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신문, 글 김창권] 최경창, 이달, 백광훈을 조선시대 삼당시인이라 일컫는다. 이들 셋은 그 당시 표절과 론리에만 치우치던 그릇된 시풍을 배격하고 인간의 감정과 함축을 중시하는 당시唐詩풍으로 전환시키는데 큰 작용을 하였다. 

중국 송나라의 영향으로 조선중기 16세기 송시宋词가 매우 각광을 받았었다. 송시宋词는 주정적主情的인 면에 기울였던 당시唐詩와는 달리 주리적인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자체의 독특한 언어표현과 풍격을 형성하였다.  이로인해 한시 창작에서 세밀한 관찰을 통한 세부묘사를 가능하게 해주었고 시작기교의 진보、내용의 심화、시재诗材의 확대 등 면에서 당시唐诗보다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게 되었다. 

하지만 문예창작에 있어서 그 기교가 진보할 수록 자연스러움이 감퇴되고 억지로 꾸미고 다듬는 흔적이 남게된다. 신기함만을 추구하다가 신의新意를 얻지 못하면 어쩔수 없이 글귀 字句 조탁에만 집착하게 되어 시로서의  의경意境에도 손상을 끼치게 된다.  당시 조선의 관료문인들은 문학작품의 효용성을 강조하면서 송시를 공명을 세우고 지위를 과시하는 방편으로 삼았고, 문학을 성정도야性情 陶冶의 수단으로 간주하여 규범적인 작품만을 지향하였다. 그 결과 시가작품들이 점차 자연스러운 감동에서 멀어지고 인정이나 세태의 절실한 경험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는 폐단이 나타났다. 드디어   시가창작의 방향전환을 위해서 당시唐诗를 따라야 한다는 새로운 주장이 대두하였다.     

이시기에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을 비롯한 손곡 이달蓀谷 李達, 옥봉 백광훈玉峰 白光勳 세  문인은 송나라의 사변적이고 철리적인 시풍으로는 산수자연에 대한  묘사와 인간감정을 처리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시를 기량을 뽐내는 방법이나  정신수련으로 여기는 풍조에 맞서 삶의 구체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애정을 충실히 표현할 수 있는 당시풍을 제창하였다. 삼당시인의 노력으로 다양한 인간 감정에 주목하고 함축을 중시하는 당시풍 시가가 점차 각광을 받게 되였다.  

이번 문학기행 행선지 가운데 강원도 원주시가 포함되어 있다. 원주에 삼당시인 중의 한사람인 손곡蓀谷 이달李達의 묘비가 있기 때문이다. 강원도의 명칭이 강릉의 ‘강’자에 원주의 ‘원’를 따서 지었다는 설이 있는 걸 봐서 원주시의 위치가 예로부터 중요시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주시의 택시기사의 말에 의하면 최근 몇년간 원주시는 혁신의 도시로 부상하여 전국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단다. 원래 강원도라 하면 산부터 머리에 떠올랐지만 강릉을 거쳐 원주시에 들어서면서 특히 ‘원천석’의 묘소와 ‘이달’의 묘비가 원주에 있으므로 하여 필자도 점차 원주에 애착이 갔다.

원천석의 묘소탐방을 마치고 고속버스터미널로 가는 택시 안에서 부론면 손곡리에 있는 이달의 묘비를 찿아가려는데 교통이 많이 불편하다하여 망설이고 있다고 말을 떼자, 굳이 버스,기차를 엊갈아 타면서 고생하기보다 택시를 이용하면 왕복 두시간 반이면 충분할 거란다. 다시 말하면 오늘내로 완성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워낙은 이달李達의 묘비탐방은 교통이 불편하니 다음 기회로 미루려고 하던 차인데 택시기사의 말에 다시 용기를 얻게 되었다. 지금 떠나면 손곡리에 있는 묘비탐방을 마치고 오늘내로 거주지인 인천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여기서 하루밤을 묵으면 비용상으로 보나 시간상으로보나 또 교통상의 번거로움까지 합치면 택시를 이용하는편이 설사 비용이 든다 손 쳐도 훨씬 효율적이다.

달리고 있는 택시 안이라 이럴까 저럴까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 실제에 부합되는 결정과 과단성 있는 판단을 내려야만 택시도 제때에 방향을 바꿀 수 있고 애매한 거리를 달리는 시간을  피면하게 된다. 비용보다 시간이 더 귀중할 때다. 때는 이미 오후 한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손곡리로 하고 결단을 내리자 택시는 금방 방향을 바꾸었다

손곡蓀谷 이달李達의 묘비는 원주시 손곡리에 위치해 있었다.  
출신이 불우한 탓인지 손곡의 시비는 한산할 정도로 조촐하였다. 손곡리소학교로 들어가는 비포장도로 곁에 오롯이 시비 한개가 세워져 있을 뿐이였다. 시비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새겨져 있었다.

