고전의 향기를 찾아서

강원도 강릉은 설악산을 등에 업고 동해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여기는 까닭없이 달려가고픈 마력을 지닌 곳이다. 지어는 두려움을 자아낼 정도로 생소하지만 또 못가서 안달을 할 정도로 유혹을 지닌 곳이다. 

가슴을 먹먹하게 스며드는 조선시대의 어머니의 전형인 신사임당,천재적인 여류시인 허난설헌, 조선에서 한글로 첫번째 소설을 지어낸 유명한 작가 허균, 그리고 뭇 시인들의 발길을 끄는 관동팔경 중에 첫번째로 꼽히는 경포대, 여기는 정녕 조선의 자랑이자 강원도를 빛내는 샛별이였다.

카카오맵으로 검색하여 선정한 노선에 따라 지하철을 두번 바꿔타며 숨가쁘게 청랑리에 도착하고 보니 강릉행 KTX는 좌석권이 이미 매진상태이고 입석立席권만 남았다. 근 두시간을 줄창 서서 가야 할 판이다. 그러나 주저없이 입석을 샀다. 좌석이 있는 열차를 기다릴 시간적 여유가 없는 처지니깐. 시간을 단축하고 효률을 높이고 비용을 절감하는 것은 이번 문학기행의 삼원칙이다.

열차표를 손에 쥐고보니 중국과는 달리 立席이란 두글자가 명백히 찍혀 있었고 비용도 15%할인 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열차에 올라와 보니 입석을 산 사람이 몇이 되었는데 차안에 좌석이 비어 있어도 안으로 들어가 앉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중국 같으면 다문 몇분이라도 좌석 주인이 오지 않으면 미련쓰고 앉을 판인데 여기는 아니였다. 차량연결처에는 그래도 의자가 하나 배치되어 있었는데 언녕 주인이 있었다. 부득이 차량 맨 뒷쪽 짐놓는 대(台)와 좌석사이의 좁은 공간을 차지해 서있노라니 문득 의자 뒷 주머니에 화보로 된 상품광고가 눈에 띄였다. 저것을  깔고 앉으면 하는 아이디어가 생성했다. 화보를 두권 겹놓고 앉으니 냉기도 방지하고 자리도 해결하고 일석이조가 달리 없었다. 비록 옹색하긴 하여도 입석권으로 이만한 향수를 누리는 것은 사치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 교통문화체험의 일부분인지라 특히 기념사진을 남겼다. 마땅히 대우를 받아야 할 연장자가 입석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도 별방법이 없었던 여승무원의 막무가내의 표정을 읽으면서 오히려 대수로운 눈길로 화답하였다. 종착역 강릉에 닿기 전에 몇몇 승객이 하차하자 여승무원이 종도르르 달려와 좌석에 가 앉으라고 권한다. 고마웠다. 모르는 척해도 얼마든지 지나칠 수 있는데 나만큼이나 좌석이 나기를 학수고대했었나 보다.

강릉에 도착하자 허난설기념공원으로 곧추 달려갔다. 공원으로 가는 길도 ‘난설로’ 로 명명되어 있었다.

허난설헌은 질곡시대의 한복판에서 수많은 고통과 비극을 이겨내고 빼어난 시들을 후세에 남긴 여류시인이다. ‘ 눈 속에 난초가 있는 집 ’ 이란 뜻을 가진  ‘ 난설헌 蘭雪軒 ’을 호로 쓴 그녀의  원명은 허초희 許楚姬 이다.  조선여류시인 중에 두번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였고 중국에서 인정하는 걸출한 여류시인이기에 그녀의 시집은 중국도서관에 400여년 소장해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허난설헌의 생가터 주변에 울창하게 우거진 소나무 숲이 있다. 그 속에 서있노라니 마치 시인의 굳은 기상과 고아한 기품이 소나무에서 묻어나는 듯 했다.
드넓은 생가 정원을 지나 안채에 이르니 그녀의 영전이 모셔져 있었다. 동양여인의 조용하고 얌전한 몸가짐이었으나 예지로 빛나는 그녀의 눈길에는 남존녀비란 봉건전통의 쇠사슬을 짓부시고 독자적인 여성 이미지를 수립할 강인한 의지가 역력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난설헌의 문학적 성취 뒤면에는 그녀의 비극적인 삶이 어려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재능을 펼칠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당시 사회 분위기에다 며느리의 재주를 질시하는 시어머니와의 불화, 그리고 두자녀의 조년 요절, 가지가지 불행들이  그녀의 삶을 질곡으로 몰아갔다. 그녀가 죽은 뒤 중국에서 출간된 시집 ‘허난설헌 시집’ 은 지식인 사회에서 일대 선풍을 일으켰고 일본에서도 뒤를 이어 출간되었다.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에 왔던 주지번 朱之藩 은 허난설헌의 시를 보고 “ 빼어나면서도 화사하지 않고  부드러우면서도 뼈대가 뚜렷하다” 고 감탄하였다 한다 .

