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신문=김창권 수필가] 고려시대 야은 길재 冶隱 吉再、목은 이색 牧隱 李穡、 포은 정몽주 圃隱 鄭夢周 이 셋을 고려삼은이라 일컬었다. 하지만 근년에는 길재 대신 도은 陶隱 이숭인 李崇仁 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길재는 고려말의 한 유자儒者였지만 고려 말기 보다는 조선 초에 더 유명했다고 한다. 길재는 이색、 정몽주、권근을 사사师事해(선생으로 섬기다) 유학연원 儒學淵源을 이은 인물이었다. 

남부기행을 시작하면서 경상도지역으로의 첫번째 코스는 구미시에 있는 길재 묘소탐방이다. 문학이란 테마를 가진 탐방인만큼 일종의 사명감이 앞섰다. 그러면서도 가야할 행선지 모두가 어느 하나 도시내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심산이 아니면 벽지이어서 교통이 불편하리라 각오했었지만 예상을 퍽 초과하였다.
상식적으로 강원도는 산악지대이고 영남 、호남지역은 평야가 주되는 지리특색이라 믿었다. 그러나 막상 닥치고 보니 첩첩산봉이란 말을 경북 안동지역에서 당할 줄이야 이 또한 상상밖이었다.  

야은 길재 선생의 묘소 
야은 길재 선생의 묘소 

길재 묘소로 가는 버스가 다른 시내버스와 달리  버스배차간격이 10분20분이 아닌 하루에 겨우 한두번에 불과하다는 상황을 알아낸 후 인차 택시를 선택했다.하지만 연속 두대를 빈차 그대로 보내야만 했다. 길재선생의 묘소를 아예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도 두번째 기사님은 택시정거장이 바로 윗편으로 좀 올라가면 있으니 그기가서 물어보란다. 택시정거장이란 고정된 정류장 이를테면 공항,기차역, 고속버스터미널과 같이 지정된 곳을 제외한 비교적 자유스럽게 돌아다니는 택시들이 손님을 대기하는 정류장이라 하겠다. 그곳에 이르니 아니나 다를가 택시한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기사가 차창을 내려주어 목적지를 말하자 이내 네비로 검색하더니 알았다고 차에 오르란다. 비용이 얼마든 시간이 얼마든 우선 가겠노라 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그런데 네비게이션에 의해 종점까지 왔지만 앞에는 주택 두채가 보일 뿐이다. 차에서 내려 문의한 즉 주택 뒷산에 올라가면 길재묘소가 있다한다. 

이제 두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돌아갈 때 다시 이차를 이용할 수 있는가. 묘소에 갔다 올 때까지 기다려 주겠는가였다. 처음에는 안된다고 딱 잡아 뗀다. 자기는 장사하는 사람이라고. 일단은 지금까지 요금을 결재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렵지 않다하고 결재를 마치자, 되로록 짧은 시간에 내려오도록 하라면서 여유로운 테세를 취하는 것이였다. 묘소인 만큼 사진 몇장이면 충분할것이다 하니 기다리겠노라 했다. 산으로 오르면서 생각하니 결재를 마치면 새롭게 기본요금이 부가되는 것을 노렸구나하고 터득이 갔다. 이쯤하면 귀로의 교통을 해결한 셈이라 필자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면서 여유롭게 묘비를 향했다. 길재의 ‘회고시’를 흥얼흥얼 읊으면서 올라갔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 匹馬로 도라드니
산천은 의구 依舊 하되 인걸 人傑 은 간듸 업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충남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에 야은 길재선생을 모신 사당 ‘청풍사’가 있다. 이마을 이름은 원래 '부리리 富利里‘였으나 길재의 한생에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 不事二君’ 정신을 기려 ‘불이리 不二里’ 로 고쳤다고 한다. 1678년 지방 유림들이 길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청풍서원’이 여기에 있다. 지금 이 서원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필로 쓴 편액이 걸려 있고 서원 경내에 ‘백세청풍비 百世淸風碑’ ,‘지주중류비 砥柱中流’ 등이 있다.

臨溪茅屋獨閑居
月白風淸興有餘
外客不來山鳥語
移床竹塢臥看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띠집에    홀로 한가하게 사노라니
달 희고 바람 맑아 흥취는 그만이네   외지손님 오지 않고 산새만 지저귀니
대밭에 평상 옮겨놓고 누워 소리 없이 책을 읽네

안빈락도安贫乐道의 삶을 엿불수 있는 길재의 칠언절구다. 한가로운 전원에서 아무 욕심없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자연에 묻혀 사는 즐거움과 얽매임 없이 학문에 전념하는 대학자의 삶이 잘 그려져 있다. 
길재의 호는 야은冶隱이고 금오산인金烏山人이다. 