田家少婦無野食  농가의 젊은 아낙 끼니 거리 없어
雨中刈麥草間歸  보리 베어 빗속에 풀섶길로 돌아오네
生薪帶濕烟不起  풋나무는 젖어 연기조차 나지 않고
入門女兒啼牽衣  딸내미는 옷자락에 매달리어 칭얼대네

손곡 이달의 시 “전가행田家行”  이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저녁에 먹을거리가 떨어졌다. 
젊은 아낙은 빗속에 보리를 베어 집으로 돌아온다. 
어서 보리밥이라도 지어서 자식들 끼니를 해결해줘야 하는데 땔나무도 습기를 먹어서 불이 잘 붙지 않는다. 게다가 어린 딸은 어머니 옷을 붙잡고 울기까지 한다. 비와 습기에 젖은 땔나무 등의 소재들은 그 당시 백성들의 처량한 삶을 대변하고 있다.

밥, 봄, 보리, 아낙네와 아이들, 이런 시어들이 곤궁한 삶을 그림처럼 보여준다. 
손곡은 16세기말 두 차례나 되는 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의 현실을 그린 작품이 많다. 손곡의 시는 말하지 않고 그냥 보여주는 것이 특징적이다. 직접적인 비판과 분노는 보이지는 않지만 시에 나온 정경만으로도 징병으로 끌려간 남편에 대한 애잔한 감정이 정화수에 먹물이 퍼지듯 배어들고 있다.    

“전가행田家行” 내용을 되새기며 묘비가 세워진 곳에서 약 200미터 올라가니 참관객의 쉼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다행이 이런 쉼터가 있었기에 허전한 마음을 다소 가라앉힐 수 있었다.이달이 손곡에 남긴 곡절많은  삶과  문학의 자취도 그의 일생의 일부라는  인식을 가졌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을  남기면서 필자는 고속터미널로 가는 귀로에 올랐다. 

손곡 이달은 고려말기 문장가 쌍매당 이첨李詹의 후손이다. 
손곡은 양반 아버지와 홍주관기官妓 사이에서 서얼庶孼로 태어났다. 문과 응시를 통한 벼슬길은 출신이 불우한 탓으로 언녕 막혀 있었고, 다른 서얼들처럼 잡과雜科에 급제해 기술직으로 입신할 수 있었으나 이달은 이기회를 포기했다.그는 오직 하나의 신념 시를 지어 심중의 울분을 토해내는 것 뿐이었다. 

손곡은 원래 송시파 시인이였다.  특히 소동파의 시를 뼈속까지 터득하여 한번 붓을 들면 그 자리에서 수십 편의 시를 쏟아냈다고 한다.  시문에 뛰어난 박순朴淳이 그에게 시를 가르치면서 “시도詩道는 마땅히 당시唐詩를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 소식蘇軾이 비록 호방하기는 하지만, 이류二类로 떨어진다.”라고 충고하면서 이백、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의 근체시를 보여주었다. 

손곡은 사암 박순으로부터 중국 당시唐诗에 대해 이해를 깊이 했고 당시唐诗의 위치를 진일보로 깨닫게 되었다. 그후 최경창, 백광훈 등과 교유하면서 그는 단연 송시풍을 억제하고 당시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손곡마을로 돌아와  밤에 낮을 이어가며 당시唐诗공부에 몰두했다.책이 무릎을 떠나지 않기를 다섯 해나 계속했다. 손곡은 시를 지을 때 말 한마디 글자 하나까지도 갈고 닦았다. 그는 당나라 여러 시인들의 시체诗体를 본받아  글자와 구절을 단련하고 소리와 운률도 입에 오를 때까지 탁마를 그치지 않았고 법도에 맞지 않은 것이 있으면 달이 가고 해가 가더라도 고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하여 지은 시는 고죽 최경창 、봉은 백광훈도  따라갈 수 없다고 감탄하였고  당나라 시인 왕유 、맹호연、 고적에 버금가도록 청신하고 아련하였다고 한다. 허균은 ‘손곡산인전’ 에서  신라、고려 때부터 당나라의 시를 배운 이들이 많았지만 모두 이달을  따르지 못했다고 손곡의 시를 높이 평가했다.

이렇게 5년간 혼신을 몰부어 공부한 손곡은 이백과 성당십이가 盛唐十二家의 작품들을 모두 외울 정도에까지 도달하였고 드디어 최경창, 백광훈과 더불어 조선시대 삼당시인으로 거듭났다.

허균은 손곡 이달이 터득한 송시와 당시의 상호 구별되는 점을 아래와 같이 총화했다. 

송시는 머리로 쓴 시이고, 당시는 가슴으로 쓴 시다. 송시는 고사와 전고典故를 인용하며 말하는 것이고 당시는 느낌과 묘사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당나라 사람들은 광경서술을 즐겨하여 표현기법에 영묘影描가 많고, 송나라 사람들은 의론 세우기를 즐겨하여 포진铺阵이 많다. 

당시唐诗가 명사를 즐겨 사용하는데 비해 송시는 동사를 즐겨 사용하고, 당시가 시적 자아가 대상이  되어 있는데 반해 송시는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대상을 객체화시키는 것이 특징적이다.

시의 사조를 바꾼 손곡 이달은 당시唐诗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의 시는 기운이 따사롭고 지취가 뛰어나며 빛이 곱고 말이 담담하였다. 

