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철(경제학 박사, 서울사이버대학교 객원교수, 전 파라과이교육과학부 자문관)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을 보고

                이남철(경제학 박사, 서울사이버대학교 객원교수, 전 파라과이교육과학부 자문관)

본지 객원논설위원 

(동북아신문=이남철 칼럼니스트)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 아버지는 국가대표 축구 경기 라디오 중계방송을 듣고 있으면 경기 결과만 알면 되는것 아니냐고 하면서 라디오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신문을 보라고 했다. 신문을 읽으면 대학 다닌 것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배운다고 하였다. 그 당시 필자의 동네에는 텔레비전은 없었고 라디오만 몇 가구 당 한 대 있었다. 사실 신문이 매일 집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정읍의 한 면단위로 발간된 신문은 우편으로 배달되고 있었으니 구문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운동 관련 라디오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청취를 권장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동양방송(TBC) 라디오 인기 다큐멘터리·드라마‘광복 20년’이다. 이 방송은 동양방송과 제휴 관계였던 군산 서해방송(현 KBS 전주방송)이 송출했다. 초등학교 다니던 필자는 가끔 그 방송을 듣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역사 내용이었다. 1967년 8월 7일 이승만 박사의 생생한 육성이 전파를 타면서 시작된 이 드라마는 하루도 거르지 않은 채 10년을 기록했다. 주 내용은 건국 전후의 비화·거창 양민 학살 사건·백범 사건·남북 협상·장 부통령 저격 사건·김창룡 사건 등 해방 뒤의 주요 3백여 사건이 관계 인사들의 증언과 기록을 통해 밀도 있게 다루어졌다.

최근 필자는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을 보았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로부터 리승만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관련 책도 많이 읽은 터라 관심이 컸다. 이 영화는 리승만 대통령과 관련된 역사적 사료와 영상을 통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많았다. 아버지는 리승만 대통령이라고 하지 않고 리승만 박사라는 호칭을 썼다. 이는 최고의 존칭, 존경과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중학교 다닐 때 필자는 교복 명찰에 ‘리남철’로 하고 다녔지만 학교에서 아무도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이’와 ‘리’성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영화를 보면서 깊은 감명은 이 대통령의 전후 국민소득이 79달러 수준인 나라의 미래 예측과 추진한 교육, 정치·경제, 사회·외교 정책, 특히 남녀평등 사상들에 대한 선각적 사고와 행동이었다. 프랑스보다도 먼저 여성 투표권이 실시되었다는 사실이다. 영화 상영 중 여러 차례 가슴 뭉클함을 느꼈다.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배재학당 박물관.

이승만은 1886년(고종 23)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였던 아펜젤러가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사립학교인 배재학당을 다녔다. 조선 정부에서 선교사들의 교육과 의료 사업을 인정한다는 의미로 스크랜턴, 아펜젤러 등이 세운 학교에 사액현판(임금이 서원의 명칭을 정해 하사한 현판)을 수여했던 것이다. ‘배재’는 인재를 기른다는 뜻으로 이는 곧 학교의 사명과 목적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안창호, 이승만, 주시경 등이 배재학당 출신이다.

이대통령은 19세 때(1894)까지 여느 양반집 자제와 마찬가지로 과거등과를 목표로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13세 때부터 해마다 과거시험에 응시했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그러다가 갑오개혁(1894)을 계기로 과거시험이 폐지되고 새로운 방식으로 관리를 선발하게 되자 한문 공부를 과감하게 그만두고 신학문에 도전하였다. 전화위복의 기회가 이승만에게 찾아온 것이다. 1895년 4월, 서당 친구 신긍우의 권유에 따라 입학하였다. 아들의 과거급제와 입신양명을 기대하던 부친 이경선(1839∼1912)은 과거제도 폐지에 낙담하여 황해도 딸네 집으로 떠났다.

