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정(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지난해 연말, SNS를 하다가 우연히 접한 한 영상물이 나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한 유치원의 학예회에서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훈훈하게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을 때, 갑자기 공습경보가 울린다. 그러자 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지하실로 대피한다. 건물은 포탄에 흔들렸고 아이와 엄마는 그만 의식을 잃고 만다. 포탄소리가 멈추자 아이와 엄마는 검은 복면을 쓴 어떤 남성에게 밖으로 끌려간다. 이는 구원의 손길이 아니었다. 얼굴에 피가 묻은 엄마가 카메라를 응시하는 절망적인 눈빛, 그리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주인 잃은 아이의 빨간 장갑이 우리에게 이들의 최후를 암시해준다. “여러분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상상해보세요”라는 자막을 이어 “10월 7일, 이스라엘은 하마스 테러리스트의 공격을 받았”다는 내용이 이 영상물의 제작 의도를 전달해주고 있다. 

이는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이 현재 국제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반이스라엘’ 목소리에 맞서 마하스 정권의 폭력, 그러한 폭력으로 피해를 받고 있고 이스라엘 국민의 고통에 국제적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미디어적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타국의 분단 상황을 악용해 한국인들의 감정이입을 유도했지만 정서적 공감은커녕 팔레스타인지구 피해인수에 비하면 이 영상은 “도가 지나치다”다는 여론이 오갔고 “분단국가인 한국의 안보 불안을 자극해 자신의 정당성을 강조”한다는 비판을 받아 결국 영상을 삭제하게 된다. 그리고 지난 19일, 이스라엘 대사는 JTBC와의 인터뷰에서 사과의 말을 전했다. (이유진, <이스라엘 대사 “서울 테러‘ 영상은 실수... 북한 공격 가능성 간과’, 2024.1.19.) 

사실 “여러분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상상해보세요”라는 자막이 나오기 전까지 나는 내내 영상 속 엄마의 불안, 두려움, 절망을 따라갔고 그 짧은 시간동안 상상을 통해 영상 속 엄마의 처지에 자신을 대입했다. 이처럼 짧은 시간에 시각적 충격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 사람들의 정서적 공감을 확보할 수 있는 미디어의 사회적 기능에 새삼스럽게 다시 감탄하면서 무엇보다도 ‘하마스=테러리스트’라는 말을 주목해본다. 

‘테러리스트’는 오랜 시간 동안 국제적으로 아랍인, 이슬람교도를 기억해왔던 방식이다. 특히 미국의 ‘911 티러’ 이후, 아랍인, 이슬람교도는 곧 테러리스트를 의미했고, 그렇게 고착화된 이미지는 사람들이 아랍인, 이슬람교도를 접했을 때, 이들 개인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정 관념에 의해 이들을 판단하고 재단하고 심지어 갖지 않아도 될 불편한 감정을 가졌다. 그만큼 이 말에 내재된 것은 한 개인 또는 집단에 대한 비인간화와 도덕적 판단인데 이는 쉽게 정서적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정서적 공감은 부족 본능에 의해 촉발된다. 정서적 공감에 의해 촉발된 부족 본능은 내부의 결속을 단단하게 하지만 이는 타자를 기반 한다는 점에서 배제와 소외를 낳고 한 개인 또는 집단을 혐오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장대익, 『공감의 반경』, 바다출판사, 2022)

그런데 과연 모든 아랍인, 이슬람교도를 싸잡아 테러리트라고 우리가 볼 수 있는가? 당연히 그럴 수 없다. 이 지점에 이르러 아랍인이자 이슬람교도로 태어나 팔레스타인 여성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는 사하르 칼리파(1941~)를 떠올리게 된다. 2009년,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학 심포지엄』에서 사하르 칼리파는 아래와 같은 말을 한 바 있다. 