그 온화함은 봄볕이 온갖 풀을 덮은 듯 하고 그 맑음은 서리 같은 물줄기가 큰 골짜기를 씻어 내리는 듯 했다. 그는 근체시 가운데서도 특히 절구絶句에 뛰어났다. 손곡의 시중 백미라 일컫는 오언절구  ‘강릉에서 서울가는 이례장을 이별’ 을 먼저 흔상해 보기로 하자.

이예장을 보내며  別李禮長

桐花夜煙落 오동나무 꽃잎이 밤안개속에 떨어지고
海樹春雲空 매화나무는 봄날의 구름처럼 하늘에 걸렸네
芳草一杯別 향긋한 풀내음에 한 잔 술로 이별을 달래노니
相逢京洛中 우리 언제 한양땅에서 다시 만나세.

소통하는 벗이 많지 않았던 이달은 친한 벗을 서울로 보내는 아쉬움을 봄의 오동나무 
낙화에 담고있다. 풀내음속에서 한잔 술로 나누는 조촐한 이별의 장면을 느끼며 막연하지만 서울에서 만나자는 여운을 남겨 독자들로 하여금 숙연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외로운 감정을 뛰어나게 묘사했다’는 허균의 말처럼 봄날 강릉에서 벗을 떠나보내는 
이별의 정한을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담담하게 그려 넣었다.
‘구운몽’ 의 작가 김만중은 이달의   이 시를  ‘조선 최고의 오언절구’라고 격찬하였다. 
 
손곡은 성격이 특이하였고  예법에 얽매이지 않고 항상 도전적인 언행을 자행했다. 한마디로 이단적이었다. 또 외방인이였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한탄하는 것으로 세월을 허비한 사람이 아니라 그러한 고통을 시로써 승화시킨 걸출한 시인이었다. 그의 생활의 다른 일면을 보여주는 최경창과의 교분을 보기로 하자. 고죽 최경창은 삼당시인의 한 사람인 손곡과 자별한 사이였다. 

한 번은 이달이 고죽 최경창이 임직하고 있는 고장을 지나다가 정을 주었던 기생이 상인이 파는 자운금紫雲錦을 사 달라고 하였다. 때마침 이달은 가진 돈이 없었으므로 최경창에게 다음과 같은 시 한수를 적어보냈다. 

湖商賣錦江南市   호남의 장사꾼이 강남시에서 비단을 파는데
朝日照之生紫煙   아침 햇살이 비치어 자줏빛 연기가 나는구려.
佳人正欲作裙帶  정을 주었던 여인이 치맛감을 보채는데
手探粧ㅁ無直錢   화장그릇 뒤져 보니 내 줄 돈이 한 푼도 없구려

고죽이 이 시를 보고 즉시 쌀 한 섬을 보내니 이달은 그 기생에게 자운금 한 필을 사서  주었다고 한다.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현실 속에서 느끼는 고독과 슬픔을  읊은  시를 더 음미해 보자. 제목은  ‘그림속에 학 畵鶴’이다.    

獨鶴望遙空  夜寒擧一足 
西風苦竹叢  滿身秋露滴 

외로운 학이 먼 하늘 바라보며, 밤이 차가운지 다리 하나를 들고 있네.
가을 바람에 대숲도 괴로워하는데, 온 몸이 가득 가을 이슬에 젖었네.

모순적 현실을 차가운 밤으로 비유한 이 시는 자신을 둘러싼 짙은 어둠과, 발이 시린 추위 속에서도 이슬로 제 몸을 씻으며 먼 하늘을 응시(요공 遙空)하고 있는 학에다 자신을 투영한 것이다. 여기서 학은 어떤 현실의 질곡과 간난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원대한 기상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대숲을 건너온 투명한 이슬, 이 가을밤 그토록 해맑은 정신이 있어 처참한 현실에서 잠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손곡의 시에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형상화한 것들 이외에도 사회적인 관심을 반영한 작품이 적지않다. 그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작품 중 한 시골 늙은이가 어린 아이와 더불어 밭머리의 무덤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모습을 그린 작품 ‘제총요祭塚謠’ 를 보기로  하자.

白犬前行黃犬隨   
野田草際塚纍纍 
老翁祭罷田間道   
日暮醉歸扶小兒

흰둥이가 앞서고 누렁이는 뒤따라가는데
들밭머리 풀 섶에는 무덤이 늘어 서 있네.
늙은이가 제사를 끝내고 밭 사이 길로 들어서자,
해 저물어 취해 돌아오는 길을 어린 아이가 부축하네.

노인과 어린 아이가 어떤 사이인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조손간祖孫間으로 짐작된다.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노인의 아들, 그러니까 아이의 아버지일 것이다. 왜란으로 피폐해진 현실을 그린 작품인데 이 시에서도 남편의 자리는 비어 있다.

