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월 작가
                              송월 작가

  유학생

 

  북경외국어학원 캠퍼스 중앙도로를 죽자 살자 달리는 자전거, 앞에 주차하고 있는 저 버스가 눈에 안 들어오는지, 여학생은 앞 바퀴만 보고 달리고 있다.

  “아아앗~!” 급히 핸들을 왼쪽으로 돌렸는데 맞은편에서 불쑥 다른 자전거가 투우처럼 들이 닥친다. 비명과 동시에 여학생은 버스 엉덩이의 라이트를 부시면서 반대편 자전거와 얽혀 넘어졌다. 

  투우사(鬪牛士)는 자전거 밑에 깔려 당황한 소리로 “뚜이부치! (미안해요) ”를 연호하고 여학생은 일어나려 버둥거리지만 왼쪽 다리가 바퀴에 끼어 움직이지 못했다. 투우사는 밑에 깔린 자세로 여학생의 등을 떠밀어 먼저 일어나도록 도와주고 일어섰다. 그리고 허리를 90°로 굽히며 또 다시 “뚜이부치! ”를 반복했다. 

  “앗, 진짜 재수야! ‘뚜이부치’ 밖에 몰라?!” 한마디 쏘아 부치려 할 때 남자가 겨우 얼굴을 쳐들었다. 순간 그녀의 시선이 남자의 얼굴에 얼어 붙었다. 죄송하다는 말 밖에 못 하는 이유를 알았다.

  그는 할리우드 배우처럼 쿨하고 핸섬한 외국인 이였다. 키는 약177cm, 긴 곱슬머리, 깔끔하게 가꾼 콧수염, 거기에다 코끝과 턱 중간에는 서양 미남의 상징인 홈까지 있었다. 지적이고 예술적인 인상이 농후하면서도 스포티한 느낌도 엿보인다. 긴 다리는 고향의 백양 나무를 연상시키는 서양인 같은데 어딘가 동양적인 분위기도 약간 섞여 혼혈인으로도 보이는 특별한 분위기를 풍기는 청년이었다. 정면으로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금방 뱉아내려던 꾸지람을 저도 모르게 꿀꺽 삼켰다. ‘어머, 타입!’ 행운인지 불행인지 여학생은 첫눈에 반했다. 

  외국인은 만면에 죄책감으로 『すみません』(미안합니다)이라 한다. 순간 일본어로 들렸지만 서양인이 중국인에게 일본말로 사과하는 신기한 일이 있을 리 없으니 영어를 잘못 들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친데 없어요?” 서툰 중국어로 걱정스레 묻는다.

  “네, 괜찮아요.” 

  “확실합니까?" 중국어로 최선을 다하는 외국인.

  “네, 전혀 문제없어요.”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ふ~よかった』!(후~ 다행이다) 이 번에는 똑똑히 들렸다. 분명 일본어였다.

  “일본 분이세요?”

  “어, 일본어 하시네요!” 일어로 묻는 여학생에게 반대로 놀란다.

  “일어학과 3학년생입니다.”

  “토리고에 세이치(鳥越 誠一)라고 합니다. 3일전에 유학 왔습니다. 일본은 왼쪽 통행이라서 그만. 진심으로 사과를 드립니다!” 그는 또 허리를 몇 번이나 굽실굽실하는 거였다. 드라마에서만 보았던 일본식 예의에 당황한 여학생은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웃으면서 그의 과분한 사과 방식을 지켜보고 있다. 

  “저는 리혜입니다.” 

  그들의 엽기적 운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두 젊은이의 창창한 앞길을 가로막는 장벽은 너무나도 높고 참혹했다.

 

 

  미국인 잭

 

  부산 해운대 켄싱턴 호텔라운지.

  술이란 참으로 신기한 마술사이다. 남자의 잔에는 여자들이 뜨고, 여자의 잔에는 남자가 뜬다. 다른 점이라면 남자의 잔에는 가지각색 인어(人魚)들이 떠오르는데 여자의 잔에는 배신자 한 놈만 동동 떠있다. 남자는 인어들로 빙긋빙긋 웃고 여자는 한 남자 때문에 눈물 콧물로 손수건을 적시며 이를 간다.

  재즈의 잔잔한 흐름에 맞춰 가볍게 춤추는 촛불 빛이 클래식풍 공간을 한결 더 로맨틱한 무드로 연출한다. 28층에 위치한 라운지는 마치도 크루즈 객선에 있는듯 바다와 접해 있다. 유리창은 거울처럼 야경과 술과 환담을 즐기고 있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선명하게 비추고 있다.

  왼쪽 구석에 40대가까운 서양인이 혼자서 라운지의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정으로 와인을 마시고 있다. 미국인 잭이다. 일본 유명한 국제회의 동시통역사 아세아 태평양 본부장이며 리혜의 상사이다. 그리고 그들 둘은 친구 이상 애인 이하의 관계이기도 하다. 