“여성임과 동시에, 나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아랍인이고 이슬람교도라고 말했다. 아랍 여성을 보는 시각과 마찬가지로, 서양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우리는 변함없는 한 가지 현실에, 정지된 일면에 고정되어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이란 테러리스트와 동의어이다. 아랍인은 수염을 기르고 묵주를 둘렀으며, 낙타를 배경으로 하여 등 뒤에는 단도를 지닌, 더럽고 기름진 셰이크와 동의어이다. 우리는 시대가 바뀌어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아도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이미지로 격하된다. 이슬람교도는 원리주의자, 이슬람교도는 테러리스트, 이슬람교도는 차도르에 휘감긴 여성, 이슬람교도는 더럽고 기름진 셰이크. 우리는 한 가지 현실에 붙박여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참모습이란 이런 것인가?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실제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 
(「‘진실’을 말한다는 것」에서 발췌)

이와 같이 “시대가 바뀌어도” 시각은 바뀌지 않는 현실에 칼리파는 단 하나 뿐인 ‘진실’만 보려고 하는 세상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세상이 믿고자 했던 그 ‘진실’이란 과연 무엇인지. 진실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단면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누군가의 의해 고착되거나 고정될 수 없는 가변성을 띠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리파는 소설을 썼고, 글을 통해 세상 독자들에게 “피부색과 시각이 달라도, 견해와 전망이 달라도” 그녀에 대해서 알아가고, 그녀와 함께 “공감”해주길 바랐던 것이다. 칼리파는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그녀가 처한 현실, 정치, 문화, 역사적 과제를 분유하고자 했다. 

때문에 칼리파의 소설은 인간의 기본 능력인 ‘공감’을 사유할 수 있도록 하는 시각을 제공해준다. 공감이 정서적 공감과 인지적 공감으로 분류된다면 그녀의 소설에서 우리가 하는 공감들은 단순히 앞에서 잠깐 살펴본 ‘서울 테러’와 같은 영상물에서 획득할 수 있는 감정이입을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공감이 아니다. 즉 어떤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공감도 단지 그 대상이 겪고 있는 심적 고통, 불안, 두려움 등 정서 자체에 대한 공감도 아니다. 이는 긴 시간과 노력과 정보를 거쳐 축적하고 사고하고, 판단하고 난 뒤, 타자가 왜 고통, 불안, 두려움을 겪고 있는지 이해하고 그런 것을 겪고 있는 타자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는 공감이다. 

