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성북구 인왕산 심우장寻牛莊 ;  
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 청운동3-100 ;   
경북 안동시 도산면 백운로525 ;  
대구광역시 달서구 명전로43 ;

이제부터 이런 곳을 더는 무심히 지나칠 수 없다. 여기에는 민족투사에 대한 추앙의 정취가 고스란히 스며있기 때문이다. 아래에 4명의 시인을 찿아 그들의 업적을 기리고 애국정신을 고양하려고 한다. 그들은 각각 인구에 회자하는 명작 “님의 침묵”을 세상에 펴낸 승려시인 한용운, 수감번호를 실제 호로 지조를 굽히지 않는 대쪽같은 성격의 소유자이며 그것을 화신으로 쓴  “절정”의 주인공 이육사, 일본형사 앞에서도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과 대책을 열정적으로 토로하기를 마다하지 않은 독립투사이자 민족시인 윤동주, 식민지 시대에 민족의 혼을 일깨운 1920년대의 대표적인 민족저항시인 이상화 등 이다.

                               01                                   

윤동주문학관은 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 청문동에 위치해 있었다. 
중국에서 태어났고 중국과 조선에서 똑같이 존경받고 있는 유명한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윤동주의 문학관은 대로변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건물은 생각에 비해 조촐한 감이 들 정도였다.  이미 탐방한 박두진, 기형도 문학관과는 그 규모나 수장자료가 많이 적은 편이었다. 전시실내에 ‘촬영불가’ 란 제한까지 있어 모자람을 더 배가하였다. 

그런데 정작 문학관의 소개를 듣고 여기에 그렇게 깊은 내용이 있을 줄은 뜻밖이였다.

윤동주문학관 앞에서
윤동주문학관 앞에서

윤동주 문학관은 특히 여러가지 건축상을 많이 수상한 건물이라고 한다. 건물 자체로만 보면 잘 모르지만 이 건물이 워낙은 “물탱크 저장 시설”이였다는 것을 알고 나면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오게 된다. 실제 물탱크가 아직도 잘 보존되어 있고, 물이 담겨서 일렁이였던 물 자국이 벽에 그대로 남아 있다. 이걸 직접 제 2 전시실로 사용 하고 있다. 

윤동주 문학관이 있는 인왕산 일대는 시인이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에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하며 산책을 즐기던 곳이다. 문학관 바깥쪽 벽에는 윤동주 시인의 장례식에서 낭독되었던 시 “새로운 길”이 씌여 있다. 문학관 실내에 들어서면 윤동주 일생을 시간순서대로 라열한 사진과 친필원고가 전시되어 있으며,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증보판 원본도 확인할 수 있었다. 

윤동주 시인의 시 “자화상” 에 나오는 ‘우물’ 에서 모티브를 얻어 원래의 물탱크의 지붕을 개방시키니 환히 트인 하늘과 자연이 그대로 문학관의 일부로 된 것이다. 제2전시실 열린 우물은 하늘이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또 흐린 대로, 비 오는 날, 눈 내리는 날을 그대로 담는 정말 그 자체로 작품이 되는 공간이였다. 물때가 그대로 남아있는 벽과 두꺼운 창문, 윤동주시인이 감금되었던 후쿠오카 형무소를 연상시키는 이 공간으로 들어서는 순간 차가운 느낌과 함께 고립감이 느껴졌다. 

시인이 언어로 시를 쓴다면 건축가는 공간으로 시를 쓰는 사람이다. 시인이 남긴 시어에서 령감을 얻은 건축가는 물탱크 앞쪽 방은 기존 콘크리트 지붕을 걷어내고 하늘을 담은 ‘열린 우물’로, 빛이 들어오지 않는 뒤쪽 방은 영상 전시를 위한 ‘닫힌 우물’로 디자인하면서, 시인 윤동주에게 더 잘 어울리는 공간이 드디어 ‘탄생’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서 있자니 내가 시인이라도 된 듯하다. 그의 작품을 한 편 골라 소리 없이 읽는다. 눈으로 머리로 읽었던 윤동주의 시가 고스란히 가슴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찿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가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리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는 당시 악명 높았던 특고나 일제 재판관 앞에서도 름름한 자태로 자신의 견해를 주저없이 당당하게 피력했고 형사 앞에서도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과 대책을 열정적으로 토로하기를 마다하지 않은 독립투사이다. 윤동주의 판결문에는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구체적인 운동 방침을 논의했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특유의 감수성과 삶에 대한 고뇌, 독립에 대한 소망이 서려 있는 작품들로 인해 한국 문학사에 큰 기여를 한 문인이다. 일제의 강압과 회유책에 의해 1940년대부터는 다수의 문인들이 절필하거나 친일파로 변절했기 때문에 윤동주는 이육사와 더불어 민족시인으로 더더욱 추앙받는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럼도 없기를 맹세한 시인 윤동주, 그의 생애는 짧았지만 음울하고 가혹한 상황 속에서도 반드시 려명은 오리라 굳게 믿고 써내려간 주옥같은 시어들은 오늘날까지 해맑은 영혼의 징표로 남아 있다. 그가 남긴 100여 편의 시는 진실한 자기성찰을 바탕으로 순수하고 참다운 인간의 본성을 되새기게 함으로써 후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02