주인공은 젊은 나이에 원통하게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무슨 까닭으로 세상을 일찍 떴을까? 어쩌면 전쟁터에 끌려가서 전사한 것은 아닐까? 제2행에서 무덤들이 풀 섶에 늘어서 있다는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그런 죽음이 한둘이 아닌 것 같다. 마을의 젊은이들을 한꺼번에 앗아간 전화를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당시 임진외란으로 말미암아 농촌의 젊은이들은 징집되어 얼마나 많이 목숨을 잃었을 것인가. 그래서 마을엔 노인과 아녀자들 뿐 젊은 남성들은 없다. 죽은 아들의 기일을 맞아 노인은 어린 손자를 데리고 묘를 찾았으리라. 

무덤 앞에 쪼그려 앉아 어린 손자를 바라다 본 노인은 세상을 원망하며  한 잔 두 잔 기울인 술에 그만 취해버리고 만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할아버지의 팔을 붙들고 비틀거리면서 밭 사이 길을 들어서는 모습을 시에 담은 것이다. 세상 물정도 모르고 앞서 가는 두 마리의 무심한 개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손곡은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불우한 자신의 처지를 시적으로 승화시켜 초월의 경지를 보여주는 '산사山寺’와 같은 명시를 남겼다. 

산사 山寺

寺在白雲中(사재백운중)
白雲僧不掃(백운승불소)
客來門始開(객래문시개)
萬壑松花老(만화송화로) 

구름에 절이 묻혔어도 스님은 쓸지 않고
지나던 손이 와서 가만히 문을 여니
온 산에 만발한 송화가 
하마 늙어가고 있지 않는가.

이시는 시각적 이미지를 중심으로 깊고 고요한 산속 절의 한적함과 ‘구름’을 통해 탈속적인 삶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절집’, ‘구름’과 같이 탈속적인 이미지의 시어를 사용하여 속세와의 단절감을 부각하였으며 ‘ 손님 ’이 와서 문을 열어 보고서야 비로소 계절의 변화를 알게 된다는 표현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잊은 채 살아가는 경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흰 구름 ’ 그리고 또 ‘ 송화 ’ 와 같은 시각적 이미지를 중심으로 시상을 전개하기 때문에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손곡 이달이 5년이란 시간을 거쳐 당시풍을 몸에 익힌 사실, 삼당시인 셋이 앞장서 송시풍을 배격하고 당시풍을 고양한것도 시대의 필연이라고 할 수 있으나 송시가  당시의 테두리 안에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송시 나름대로의 풍격을 형성함은 중국고전시가의 역사적인 발전이라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재산이 아닐 수 없다.  

손곡의 시가  짙은 서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시켰다면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의 시는 서정성이 풍부하면서도 꼿꼿한 자아의 모습을 잃지 않는 것이 특징적이다.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은  손곡 이달蓀谷 李達、옥봉 백광훈玉峰 白光勳과 함께 16세기 조선의 시풍 변화를 이끈 삼당시인 중의 한사람이다. 

이  셋은 남원 광한루廣寒樓, 대동강의 부벽루浮碧樓 등 지에서 시회詩會를 가지면서 시사詩社로서의 성격을 형성하였다. 특히 봉은사奉恩寺에서 시재를 자주 겨루었는데   세 사람은 모두 당시를 배웠지만,  최경창은 청경淸勁함이 특징적이였고 백광훈은 고담枯淡하며 이달은 부염富艶하다는 개성적 차이가  있었다.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은 31세 되던 1568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북평사, 사간원 정언 등을 지냈다. 1576년 종사관으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영광군수에 부임했다. 1582년 비변사의 천거로 종성부사鍾城府使에 특별 제수됐으나 논박을 받아 파직되면서 다시 직강에 제수돼 상경하던 도중 경성鏡城객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성혼成渾、 이이李珥、박순、정철鄭澈、 신응시辛應時 등과 교유했다. 이이李珥는 그의 청고淸苦한 인품과 청신준일淸新俊逸한 시를 높이 평가했으며, 송시열도 시와 인품 모두 뛰어난 인물이라 칭상하였다.

고죽 최경창이 바라보는 세계는 결코 밝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인간사회의 폭압성에 순순히 굴복하지 않았다.  이런 무자비한 세력에 저항하는 와중에서 오히려 자신의 개성을 창조하고 있다.바로 선인들이 품하는 청고淸苦한 인격미일 수 도 있고 인간세계와의 타협을 거부한 완강함이 빚어낸 멋일 수도 있다. 

自奉恩歸舟 
歸人臨發折梅花
步出沙頭日又斜
水轉山移舟去遠
滿江離思起風波

떠나는 이 이별에 앞서 매화가지 꺾어서는 
모래 언덕으로 걸어가면 해는 또 기우네
물길따라 산을 돌아 배는 멀리 가는데 
이별의 시름 강 가득히 풍푸를 일으키네

봉은사에 갔다가 돌아올 때의 마음을 표현한 시다.
저물녘이 가까와 오자 시인은 이곳을 떠나 배를 타고 돌아가야 한다. 봉은사는 한창 봄날이라 매화가 활짝 피었다. 시인은 매화를 뒤로하고 떠나야 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문득 매화나무에 다가가 가지 하나를 꺾는다.매화가지를 손에 들고 모래 언덕으로 걸어간다.밝음을 기대했던 해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또 기울어지고 있다. 돌아가는  길은  험난하다. 거친 물길따라 험한 산을 돌아 배는 봉은사로부터 멀어져 간다.혹시 거세지는 강물은 시인의 서글픔이 전이 된 것일까? 꽃은 시간 따라 저버리고 봄 풍경은 기억 속에서 잊혀질 것이지만 시인은 그러한 시간의 흐름에 동의하지 않았다. 마주한 꽃을 꺾어서는 아직 기울지 않은 태양 아래 더 밝은 빛으로 꽃을 보고자 했다.