길재는 어릴 적부터 맑고 깨끗하면서 영리했다고 한다. 1374년 국자감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했고, 1383년 사마감시에 합격했으며 1386년 문과에 급제했지만 벼슬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 무렵 그는 이방원과 한 마을에서 살면서 자주 교류했고 깊은 인연을 쌓았다고 한다. 1387년 성균학정에 제수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는데 1388년 순유박사와 성균박사, 1389년 문하주서에 임명되었다가 1390년 고려의 사정이 기울어져 어머니를 봉양한다는 이유로 사직해 낙향했다. 그후 여러차례 부름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조선이 건국된 후 1400년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던 세자 이방원이 한 때 같이 동문수학한 인연이 있는지라 자신이 직접 찾아가 조정에 출사하라고 설득했으나 부드럽게 제안을 거부했다. 

이방원은 벼슬을 내린게 자기가 아니므로 왕에게 직접 가서 말하라고 했다. 결국 길재는 왕에게 상소를 올려  “ 여자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고, 신하는 두 왕을 섬기지 않으니, 충신불사이군, 열녀불경이부 忠臣 不事二君 烈女 不更二夫라 자기도 고향으로 내려가게 해달라며 하사받은 벼슬을 완곡히 거절하였다.

집이 가난한데도 벼슬을 거부한게 정종왕이 보기에도 괴이했는지 신하들에게 길재가 누구냐고 묻기까지 했다. 당시 신하들은 한미한 유자라고 답한 걸 보아 확실히 집이 가난했던 모양이다. 정종이 어찌 해야하는지 권근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권근이 벼슬을 더 올려주거나 아니면 두고 두고 이름을 남겨 충효의 모범으로 삼으라고 해서 결국 정종은 권근의 조언으로 길재를 충절의 본보기로 삼았다. 이방원은 이를 가상히 여겨 그의 집에 세금을 면제하도록 했고 어머니가 사망하자 ‘주자가례’ 에 의거해 상사를 치르게 했다. 이방원은 늘 대신들에게 길재의 고결하고 청렴결백한 인품을 본받으라고 강조했다. 

길재의 청렴결백함을 보여주는 일화에 의하면 한번은 이방원이 길재가 산골에서 가난하게 산다는 말을 듣고 쌀과 콩 백 섬을 보냈으나 길재는 나라를 위해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면서 받지 않았다고 한다. 
길재의 명성은 이미 당대에 널리 알려졌으며 그의 절의와 인품에 감복한 군수 이양李揚이 율곡동에 전원을 주고 좋은 전답으로 바꾸어 주었으나 ‘무릇 물건이 아무리 풍족하다한들 그 종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기증받은 전답을 그 가용에 준하여 남겨 두고 나머지는 다 돌려보냈다고 한다. 
길재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 1421년, 牧隱이색、圃隱정몽주、冶隱길재를 합사하는 삼은각三隱閣이 세워졌다. 1426년 길재의 제자들의 건의로 조정에서는 길재를 좌사간대부에 추증하고 충신이란 정려旌閭를내렸다. 