8세부터 시를 짓기 시작한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의 상처를 시에 담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또 여성이라는 이유로 굳게 닫혀 있는 세상 문을 오직 붓 하나로 열고자 애썼다. 한편 그녀는 스승 이달의 혼신적인 응원에도 마다하고 “ 이 시들은 나의 숨통이고 목숨이니 풀어 줄것이다. 멀리멀리 날아가도록” 하면서 시대와 사회적 편견에 갇힌 자신의 시가 모두 사라지길 원했다.

그녀의 시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이다. 난설헌은 8세때 이글을 지어 여신동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어영차 동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새벽에 봉황타고 요궁에 들어가
날이 밝자 해가 부상 밑에서 솟아올라 
일만 가닥 붉은 노을 바다에 비쳐 붉도다. 
어영차, 남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옥룡이 하염없이 구슬못 물 마신다. 
은평상에서 잠자다가 꽃그늘 짙은 한 낮에 일어나, 
웃으며 요희를 불러 푸른 적삼 벗기네. 
어영차, 서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섬세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문체는 난설헌 자신과 꼭 닮아 있다. 그녀는 이 시에서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는 가상의 선계 仙界를 설정해 여성도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이상세계를 그렸다.

허난설헌 생가터로 들어가는 길목에 대리석으로 된 시비가 세워져 있는데 비석에는 '죽지사 竹枝詞'의 세 번째 시가 새겨져 있었다. 난설헌이 고향 강릉에서의 추억을 담아 지은 한시다.

나의 집 강릉 땅 돌 쌓인 갯가로
문 앞 강물에 비단옷을 빨았다
아침이면 한가롭게 목란배 매어놓고
짝지어 나는 원앙새만 부럽게 바라본다

고향에 대한 아련함이 진하게 묻어난다. 님에 대한 그리움까지 보태여 감성을 더 자아낸다. 열다섯에 시집가 다신 올 수 없었던 강릉땅을 그린 간절한 마음이 난설헌을 당대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만들었다. 자식을 잃은 마음과 마음껏 재능을 발휘할 수 없는 시대적 슬픔 역시 난설헌의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짧은 생애를 살다갔지만 그의 문학은 그대로 강릉에 남았다.

실제로 그녀가 남긴 시편은 부자유한 시대를 살아간 한 여성이 감내하고 소망하던 정감으로 가득하다. 규방에 갇혀 지내야 했던 여인의 원망을 절절하게 그려내기도 하고, 천상에서 노닐고 싶은 욕망을 환상적으로 표출하기도 했다. 세속 사람이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맑고 깨끗한 ‘ 유선시 遊仙詩 ’ 는 허난설헌의 특장 중 하나였다. 돌이켜 보건대 신선이란 오직 남성에게만 속하던 오랜 로망을 여성 허난설헌은 감히 그 세계를 꿈꾸었던 것이다. 그녀의 꿈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사대부 남성에게만 속해 있었던 한시를 가지고 중국의 시선 詩仙 인 이백에까지 넘어다 볼 정도였다.  그녀는 ‘채련곡’採蓮曲’ 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가을이라 긴 호수엔 푸른 옥 흐르듯
연꽃 깊숙한 곳에 작은 배 메여두고
물 건너의 님을 보고 연꽃을 던졌다가
멀리서 남에 들켜 반나절 부끄러웠네