칼리파는 글을 통해 목소리를 내고 공감을 얻고자 했는데 글을 쓴다는 것, 글을 통해 무언가를 실현하고자 하는 행위는 사실 아랍 문화권에서는 자명한 일이 아니다. 이는 우선 아랍에서 소설과 같은 산문문학의 발전과정과 관련된다. 즉 산문문학이 아랍에서 역사가 그리 길지 않는데다가 아랍 지대의 지속적인 동란과 정치적 분쟁으로 어려운 발전과정을 거쳐 왔기 때문이다. 아랍 내에서 소설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팔레스타인의 경우, 산문문학의 탄생은 정치적 격변과 무관하지 않으며 새로운 정치 및 미학적 수단으로 소설이 요구된 시기는 1940년대부터였고 그것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는 1967년, 즉 제3차 중동전쟁 이후였다. 칼리파는 바로 제3차 중동전쟁 이후,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특히 아랍어 보급이 여전히 보편적이지 않는 아랍지대에서 소설을 쓴다는 것은 특정 계층, 즉 아랍어 교육을 받은, 삶의 여유를 얼마큼 가지고 있는 계층을 향한 것이고 이것이 자국 ‘대중’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번역을 거쳐 외부 대중에게 전달된다는 점에서 소설 쓰기는 칼리파에게는 당위성을 띤 선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음으로 ‘인류 보편성’과 관련된 문제다. 아랍문학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는 1980년대였다. 이집트 소설가 나집 마흐푸즈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위시로 아랍문학의 문학성이 인정받게 되었다. 그런데 소설이라는 장르가 “근대 서양적인, 특수한 지의 형태”라는 점을 상기하였을 때, 비서양세계에서 소설이 쓰이고 읽힌다는 것은 근대 식민주의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오카마리,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현암사, 2016, 219~221쪽) 더구나 아랍문학이 나집 마흐푸즈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에 전 세계적으로 주목되었다는 것은 그러한 ‘세계성’, ‘인류 보편성’이 소설 장르에서는 서구적인 것과의 미묘한 연결 속에서 담론화 되어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나집 마흐푸즈의 노벨문학상 수상평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의 소설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아랍적 서사 예술을 이룩하였다”는 평을 받았는데 (송경숙, 『팔레스타인문학의 이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05, 278~288쪽) 이런 평가은 비서양세계에도 문학이 존재하고 아울러 그 속에도 ‘인류 보편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태도가 담겨져 있다. 비록 노벨문학상을 아직 받지 못했지만 그녀는 여러 해 동안, 요르단, 팔레스타인 그리고 아랍 세계 전체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등 지역에서 중판되면서 외국어로도 많이 번역되어 팔레스타인 작가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비슷한 시기, 팔레스타인 남성 작가(갓산 카니파니, 자부라 이브라힘 자브라, 이밀 하비비 등)와 비교하였을 때, 칼리파의 소설은 그들과 함께 팔레스타인 민족의 삶에 대하여 관조하면서도 그 위로 여성적 문제를 가시화하였다는 점에서 여성 작가로서 자주 호명되곤 했다. 한국 내에서도 칼리파의 소설은 그러한 맥락에서 줄곧 주목되었고 2018년, 그녀는 한국에서 ‘제2회 이호철통일로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렇다면 칼리파의 소설이 어느 정도 ‘인류의 보편성’에 가닿고 있고, 그녀가 생각하는 ‘보편성’이란 무엇이었을까. 

사하르 칼리파의 소설의 ‘민족성’ ‘정치성’ 때문에 그녀의 작품들이 세월을 당해내지 못하리라는 비난을 받고 있을 때, 특히 그러한 팔레스타인 세계의 정치적 특수성으로서 문학의 ‘보편성’이라는 서양세계의 인식에 의해 부정되고, 그것이 과연 ‘보편적’인가라는 비난과 대면할 때, 칼리파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해결해야 하는 온갖 현실의 문제, 즉 이러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야말로 팔레스타인 문학의 보편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이외에도 소설 쓰기의 어려움은 더 있다. 그것은 첫째, 팔레스타인으로서 팔레스타인 내부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어야 했고 둘째, 서양세계에 의해 ‘제3세계’화 되어갔던 ‘제3세계 여성’으로서 탈식민주의 과제와 페미니즘운동가로서의 과제를 떠안고 소설을 써야 했으며 셋째, 그것들에 대한 사하르 칼리파라만의 독특한 세계를 보여주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사하르 칼리파가 팔레스타인 적(籍)을 두었다고 해서, 그리고 팔레스타인 여성이라고 해서 팔레스타인 전체의 현실이나 그 여성들의 삶을 대변해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넷째, 소설 속에서 누구를 향해 어떻게 ‘발화’ 할 것인가, 누구를 어떤 식으로 대변해 줄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공감’을 사유하는 문제로 돌아간다. 즉 필자인 내가 칼리파의 소설을 읽기 위해선 위와 같은 선행 작업을 수행하지 않으면 그녀의 소설들이 단지 팔레스타인인의 삶의 또 다른 단면으로밖에 되지 못하고 말 것이다. 아울러 아랍인=이슬람교도=테러리스트, 또는 “단도를 지닌, 더럽고 기름진 셰이크”를 등치시키는 문화적 선입지견에서 영원히 스스로의 인식을 갱신하지 못한 채 암묵적으로 그러한 폭력에 동조하게 될 것이다. 시대성 역사성을 고려하지 않고, 또한 파악하지 않고 개인, 집단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자격이 있다는 믿음은 엄연히 하나의 폭력이고 타자를 향한 그러한 자격은 사실 우리 아무에게도 없다. 중요한 것은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 공감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런 점에서 칼리파의 소설은 우리가 그녀에게 공감할 수 있도록 일종의 ‘환경’을 마련해준다. 

