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니웨이(倪偉)

2015년 7월 10일, ‘불로남신(不老男神 )’ 페이샹이 검은 옷을 입고 지난에 와서 노래를 불렀고, ‘겨울의 한 줌 불(冬天裏的一縷火)’이 관객들의 열정을 불태웠다. 사진/장용(張勇)
2015년 7월 10일, ‘불로남신(不老男神 )’ 페이샹이 검은 옷을 입고 지난에 와서 노래를 불렀고, ‘겨울의 한 줌 불(冬天裏的一縷火)’이 관객들의 열정을 불태웠다. 사진/장용(張勇)

“아저씨 왔다!” 스태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페이샹은 다소 비좁은 방으로 몸을 던졌다. 깔끔한 흰색 바지에 흰색 구두, 회색 블레이저 차림으로 촬영 일정 없이 단정히 차려 입고 머리를 빗은 그는 지친 기색이었다. “죄송합니다.” 그가 쉰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전 감기에 걸렸습니다.”

그는 항상 대비를 만드는 사람, 새로운 세계의 대변자, 구세계의 틈입자이다. 그러나 뼛속까지 그는 우아하고 느린 구식 남자였다. 직원들은 그를 삼촌이라고 부르고 네티즌들은 그를  Daddy라고 부른다. 

1987년 섣달그믐날 밤 대중을 매료시켰던 페이샹은 2023년 다시 잘나가며 부드러운 아저씨로 탈바꿈했다.

영화 ‘봉신 1부’에서 페이샹은 상왕 인시우(商王殷壽) 역을 맡았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그는 영화 제작진과 함께 기록적인 규모의 거리공연을 마쳤다. 거리공연과 함께 인터넷에는 새로운 검색어와 드립(梗)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으며, 사람들은 페이샹의 중국어 억양을 ‘비즈니스 은어’라고 조롱했다.

과거 그의 분명하고 격에 얽매이지 않는 발언들도 다시 화제가 되면서 이 불안한 시대에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힘이 되었다.

 

“끝이 있기 마련인데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어요”

2023년 한 해, 페이샹은 앞다투어 '쟁탈'해 가는 인기인이 되었다.
모인 것은 2018년 그 전화에서 시작되었다. 우얼산(烏爾善) 감독이 베이징(北京)에서 전화를 걸어와 페이샹에게 대본을 보라고 했다. 그가 우편함을 열자, 안에는 ‘봉신 3부작’(封神三部曲)의 세 가지 시나리오가 들어 있었다. 그는 단숨에 읽었고, 한 가지 생각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 바로 인시우(殷壽)를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가 우얼산에게 전화를 했을 때, 우얼산 감독은 이미 칭다오(青島)에서 신인 배우들을 트레이닝시키고 있는 중이었는데, 감독은 그에게 인시우 역을 맡아달라고 말했다. 과녁의 중심을 명중한 대답이었다.

“감독님께 바로 하겠다고 말씀드렸죠.”

3부작이 제작부터 후기 상영까지 최소 5년 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이는 '큰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는 매우 간단한 결정이었다.

원래 페이샹은 2018년에 휴식을 취하려고 했었다. 1998년부터 매년 중요한 업무로 2016년까지 중국 투어를 이어오던 그는 갑자기 스태프들에게 “2018년 구정이 되면 이 삼촌도 잠시 공연을 중단할 것이다.”라고 선포했다.

“그때 목소리도 괜찮았고 외적으로도 괜찮았어요. 밖으로 나왔을 때 관객들을 놀라게 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깐요. 하지만 저도 영원히 이렇게 할 수는 없지 않나요.” 그는 그때의 결정을 회상하며 “하지만 끝이 있는 게 당연하고,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페이샹은 모든 모습이 완벽했다. 1982년 대만에서 데뷔 앨범 ‘류롄(流連)’을 발표하며 대박을 터뜨렸다. 양안 개방 후, 페이샹은 중국 본토에 편안하고 고품질의 유행을 따르는 음악을 전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일부 노래를 선택하여 광저우(廣州)에서 ‘사해를 건너는 노래’ 앨범을 녹음하고 발매했다. ‘겨울날의 횃불’(冬天裏的一把火), ‘고향의 구름’(故鄉的雲), ‘고뇌스러운 가을바람’(惱人的秋風), ‘유련’(流連) 등 대표곡이 수록된 이 앨범은 1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이어 그는 춘완(春晚, 구정 야회) 연출진의 러브콜을 받았다.

1987년 섣달그믐날 밤, 그는 붉은색 옷을 입고 춘완 무대에 올라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혼혈 유전자에 긴 머리를 휘날리는 스타일, 밝고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페이샹이 카메라 앞에 나타나자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손님처럼 보였다. 베이징에 사는 외할머니와 무대 아래에서 껴안고 입맞춤했을 때 그는 또 전체 중국인들의 먼 친척이 되었다. 그렇게 그 섣달그믐날 밤에 그는 중국인들에게 우상이자 사자(使者)로 받아들여졌고, 하나의 상징으로 1980년대의 집단적 기억 속에 자리 잡았다.