민족투사이자 저항시인 이육사문학관은 이번 문학기행 남하답사의 두번째로 되는 코스였다.  경북지역에 들어서면서 피부로 다가오는 느낌은 우선 사람들의 말씨였다. 지역사투리의 구수한 맛은 마치 고향에 온 듯 마음이 따스해 났다. 구미에서 길재묘소 탐방을 끝내고 택시로 고속버스터미널에 오니 마침 영주행 버스출발 시간이 오후 4시였다. 아직 20분 시간이 남아 있었다. 사실 영주행은 원계획에는 이틑날인 6월8일의 일정이다. 이제 행사를 앞당기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계획대로 영주군까지 두시간을 달렸다. 고속버스는 차체가 크고 온당하여 거의 들추지 않았고 차내시설이 잘 되어 있어 아주 편했다. 이를테면 좌석의자를  비스듬이 눕히면 그 경사도가 미미하여 거의 침대나 다름이 없었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비행기 좌석보다 오히러 더 편안했다. 원계획은 정지용과 길재탐방을 완성하면 구미시에서 하루 묵으려 했는데 시간을 단축(택시를 이용했기에)하여 내일 일정을 오늘로 가져왔으니 맘상으로 여유가 잡히고 흐뭇했다. 생각밖으로 순리로왔다. 지금껏 동분서주하는 기행 가운데 직면한 모험을 무릅쓴 것이 이제 노하우가 되는 모양이다고. 고속버스는 강원도 원주까지 가는 것인데 중도에 안동시를 거쳐서 손님을 부리우고 계속 달렸다.

저항시인 이육사 문학관 앞에서
저항시인 이육사 문학관 앞에서

오후 다섯시 반에 영주군에 당도했다. 터미널 앞에 택시들이 십여대 줄을 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이육사문학관의 위치를 찾으려 한다니 당장에서 잘못왔다는 것이다. 기실은 안동에서 내리면 더 가까웠을 거란다. 안동까지 가는 버스는 없고 택시로도 한시간은 걸려야 한단다. 제딴엔 오늘 일이 잘 풀려서 내일 일정을 앞당긴다 했는데 정작 마추치고 보니  오히려 목적지와는 반대 방향으로 달린 셈이 되어버렸다. 충격이 컸다. 목적지의 반대쪽으로 온것도 그러하지만 택시로도 한시간을 더 달려야하니 그요금은 어찌고.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가자니 비용이 높고 여기서 묵자니 숙비는 그렇다 치더라도 내일 또다시 무엇이든 타야 할 거 아닌가. 어차피 가야할 바에는 이 일정을 오늘 소화하는 것이 옳다. 이육사문학관에 당도하면 민박이라도 있겠지 하고 나름대로 생각을 굴리면서 용단을 내렸다. 가자. 

택시로 영주군을 벗어나서부터 골을 타고 이어지는 산간도로는 말그대로 꼬불랑할매 오솔길이었다. 거퍼 20미터도 안가서 급커버가 이어지는데 시속 20키로로 달리지만 뒤에 않은 필자는 속도를 천천히 하라고 운전기사에게 연신 당부할 지경이였다. 오지도 이런 오지가 또 어디 있겠는가. 거의 한시간을 달려 겨우 앞이 좀 터이는 곳이 나왔는데 도산면이라 했다. 잠시 팔다리의 피로를 풀고있는 와중에 문득 김구金坵의 한시 分水嶺途中 이 떠오른다.

杜鵑聲裏但靑山   두견의 소리 속에 푸른 산뿐이라
竟日行穿翠密間   종일토록 푸르고 빽빽한 숲을 뚫으며 걸어가네
渡一溪流知幾曲   한 시냇물을 건넜으니 몇 굽이나 남았는지
送潺潺了又潺潺   흐르는 물 보내고 나면 또 흐르는 물이다

산을 에돌고 내를 건너 굽이굽이 수십구비를 지나왔는데 이육사문학관은 아직 십여키로 남았단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바야흐로 저녁6시반을 가르키고 있었다. 여기서 묵고 갈까고 생각을 굴리다가 단념하고 계속 달렸다. 드디어 이육사문학관이 나타나고 가옥이 몇채 눈에 띄었다. 차에서 내리니 바로 산밑인지라 땅거미가 져서 어둑어둑하였다. 택시를 보내고 가옥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니 제법 고풍스러운 고옥앞에 전등까지 켜져 있었다. 주인을 불러보니 무응답이다. 이 문 저 문 다 두드려도 무응답. 빈집이나 다름없었다. 이일을 어쩌지. 어둑어둑한 주위를 살피다가 비닐하우스가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주위는 여전히 고요했다.