여기서 나는 유독 애정을 갖고 읽었던 칼리파의 『유산』(1997)을 언급하고 싶다. 이 소설은 오슬로협정 이후의 분위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오슬로협정은 1993년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아라파트 의장이 만나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와 이스라엘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한 합의였다. 오슬로 계획은 이스라엘 시온주의 좌파가 고안해 낸 것이다. 이스라엘 시온주의 정치체제를 더욱 강화하는 허위성이 내포되어 있고, 실은 평화협정이 아닌 또 다른 식의 식민통치였다. 이 협정을 계기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약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라는 새로운 시온주의 피조물을 탄생시켰다. (일란 파페, 『팔레스타인현대사』, 2009. 373~377쪽) 작가의 말을 빌리면 『유산』은 오슬로협정 이후, “늘어만 가는 비애와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내뱉는 신음”을 “반영” 하였고 “모든 측면에서 온갖 종류의 패배를 다 맛본 민족의 이야기”를 담아냈다.(사하르 칼리파, 「나, 내 삶, 내글」, 『나는 어떻게 글을 쓰는가』, 아시아, 2020, 197쪽) 

소설은 총 3부로 이루어지고 있다. 제1부에서는 팔레스타인계 아버지와 미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나(자이나)’가 어느 날 요르단강 서안에 살고 있는 삼촌에게서 온 편지로 시작된다. 편지에는 아버지의 병중 소식과 함께 아버지가 고향에 남긴 유산을 상속받으러 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고, ‘나’는 곧 고향으로 떠난다. 제2부에서는 고향에 도착한 ‘내’가 그 곳 일상에서 전개되는 사건들과 인물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복합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서 유산을 둘러싼 인물들 간의 갈등을 통해 국가, 민족, 여성의 문제를 가시화하고 있다. 제3부에서는 고향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환경사업과 문화사업의 실패, 아버지의 새로운 아내가 이스라엘에서 인공수정 된 아기를 맞이하는 등 일련의 사건을 겪고 난 후 결국 ‘나’는 유산을 상속받지 않기고 결정하고 삼촌에게 꼭 돌아온다는 기약만을 남긴 채 미국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 소설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우선, 화자 설정의 문제다. 칼리파는 미국에서 유학 체험이 있고 서구세계의 교육을 받은 지식인 신분과 유사한 화자를 창조해 나갔다. 하지만 다른 지점으로는 화자인 ‘나’(자이나)는 미국으로 이주한 팔레스타인계 아버지와 미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로 설정되고 있다. ‘나’는 ‘유년’시절 아버지의 사랑 아래서 행복하게 지내다가 사춘기 시절에 임신을 해 아버지로부터 가문의 명예와 아버지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할 뻔 한다. 그런 사건이 있은 뒤 나는 미국계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미국식 교육을 받고 인간과 문명의 학문을 다루는 저술가 즉 인류학자로 성공하게 된다. 이처럼 주인공을 미국의 문화와 깊은 친연성이 있는 인물로 설정한 것은 미국 지식체계를 갖춘 여성의 시선을 창조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 여성 시선의 창조는 단지 미국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으로 표상되는 서양세계 시선이 어떻게 팔레스타인 내부에 산재된 문제를 보아야 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하는 문제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이같은 시선이 2부에 와서 점차 후경으로 물러나는데 ‘나’의 미국 시선이 드러나는 지점에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연민의 대상으로 보거나 그 속에서 어떤 우월감을 찾으면서 이들의 삶을 평가 및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인’으로서 ‘내’가 상상한 팔레스타인 문화와 다른 데서 기인한 소외감각을 드러낸다. ‘나’는 ‘고향’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목소리에 개입하는 대신 귀를 기울이기만 하고 있다. 한편 ‘나’의 미국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는 소설을 쓰는 칼리파의 전지적 시선이 드러나고 있으며, 그러한 칼리파의 시선의 도움으로 고향 내부에 있는 사람들이 직접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드러낼 수 있게끔 하였다.  