연밥을 따던 젊은 여인이 마음에 두고 있던 사내를 보고 연밥을 던지며 속마음을 표현했다가 다른 사람 눈에 띄어 수줍어하는 장면을 묘사한 절묘한 시구이다. 하지만 이백의 ‘채련곡’은 연꽃 사이에서 연밥을 따고 있는 아릿다운 처녀를 훔쳐보며 희희닥거리던 사내들의 모습만을 그렸다. 그에 반해 허난설헌은 여성을 애정 표현의 주체로 당당하게 내세웠다. 남자의 한시를 활용해 남성적 관점을 여성의 관점으로 뒤집어 놓은 것이다. 실로 대담한 착상이 아닐 수 없다.  몸은 비록 밀폐된 규방에 갇혀 있었을지 몰라도 그녀의 시 정신은 그를 훌쩍 뛰어넘어 천상과 같은 상상의 공간만이 아니라 사대부 남성의 현실 공간까지 휘젓고 다녔던 방증이다.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그녀는  ‘몽유기’ 에서 마치 예언이나 하듯  이런 시구를 남기고 스물일곱 살 짧은 생을  마쳤다. 

허난설헌의 생가터에 마음이 더 실리는 데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음지에 있었던 그녀의 비극적인 삶이 가진 향기 때문일 것이다. 신사임당이 가부장적 사회의 모범적인 여인상이라면 그 정반대 쪽에 허난설헌이 서있다. 시대와 불화했으며 비극으로 점철된 생을 살았던 허난설헌의 짧고도 강렬한 삶이였다. 그가 남긴 시구들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아릿아릿하고 또 핏빛처럼 선명하다.

 스물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작품을 모두 불태우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허난설헌의 비극적인 최후에 가슴이 아려온다. 짧고 강렬한 그녀의 삶, ‘재인박명’才人薄命이란 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이어서 강릉의 또 하나의 자랑인 천재 시인 허난설헌의 남동생이며 그녀의 가장 친근한 문인 허균의 삶을 돌이켜 보기로 하자. 허균은 조선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대작가이며 성리학이라는 당대의 지배적인 이념에 얽매이기를 거부한 개성있는 지식인이기도 하다. 그는 사상과 신분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개혁사상가이고 그 꿈을 이룩하기 위해 정변을 꾀하다 실패한 혁명가이기도 하다. 그는 정감과 개성의 세계를 중시했고 특히 중국 성당시기의 시를 높이 평가하였다. 

허균은 권필 權韠, 리안눌 李安訥 과 같은 당시의 불우한 문인들과 친교를 맺었으며 중국의 이백、도연명、소동파와 같은 문인들을 흠모했다.그는 삼당시인 중의 한사람인 손곡 이달에게 당시를 배웠다. 허균은 17세에 한성부에서 치르는 초시에 급제했고 26세에 문과에 뽑혔으며 29세에 중시重試에서 장원급제를 하여 당시 예원 藝苑을 놀라게 했다.

허균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다. 자유분방하고 사회 비판적이고 다양한 사상들을 접수하고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과 꺼리낌없이 교류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에서 천지간의 한 괴물이라고 비판까지 받았다. 남녀간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이며 남녀유별의 윤리는 성인 圣人의 가르침이다. 성인은 하늘보다 한등급 아래다. 성인을 따르느라 하늘을 어길 수는 없다고 한 허균의 말에서 그의 생활태도를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같은 허균의 생활태도는 그의 학문에 그대로 반영되어 “글 쓰는 재주가 매우 뛰어나 수천마디 말을 붓만 들면 유수처럼 써내려 갔다” 고 한다. 그의 전기체 소설 “홍길동전”은 조선에서 최초의 한글 소설로서 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만큼 “홍길동전”은 허균의 생애와 사고를 응축해 놓은 결정판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허균의 벼슬살이는 여섯번의 파직과 세번의 유배에서 볼 수 있듯이 파란의 연속이였다. 세상과의 불화 속에서 그는 불경으로 번뇌를 덜려고 했다. 결국 삼척부사로 있을 때 먹물 옷을 입고 부처를 섬긴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기도 했다.
이때 허균은 “ 벼슬에서 내쫓겼다는 소식을 듣고” 란 시를 지어 자신의 감회를 토로했다.