 정 旌 은 깃발의 의미로 '드러낸다'는 뜻이고, 려 閭 는 마을 또는 마을 어귀에 세운 문이라는 뜻으로, 왕이 충신、효자、열녀에게 정려를 내려줌으로써 해당 인물이나 후손에게 포상을 시행하는 의미와 함께 그들의 행실을 널리 드러내어 보임으로써 풍속 교화의 방편으로 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야은선생은 고려시대에는 일민에 지나지 않았으나 고려가 망한 뒤 고려왕실의 충신이 되었고 그의 풍도는 맑고 절조는 더높아 후세사람들의 탐욕과 나태를 각성시켰다.
야은 冶隱 길재 吉再보다 16년 위인 포은 圃隱 정몽주 鄭夢周는 경북 영천 출신이다. 
조선왕조 건립에 불만을 품고있는 정몽주를 태종 이방원이 부른 적이 있다.  그날은  1389년10월 11일 태종 이성계의 생일날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방원은 정몽주에게 정중히 양해를 구하고 나서 지그시 눈을 감은채 천천히 시를 읊는다.  최종적으로 역성혁명에의 동참 여부를 타진해보려는 의도다.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리리라”
눈을 천천히 뜨고 정몽주를 바라보는 이방원의 눈길이 한결 부드럽다. 
새로운 왕조를 섬기는 게 결코 그간 섬겼던 고려왕종를 배신하는 게 아니라 하늘의 뜻에 따라 필연적으로 열리게 되어 있다는 의미이며 거기에 동참해 공신으로서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함께 누리자는 의미가 슴배여 있었다.
조선 태조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어려서부터 흠모해오던 정몽주를 설득하기 위해 자신의 속마음을  시조 ‘하여가’로 나타내었던 것이다.  
마주 앉은 정몽주의 자태는 마치 거센 파도를 튕겨나가게 하는 바위와 같이 묵연함이 스려있었다. 포은 정몽주의 반응을 기다리는 이방원은 폭풍전야가 몰고오는 긴박감에 젖어 있었다.

정몽주 초상화 

진작 예상했던 바, 열정과 진심을 담은 혁명 실세의 설득에 바위처럼 꿋꿋하게 미동조차 없던 정몽주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스치는가 싶더니 
“저도 한수 읊어도 될까요?”하고 정몽주는 이방원을 향해 미소를 머금는다.
이방원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지만 왠지 몸이 더욱 긴장되어 굳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충심을 극치로 나타낸 시대의 명시 ‘단심가’가 이렇게 탄생한다. 고려냐 조선이냐 하는 갈림길에서 정몽주는 비록 내가 이자리에서 죽을 지언정 절대 고려왕조를 외면할 수 없다는 확고부동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방원은 존경심이 우러났다. 이분이야말로 충신 중의 충신이로다. 하지만 개국, 이 얼마나 꿈같이 황홀경으로 이끄는 리상인가. 아무리 하늘처럼 공경해오던 인물이라 해도 새로운 왕조건립에 등을 돌린 자라면 그대로 놓아 둘 수는 없다. 이방원은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칼보다 날카롭고 모정보다 끈끈한 절의, 우뚝솟은 기개, 포은의 결연한 시조를 되뇌이노라면 검붉은 선혈이 서리는 듯했다.
이렇게 사제지간의 끈끈한 정이 정치적 라이벌로, 드디어 선죽교를 선혈로 물들이는 뼈아픈 비극이 발생하고 말았다.
포은은 이렇게 고려인으로 생을 마감하고 영원토록 고려사람으로 추앙받는 충신 중 충신의  대명사로 세상에 남아있다.
포은의 ‘단심가’를 소리내어 읽노라면 가슴으로 기리게 되고,  속으로 되뇌이면 머리로 추앙하게끔 한다. 현실에는 접수하기 어려운 참멋이 담겨있기 때문이리라.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난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청강에 고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이는 아들 포은에게 이르는 어머니의 가르침이다. 역시 서슬이 느껴질 정도로 날카롭게 날이 서있다. 구차하게 세상과 동화하느니 학자와 정치인으로서의 소신을 지켜 깨끗한 죽음을 맞는 게 옳바른 길임을 가르키는 어머니의 심정을 곱씹노라면 또 한번 가슴이 저려온다.
포은 정몽주는 고려 말 문신학자로서, 자는 달가 達可, 호는 포은이고 영천 안동 永川 출신이다.1360년 문과에 장원, 우문관 대제학을 지냈다. 명나라, 일본과의 외교에 능했고 왜구, 여진족 토벌 등에서 공로가 혁혁하였을 뿐 아니라 의창义仓을 세워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였다.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고려에 충성했으나 국운이 기울어진 고려왕조의 멸망을 막지 못했고 새왕조를 이끄는 신흥세력에 의해 피살되었다. 
포은 정몽주는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외국에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을 구해오기 위해  자신의 재산까지 털어가며 모금운동을 벌였었다. 당시 중국과 일본은 모두 전란에 휩싸여 있어 여기에 사신으로 가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지만 정몽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태풍으로 표류하기까지 하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계속 사신행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만으로도 그의 충효정신을 엿볼 수 있다. 심지어 명나라로 갈 때는 죽는 게 거의 확정사항일 정도로 위험한데도 거절하지 않고 바다를 건너가 기어코 목적을 달성했다. 이러한 행동은 결코 노회한 정객이나 권력에 눈 먼 대신에게서 나올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의 충성의 대상은 '조정'에 앞서 '백성'이 먼저였다. 또한 이방원의 회유에 따라서 이성계 편에 붙었다면 손쉽게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몽주는 고려의 마지막 기둥이자 양심적이고 청렴결백했던 정치가였음이 틀림이 없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평범한 백성이나 상인들까지 그의 죽음을 애도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명나라가 원나라를 북쪽으로 밀어내고 중원을 차지하자 고려 조정은 친명파와 친원파로 나뉘어 대립한다. 이때 포은은 이성계, 정도전과 함께 친명을 주장했고, 명나라와의 중요한 외교적 사안이 있을 때마다 명나라로 사신을 갔다. 
명나라 태조 홍무제는 고려와  북원의 관계를 의심하고 고려를 견제하기 위해 상당히 까다롭게 굴었다. 그 때문에 당시 대명외교는 지난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정몽주는 그런 악조건 하에서도 명나라 태조 홍무제를 설득하여 고려의 입장을 이해시키는데 성공하였고 명나라에  억류당한  고려 사신들을 풀려나게 하는 목적을 달성하였다. 