운명 톱니바퀴의 회전은 그 자신의 적극성과 떼려야 뗄 수 없었다. 대륙에 진출해 음반을 내고 팝을 전파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광저우(廣州)에서 녹음한 '사해를 건너는 노래'는 그가 직접 프로듀서를 맡았고, 본토에 첨단 장비가 없어 홍콩에서 직접 운송해 와 작업했다. 

“바로 저라는 사람이, 그때 그 시절, 이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삼박자가 결합하여 성공할 수 있었어요. 그때 제 자리를 개인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는가구요? 저는 바로 해협 양안을 소통시키는 다리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1998년 8월 22일 페이샹(왼쪽)이 대규모 수재 복구 자선공연에서 ‘고향의 구름(故鄉的雲)’을 열창해 관객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사진/왕리난(王麗南)
1998년 8월 22일 페이샹(왼쪽)이 대규모 수재 복구 자선공연에서 ‘고향의 구름(故鄉的雲)’을 열창해 관객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사진/왕리난(王麗南)

“페이샹이라는 두 글자를 떠난다면 저는 무엇일까요?”
칭다오(青岛)에서 페이샹을 기다렸던 것은 또 다른 옛날과 같은 날들이었다.
‘봉신 3부작’을 위한 해변의 거대한 촬영기지에서 그는 1년 반 동안 촬영했다. 연기 외에도 그는 상왕(商王)에 대한 사람들의 상상을 충족시키기 위해 슈퍼맨과 같은 몸을 만들어야 했다.

'봉신 3부작'의 하이라이트 장면마다 촬영 하루 전 리허설을 하고, 어떻게 연기할지 논의를 펼칠 때였다. 매일 같이 어마어마한 투자금을 들어야 하는 제작진에게 이것은 상당히 사치스러운, 확실한 구식 촬영 방식이었다. 아마 할리우드도 이렇게 찍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구식 접근법이 마음에 들었어요. 제작진들은 예산 압박이 생기면 가장 먼저 리허설 시간을 줄였다. ‘빨리, 빨리, 빨리, 빨리 옷을 갈아입어라.’는 말과 함께 촬영을 시작했죠. 하지만 진정한 창작은 연기를 할 때 불꽃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는 느림보 제작진들에게 반했다.

춘완(春晚)을 통해 인기를 얻은 후, 그의 공연은 3년 연속 팬들로 중국 대륙 순회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동남아에서 인기를 끈 지 10년 가까이 지난 후,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그는 왜 하필 시대가 자신을 골랐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나는 누구인지? 내 표현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내 가창력이 과연 좋은지…저에게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폭풍의 속도는 점점 더 큰 혼란을 가져왔다. “페이샹이라는 두 글자를 떠나 저는 어떤 존재일까요?”

페이샹은 이 모든 것을 떠나기로 했다. 28세 때 미국으로 돌아가 오페라를 가르치는 성악 선생님을 찾아 노래를 처음부터 배운 뒤 이력서를 들고 음악회사 복도에 줄을 서서 오디션을 기다렸다.

배우 노조의 노조 카드도 없었기에 브로드웨이에서 배역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침 뮤지컬 ‘미스 사이공’이 브로드웨이 판을 찍게 되어 사회적으로 배우를 모집하고 있었다. 당시 뉴욕에는 노조 카드를 든 뮤지컬 배우 8만여 명이 있었다. 자신이 합격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페이샹은 처음으로 자신이 정말 노래할 줄 안다고 믿었다. 비록 그것은 이름이나 독창도 없는 작은 배역이었지만 말이다.

4편까지 연기한 후, 그가 이 공연을 떠났다. 뮤지컬 ‘극장의 유령’과 ‘캣츠’의 작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작품음악회 월드투어를 기획했고, 페이샹은 네 명의 보컬리스트 중 한명으로 선정돼 세라 브라이트 먼 등 쟁쟁한 배우들과 듀엣을 하게 된 것이다. 2001년, 페이샹의 주도로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중국에 상륙했다.

무대에서 세상으로 돌아오자, 그는 다시 중력을 얻게 되었다. 그는 직선 상승을 멈추고 자발적으로 운명을 곡선으로 구부려 느린 속에서 여유와 편안함을 얻었다.
그는 영화를 볼 때 항상 사람을 본다. ‘봉신 1편’은 화려한 시청각으로 유명하지만, 눈부신 기술에 대해 그는 “저는 구식 관객이고 나이도 있죠. 저 같은 경우 사람을 주로 보는데 제 연기에 만족해요. 이 영화에서 캐릭터가 변하는 걸 볼 수 있었죠.”라고 말했다.