고죽 최경창은 1573년 35세 때 북도평사北道評事가 되어 함경도 경성慶城으로 부임했다. 당시에 조선의 최전방은 여진족과 국경분쟁이 많던 함경도였다. 북도평사는 이곳 군 사령관인 함경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부관을 가르킨다. 
새로 부임한 관리를 영접하는 연회에서 고죽 최경창과 관기 홍랑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러나 1년 후 임기를 마친 최경창은 서울로 귀환해야 했다. 홍랑은 강원도와 가까운 쌍성雙城까지 고죽을 배웅한다. 함경도 경성慶城에서 쌍성까지는 천리 먼 길이다. 그들 둘은 여기서 부득이 헤여질 수 밖에 없었다.홍랑은 관기官妓신분으로서 ‘양계지금 兩界之禁 ‘(도道와 도의 경계를 넘다)이란 법을 어길 수 없기 때문이다. 

묏버들 갈혀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창 밖에 심거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우수에 젖은 홍랑은 님이 그리워 노래를 불렀는데 바로 위의 묏버들로 시작하는 시조이다. 고죽 최경창이 이를 한시漢詩로 번역하였는데 이를 번방곡飜方曲 이라 한다. 
‘ 번 飜 ‘ 이란 번역한다는 의미이고,  ‘ 방方 ‘ 이란 즉시란 뜻이니  ‘ 즉시 번역한 노래 ‘라는 의미이다. 

折楊柳寄與千里人
爲我試向庭前種
須知一夜新生葉
憔悴愁眉是妾身 

산에 있는 버들가지를 꺾어 임에게 보내오니, 
주무시는 방의 창문가에 심어두고 보시옵소서. 
행여 밤비에 새잎이라도 나거든 
마치 나를 본 것처럼 여기소서. 

예로부터 이별할 때는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증표로 삼았다고 하는데 버들 류柳와 머무를 류留가 음이 같아 더 머물러 달라는 뜻이 있었다고 한다.서울로 돌아온 고죽 최경창은 예조禮曹와 병조兵曹의 좌랑佐郞을 거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였다. 직위는 낮지만 출세가 보장된 청요직淸要職이였다.그러다 갑자기 병으로 몸저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홍랑은   꼬박 7일 밤낮을 걸어서 최경창을 찾아왔다. 3년만의 재회였다.  그러나 둘의 만남이 빌미가 되어 최경창은 탄핵을 당하고 만다. 아무리 병간호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관청의 관리가 외방의 관비와 함께 사는 것은 법을 위반한 것이다. 결국 둘은 어쩔 수 없이 다시 헤어지게 된다.  이에 고죽 최경창은 “ 증별 贈別 “ 이라는 시를 홍랑에 지어 주었다.

증별  贈別 2

相看脉脉贈幽蘭   此去天涯幾日還
莫唱咸關舊時曲   至今雲雨暗靑山 
애달피 얼굴 바라보며 난초 건네주노니
하늘 끝 먼 곳으로 가면 언제 오시려나
함관령의 옛 노래 다시는 부르지 마오
지금도 구름비는 가득 청산에 머무나니 

함관령의 옛 노래는 홍랑의 묏버들 시조를 가르킨다. ‘운우 雲雨’는 ‘구름과 비’지만 남녀의 사랑을 뜻하는 ‘운우지정 雲雨之情’을 말하기도 한다. 고죽은 홍랑에게 우리의 사랑은 당신이 건네 준 버드나무 한가지가 아니라 이미 숲을 이루고 있으니 ‘나를 기억해 달라’는 ‘함관령 노래’는 더 이상 부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증별贈別 1

玉頰雙啼出鳳城  曉鸎千囀爲離情
羅衫寶馬汀關外  草色迢迢送獨行。
고운 뺨 눈물지며 왕성을 나서누나
새벽부터 꾀꼬리 이별 설워 우는데
보마에 비단적삼 냇가 관문 밖으로
푸른 빛 아득히 홀로 가는 임 보내네

사헌부의 탄핵을 받은 고죽 최경창은 어쩔 수  없이 홍랑과 헤여진다. 헤여짐이 서러워 예쁜 뺨으로 눈물이 흐르고 꾀꼬리는 새벽부터 울고 있다. 천리길 먼 길 떠나보내는 임을 위해 비단 옷을 입히고 아름다운 보마에 태워 보내지만 아득히 홀로 가는 임은 안쓰럽기만 하다. 이제 헤여지면 언제 다시 만날가. 그후 최경창은 한양으로 귀환하는 도중 경성관아에서 44세로 생을 마친다.

