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은주 (시인·문학평론가)

[동북아신문= 전은주 박사] “이런 싸가지 없는 것들!”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 막된 짓을 서슴지 않고 하거나, 품성이 저열한 사람의 눈꼴 사나운 행동을 보면 이런 욕설이 저절로 나올 법하다. 욕은 저열하고 경멸스러운 상대를 꾸짖는 것이기는 하지만, 마치 구정물 같아서 욕설을 내뱉는 사람도 그 구정물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능하면 욕을 해야 하는 상황이나 욕을 퍼부을 만한 사람과 만나는 것을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요즘과 같이 험한 일들이 많으면 티브이를 틀거나 뉴스 창을 열기만 해도 싸가지 없는 소식들을 들을 수밖에 없다.
 
‘싸가지’는 ‘싹수’의 방언으로 분류되는데, 그런 의미로 보자면 처음부터 잘 할 낌새나 징조가 보이지 않는 경우를 일컫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런 욕을 먹는 사람 중에 지식이 얕고 지능이 열등한 경우보다는 그것과는 정반대인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애초부터 열등한 경우라면 ‘멍청하다’는 욕을 먹을지언정, 싸가지 없다는 소리는 듣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까 그 욕은 좋은 대학을 나오고, 번듯한 직장을 다니거나, 다양하고 뛰어난 스펙을 지니고 있으며, 이 사회를 직접적으로 이끌어나가는 비범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경우가 더 많은 듯하다. 
 
예로부터 우리 사회는 학력과 인성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초등학교 시절부터 성적이 우수하면 반장 같은 소임을 맡고, 도덕성, 협동성, 정의감 같은 인성 평가에도 좋은 평가를 받는 경우가 흔했다. 그래서 수능점수나 지능지수가 높은 경우, 일류대학을 나온 경우, 그들의 도덕성이나 윤리의식도 우수할 거라고 판단한다. 왜 그럴까? 그건 종래의 전통 교육 과정은 인성 교육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사회나 가정도 그 교육에 종합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신자본주의가 이 사회를 지배하고, 전통적인 가족 체제와 마을 공동체가 붕괴되면서 교육의 가치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도덕과 윤리의 가치보다는 돈이나 권력의 가치가 인간사회의 중심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현재와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자기성찰 없이 지적인 능력만 신장시키고, 사회 제도를 통한 조작 능력이 뛰어난 개인이나 집단에 대해 염려한다. 그러나 은연중에 맹자의 성선설을 믿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간악스러운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악의 세력은 그런 틈새를 노려 ‘싸가지 없이’ 대중들의 어리석음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조종하고 부추겨 종속시켜 지배하여 착취한다. 

물론 이러한 탐욕스러운 존재들은 어느 시대에도 다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혜안을 지닌 사람들이 ‘싸가지’를 다 훼손시키는 존재들과 싸웠다. 그들은 인간의 덕목을 훼손시키는 그 간악한 세력들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러한 단서는 우리 선조들의 삶에서, 근세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싸가지’의 본래 뜻이 무엇일까? 이 ‘싸가지’가 ‘4가지’에서 나왔다고 보는 흥미로운 견해가 있다. 그 ‘4가지’는 조선조의 기본 덕목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싸가지가 없다’는 것은 ‘인의예지’ 4가지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500년 동안 존속했던 조선왕조의 기본 덕목은 유교의 중심 이치인 ‘인의예지(仁義禮智)’였다. 적어도 조선왕조 오백년 동안 우리는 이 ‘4가지’ 덕목을 인식의 중심에 놓고, 인간의 ‘인간됨’의 지표로 삼았다. 그래서 조선조의 건국과 더불어 서울(한양)에다 이 4가지 덕목을 상징하는 4 대문을 만들어 그 정신을 굳건하게 수호하려 들었다. 서울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드나들어야 하는 이 문을 통해 그 덕목을 강조했다. 

동쪽에다 ‘흥인문(興仁門: 동대문)’을 세워 ‘인(仁)’을 드높였다, 인은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사람의 본성 중에 있는 착한 마음을 의미한다. 인으로써 타인의 고통이나 불행에 동참하는 마음을 잃지 않게 하여 인의 이치를 깊이 새기려 했다. 모두 남의 고통과 불행을 잊지 않는다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등치고, 패거리의 권력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짓밟는 행위는 하지 못할 것이다. 인은 자신과 타인과의 경계를 두지 않은 화합-평등의 마음이 기본에 자리잡고 있다. 

서쪽에다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현재 멸실됨)’을 세워 ‘의(義)’를 드높였다. 의는 수오지심(羞惡之心)으로 자신과 타인의 불의를 부끄러워하여 경계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근세사에 있었던 민중들과 학생들의 의거가 모두 의에 기초한다. 의가 자신과 타인의 불의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라는 점에서 의와 불의의 경계를 차별하는 마음이다.

남쪽에다 ‘숭례문(崇禮門)’을 세워 ‘예(禮)’를 드높였다. 예는 두 가지로 보았다. 첫째, 타인에게 자신을 낮추는 사양지심(辭讓之心)이 있고, 둘째 타인을 높이는 공경지심(恭敬之心)이 있다. 그런 점에서 예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질서의 미덕을 뜻한다.

북쪽에다 ’숙정문(肅靖門)‘을 세워 ’지(智)’를 드높였다. 지는 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 사람의 본성 중에 있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이다. 서양의 지(知)가 지식 또는 개념이라면 우리의 지(智)는 그 ‘무엇’에 대한 ‘행동’, 즉 실천을 의미한다. 아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는 경지를 일컫는다. 

물론 이 4 대문들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세워졌고, 경우에 따라 헐기도 하고 바꾸기도 했지만 이 문을 세운 핵심은 ‘인의예지(仁義禮智)’에 있었다. 여기에 신(信)을 덧붙였는데, 그게 4 대문의 중앙에 있는 보신각(普信閣)이다. 
   
다시 말하면 ‘싸가지(4가지)가 없다’는 것은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없는 짐승 같은 존재라는 뜻이다. 

‘싸가지 없는 것들!’이라고 욕을 먹어야 마땅한 존재들은 어떤 부류일까? 남의 불행과 고통을 즐기는 자들, 가난한 자들을 도외시하고 자신들의 부만 긁어모으는 자들, 부유한 자들의 세금은 줄이고 서민들에게 그 부담을 떠넘기는 정책을 펴는 정책가들, 서민들을 속이는 악덕 기업가들은 인(仁)과는 거리가 멀다. 패거리의 불의는 눈감고 부끄러움도 없이 정적들의 비위를 파헤치는 데 혈안이 된 이들은 의(義)와는 거리가 멀다. 상대를 멸시하고 자신을 드높이려드는 자들은 예(禮)와는 담을 쌓은 자들이다. 논리나 관념을 내세우고 행동이, 실천이 없는 자들은 지(智)와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없는 사회는 우리를 슬프게 하기도 하고 분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싸가지 없는 존재가 판을 치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신이 맡은 일들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행동하는 역군’들이다. 이들을 ‘실천하는 지성들’이라고도 부른다. 물론 그들이 다른 종족처럼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성찰하며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는 그 개개인이 있기 때문에 이 사회는 바른 흐름으로 흘러간다. 그러므로 그들이 바로 이 시대의 숨은 영웅들이다.

우리 모두 ‘싸가지 갖춘 자’가 되어보자!

전은주 프로필 

시인·문학평론가
연변대학 조문학부, 동대학원 문학석사
연세대학교 문학박사
재한조선족작가협회 부회장
디아스포라 시치료연구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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