인시우라는 캐릭터에 대한 그의 생각은 심리와 역사의 깊이에도 와 닿았다. “인시우는 고기능 적이고 반사회 적 인격자에 속하죠.” 페이샹은 표준적인 심리학 개념으로 그의 역할을 정했다. 그는 역사의 일부 폭군들을 떠올리며 “그들은 매우 집중력이 강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어요. 그렇게 집중하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자신을 믿도록 하고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거죠.”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매우 무서운 존재들이죠.”
페이샹은 젊은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인시우의 개인적 매력 뒤에 숨겨진 무서운 야망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젊은이들은 매력적이고 목표를 잘 아는 것 같은 사람에게 이끌리기 쉬우므로 판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는 “저는 그들이 지파(姬發)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고 자신을 찾기를 바랍니다.”고 전했다.

“관객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건 제 복이죠”

거리공연이 시작될 때 페이샹은 관객들에게 익숙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쉐지옌(雪健) 선생님(리쉐지옌,李雪健: 영화 속 지창’姬昌’ 역)이 몸이 안 좋아 계속 저희와 함께 있을 수 없었어요. 황붜(黃渤, 강자아 역)는 아시다시피 여름에 새 영화가 여러 편 개봉되기 때문에 저밖에 할 수 없었어요.” 그는 이렇게 겸손하게 설명했다. 그는 한 주연배우 이상의 책임감을 가지고 정신적으로 가장이자, Daddy의 역할을 맡았다.   

‘봉신 1부’ 최종판을 본 페이샹은 우얼산에게 진지하게 “영어 자막 한 곳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직접 나섰다. 이렇게 대스타는 책임감을 갖고 번역 작업에도 착수했고 그는 밤낮으로 책상에서 한 줄 한 줄씩 영어 자막을 최소 70% 이상 고쳤다.

페이샹은 중국 내에서 일하거나 상하이에서 어머니를 동반하는 시간 외에는 런던과 뉴욕에서 살고 있다. 그는 서방 국가가 여전히 중국에 대해 너무 모른다고 느끼고 초조해했다. 그는 ‘봉신 1편’이 중국 영화와 중국 문화를 널리 알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제작자에게 “이 영화는 반드시 해외로 가야 한다. 내 시간을 다 줄 테니, 중국어와 영어로 다 해도 좋다.”고 말했다. 하반기 내내 그는 ‘봉신 1편’을 위해 베네치아, 도쿄, 싱가포르 등 해외 출장을 많이 다녔다. 런던과 뉴욕으로 돌아가서 그는 자신의 국제적 경험을 활용하여 영화 홍보를 위한 완벽한 플레이를 펼쳤다.

이 전통적 부자 차림새의 남자에게서 책임감은 언제나 개인적인 기질의 일부로 작용했다. 춘완이 인기를 끌자 대륙에 머물며 음반을 내고 투어에 나선 것도 팬들을 만날 수 있고 음반사가 돈을 벌어 물보다 진한 동포애를 이어갈 수 있다는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그는 다시 한번 이런 위치에 자신을 두고 중국 내로 돌아왔을 때마다 이런 방식으로 일을 한다.

그는 항상 모든 이들을 만족시키는 사람이었다. 때로는 팬들을 무대 옆으로 안내하며 “자, MC는 계속 진행을 이어가고 우리 둘이 셀카 찍고 집에 가서 엄마한테 보여줘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당신들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제 복이죠.”라고 했다. 

햇살 뒤편에는 슬픈 소년이 있었다. 어린 시절, 누나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부모의 결혼생활이 파탄 나면서 그는 큰 상처를 입었다. 그는 세상일이 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사람과 사람은 결국 헤어지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외로움과 상처의 기억이 그에게 온정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만든 원인이 아닌가 싶다.

“어떻게 부드러워졌느냐고 물으셨는데,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는 “저는 다른 사람을 지도할 방법이 없고, 제 개인적인 관점에서만 말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대한 다른 사람의 위치에서 일을 고려하는 것으로 생각해요. 자아도 중요하지만, 전체 국면을 객관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서양 문화는 매우 자아중심적입니다. 그러나 중국 전통은 평생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갑니다. 두 문화는 평생 저에게 번갈아 영향을 미쳤죠. 이것은 나의 한 관점입니다.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더 진실하고 착한 방식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큰 제목이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전했다.

인터뷰 시간을 넘긴 페이샹은 재촉하거나 졸리는 기색 없이 피곤한 듯 목소리를 낮췄다. 마지막 질문에 그는 반갑게 몇 마디 인사를 한 뒤 퇴장해 방을 나갔다. 시작부터 끝까지 그는 매 순간을 온당하게 채웠고, 그 때문에 인터뷰 내내 주변 공기 또한 부드러워진 듯했다. 어둠이 내리고 그는 또 하루의 일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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