사실 고죽 최경창 묘소를 끈질기게 찿아온 데는 최경창시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함도 있겠지만 시대를 초월한 한가지 사건이 필자의 발길을 더 끌었던 것이다. 고죽 최경창시인의 유고遗稿를 생명을 무릅쓰고  보존하여 후세에 넘겨준 엄청난 대업을  일개 기생이 이룩했다는 점에 숙연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가 다름아닌 홍성의 관기 홍랑이다. 

고죽 최경창이 죽은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 온 나라가 전란에 힙싸이게 될 때 홍랑은 죽음을 무릅쓰고 고죽의 유고를 싸들고 고향인 함경도로 피난을 간다. 전란이 끝나고 나서 홍랑은 생명으로 보호한 고죽 최경창의 유고를 그 후손들에게 전해주었다. 오늘날 후세사람들이 시인 최경창의 시가를  맘놓고 흔상하고 있지만 그의 명시들이 어떻게 지금까지 전해왔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진자가 많지 않다. 필자도 그 중의 한사람이다. 홍랑의 묘소가 최경창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 따름 여기에 이런 깊은 사연이 깃들어 있는 줄을 모를 것이다. 

중국에는 변화가 계획보다 더 빠르다는 격언이 있다. 계획을 아무리 면밀하게 작성한다하더라도 천변만화하는 현실을 따르기는 쉽지 않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정보화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런 사례가 더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최경창묘소를 찾아가는 그날 , 필자는 이른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최경창의 묘소 위치를 다시 확인해 보았다. 혹시나 하여 . 그러나 결국은 뜻밖의 일에 부딫쳐고 말았다.

버스를 타고 지정된 정류소에 내리니 눈앞에 세갈래 길이 나타났다. 자동차만 오갔지 행인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맞은 켠에 건물이 보이기에 원장안에 들어서니 뜰안에 크고 작은 인쇄품들이  쌓여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확트인 직장안에 수십대의 인쇄기가 돌아가고 전송대를 통해 쉼없이 나오는 인쇄품들을 차곡차곡 쌓는 작업대의 젊은 청년이  일손을 멈추지 않으면서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나는 기계동음을 누르고 눈을 껌벅이며 손에 쥔 종이를 가르켰다. 그 청년이 나에게로 다가오자 나는 “최경창 묘소”란 글을 짚으며 읽었다. 그러자 청년은 금방 환한 얼굴로 산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올라가라는 것이다. 아주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올치 이제 찿았군, 아니 그보다 여기에 있기는 확실히 있구나하는 사실 자체가  무등 기뻤다. 산으로 올라가니 이내 갈림길이 또 나왔다, 하나는 산기슭으로 하나는 산아래 건물쪽으로 ,우선 건물쪽으로 가 사람을 만나서 물어야지.  공장안에서 서성이는40대 중년에게  물어보니 안의 노인을 가르킨다. 노인에게 최경창묘소를 보려왔다니 최경창묘지는 이미 이장을 시켰다고 딱 잘랐다. 

청천벽력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물어물어 여기까지 왔는데 이장移葬이라니? 지금 큰 공장이 들어서고 있는데 묘지를 팔고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묘지를 파헤친 어수선한 상황을 눈에 떠올리며 일단 가보자고 작심했다. 5-6리를 푼히 걸어서야 철판으로 한 가림막이 나타났다. 가림막은 산아래까지 쭉 뻗어내려 갔다. 마침 대문을 만들어 놓아 (물론 큰 자물쇠로 채워졌지만) 산아래 공사현장을 읽어 볼 수가 있었다. 공사장에는 대형 트럭들이 쉴새없이 오가고 크고작은 굴착기들이 여기저기서 산턱을 파헤치고 있었다.이일을 어쩌지, 올라오면서 만난 그 령감말이 맞았구나. 저 건설현장이 최경창묘소를 삼켠 것이 분명해. 실망에 빠진 필자는 넋을 놓고 건설현장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되돌아서는 수 밖에 별 다른 방법이 없었다. 몇발자국 걷다가 건설현장이라도 영상을 남기자, 그래야 나의 독자들에게 이유설명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가, 이렇게 순간적으로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지만 찍고보니 가치가 있구나하고 스스로 위안을 얻었다. 독자들도 이영상을 보면 나와 같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럴수 밖에 하고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파주시 교하면 다률리에는 당당한 문벌을 자랑하던 해주 최씨海州崔氏 의 선산이 있다. 그런데 최씨가문에서  일개 기생의 묘를 선영에 모시고 있다. 뿐더러 해마다 그녀에게 제사를 올리고 있다. 이묘의 주인공이 바로 함경도 홍원洪原기생홍랑洪娘이다. 그럼 홍랑이란 사람이 어떤 녀인이기에 이토록 최씨가문의 숭배를 받고 있는가? 

남존여비 사상이 투철한 조선시대에 그것도 혈육 한 점 없는 기생의 무덤이 지금도 남아 있다는 자체가 문학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신비스러운 일이다.유교적 질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시대적 질곡을 뛰어 넘어 천민의 신분으로 양반집 선산에 그녀의 유골이 묻혔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당시 조선시대에는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수없다 .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의 시가 서정성을 지니면서 꼿꼿한 자아모습을 잃지 않는다면 옥봉 백광훈 玉峰 白光勳의 시는 곱고 호소력이 있는 반면 유약柔弱함이 드러남이 특징적이다. 

