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상의 어떤 일들은 그저 그렇게 일어난다. 아무런 사전 예시도 없이, 아무런 사전 계획도 없이, 촘촘한 계산에 떠받들리지 않고 문득 소리없이 일어난다.

우리 일행의 초엿새날 대련 행차도 그렇게 발생했다.

2.
석삼년전, 권회장님의 발의에 의해 성문학회 회장단이 산하 분회인 대련문학회 예방문제가 탁상위에 올랐다. 하지만 예고 없이 느닷없이 들이닥친 권회장님의 건강상 변고로 곧 까마득하게 기억의 저편으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가물가물 사라지는가, 묻혀버리는가 했는데... 

초사흩날, 성문학회의 단체방에 뜬금없이 “해변의 여인들” 이 울려퍼졌다. 나훈아의 그 하마같이 커다란 입이 실룩거릴 때마다 흘러나오는, 그 사람 잡는 음정이 여심만 자극한 게 아니었다. 

우리의 잠자는 기억을 다시 소환하였다. 
뜸들이지 말고 가자,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거의 이구동성이었다.

3.
이건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충동결심이다. 그래서 말을 꺼내놓고 바로 후회막급. 하지만 대련의 문우들은 따스한 온정으로 화답해주었다. 가족들과 보내야 하는 정초의 시간을 헌납하기로 했다. 

림회장께서 곧 뜨거운 답장을 보내오셨던 것. 
오시라고! 
그리고 한마디 더 보태였다. 
아무 때건 괜찮다고! 

4.
림회장님의 명쾌한 답변에 오히려 주춤했던 쪽은 우리. 
사실 말은 꺼내놓고도 긴가민가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정초의 외람된 발길이 생각만큼 가볍지 않았다. 

명절의 규칙과 예의라는 무게에 짓눌려 어쩔 바를 모르고 있을 때 달콤한 정보 하나가 슬며시 다가왔다. 기다리고 있다고, 대련의 문우들이! 그 소식에 접하는 순간 규칙의 담벽이, 예의와 범절의 창살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곧 문운룡, 김창영부회장님께 메시지를 보냈다. 

대련의 문우님들이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고!
‘간절하게’는 내가 추가했다. 

5.
문운룡, 김창영 두 아저씨가 반색을 했다. 참을 수 없는 즐거움으로 가득찬 그네들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서 너울거렸다. 모름지기 입이 가로 쫙 찢어져 있었을 것이다, 고 생각했고, 아마 사실 정말 그랬을 것이라고 지금도 확신한다. 

확인작업은 하지 않았지만.

6.
정초의 마무리가 한창인 대련역은 인파로 북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혼잡해도, 아무리 붐비더라도 대련문우님을 가려보는 우리의 혜안을 흐리게 할 수는 없었다. 우리들의 시선은 거의 동시에 한곳에 꽂혔다. 주황색 스프링코드의 옷자락이 봄바람에 하느작이는 그곳, 보라색 고급 머풀러가 우아한 빛을 발하는 그곳에서 리해란 문우님이 단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서로를 발견했다. 우르르 달려가 손을 맞잡았다. 구구절절 인사수작은 생략했다. 

그저 허허 호호했다. 
반가워서, 그리고 좋아서!

7.
우리는 그 길로 해변으로 안내되었다. 대련 문우님들의 고심어린 안배였다. 내륙의 깊고 탁한 골짜기에서 길들여진 우리가 가장 먼저 원했던 건 바다의 풍광. 그 소원이 대련의 지평에 발을 디뎌놓자마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저 황송하고 미안하고 안쓰러워서 손을 싹싹 비비고 있는 우리 일행을 해란,매화문우님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 그녀들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정보도 감지되지 않는다.

8.
대련의 바다는 넓었고 푸르렀다. 가슴이 탁 열렸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해변의 도로를 우리는 말 타고 꽃구경을 하기도 했고 이따금 내려서 걷기도 했다. 밝은 햇살이 찬란하게 내리 꽃혔다.
아담한 산길은 거울처럼 반듯했고 산기슭을 덮은 나무에도, 억새풀에도 은혜로운 햇살이 유정하다. 