그런데 밭길 저편으로 사람이 앉아 있는 것 같아 거기로 가니 예순넘어 되보이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이육사문학관에 왔는데 민박이 있으면 알려달라 했다. 없단다. 아주 단호했다. 어쩌지 ? 오늘  밤은 틀림없이 어느 집 처마 밑에서 … 하고 생각을 굴리고 있는 사이 하얀택시 한대가 고풍스런 고옥으로 내려간다. 얼른 저 택시를 잡아서 면으로 올라가란다. 내려가는 사이에 택시가 떠나면 산토끼 집토끼 다놓치는 판이다. 걸음을 재촉하여 겨우 택시까지 갔을 때 마침 택시기사가 고택에서 나왔다.

차에 오르면서 나는 기실 내일 아침이면 또 문학관으로 내려와야 하는데 하고 혼잣말을 했더니 이곳 민박은 미리 예약해야 한다며 방금 내린사람이 이육사 따님인데 숙박은 반드시 예약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말에 응 이곳이 민박이였구나. 또 이육사따님이 운영하고 있구나를 알고 무작정 차에서 내렸다. 내가 사정해봐야겠다고. 기사도 차에서 따라내리면서 이육사따님을 아느냐 했다. 무작정 “예 압니다” 했다. 기사는 뒷쪽으로 난 대문을 열고 동쪽채 창앞에서 주인을 부르며 손님이 왔다고 알렸다. 인츰 방문이 열리면서 안노인이 나타났다. 정신이 맑고 체신이 가벼운 것을 보아 칠순이 좀 넘은 듯 했다. 나의 행색을 보더니 두말없이 서쪽별채로 안내했다. 

방문을 여니 작은 방이지만 아담하고 깔끔하였다. 짐을 풀고 나와서 수도를 틀고 손을 씻으려니 집안에 화장실이 다 구비되 있단다. 비록 좁기는 하지만 아주 시설이 잘 된 세면실이라 샤워기에 전기스팀으로된 좌석변기까지 갖추어져 그저 민박이 아니구나 느껴졌다. 인천에서 새벽에 떠나 충북옥천군을 거쳐 경북구미에 들어와 다시 영주군까지, 영주에서 택시로 한시간반을 또 달려왔으니 지쳐도 어지간히 지칠정도가 아니다. 이내 샤와를 하고 나니 여로의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노크소리와 함께 저녁식사 하세요 했다. 

간소한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다. 밑반찬에 라면 한그릇. 하지만 진수성찬 맞잡이로 맞갈스레 먹었다. 속이 든든해지자 따뜻한 차를 들여왔다. 차를 마이면서 문학애호가로서 중국에서 특히 찿아왔다고. 이육사선생님을 특히 존중하고 있다고.
오늘 새벽에 인천을 떠나 광명시에 도착. 광명에서 대전 옥천까지 ktx .  그리고 옥천에서 구미까지 무궁화. 모두 입석이였지만 시간을 쟁취하려고 주저없이 차에 올랐고 또 영주에서 이렇게 택시를 타고 여기까지 이 모든 것은 이육사문학관 탐방을 위해서였다고 자초지종 이야기했다.

이육사시인의 딸 이옥비 (82세)
이육사시인의 딸 이옥비 (82세)

저녁상을 물리고 자연스러운 한담으로 이어졌다. 나라에서 지원금 5억에 안동시청의 도움으로 이육사문학관을 건립. 이육사선생슬하에는 딸이 하나였다며 자신을 가르킨다. 성명은 이옥비이고 4살때 부친과 헤여졌단다. 아버지와 첫대면이자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단다. 당시 아버지는 흰천으로 얼굴을 가리웠는데 구멍 세개를 뚫어 놓았었다. 볼수 있게 두눈, 그리고 말할 수 있게 입에 구멍하나. 그때 나는 아버지의 위용을 보지 못하나 아버지는 나를 볼 수 있었다고 했다. 북경감옥으로 압송하는 도중 시간을 내여 집식구들과의 면회를 가졌다는 것이 얼굴을 가리운 채 자유를 잃은 죄인으로 였다. 당시 나는 네살아이였기에 어른들의 일은 전혀 알 수 없었고 다만 아버지가 나에게 예쁜모자와 모빈단 저고리에 가죽구두를 사온 기억뿐이란다.