36세 때인 1372년 명나라에 건너 간 것이 첫 번째 사행이였다. 당시 북쪽의 육로는 원나라에 막혀 있어 뱃길로 바다를 건너 다녀와야 했는데, 거친 풍랑을 만나 일행이 익사하는 일까지 겪었다. 포은은 복잡다단한 국제 관계 속에서 누구도 맡기 싫어하던 사신의 임무를 1388년까지 모두 여섯 차례나 맡아 긴장상태에 처해 있던 对明国交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당시의 심경을 표현한 정몽주의 시 ‘도발해渡渤海’를 음미해보자.

之罘山下片帆张,不觉须臾入渺茫。
云接蓬莱仙阙远,月明辽海客衣凉。
百年天地身如粟,两字功名鬓欲霜。
何日长歌赋归去,蓬窗终夜寸心伤。

지부산 아래에서 외 돛을 펼치니 
어느덧 순식간에 망망 대해에 들어선다.
구름 띤 봉래도의 신선 궁궐은 먼데 
달 밝은 료해에서 나그네 옷 서늘하다. 
백 년이라야 천지간에 이 몸은 좁쌀 같고
공명 두 글자 때문에 귀밑머리 세려하네.
언제나 한가하게 귀거래사 지어 읊어볼까? 
해 질때까지 봉창 안에서 마음 상해하네.

정몽주는 대일본외교에서도 대단한 수완을 발휘했다.
당시의 일본은 끝없는 전쟁 상태였고 왜구들 또한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노략질에 나선 도적떼가 아니라 내전에서 패배한 세력들의 잔당으로 구성된 것이 상당수였다. 즉, 일본 본토에 찾아간다는 것은 왜구들의 마굴에 제발로 걸어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매우 위험한 일이였다. 포악하기로 손꼽히는 왜구들한테 거의 단신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찾아가 국제관계를 설명하고 설득하여 잡혀온 고려인 포로 수백 명을 끝내 구출하였다.  당연히 처음부터 일본의 영주가 그의 설득에 응한 것은 아니다. 반복을 거치면서 유세에 긴시간이 걸렸고 준비해 간 돈도 떨어져서 앞 일이  막연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처지를 표현한 시 ‘봉사일본奉使日本’ 을 흔상해 보기로 하자.  

水國春光動 (수국춘광동) 섬나라에 봄빛이 생동하는데
天涯客未行 (천애객미행) 천애의 나그네는 길을 못 떠나
草連千里綠 (초연천리록) 풀빛은 천리 산야 온통 푸르고
月共兩鄕明 (월공양향명) 저 달은 타향 고향 함께 비추리
遊說黃金盡 (유세황금진) 유세에 가진 황금 바닥이 나고
思歸白髮生 (사귀백발생) 귀국 생각 백발이 절로 돋아나
男兒四方志 (남아사방지) 사나이가 사방에 품은 그 뜻은
不獨爲功名 (부독위공명) 공명 때문 그것만은 아니고말고.

