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세미나에 '캐리어 디자인'이라는 과목이 설치됐다. 그 의미조차 몰랐기 때문에 담당하게 되었을 때 '대학생을 위한 캐리어 디자인 입문'을 구입하고 공부했다.

캐리어 디자인이란?
 "일하는 방식, 사회활동과 삶의 방식에 연결을 하고, 자신의 인생 속에서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사회활동을 하는지를 생각하고,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이 캐리어 디자인"이라고 한다. 직업 인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장래 취직하고 싶은 일에 대해' 보고서를 쓰도록 했다. 그전에는 ‘인생 100세 시대를 어떻게 사는가’ 테마를 내고 각자 파워포인트를 만들어 발표시킨 적도 있다. 이번에도 학생들은 여러가지 자료를 조사해, 그것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도록 했다.

그러나, 나는 일본의 학교 교육에 있어서 뭔가 부족한 것이 아닐까, 언제나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 초중이나 고등학교교육에 종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교육을 받았는지는 개인면담 등을 통해 추측할 수밖에 없다. 

무엇이 부족할까? 30여년간 일본에 살고 관찰하고 있지만 일본의 교육은 '샐러리맨'(월급쟁이)을 키우는 것이 주된 역할인 것 같다. 물론 사회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많은 샐러리맨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 「캐리어 디자인」이라고 한다면 뭐가 부족한 것이 아닐까.

그 대답을 한국인 친구의 에세이에 찾아냈다. 작년 12월 '세계평화포럼'에서 필리핀에 초대되었을 때 내 강연의 모습을 일러스트에 그려 나에게 보여주었으므로 함께 사진을 찍고 그 후도 일본과 한국에서 두번 만나본 분이다. 그분이 건설 현장에서 일고용 일을 하고 있다고 듣고 깜짝 놀랐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직접 관찰하면서 인간과 사회의 심층을 탐구하고 일러스트로 표현해 사회에 호소하고 있다. 그 자체가 훌륭한 삶의 방식이라고 나는 감탄할 뿐.

친구가 보내준 한국 신문에 게재됐다는 에세이를 읽고 떠올랐다. 인간의 직업은 3종류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직업 (Job)이며 생존을 위한 직업. 둘째는 경력으로 회사나 사회에서 자신의 재능과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세 번째는 콜링(Calling) 즉 '천직' 이라고 한다. 일본에 와서 '학교의 교사는 직업인가, 아니면 천직인가' 라는 논의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천직'에 대해 그 이상은 파고들지 않았다. 하물며 「콜링」이란 무엇인가, 사전을 들춰 보았다. "부르는 것, 외침, 점호, 소집, 천직, (신의) 부르심, 직업, 강한 충동, 욕망, 성향"등으로 설명되여 있었다.

이번에는 채팅 GPT에서 찾아보았다. '천직 또는 콜링에 대해 어떻게 해석합니까?' 단순한 직업이나 일 이상의 것이며, 개인의 가치관이나 열정과 깊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대답에 매우 만족했다. 중국의 성인 공자의 말 '50에 천명을 알게되였다'로 통한다. 저도 50세에 '천명'을 알게 됐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난주 대학 강의 전에 학생들에게 '3개의 직업'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선 “커리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져 학생의 대답을 듣고 나서 설명했다. 학생들은 눈을 둥글게 했기 때문에 모든 학생들이 처음 듣는 이야기임을 알 수 있었다.

세상에서 자주 말하는 「일본의 교육은 학생에게 꿈을 갖도록 가르치지 않는다」, 「일본의 교육에는 철학이 없다」, 등의 논의를 생각하면, 학생에게는 「직업」이나 「커리어」만 아니고, 「천직」에 대해서도 가르쳐치면 좋지 않겠는가? 숭고한 이상이나 꿈을 가지고 'Job'을 해내고 '커리어'를 연마하는 교육이 필요하지 않은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면 어릴때는 장래에는 과학가가 되겠다는 꿈을 생각해본적이 있었다. 

막상 사회인이 된 나는 가난한 농촌에서 어떻게 생존할지가 중요한 과제가 되어 버려 그 가난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4 년간 농업노동을 하면서 수험공부를 해서 농촌사람으로 부터 베이징 대학생이 되어 인생이 180도 바뀌였다. 대학에서는 공산주의 교육을 받아 솔선해 공산당원이 되어 “전세계에서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종생분투한다”고 당기 앞에서 선서했다.