옥봉 백광훈은 한 시대를 풍미한 또 하나의 걸출한 시인이다. 손곡 이달 、고죽 최경창과 더불어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며 명성을 떨쳤다. 

옥봉 백광훈이 11세 때 일이다.  당시 서당에 다니는 학동들 사이에 초-종장 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시의 초장을 부르면 종장을 답하는 놀이이다. 어느 학형이 ‘춘 春’을 불러 고시 古詩로 종장을 답하라고 운을 떼었다. 백광훈은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강화수수춘 江花樹樹春’이라 응수했다. 학형이 “그런 시구가 어디에 있느냐”고 하자 백광훈은 즉석에서 전편을 외웠다.  

夕陽江上笛  저녁놀 비낀 강에 피리소리
細雨渡江人  가랑비 속 강 건너는 사람 있네
餘響杳無處  남은 울림 아득히 간 곳 없고
江花樹樹春  강가 꽃나무마다 봄이 왔구나

시격이 완전하여 모두 그런 시가 있겠거니 했다. 백광훈이 곧이어 즉흥시임을 실토하자 좌중이 그의 시재에 놀라 감탄했다. 이 이야기가 향리에 퍼져 유명한 일화로 전해졌다. 

옥봉 玉峰 백광훈白光勳과 더불어 ‘관서별곡’의 저자인 큰 형 백광홍, 문장에 뛰어난 둘째 형 백광안, 종형 백광성 등 한 집안에 네 명의 문인이 나왔다하여 ‘일문 사문장 一門四文章 ’으로 유명하다.  조선의 기행가사의 효시로 훗날 정철의 ‘ 관동별곡 ‘에 영향을 준 ‘ 관서별곡 ‘ 의 저자 백광홍이 그의 큰 형이다.

옥봉 백광훈은 전남 장흥 출생으로 해남에서 자랐다. 
어려서는 문신 이후백에게 배웠고 2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지만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더 이상의 과거시험도 포기하였다.처가인 해남 옥천면 원경산 옥봉 아래  ‘옥산서실’을 짓고 시를 쓰며 은거하였다. 

1572년 명나라 사신의 접빈 책임을 맡은 노수신이 시문을 응수할 인물로 해남에 은거하고 있는 제자 백광훈을 불렀다. 관직에 있지 않았는데도 제술관 임명을 간청하여 허락을 얻은 것이다. 스승을 따라 의주에 가서 사신을 맞았는데 중국 사신 일행이 그의 시와 서예를 보고 깜짝 놀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의 문재를 인정한 조정에서 수차례 관직을 내렸으나 백광훈은 나가지 않다가  41세 되던 1577년 선릉참봉에 제수되어 첫 벼슬에 올랐다.

정철은 “ 빼어남과 맑음으로 기개가 있고 청명한 시가와 오묘한 필법은 그의 으뜸가는 재주이다 “ 라고 백광훈의 문장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신흠 申钦 은 옥봉의 시를 “기는 완전하고 소리는 맑고, 색은 옅으면서 예스럽고, 뜻은 바르면서 법도에 맞는다”면서 그의 시는 ‘천득天得 ‘하였다고 극찬했다.

그의 시는 대부분 순간적으로 포착된 삶의 한 국면을 관조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전원의 삶을 다룬 작품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안정과 평화로 가득 찬 밝은 분위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현실에서 오는 고통과 관직생활의 불만에 의해 상대적으로 강화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옥봉 백광훈은 서정성이 풍부한 시인인가 하면 을묘왜란때 19세의 나이로 분연히 의병대에 가담한 격조있는 의병이기도 하다. 이시기 그의 시  '달량행達梁行'을 보기로 하자. 

삭막한 산천에 초목은 슬피 울고
마을은 잿더미가 되어 황량하기 그지없네
유리걸식하며 날마다 관군 오기를 바라건만
언덕으로 뻗은 칡덩굴은 어찌 저리도 길어졌을까…'

'달량'은 해남에서 완도로 넘어가는 포구이다. 백광훈이 그곳을 다녀오면서 쓴 시다. 달량은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난 곳이다. 왜적 수천 명이  함선 70여척을 거느리고 달량에 침입하여 불과  50여일에 해남、 강진、 장흥 일대를 쓸어버린 변란이다. 관군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성은 함락되고, 민가는 불타고, 백성들은 유린당했다. 조선건국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왜변倭变이었다. 걸식으로 버티면서 손꼽아 기다리건만 관군은 오지 않는다.이제나저제나 기다리는데 언덕 너머 칡덩굴만 쑥쑥 자라는 것이다. 애통하고 절절한 시간이 흘러간다. 끝내 관군이 오지 않을 때 의병이 일떠선다.

여기서 백광훈의 스승이며 조선시대 의병의 첫대오를 거느린 양응정을 간단히 소개한다. 양응정은 백광훈 뿐만아니라 정철 、최경장、  최경회 、신립 、박광전 등의 후학을 길러냈다.