왜구의 노비로 혹사당하는 고려 양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그는 개인 재산을 무대가로 지원함으로서 다른 대신들이 모금활동에 동참하도록 하였다. 정몽주의 이런 각고의 노력에 감탄한 일본의 영주는 고려인 포로를 그때그때 백여명씩 돌려보내주었다. 
스승인 이색은 정몽주를 가리켜 "횡설수설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하면서 동방이학의 비조로 추대하였고, 명나라의 홍무제 또한 정몽주의 언변은 고금의 예에 어긋남이 없이 뛰어나다고 평하였다. 
정몽주는 큰 일을 결단하는데 낯빛이 변하는 일이 없었고, 극비로 처리해야 하는 일에서는 한치의 허트름 없이 침착하였다고하니 사람들은 그를  왕좌지재王佐之才라 고 일컬었다 한다.
세종대왕은 고려 왕조의 충신들에 대해서 객관적인 평가를 내렸는데  그 중 고려 삼은에 대한 평가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목은 이색은 학문은 뛰어나지만 절의를 지키지 못했고,  
야은 길재는 절의를 굳게 지켰지만 성격에서는 모가 난 사람이었다.
포은 정몽주는 절의를 지켰고 관리로서 뛰어나며 인품이 순후하고 성실하다. 

이와 같이 정몽주는 세종대왕으로부터 충절만 평가된 것이 아니라 관리로서의 외교적 능력도 높이 평가되었다. 정몽주는 고려왕조의 신하이지만 조선시대의 왕들까지도 역적도당이 아닌 충신으로 인정하였다. 
중종은 사림파의 요구를 받아들여 문묘에 정몽주의 위패를 안치하게했고 명종 때에는 정몽주의 고향에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임고서원을 창건 하였다.

필자가 정몽주의 임고서원을 탐방한 것은 록음이 무르익는 6월이였다. 영양군의 조치훈 문학관 탐방에 이어 영천군으로 이동하였다. 조선 명종8년에 정몽주의 공적을 기리고 고상한 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고향인 영천 부래산에 임고서원을 창건하였었는데 임진왜란에 소실되었다가 다시 이곳으로 옮겨지었다고 한 다.
정몽주의 변함없는 지조를 올곧이 나타내는 ‘단심가’의 시비가 한눈에 안겨왔다. 
조선왕조 성종실록에 '만약 한 번 마음만 바꾼다면 개국開國의 원훈元勳이 될 것이니, 누가 그를 앞설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정몽주는 끝내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켜 죽어도 의義를 잃지 않았다’ 라는 기재가 있다. 

그런가 하면 개성에 있는 선죽교를 실측하여 그 규모대로 서원 앞에 가설해 놓아,  관람자들이 정몽주선생의 장렬한 최후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었다. 원래 이 다리의 이름은 ‘선지교’였는데 정몽주가 피살되던 날 밤 다리옆에서 참대나무가 솟아났다하여 ‘선죽교’라 고쳐불렀다고 한다. 

서원 뒷 쪽에 20여 미터 높이로 치솟은 은행나무는 500년의 수령을 자랑하며 정몽주의 굳은 절개와 변함없는 충절을 상징하듯 꿋꿋이 서있었다.

정몽주의 충신 이미지 때문에 간과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는 상당한 경지에 들어선 시인이다. 9살 때 쓴 편지가 있는데 지금 봐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글솜씨가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다. 9살 당시 외삼촌인 판서댁에서 머물고 있을 때, 한 여종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남편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지만 글을 몰라서 안달아나 했다. 정몽주에게 대신 써달라고 부탁했고 여종의 남편도 글을 몰라 주변 선비에게 부탁해 읽었다. 그 선비는 여종의 글솜씨에 감탄하여 주변에 소개하게 되면서 소문이 났다고 한다. 그러자 이편지가 당시 여인들의 연서에 즐겨 사용하는 문구로 되었다고 한다.  정몽주가 쓴 시를 흔상해 보기로 하자.  

상사곡  相思曲

云聚散月盈虧,
妾心不移,
缄了却开添一语,
世间多病是相思。

구름은 모였다가 흩어지고 
달은 찼다가 이지러지나
첩의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편지를 봉함하였다가 도로 열어 한마디 덧붙이는데 
세간에서 제일 많은 것이 상사 (병)이라 하더이다.

라이벌인 정도전도 정몽주를 "도덕의 종장, 문채의 으뜸"이라고 평하였고 항상 "선생"이라고 부르며 존경심을 표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친우였고 역사적으로는 이상을 부딪히는 정적이었다. 한 사람은 자신의 나라를 지키려 했고, 한 사람은 새로운 세상을 열려 했다는데서 이 두사람을   자주 함께 거론하게 된다. 