베이징에서 10년동안 생활과 사업한후에 직업을 포기하고 일본 유학을 결의했다.
목표나 꿈이 없는 채, 그리고 돈도 없이 알몸 일관으로 일본에 와 10년간도 「취학생」이나 「유학생」이라고 하는 재류 자격을 가지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세우면서 방랑하고 있었다.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대학의 선생님이 되였던 나는 일본에서 배울 목표도 없었지만 그러나 무언가의 계기를 찾아내고 싶었을 지도 모르지만, 인생이 그렇게 간단하게 성공이 되지않는 것이 현실이었다.

일본어학교를 거쳐 비자를 연기하기 위해서는 일본 대학원에 갈 수밖에 없다. 대학원에서는 국제경제학을 배웠지만, 우연히 「두만강지역의 국제개발구상」을 연구 테마(UN UNDP 가 관련된 개발 프로젝트로 중국, 북한과 러시아 참여 국경지대를 공동으로 개발하는 구상)를 만났다. 두만강 지역의 중국 쪽은 내 고향이었고, 나는 중국어와 한국어 (조선어)를 마스터했고 중국 대학원에서는 러시아어를 독학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만강황금삼각주에 관한 연구는 나의 라이프 워크"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때는 천직(calling)이라는 말은 몰랐다.

도쿄에 있는 대학 등에서 이 연구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지도 교수님으로부터는 “이군, 그런 테마를 연구해도 일본에서는 밥을 먹을 수 없어”라고 했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고, 이 연구에 돌진했다.

그 후, 훌륭한 만남이 있어 인생의 전기를 맞이해 도쿄재단에서 ‘동북아시아개발은행 설립 구상’에 대해 연구하는 연구 프로젝트의 일원이 되어 연구결과를 가지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총리에게 정책 제언했다. 

'커리어'로서의 나의 삶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내각부의 국책 싱크탱크 종합연구개발기구(NIRA)의 연구원이 되어 ‘동북아의 미래를 구상하는’ 다양한 프로젝트에 종사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대학에 전직하여 대학의 교원으로서 「동북아 경제」등을 가르치게 되였다.

환갑년을 맞는4년 전에 일반 사단법인 동북아시아 미래구상연구소(INAF)를 유지들과 설립해 장래는 싱크탱크로서 이 지역에 평화와 번영이 실현되는 것을 목표로 평생을 걸고 노력하겠다고 결의 하고있다. 결국 이 연구와 활동이 나의 '천직' 된것이다.

 
저자약력

리강철 교수
리강철 교수

1959년 중국 연길현 동불사 출생. 고등학교졸업후 로투구진 렴명대대 5대에서 4년간 농사지음
1981년 9월-85년 7월 북경 중앙민족학원(현재 중앙민족대학) 정치학부 철학전공
1985년 9월-87년 7월 중공북경시위당교 대학원연구생 공산당건설 연구
1987년 7월-91년 4월 중화전국총공회산하 중국공운학원 전임강사
1991년 5월 대학강사 사직하고 일본류학, 토쿄에서 일본어학원, 요코하마국립대학, 릿교대학 경제학연구과 석사/박사과정을 결쳐

2001년 4월부터 동경재단연구원(동북아개발은행설립에관한 정책연구)연구원, 나고야국립대학 경제학부 국제경제동태연구센터 외국인교수, 종합연구개발기구(NIRA, 일본정부내각부산하 정책연구소)주임연구원으로되여「동북아지역의 그랜드데자인」프로젝트 연구, 중국국가발전 개혁위원회(NDRC) 산하 국토 연구소와 한국국토연구원(KRIHS) 등 정책연구기관과 공동연구, 각국 정부에 정책건의, 한국대외경제정책 연구원(KIEP)방문연구원, 2006년~ 호쿠리쿠대학 미래창조학부 교수(이시카와현 카나자와시)

사회활동: 일본 조선족연구학회 회장(일본,현재명예회장), 연길시인민정부 홍보대사와 경제특사, 남개대학 일본연구원 객원교수. 한국통상전략연구원 연구위원등 역임. 
 일본을 거점으로 중,한,조,로,몽 등 국가를 중심으로 동북아공동체에 관한 연구활동. 2005년 12월 연합국공업개발기구(UNIDO&UNDP,오스트리아의 윈)국제회의에서 강연, 2011년8월 동북아경제포럼 (NEAEF, 미국하와이)에서 강연, 2013년 8월 연합국 아태경제사회위원회(UN-ESCAP) 국제회의(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에서 연구발표와 정책제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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