위와 같은 칼리파의 소설 쓰기 시도는 여성의 문제를 바라봄에 있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왜 서구인들은 하나의 현실, 하나의 상태에 우리를 고정시켜 보는 걸까? 왜 우리가 다르게 창조된 존재이며, 변화가 불가능하고 생각하는 걸까”라는 칼리파의 서구 시선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볼 수 있듯, 팔레스타인 여성 역시 그렇게 고정적인 시선 하에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여성이라는 동일성 속에서 미국지식체계를 갖춘 ‘내’가 팔레스타인 여성들을 판단하지 않게끔 미국 시선을 후경으로 물러나게 했던 것이며 또한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다양한 목소리, 다양한 삶을 보여주면서 “서구 미디어 속”에서 만들어진 이미지, 그리고 아랍여성만 제쳐둔 채 암묵적인 동의하에 스테레오타입식으로 고착되어가게 했던 아랍여성의 상 - “가죽 가면을 쓰고 차도르로 상체를 감싼 채, 베일 뒤의 하렘 속에 있는 끔직한” 문화적 이미지를 경계하는 작업으로 될 수 있다. 이는 ‘미국 여성’의 시선이나 팔레스타인 여성으로서의 칼리파 자신의 단일한 시선이 권위적인 목소리로 되지 않게끔 균형 잡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에마 골드만 외, 『그곳에 가면 다른 페미니즘이 있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21, 95쪽)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조카뻘 되는 나흘라가 미국에서 온 성공한 여성인 ‘나’에게 “글쓰기가 두렵지 않는지, 사람들에게 자신을 읽히는 게 겁나지 않는지” 묻는 대목이다. 여기에 팔레스타인 여성으로서 글쓰기의 어려움과 팔레스타인 여성으로서 읽힌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는데 그만큼 팔레스타인 땅에서 여성의 문제가 민족의 문제에 비해 그 문제성을 가시화할 수 있는 이론적 토양이 척박하거나 그런 가능성조차 잘 주어지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흘라의 질문을 받고 ‘나’는 자신이 “미국인이고, 미국식 교육을 받았고, 미국 사람들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괜찮노라” (사하르 칼리파, 『유산』, 아시아, 2009, 50쪽)고 답한다. 이는 칼리파가 서양세계의 시선을 비판하면서도 팔레스타인 땅에서 여성문제를 다루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미국지식 체계를 동원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소설 속에서 다양한 팔레스타인 여성상들은 기존 제1세계 페미니즘에 의해 아랍 가부장의 억압성의 틀안에서만 담론화되어 갔던 여성의 문제, 그 속에서 칼리파는 억압 및 희생의 여성상보다 그렇지 않는 이미지를 보다 많이 보여주면서 고향 내부의 여성의 자아 각성이나 주체적인 면모들을 그려내고 있었다.

‘제3세계’는 없고 ‘제3세계’는 ‘제3세계’화 된 것이다. 이는 “선진국의 차별적 시선의 욕망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하다. 다사위의 논의를 빌어 오카마리는 ‘제3세계의 제3세계화’는 아래 두 가지 차원에서 존재한다고 한다. (1) 제3세계의 경제 및 정치의 자율성을 무너뜨린 ‘제3세계’ 민중을 더 심한 억업과 빈곤으로 전락시킨 구조적 착취의 구도. 이를테면 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가 대표적이다. (2) 선진국 사회의 페미니스트 담론이 아시아, 아프리카의 이슬람 세계의 여성을 부권주의에 의해 희생된 모습으로만 일방적으로 표상함으로써, 이슬람=억압적 종교, 무슬림 여성= 무력한 희생자‘의 전형을 재생산 해냈다. 이런 점에서 칼리파가 예상하고 있는 『유산』의 수신자는 팔레스타인 내부에서 여성문제를 토양적으로 근절시킨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고 그리고 팔레스타인 여성을 ‘제3세계화’한 제1세계 페미니스트였으며 더 나아가 팔레스타인 문학에 생소한 독자들, 즉 번역을 통해 그녀의 문학세계를 접한 독자들일 것이다.( 오카마리, 46~47쪽).