태종이 집권 후 조선의 설계자인 정도전은 간신으로 비하되고 고려의 충신 정몽주는 동방의 성현으로 성균관에 모셔진다. 정몽주는 조선이 건국된 지 10년째 되는 1401년에 자신을 살해 한 태종 이방원에 의해 학문과 충절의 인물로 다시 공식적인 인정을 받는다. 영의정 벼슬을 추증하고 ‘ 문충 文忠 ‘ 이란 시호를 내린 것이다.      정몽주에 대한 태종의 사후 복권 조치가 이루어지자 그의 아들 정종성 형제가 각지에 흩어져 있던 포은의 유문을 수집해 모두 303수의 시를 편집했다. 
내용은 명나라와 일본에 사신을 다녀온 사행시 使行詩 , 
전투에 참여할 때 지은 종군시  從軍詩 ,
중국 사신, 일반 친지, 승려들과 주고받은 수작시 酬酌詩 ,
일상의 감회를 표현한 영회시 詠懷詩 , 네 부분으로 구성됐다. 

이 가운데 사행시가 138수나 되는데,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외교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포은집은 그 후 유문과 부록의 증보를 거듭하면서 조선 말까지 14회나 간행해 한국에서 가장 많은 판본을 가진 문집으로 자리매김했다. 

포은 정몽주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그는 학문、외교、경제、군사、정치、인품 모든 면에서 출중한 고려 말  최후의 보루였다.  선비의 이미지가 강하다지만  그는 정녕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고려 삼은 중의 한사람인 목은牧隱 이색 李穡은 삼은 三隱 중 가장 나이가 많으며 조선왕조가 건립되자 세상을 떠났기에 고려시대 문인으로 지낸 사건들이 주된다, 그의 본관은 한산 韓山, 호는 목은牧隱이며, 아버지는 찬성사 이곡 李穀 으로 이제현 李齊賢의 문인이다. 
영덕군에서는 목은 牧隱 이색 李穡 선생의 유적을 기리기 위하여 옛 문헌에 묘사된 대로 생가터를 복원 시키고 목은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목은 이색 기념관에는 목은 이색의 영정, 문집판, 목은집 牧隱集 등 관련 유물들이 전시 되어 있다.
목은 이색 기념관 동쪽편에 목은 이색과 그의 부친 이곡선생, 두부자의 유적을 추모하는 석비 稼亭 牧隱 兩先生 遺墟碑가 있다. 그러나 이 석비는  비바람에 돌이 깎이고 하여  몇개의 쪼각으로 갈라져 후세사람들이 다시 가즈런히 맞추어서  석비 표면의 글들이 눈에 띄게 땅에 묻어놓았다.  워낙은 세워놓아야 할 석비이지만 당시는 갈라진 비석 조각들을 붙힐 수 있는 점착제가 없었든가 본다. 18세기 말 1796년의 일이니 어언 20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기념관 서쪽편에 목은 이색의 석조좌상이 모셔져 있었다. 필자는 경건한 마음으로 기념사진을 남겼다.

목은 이색은 원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도중에 고향인 호지촌濠池村에 들린 적이 있다. 당시 이색은 호지촌이 중국 구양박사방歐陽博士坊 의 괴시槐市마을과 유사하다고 하여 괴시槐市마을이라고 이름 지었다. 마을 안에 있는 가옥 대부분은 동해안 전통가옥의 특징인 뜰 집(안채·사랑채·부속채 등의 가옥 공간이 하나로 연결된 'ㅁ'자형의 주택)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고택이 서남향을 바라보고 있으며, 기와와 토담으로 만들어진 마을 길은 이색적이고 정감이 간다. 마을 앞에는 동해안의 3대 평야인 영해평야 푸른 들녘이 넓게 펼쳐져 있다. 

영해 괴시槐市마을은 목은 이색의 외가 마을이다. 그는 괴시리에서 태어나 외할아버지인 김택에게서 한학을 배우며 소년기를 보냈다. 15세에 부음 父陰으로 별장 別將의 직을 얻고, 1341년 진사가 되었다. 1348년 아버지가 중국 원나라에서 중서사전부 中瑞司典簿로 위임되자 조관 朝官의 아들로 원나라 국자감의 생원이 되었다. 이색은 이제현李齊賢을 좌주 座主로 하여 주자성리학을 익혔고, 이 시기 원의 국립학교인 국자감에서 수학하여 주자성리학의 요체를 파악하였다. 1352년 아버지가 죽자 귀국해 토지문제、왜구대책、학교교육론、이단배척 등의 상소를 올렸다. 이 일로 이부시랑 겸 병부시랑에 임명되어 문무 文武 의 전선 銓選을 장악하게 되었다.