이튿날 아침식사가 끝나고 편안한 마음으로 숙박비를 물으니 원래는 17만원 인데 3만원 감면하고 14만원  내란다. 환경이 아늑하고 시설도 괜찮았고 했지만 필경은 방이 작고 식사도 저녁에 라면 아침에는 계란하나에 구운감자 두개였다. 어느면으로 보나 높은 가격이었다. 인민폐로 750원에 해당된다. 어지간한 대통령방의 가격이다. 그러나 두말않고 지불했다. 어제저녁 오갈데 없을 때 받아준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를 드려야 했기에.  오늘 밤은 영락없이 어느 집 처마밑에서 새우잠을 잘 수 밖에 하고 맘속으로 작심까지 하지 않았던가.

이옥비여사님과 기념사진을 남기려 해도 사진 찍어 줄 사람이 없어 고옥을 배경으로 각기 독사진을 남겼다. 아침 9시에 문학관으로 향하는 도중 부근 공원에 세워진 시비를 감상하면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문학관에 도착하니 청소부가 한창 작업중이었다. 이육사문학관은 안동시 도산면 백운로에 위치해 있으며 현대식 사각형의 문형을 살려 단순하면서도 회색계렬의 색깔을 입혀 안정감을 주었다. 전시관은 이육사의 독립운동을 시작하게 된 배경 그리고 본명이 이원록인데 이육사라는 이름은 대구감옥에 있을 때의 수감번호 264의 음을 따와 원명을 대체해버렸다고 한다. 한국의 소설가나 시인들의 작품과 생애를 보면 올곧은 삶의 자세를 끝까지 견지한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중국 북경감옥에서 40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 이육사李陸史 시인이다. 

이육사는 1904년 4월 4일 경상북도 안동에서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친가와 외가 쪽 모두가 일제식민통치에 항거한 항일가족이였다. 이육사는 이런 엄숙하고도 애국적인 가풍 속에서 성장했다.그는 일제의 어두운 시대에서도 깨끗하고 맑은 언어로 꺼지지 않는 독립 의지를 노래하였고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한발자욱도 물러서지 않고 붓끝으로 세상사람들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실천적 문학인이라 할 수 있다. 

청포도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의 시 “청포도”이다.시인은 ‘ 청포도 ‘ 를 통해 풍요롭고 평화로운 미래 세계에 대한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청포도’라는 사물 속에 화자의 꿈과 소망이 담겨 있으며 선명한 색채감도 드러나 있다. 여기서  ‘ 이 마을 전설 ’ 은 잊혀 진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래에 찾아올 청포도와 같은 세계를 상징한다. 화자는 청포도를 푸른 바다와 연결하면서 미래의 희망을 표현하고 있다. 

화자가 바라는 손님은 그가 기다리는 대상으로 미래 세계를 상징하는 소재이다.광복은 평화로운 세계를 상징한다. 희망한 평화의 세계가 찾아온다면 화자는 ‘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을 만큼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그는 자신의 소망이나 신념을 호소하되 직설적인 구호 토로 방식을 회피하고 문학이란 방식을  통해서 전통적이고 목가적인 어조, 때론 화려하게 느껴질 정도의 상징과 은유를 사용하였다. 

이는 당시 그가 처한 암울한 시대특징에 비롯된 것이다.

이육사는 어릴 적에 익힌 한학과 엄한 가풍에서  키워온 선비 정신, 그리고 북경 유학 시절에 접한 중국 문학의 영향을 받아 시창작에서도 독립지사다운 품위를 잃지 않았다.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 시에서 “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 ”이 바로 이육사 자신이며 그 초인의 가슴속에 들끓는 결연한 의지가 바로 “강철로 된 무지개”이다. 그의 삶은 북방의 칼날 같은 추위 속에 홀로 피어나 고고히 향기를 뿌리는 한 떨기 매화梅花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절정”에 나오는 “매운 계절의 채찍”이나 “서릿발 칼날진” 같은 시구는 식민지 지식인이 당면한 현실의 가혹함을 말해준다. 

이처럼 암담하고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시인은 자신의 영혼과 의지를 더욱 가다듬어 “강철로 된 무지개”를 꿈꾸는 선비의 꼿꼿한 정신적 결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가 명실공히  ‘ 민족 시인 ’, ‘ 저항 시인 ’ 임을 또 다른 측면에서 립증해 주고 있다.

해방후 그의 고향인 경북 안동시 낙동강댐 언저리에 이육사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시비에는 그의 시 “ 광야 ”가 새겨져 있고 뒤쪽에는 조지훈의 추모의 글이 세겨져 있다.

김창권 프로필 

1974_1977 연변대학조문학부
1989_2000 치치하얼시정부외사판공실
2000_2011 치치하얼대학외국어학원
2011 정년퇴직, 현재 대련시조선족문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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