위와 같이 칼리파는 여러 가지 소설적 시도를 통해, 우리에게 공감적 환경을 마련해주고 있다. 그녀는 소설 쓰기 행위를 통해 팔레스타인 땅에서의 현실문제가 그들 문학의 ‘보편성’임을 보여주었고 필자를 포함한 팔레스타인문학에 주목하고 있는 독자와 팔레스타인의 현실문제, 민족문제, 여성문제 등을 분유하려고 했으며 팔레스타인 ‘문화’란 한마디로 어떤 것이야 하는지 규정하기보다 이 세계처럼 그것은 팔레스타인 내부에서도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상상시켜주고 있다. 

때문에 『유산』에서의 ‘유산’은 단지 상속해야 할 물질적 유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시대성, 역사성을 바탕하고 있는 문화적 유산까지 의미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인지적 공감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인류의 공감능력, 즉 무엇을 바탕으로 어떻게 공감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을 마련해주었다. 

여기서 시대, 역사적 상황은 다르지만 ‘고착화된 이미지’라는 측면에서 나는 최근까지도 논의되고 있는 ‘조선족 이미지’ 문제를 겹쳐 읽고자 한다. 2000년대 이후, 진행된 ‘조선족 이미지’는 재현 및 수용의 문제로 많이 다루어왔고 크게 문학적 재현, 미디어적(주로 영화, 드마라)재현, 그리고 (설문조사를 통한) 사회적 이미지 수용문제로 분류할 수 있다. 특히 미디어에서 재현된 조선족은 대부분 부정적 이미지였고 심지어 이같은 미디어적 재현은 MZ시대에 영향을 미치면서 사회적 설문조사에서도 부정적 인식을 얻는 결과를 보게 되었다. 반가운 것은 이같은 현상을 두고 한국 내 일부 학자들이 이에 따른 대안을 내놓으면서 소통하고 공존하고 공감을 하려는 노력이 보인다는 점이다. (예건대 조인숙, 김도연, 2020) 여기서 우리는 한국사회에서 시대적, 역사적으로 조선족에 대하여 알아가고 이해할 수 있는 인지적 공감의 토양(환경)이 얼마나 척박한지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타자로서 살아왔고 또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타자가 하나의 이미지로 이 편의 사랑과 정의, 고통과 분노를 보여주기 위해 반대편에 세워져야 하는 대상 또는 그것을 보여주는 수단으로밖에 되지 못할 때,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인간은 사라지고 환영 속의 빈껍데기로만 남게 될 것이다. 혐오와 역겨움 등은 감정적 공감에서 야기된 정서적 반응이다. 이러한 정서적 공감이 한번 또 한번의 인지 과정을 거쳐 인지적 공감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타자에 대한 환대가 가능해질 것이다. 2018년은 일명 ‘제주 난민 사태’가 일어났던 해이다. 같은 해, 칼리파의 ‘이호철통일로문학상’의 수상은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주지 않는가? 

끝으로 전쟁, 분열, 갈등이 난무하는 시대,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어야 한다는 칸트의 말에 다시금 고개를 끄덕여 본다.

주해: 이유진, <이스라엘 대사 서울 테러영상은 실수... 북한 공격 가능성 간과’, 2024.1.19.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25100.html

 

정희정 프로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연변작가협회 회원. 
시, 소설, 수필 다수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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