이승만은 1890년 15살 때 동갑내기인 음죽 박씨(朴承善)와 결혼해 외아들 봉수(태산이라고도 부름)까지 있는 터에 큰 집안 살림을 책임져야 했다. 조지워싱턴대에 입학 후 곧이어 박씨 부인도 이승만과 합류할 생각으로 아버지의 옥중 동지인 박용만 편에 봉수를 보냈다. 그러나 9살 난 봉수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나 이승만에게는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1895년 영어 위주로 가르치던 배재학당에 입학한 그는 이 학교에서 정치적 자유와 평등을 공부하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에게 민주정신을 불어넣어 준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은 바로 서재필이었다. 1896년 5월, 서재필의 강의를 듣고 이승만은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이승만은 심지어 비가 내리는 날에도 볏짚으로 만든 모자와 짚으로 만든 비옷을 입고 서재필의 집에 찾아가 면담하기도 하였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6개월 영어공부를 한 후 영어 ‘보조교사’ 발령을 받은 그에게 선교사와 교사들은 교내 영어신문 등 영어로 해야 하는 작업은 이승만에게 도맡기다시피 했다. 졸업식에서 이승만은 졸업생을 대표해 영어로 ‘한국의 독립’에 대한 주제로 연설을 하였다. 이승만은 조선과 중국 관계, 청일전쟁의 결과 및 당면 과제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청중들은 계속 놀랐다. 첫째 영어연설이란 충격, 영어에 능한 서재필이나 윤치호가 외국에서는 했지만 국내에서 한국인이, 그것도 22세 학생의 유창한 영어에 모두 신기한 듯 감탄했다. 다시 한 번 놀란 것은 ‘독립가’ 노래를 영어로 부르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1899년 1월 9일 발생한 박영효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형수로 한성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는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었다. 비록 감형은 됐지만 1904년 8월 9일 석방될 때까지 무려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훗날 이 공부는 미국 유학과 독립 운동을 하는 데 큰 뒷받침이 되었다.

1904년 11월 5일 제물포 항에서 미국 상선 오하이오호에 승선해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이승만은 유학생 자격으로 여권을 발급받았지만, 트렁크 속에는 민영환이 미국 공사관으로 보내는 서찰을 감추고 있었다. 당시 민영환·한규설 등 개화파 지도자들은 조선의 장래를 우려해 미국 대통령에게 탄원을 하기로 하고, 이승만에게 그 전달임무를 맡겼다. 이들은 조미 통상조약상 알선조항에 따라 미국이 한국을 위해 일정한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했다. 일본 고베를 거쳐 하와이 호놀룰루와 샌프란시스코에 잠시 머물고 12월 31일 목적지인 워싱턴 디시에 도착했다.

하바드대학교 방문 후 Jose Mateo Ballet Theatre에서...필자

하바드대학교 방문 후 Jose Mateo Ballet Theatre에서...필자

이승만은 서울에서 받은 선교사 게일의 추천서를 들고 루이스 햄린을 만났다. 그는 서재필이 미국에서 결혼할 때 주례를 선 사람이었다. 햄린은 이승만이 장차 유능한 선교사가 되리라 기대하고 마침 한국 공사관 법률고문이자 조지워싱턴대학 총장인 찰스 니드햄과 윌버 학장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이들과 면담 후 이승만은 곧 시작하는 1905년 봄 학기부터 2학년으로 편입이 허용됐다. 이승만이 대학교육을 받은 적은 없으나 배재학당에서의 교육을 대학과정의 일부로 인정받은 듯 했다. 배재학당은 영문 명칭에서 College를 사용했었다. 1907년 6월 졸업할 때까지 2년간 공부에 전념했다. 비록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이승만은 조지워싱턴대학을 마친 뒤 서재필 등의 주선으로 보스턴에서 있는 하버드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당시 하버드대학에 몇몇 과목에서 D나 C를 받아 박사과정을 마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하버드대학에서 2년 내에 박사학위 취득이 어렵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국내에서부터 친분이 있던 프린스턴신학교 출신 북장로교 홀 선교사를 통해 프린스턴 대학원에 다시 입학했다.

