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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저항시인  중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은 만해 한용운이다. 

한용운의 심우장을 찾아가던 날은 하늘도 유난히 맑았고 모춘의 산과 들은 온갖 꽃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만해 한용운의 유허지 심우장寻牛莊은 성북동 인왕산산자락에 자리잡고 있었다. 심우장의 입구에는 한복차림을 하고 왼손에 신문을 쥐고 앉아 있는 한용운의 동상이 찿아오는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동상의 얼굴륜곽을 통해 나라의 비운을 감내하는 시인의 무거운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님의 침묵”을 새긴 동그란 검은 대리석 시비가 조용히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불교를 상징하는 작은 채색기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꽂혀 있어 마치 숭엄한 사찰을 림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심우장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있는 한용운시인의 좌상과 “님의 침묵” 시비
심우장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있는 한용운시인의 좌상과 “님의 침묵” 시비

한치의 꺼리낌도 없는 삶을 후세에 선사하였기에 그를 찿아가는 필자의 마음도 한결 거뜬하었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까지 그의 시작들을 수십번 보고 듣고 외우기까지 하였지만 그의 위용은 근근히 사진이나 서책에서 접했을 뿐이였다. 맘속으로 깊이 숭상해오던 시인의 거룩한 모습을 오늘에야 그 실물과 만나게 된다고 생각하니 그 반가움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그의 명작 “님의 침묵”이 오늘처럼 타이밍에 잘 맞아떨어지기는 다시 없었다. 저도 모르게 시구가 흘러나왔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나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이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만날 때 
미리 떠날 것을 념려하고 경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이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되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알고 있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 떠날 것을 념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 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설악산 백담사에서 집필한 이시는 오늘도 수천 수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명을 자아내고 있다. 여성적인 정감의 어조로 일관하고 있는 “님의 침묵”은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 형상화한 것이라 평가를 받는다. 

님을 이별한 시대는 바로 침묵의 시대 상실의 시대이며 따라서 언젠가 맞이하게 되는 만남의 시간이 바로 참된 낙원을 회복하는 시대 - 광복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시는 기다림의 시 또는 희망의 시로 파악할 수 있다. 

조선 중기 정철 鄭澈이 왕권으로부터 소외를 극복하기 위하여 여성주의의 “사미인곡”을 쓴 것처럼 한용운도 님이 침묵하는 시대에 잃어버린 조국과 민족에 대한 회복의 소망을 여성주의적 방법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의 시의 여성주의는 정감적인 호소력을 유발하기 위한 표면적 기법일 뿐 그 내면에는 저항과 극복정신이 잠재해 있다. 여성주의적인 부드러움과 애한의 정조는 실상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정신적 응전應戰 방식일 뿐 내면에 흐르는 선비정신으로서의 저항의식이 극복정신과 조화되어 한국 문학의 총체적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만해의 시는 저항시로서 가치를 가지며 또한 전통시와 상관관계가 선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만해 한용운은 스스로 시대와의 불화를 피하지 않은 ‘님’이였다. 그는 불교 개혁을 부르짖은 승려요, 일제와 맞서 싸운 독립 운동가였다. 일본 총독부와 얼굴을 마주하기 싫다고 워낙은 남향으로 지을 집을 굳이 고집하여 동쪽으로 창을 내여 지은 심우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가 대쪽처럼 올곧은 선비정신의 소유자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동북 항일무장투쟁지도자 김동삼이 살해당하였을 때 일제의 눈이 두려워 누구 하나 그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자 한용운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선뜻 나서서 그의 주검을 수습해 와 심우장에서 5일장을 치렀다. 식음을 전페하고 빈속에 술만 마시다가 장례식 마지막날에는 김동삼의 관우에 올라 앉아 울부짓고 통탄했다고 한다. 

만해 한용운은 독립운동가이자 또 시인이였다. 만해의 시는 은유와 역설 등 시의 방법과 산문적인 개방을 지향한 자유시로서의 형태를 완성시킴으로써 현대시적 특성을 지니게 된다. 그는 악과 부조리의 사회현실을 타파하려는 노력과 결심으로 불교유신을 주장했고 불교인의 일반적 신앙자세를 떠나 시나 소설을 통하여 적극적인 대중교화활동을 지펴나갔고 조국수호에 대한 열의를 실천하였다. 한용운의 옥중에서 지은 한시 오언절구 한수를 흔상해 보기로 하자.