을묘왜변으로 달량성이 함락되고 왜적이 북상하자 양응정등 4형제는 모친상 시묘살이 중이었으나 분연히 일떠나 상복을 입은 채 창의하여 의병 4천여 명을 규합해 전장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적들을 격파해 백성이 도륙당하는 것을 막아'내는 전과를 올린다. 이 대열에 백광훈이 19세, 최경창이 17세로 합류하였던 것이다. 

창의倡義는 불의와 분노와 저항 속에서 태동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반체제적인 속성을 띄지 않을 수 없다. 적국이든 조국이든 빼앗으려는 자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존, 죽이려는 자에 저항하며 목숨을 지켜내는 생존, 그 처절한 몸부림이 '창의'이다.이때의 창의가 훗날 이 땅에 민족의 자존으로 꽃피는 조선 최초의 의병이다.

장암 정호는 백광훈의 삶과 시문학에 대하여 뛰어난 해설을 남겼다. “당시에 옥봉을 좋아했던 사람이자 옥봉이 좋아했던 사람으로 선배에는 노수신、임억령、박순 등이 있었고 동년배로는 율곡、 성혼、정철 등 당대의 어진 이들이었다.” 대부분 호남인들인데 국중의 대문장가들과 서울의 몇몇 어진 이들과 가까이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아래에 조선시대 대문호인 허균이 ‘’國朝詩刪‘’ 에서   오로지 ‘절창絶唱’ 이라고만 하여 더 이상의 췌언贅言이 필요하지 않다고  평가한 백광훈의  오언  절구  “ 홍경사  弘慶寺”를 흔상해 보자.

홍경사  弘慶寺

秋草前朝寺     가을 풀, 전 왕조의 절
殘碑學士文     낡은 비석엔 학사의 글
千年有流水      천 년 동안 흘러온 물이 있어서
落日見歸雲    지는 해에 돌아오는 구름을 본다

이 시는 홍경사를 지나며 회고적 감회를 읊은 오언절구이다. 
짧은 형식 속에 옛고려시대의 절터에서 느끼는 정회와 그 주변의 경물을 조화롭게 연결해 낸 부분이 뛰어나서 인구人口에 많이 회자脍炙 되는 작품이다 

1·2구에서는 절의 쓸쓸하고 오래된 모습을 가을 풀과 학사비를 통하여 잘 나타냈다. 3구에서는 유구한 세월 속에 퇴락한 절의 모습과는 달리 변함없이 흐르는 물의 영속성을 대비시켜 노래한 것인데  이것은 동시에 절의 옛날 흥하였던 모습과 오늘 쇠한 모습을 이어주는 구실을 한다. 즉, 작자는 역사의 흥망성쇠에 대한 깊은 감회와 더 나아가 인간무상의 초절적 경지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4구의 ‘해질녘’,‘돌아가는 구름’ 들은 이와같은 사실을 형상화하는 시구이며, ‘이들을 바라본다’는 것은 바로 초절적 경지의 작자를 형상화한 것이다.
홍경사 弘慶寺 는 충청남도 천안 서북구 성환읍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 이곳은 인가가 멀고 갈대가 우거져 도적이 자주 출몰하였다고 한다. 이런 우환을 없애기 위해 현종은 승려를 불러 홍경사를 지었다고 한다.

1026년 기공하여 200여 칸의 규모를 갖춘 홍경사 弘慶寺를 일떠 세웠고 또 절 서쪽에 “경연통화원 慶緣通化院” 이란 객관을 재건하여 오가는 길손에게 숙식을 제공하였다고 한다. 객관 客館은 무려80칸에 달했는데 이를 계기로 주위환경이 점차 흥성해졌다고 한다. 
세월은 500년을 흘렀다. 

수많은 길손들이  머무르던 절과 여관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누른 들풀만 어지럽다. 오랜 비바람을 견디고 비갈 碑碣 만 남아 옛 학사의 문장을 전하고 있다. 천년을 흐르는 물은 변함없이 지금도 흐르고, 하늘에 비낀 노을을 에돌아가는 구름도 예나 다름 없다.   인생의 유한과 자연의 무한 無限 의 대비이런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이 당시 唐詩 의 맛이 겠다. 농담 濃淡 으로 그린 단순한 수묵 한 점 같은데 들여다 볼수록 다채롭다. 가을날 봇짐 지고  옛절터에 서있는 나그네가 처량하다.

백광훈의 시 ‘홍경사 弘慶寺’ 는 ‘옥봉집’ 첫페이지에 실려 있고 ‘봉선홍경사 갈기비’는 국보 7호로 지정되어 있다.      

옥봉 백광훈은 한 생을 시와 더불어 자연에 묻혀 살다가 갔다. 그는 오언절구 116편 137수, 칠언절구 199편 231수, 오언율시 72편 79수, 칠언율시 34편 37수, 오언고시 16수, 칠언고시 14수로 총 451편 514수에 달하는 시를 남겼다. 

김창권 프로필 

1974_1977 연변대학조문학부
1989_2000 치치하얼시정부외사판공실
2000_2011 치치하얼대학외국어학원
2011 정년퇴직, 현재 대련시조선족문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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