우리는 자그마한 어촌의 그림 같은 풍경에 아아, 오오 감탄했고, 망망 바다에 몸을 내맡긴 일엽편주의 아슬아슬한 흔들림에 숨을 조이기도 했다. 
기슭을 철썩이는 파도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기도 하였고 갈매기의 힘찬 날개짓에 아직도 어디선가 희망이 반짝이고 있음을 보기도 하였다. 

절경이로다! 마음속에서 메아리치는 탄성.
우리는 시종일관 표정관리에 신경을 써야 했다. 

9.
이때 누군가 전화를 했다. 심양에 있는 동창생이다. “저녁에 한잔 합세.” 하는 소리에 “나 지금 대련 바다가야!” 했다. 곧 이어서 “대련의 문우님들 덕분에!” 하며 수화통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해란문우님이 들으라고! 매화문우님이 들으라고! 

이렇게라도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감사의 정을 전달하는 방법이 살짝 좀 얄팍하다고 조금은 마음을 조렸던 것일까. 
지금 이 시각, 기억을 더듬는 마음 한편에서 또다시 감격의 파문이 일렁인다. 

10.
겨울의 끝자락, 해변의 도처에서 봄의 기운이 완연하다. 
그래서 중요한 화제가 하나 대두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날씨가 억망이라고 한다. 그런데 오늘 이처럼 화창해졌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와서 화창해졌나, 아니면 화창졌는데 우리가 왔나,였다. 정답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누구나 다 공감하는 답안은 머릿속에서 뻔할 뻔자로 누워있다. 하지만 일동은 잠시 주춤거렸다. 밖으로 끄집어내려고 하지 않고 잠시 그 은밀한 맛을 즐기고 있었는데... 

성질 급한 전상무님이 참지 못하고 한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와서 화창해졌다고!

11.
그리고 대련의 문우님들을 만나는 시간!
림회장님 이하 신사숙녀 여러분들과 함께 했던 시간은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의 한페지를 장식했다. 왜 그토록 설레이었던지 왜 그토록 마음이 푸근했던지 지금 생각해도 경이롭기만 하다. 

한량없는 문학의 인연으로, 뜨거운 문우의 정으로 우리들의 시간은 황홀했다. 놀라운 것은 술잔이 몇순배 돌기도전에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는 것! 대부분 면식이 없는 초면의 문우들이지만 마치도 수십년전에 이미 알고 있던 이웃집 아저씨, 이모들이다. 아름다운 문학담론, 예술의 가치...문학의 여로를 비추는 숭고하고 존엄한 그 경지에서 대련의 문우님들 하나같이 수준급이다. 지성이 차 넘친다. 하시는 말씀마다 가슴을 두드린다. 집단지성의 매력에 봄의 향기가 그윽하다.

그리고 또 놀라운 관점 하나 더 있다. 림회장님이하 대련문학회분들 정말 가족 같다! 시종일관 화기애애했고 서로 배려와 응원이 흘러넘쳤다. 
눈부신 관계의 미학, 부러웠다. 

문득 나도 그들속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네들의 일원으로 그네들과 함께이고 싶었다! 

12.
그리고 어김없이 찾아온 음주가무의 무대! 아니, 이 분들 노래는 왜 또 그렇게 잘 하시는가. 동행했던 문운룡부회장님의 남중음과 물찬 제비 김창영부회장님의 핫한 무용이 없었더라면 어쩔번 했나 하는 생각은 아직도 나를 긴장으로 몰아넣는다. 

해변의 밤은 미려했고 황홀했다. 
낭만이 넘치게 흘렀다.

13.
모든 건 이틀전에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아직도 격정이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무엇이 우리를 사로 잡았을까. 내 마음은 왜 아직도 그 자리를 배회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기 때문일까!
들뜨고 설레이는 이 감동의 저변에 무엇이 버티고 있는 걸까. 
이 충동과 격랑이 빠져나간 자리에 계속 확고하게 남아있어야 하는 건 무엇일까!

어떤 만남은 뼛속에서 나른하게 즐겁게 사무친다.

창밖에서 봄바람이 한창이다!


2024년 2월 18일 밤 11시에 영구 이수호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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