예절의 가르침이 어찌 자유를 얽매리요. 
뜨고 가라앉는 것은 다만 천성에만 맡기노라. 
그대는 모름지기 그대들의 법을 지키게. 
나는 나름대로 내 삶을 이루겠노라. 

이것은 세상의 습속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천성대로 살겠다는 과감한 그러나 만용에 가까운 “홀로  서기” 선언이기도 하다. 그가 여색을 밝힌 것도 사실이다. 허균이 있는 곳에는 늘 노래와 글잘하는 기생이 붙어 다녔다. 허균은 홀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직후에 기생들과 함께 술잔치를 벌이는 파격을 서슴치 않았다. 허균은 자신의 삶과 행동을 다스리는 법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 법은 성인의 사상이 아니라 허균 자신의 천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타고난 본성을 구속하고 왜곡하는 유교 윤리에 꺼리낌없이 맞서 나갔다. 

허균의 호는 여러 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인 성옹惺翁은 ‘온 세상이 어지러운데 홀로 깨어 있는 사람’ 이란 뜻이다. 그에게는 공자의 권위도 통하지 않았고, 집단의 통념도 아무 소용 없었다. 오로지 ‘소우주 허균’이 존재할 뿐이었다.

허균은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지녔고 문장、시、소설 등 문집으로 조선과 명나라에 널리 알려 졌으며 아버지 허엽、형 허성、허봉 그리고 누나 허난설헌과 함께 허씨 5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스승 이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시가 당시나 송시와 비슷해질까 두렵습니다. 나는 남들이 허균의 시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습니다”라고 썼다. 

한편 “글에 대해 말한다”에서는 “내가 바라는 것은 답습하지 않고 일가를 이루는 것이다. 남의 집 아래에다 또 하나의 집을 지어서 본뜨고 훔쳐서 썼다는 꾸지람을 받을까 두렵다”고 썼다. 허균은 창의에 의한 개성적 문학을 지향했다. 그의 이런 문학관은 한국 버전의 르네상스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허균은 시대와의 불화를 ‘귀거래歸去來’ 로 품하기도 했고, 시를 빌려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有懷 유회   
              許筠

倦鸟何时集  孤云且未还  
浮名生白发  归计负青山  
日月消穿榻  乾坤入抱關  
新诗不缚律  且以解愁艳  

지친 새는 어느 때 모여들지 모르고, 외로운 구름은 흘러 다시 돌아오지 않는구나
덧없는 이름 때문에 백발만 늘어나고, 돌아 갈 내 계획은 청산을 저버리는구나
세월은 부질없이 흘러만 가고, 천지는 벌써 밤이 되는구나
새로운 시는 음류에 구속되지 않아, 근심스런 얼굴을 풀어주는구나.

허균은 당시 반역혐의를 덮어쓰고 거열형车裂刑을 당하고 역적이 되었다.그러나 그의 인간을 사랑하고, 차별없는 세상을 동경하고, 약자가 살 수 있는 세상을 세우려는 진보사상은 오늘 국가행정안전부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으며 “시대를 앞서간 비운의 천재”란 칭호까지 수여받았다.

전통의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붓대로 과감히 쇠사슬을 부셔가는 허난설헌의 강인한 정신, 당시 지배적인 이념에 얽매이기를 거부하고 고정된 사상과 신분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는 허균, 이 두자매의 개혁사상은 오늘날 현대 사람들에게도 심각한 사색을 던져 준다.

김창권 프로필 

1974_1977 연변대학조문학부
1989_2000 치치하얼시정부외사판공실
2000_2011 치치하얼대학외국어학원
2011 정년퇴직, 현재 대련시조선족문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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