1907년 6월 5일, 32세의 이승만은 2년 4개월 만에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사학위, 하버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경제학 과목에서 D를 받았기 때문에 석사 학위도 바로 받지 못한 그는 하버드에서의 1년은 그리 즐거운 시기는 아니었다. 1909년 프린스턴 재학 중 여름학기에 다시 하버드로 가서 미국사를 수강하고 B 학점을 받음으로써 졸업 요건을 채워 석사 졸업은 1910년 2월 23일 이었다. 이승만은 1909년 9월부터 1910년 6월 중순까지 2년 동안 뉴저지주 소재 프린스턴대학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국제법을 전공으로 했고, 미국사와 철학사 과목들을 부전공으로 택했다. 1910년 프린스턴대학에서 ‘미국의 영향 하의 중립론’(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1912년 프린스턴 대학출판부에서 같은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며, 이 졸업논문은 조선인 최초로 미국 대학 출판부에서 간행된 책자였다.

 

이승만의 프린스턴대학교 박사학위 취득.

이승만의 프린스턴대학교 박사학위 취득.

이승만의 학위 취득과정에는 의문점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는 이승만이 통상 10년 이상 걸리는 학부, 석사와 박사과정을 단 5년 만에 마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박사학위와 석사학위를 같은 날에 받은 것도 참으로 이해가 안 될 만큼 흥미로운 일이다. 필자는 미국에서 7년 정도 경제학 공부를 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한국에서 학부를 마치고 석사 과정에 입학하지 않고 바로 미국 명문대학 박사과정에 입학이 가능하다. 박사 과정 중 석사학위에 필요한 학점을 이수하고 시험에 통과하던지 석사논문을 쓰면 박사 과정 중에 석사학위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같은 대학, 같은 학고 전공에서 가능한 것이다.

필자는 이승만과 서재필에 대한 관심이 많아 워싱턴 디시에 있는 조지워싱턴대학교, 보스턴에 있는 하바드대학교와 뉴져지주 프린스턴에 있는 프린스턴대학교를 찾아가 보았다. 프린스턴대학에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논문 지도로 학위를 받은 이승만은 무엇보다도 윌슨 총장과 그의 가족과도 친밀한 친구가 되었다. 윌슨 총장이 정계로 투신하기 전 마지막 프린스턴대학 졸업식이었다. 그는 제28대 미국 대통령이 되어 이승만 박사에게 국제 외교 활동에서 든든한 지원자였다.

이승만은 세계정세를 알리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태평양 잡지’를 발간했다. 이 잡지 1914년 6월 호에 그는 “하와이는 모두 여덟 개 섬으로 이뤄져 있다. 그는 하와이 팔도(八島)를 조선 팔도(八道)에 비유하면 독립과 자유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꿈꿨다. 이 여덟 섬에 한인이 아니 가 있는 곳이 없으니 가위 조선 팔도라.”고 하였다. 이승만 박사는 대부분 사탕수수 농장 근로자인 한인 이민자들이 살고 있는 섬들을 찾아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같이하였다.

이 대통령은 하와이에서 부인 프란체스카 준 참빗을 지니고 있었다. 하와이 병실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마음이 울적할 때면 향수를 달랬던 그 참빗이었다. 그는 이국 땅 하와이에서 1965년 7월 19일, 향년 90세로 사망했다

아들인 이인수 박사에 의하면 “아버님은 국어는 우리 민족의 숨소리야, 국어를 잘해야 영어를 잘할 수 있어”라고 하셨다고한다. 그렇다. 한국어를 논리적으로 쓰고 말하는 것을 잘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나라 언어를 잘 할 수 있을까? 80이 넘은 연세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새로운 영어단어를 손바닥에 써 가지고 다니며 외우셨다고 한다. 필자는 이승만 박사의 천재성을 바탕으로 수많은 난관을 극복한 인내력과 평생 동안 조국 대한민국을 위한 애국심에 고개가 숙여진다. 이승만 대통령이 만든 자유민주주의와 한·미 동맹은 현재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근간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역사는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남철 (경제학 박사, 국제협력개발 전문가)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원과 파라과이교육과학부 자문관 등을 역임한 이남철 박사는 세계 각국을 방문하며 국제원조경제개발 자문역으로 활동하면서 단행본 저서(13권) 번역 저서(2권), 전문 영문 저서(7권) 교양 편저서(5종 17권) 발간하고 해외 학술논문 31편 게재: 국제 학술대회 논문 48번  발표 및 정부정책보고서 132건을 발간하는 등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본지 객원논설위원으로 본지에 칼럼 및 여행수필 등을 발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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