昨冬雪如花 今春花如雪
雪花共非眞 如何心欲裂
작동설여화 금춘화여설
설화공비진 여하심욕렬

지난 겨울은 눈도 꽃이려니
이번 봄날엔 꽃도 눈이런가
눈이야 꽃이야 모두 참이 아니건만
어찌하여 이 마음 찢어지려 하는가.

이 한시는 한용운이 옥중에서 지은 시편 중 하나이다. ‘지난겨울’은 그가 자유의 몸이었을 때이고, ‘이번 봄’은 구속되어 자유를 박탈당한 때를 말한다.  그리고 ‘눈’은 추운 겨울과 억압을 상징하고 ‘꽃’은 따뜻한 봄과 자유를 상징하고 있다. 자유의 몸일 때에는 겨울의 눈도 꽃처럼 포근하게 느껴지더니, 구속의 몸이 되어서는 봄의 꽃도 겨울 눈처럼 차갑게만 느껴진다.

이러한 감정이 어찌 일개인의 옥중 감정에 그치겠는가. 같은 시대를 살아 온 전민족이 함께 느끼던 암울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승려로서 구도자의 삶을 택했던 만해는 일반인보다 고뇌가 더욱 심하였던 듯하다.
눈이건 꽃이건 진리에 견주어 보면 모두 허상에 불과한 것이라 마음 쓸 것이 없겠지만 조국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 마음이 찢어지도록 아파하였다. 시대를 아파하며 외면하지 못했던 만해는 자신이 갈 길을 시조의 형식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나이 되었으니 무슨 일을 하여 볼까
밭을 팔아 책을 살까 책을 팔아 칼을 갈까
아마도 칼 차고 글 읽는 것이 대장부인가 하노라

이처럼 그의 문학은 험난한 역사를 살아가는 예지와 용기를 가르쳐주며 현실적인 생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신념과 희망을 불러일으켜 준다는 점에서 참된 의미를 가진다. 그는 일관성 있는 행동에 따른 실천의지와 저항정신을 깊이 있는 불교사상으로 이끌어 올리면서 끊임없이 변화발전 시켰다. 그의 시혼은 우리가 되살려야 할 소중한 정신적 자산이다. 그의 시정신과 미학은 어려운 시대일수록 풍란화 매운 향내로서 더욱 그 빛과 향기를 뿌려갈 것이다. 


                               02
한용운과 동시대를 살았던 민족저항시인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반문하며 자신의 쓰라린 마음을 표현하였다.

대구 달서구명천로에 위치한 상화 尙火 이상화문학관을 찿아 올라가는 길에는 “뺴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란 크다란 벽화가 손님을 정겹게 맞이해 주었다.
이상화는 상화尙火를 호로 사용하였다. 상화 尙火는 아름다운 서정시로 식민지 시대에 우리 민족의 혼을 일깨워 준 1920년대의 대표적인 민족저항 시인이다. 그때 당시 낭만주의、 상징주의、 퇴폐주의 등 문예사조가 일본으로부터 수입되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었지만 이상화는 그러한 문예사조들을 과감히 탈피하고 민족의 현실에로 눈을 돌려 민족의 아픔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빼어난 저항시들을 남겼다.

상화尙火의 집안은 당시 대구의 명문가로 그가 7세 때 부친 이시우의 사망으로 백부 이일우의 가정 사숙에서 교육받다가 15세에 경성중앙학교에 입학했다.당시 백부 이일구는 3천석지기인 민족자본가였고 “우현서루”를 운영하였는데 서생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면서 민족 지사를 양성해 냈다. 상화尙火는 1919년 백기만 등과 대구 3.1 운동 거사 당시 독립선언서 선전문을 작성했고 대구 학생시위를 주도하였다. 일제식민통치에 과감히 맞서 항거하다가 수차 투옥하게 된다. 

이상화 문학관으로 올라가는 길 북쪽에 벽화
이상화 문학관으로 올라가는 길 북쪽에 벽화

현대문학 초기의 개척자이자 민족문학의 거두인 현진건과 이상화 두 사람은 유년기와 청년기를 대구에서 함께 보낸 죽마고우이자  ‘백조’ 동인 활동도 같이한 문우였다. 두 사람은 모두 독립유공자이기도 하고, 뛰어난 작품을 통해 문학사에 나란히 이름을 아로새긴 찬란한 별들이기도 하다.