신흥유신으로서 현실개혁의 뜻을 가진 이색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반영시키는 가운데 순조롭게 출세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1359년 홍건족이 침입했을 때 왕을 시종하여 호종공신 1등에 책봉되어 전 田 100결 結, 노비 20구 口를 받았다. 그리고 공신전으로 중앙정계에 정치적 지위에 상응하는 경제적 기반도 마련하였다. 1365년 신돈이 등장하고 개혁정치가 본격화되면서 그는 교육、과거 제도 개혁의 중심인물로 되였다. 

목은 이색은 고려후기 문하시중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 성균관,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문장으로는 이제현과 쌍벽을 이루었을 정도로 이름을 떨친 대학자이다. 그는 고려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문신이였다. 그의 대표작 ‘부벽루’를 보기로 하자.

부벽루 浮碧樓

 昨過永明寺  暫登浮碧樓
城空月一片 石老雲千秋
麟馬去不返  天孫何處遊
長嘯倚風磴  山靑江自流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가  잠시 부벽루에 올랐었네
텅 빈 성엔 한조각 달이요  바위는 늙어 구름만 천년을 떠도네.
기린말이 가서 돌아오지 않으니  천손은 어느 곳에서 노니는고
돌비탈에 기대어 휘파람 부노니  산은 푸르고 강은 절로 흐른다.

이 시는 목은 이색이 중국 원나라로 가는 도중 고구려의 유적지인 평양성을 지나면서 지은 시다. 찬연하였던 고구려의 옛모습을 그리고 있다. 바야흐로 고려의 국운이 쇠약해지고 있는 터에 찬란했던 고구려의 회색 자취만 쓸쓸히 남아 있다. 인간의 유한과 자연의 영원함을 한 조각의 달과 구름으로 그리고 있다. 그런가 하면 웅혼한 력사를 이룩한 고구려 동명성왕의 위업을 ‘천손’ 으로 비유하고 있다. 이작품은 현재에서 과거를 비추어보는 시각과 또 과거에서 현재를 다시 비추어 보는 시각을 절묘하게 조화시키고 있다. 
고려 왕조가 무너지고 신진 세력인 이성계 일파를 중심으로 한 조선 왕조가 들어서는  역사적 전환기에 고뇌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시조 “ 백설이 자자진 골에”를 보기로 하자.

백설이 자자진 골에
백설(白雪)이 자자진 골에 구룸이 머흐레라
반가온 매화(梅花)는 어느 곳에 퓌엿는고
석양(夕陽)에 홀로 셔 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

이를 현대어로 풀이하면:
백설이 녹아 없어진 골짜기에 구름이 험하구나.
반겨 줄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가.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이 작품은 고려 유신인 이색이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모습과 우국충정 憂國衷情 의 마음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지고 있는 시조이다.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색은 자신이 충성을 다했던 고려 왕조가 무너지고 신진 세력인 이성계 일파를 중심으로 한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느끼는 회한과 안타까움을 우의적, 풍자적인 방법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시에서 작자는 ‘백설’로 고려 유신 遺臣 을 비유하였고, ‘구름’ 、 ‘매화’로 각각 조선의 신흥세력과 우국지사 憂國之士 를 비유하였다.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고려에 우국지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상징적 소재를 통해 형상화하였고 전환기에 처한 지식인의 고민을 ‘夕陽 석양에 홀로 셔 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 .라는 탄식 속에 묻고 있다. 정치적 배경을 가지는 시조가 흔히 그렇듯이 자연물을 통해 현실을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목은은 지성계의 태두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정치적 력량이나 권력의 소유에서는  엄연히 한발 물러나 있었다.  그의 활동 중심은 그래도 문학이었다.  정도전이나 정몽주와 같은 인물과 비견할 수는 없지만   고려시대에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작가 중 한사람이였다.

김창권 프로필 

1974_1977 연변대학조문학부
1989_2000 치치하얼시정부외사판공실
2000_2011 치치하얼대학외국어학원
2011 정년퇴직, 현재 대련시조선족문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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