상화尙火는 이때부터 “말세의 희탄”을 발표하면서 나도향, 박영희와 함께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한다.그후 프랑스로의 유학을 꿈꾸며 일본 도쿄에서 공부하던 중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동포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귀국하여 서울 가회동에 기거하면서 작품활동에 몰두하게 되는데 문단초기 그의 시는 탐미적인 경향이 있었다.
1925년 카프에 가입한 이상화시인은 사회적인 책임감을 느끼며 백조동인의 나약하고 낭만적인 사조에서 탈피하여 향토적인 저항시인으로 거듭난다.

1937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친형인 이상정 장군을 만난 이유로 이상화는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투옥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다. 1937년 교남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는데 이때 "피압박 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교남학교에 권투부를 신설하기 까지 했다. 

1926년 ‘개벽’ 6월호에 발표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는 지은이의 반일 민족의식을 표현한 대표시로 비탄과 허무, 저항과 애탄이 깔려 있다.국토는 잠시 빼앗겼을 망정 우리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봄'은 빼앗길 수 없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초기 시에서 볼 수 있는 까다로운 한자어를 피하고 순한글로 썼을 뿐 아니라, 각 연의 2·3행을 길게 했는데 이러한 의도적인 시어와 행배열로 가락이 힘차고 거센 격정을 느끼게 한다. 

이상화는 조국의 아픈 현실을 통감하며 저항정신을 시에 담아 표현한 시인이자 나라와 겨려의 고통을 해방시키고자 행동한 독립애국지사이다. 이상화는 험난한 근대사 속에서 준열한 자기 비판과 불같은 저항정신으로 나라를 상실한 망국민들이 해야 할 책무가 무엇이며 지조와 애국이 무엇인가를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써 이 땅에도 저항문학이 존재했음을 실증한 인물이다. 서슬 퍼런 일제 치하에서도 시대적 상황을 직시하고 조국해방을  념원하며 통곡의 심정으로 “시인에게”, “통곡”, “역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의 침실로” 와 같은 혼이 담긴 보석같이 빛나는 저항시를 남겼다.

광복을 맞이하고 3년 후인 1948년, 대구광역시 달성공원에 대한민국 현대문학최초의 시비가 세워졌다. 상화고택이 도시 개발로 철거될 위기를 맞이했던 1999년, 시민운동 차원에서 고택보존 운동을 벌여 2002년 대구 시민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상화고택을 지켜냈고 광복 63년인 2008년 8월 마침내 개관하게 되었다. 시민의 숙원 사업으로 이루어진 상화고택은 그의 마지막 시 ‘서러운 해조’가 집필된 곳이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한생을 살다가 다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한번 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이라 하여 이를 일생一生이라고 한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일생이지만 혹자는 버림받는 일생이 되고 혹자는 만인의 추앙을 받는 일생이 된다. 한용운, 이상화, 윤동주, 이육사와 같은 민족시인들의 일생은 투쟁의 일생이였고 민중의 자유평화를 위하는 청사에 길이 빛나는 일생이였다.

그 누구보다 평화를 사랑하고 자유를 갈망하는 그들인 만큼 빼앗긴 나라를 되찿고 민족의 해방을 안아오기 위해 그들은 그 어떤 대가를 치르기를 서슴치 않았다. 손에 쥔 붓대를 총가목삼아 민중을 호소하고 함께 일떠나 일제식민통치를 짓부시는 길로 나아가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치욕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건 창피한 게 아니다. 잊고 모르는 게 창피한 것이다. 그 안에 갈등과 분열을 해소할 해법이 있기 때문이다.

애국심이란 어찌 보면 장엄한 용어일지 모르지만 그 출발은  작은 관심과 실천으로부터 시작되며 역사가 주는 교훈으로부터 우리는 오늘을 사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김창권 프로필 

1974_1977 연변대학조문학부
1989_2000 치치하얼시정부외사판공실
2000_2011 치치하얼대학외국어학원
2011 정년퇴직, 현재 대련시조선족문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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