  그는 리혜에게 다시 한 번 프러포즈 하려고 출장중인 부산으로 서포트가 필요하다며 그녀를 불러왔지만 짝사랑의 벽은 너무나도 높았다. 프랑스, 이태리, 일본 등등, 여러 나라 여성들과 연애해 왔지만 처음으로 맛보는 좌절이다. 그는 중국 여성을 다루는 설명서를 아직 습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밤의 우울함은 단지 거절당한 남자의 자존심 또는 소유욕을 채우지 못한 공허감이 아니다. 회사에서 공인하는 플레이보이였지만 리혜를 만나 함께 일하면서 그녀의 남다른 독특한 매력에 푹 빠져버린 미국인은 플레이보이를 졸업했다고 선포했다. 잭에게는 리혜가 《귀여운 악마》 였다. 요즘 여자들은 실연해 가슴 치면서 울다 가도 그 아픔이 감기보다도 더 빨리 낫는 시대인데 12년전에 말도 없이 증발한 일본인의 아이를 가지겠다고 임신작전까지 짜고 있는 리혜의 변태적인 사랑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잭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순수? 집착? 혹시 본인도 알 길 없는 심리 심층에 숨어 있는 복수심?! 대체로 어떤 성질의 사랑인지 그 비겁한 일본인에게 질투를 느낄 때도 있다.

  몇시간이나 마셨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눈앞의 바다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남은 것만 비우고 해변가를 잠깐 산보할 예정으로 와인 잔을 눈앞에 높이 쳐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술잔에 지적이고 세련된 여성이 인어처럼 다가오는 거였다. 깜짝 놀라며 들었던 잔을 놓는다. 인어도 유령도 아니고 진짜 그녀였다. 프러포즈를 거절하고 곧바로 호텔을 떠난 그녀를 공항까지 바래줬으니까 이 시간엔 도쿄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한밤에 와인 잔에 불쑥 나타났는지, 놀란 잭은 술이 깼다. 그녀는 다행히 오른쪽 제일 안쪽 창가에 앉았다. 거리가 있어 의식적으로 살펴보지 않는 한 서로의 눈길이 부딪칠 걱정은 없었다. 잭에게는 와인 한 병 더 필요했다.

  리혜는 가끔 다리를 바꿔 꼬면서 맥주를 마시고 있을 뿐, 누구를 기다리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술은 세기 때문에 취할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만 저 페이스로 쭉쭉 들이 마시는 게 어딘가 좀 불안했다. 맥주만 마신다는 건 취하지 안겠다는 의사 표시이다. 

  옷은 갈아입었다. 흰색 바지에 핑크색 블라우스, 뒤에 놓은 관엽 식물이 받쳐주니 그녀의 옆모습은 달빛에 반짝이는 바닷물에 꽂아 놓은 한송이의 연꽃 마냥 도도했다. 밤바다에 핀 연꽃, 이세상에 있을 수 없는 환상적인 꽃은 본의 아니게 라운지에 있는 남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척도로 홀로 마시고 있는 우아한 여자의 사유를 다투어 점치고 있는 듯했다.

  한 젊은 서양인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간다. 어떤 말로 작업을 걸었는지 모르겠지만 외국인은 어깨를 으쓱 올려 두 손을 펼치며 쑥스러운 표정으로 제자리에  돌아간다. 동양에 오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지 착각하는 서양 놈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흥, 무서운 줄 모르는 새끼!” 잭은 와인을 뿜을 번 했다.

  한편 리혜는 왼손으로 턱을 고이고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 

 

  탑승 시간까지 좀 기다려야 했기에 “재밌는 특집이 있으니 심심풀이로 봐.”하고 잭이 준 잡지가 생각나 가방에서 꺼내 펼쳤더니 큰 사진과 함께 특집 타이틀이 눈에 확 들어왔다. 

  리혜의 운명이 또 다시 파란만장속으로 말려들어 가는 순간 이였다. 

 

  《위안부의 일생》 연출가 토리고에 세이치.

  〈사상 처음으로 일본 아티스트가 위안부를 주제로 다룬 연극! 

  기사에는 세이치의 창작 동기와 과정, 그리고 한국관객들의 반향에 관해 거론되었다. 

  제정신없이 공항에서 다시 해운대로 돌아와 새로 호텔 잡고 인터넷 검색과 전화로 세이치의 리서치를 끝낸 후 옷 갈아입고 세이치가 숙박하는 호텔까지 찾아왔다. 캠퍼스의 유학생 전용 식당 뒤에 숨어서 세이치의 뒷모습을 훔쳐보던 학생 때처럼, 어쩌면 그가 묵고 있는 이 호텔에서 그와 어깨를 스치며 지날 수도 있을 것 같아서…막연한 기대감과 약간 설레는 마음을 달래며 라운지로 올라왔다. 

  이상하게도 오늘 발생한 일련의 흐름이 자신의 자동적 의식만이 아닌 것 같았다. 우주에 있는 수호령이 보내주는 텔레파시를 자기 영혼 속의 안테나가 수시로 암시 받으며 이끌린 느낌이었다…

  리혜는 낳아 준 부모가 누구인지를 모른다. 소낙비 퍼붓는 밤에 대나무바구니에서 발버둥치며 우는 갓난 아기를 조선족 부부가 안아 들여 키웠다고 한다. 그런데 키워주던 엄마는 리 혜가 3살 때 자살하고 아버지가 혼자서 정성 들여 키워 북경의 명문대학까지 보냈는데 리 혜는 그런 아빠를 배신하고 일본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임신까지 해서 퇴학당하고 집으로 쫓겨온 불효 자식이었다.

  “일본놈의 종자냐? 키워준 아빠냐? 둘 중 하나만 골라.”하는 아빠의 강요에 반항해 그녀는 가출해버렸다. 분에 못 이긴 아빠는 지병인 심장병이 도져 영영 눈을 감아 버렸다. 아빠를 저 세상에 보낸 리혜는 배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작은 생명을 지우는 길 밖에 없었다.

  “사랑에 눈이 먼다”는 소리, 지금 생각하면 맞는 말이지만 그때는 누가 뭐라해도 무조건 좋았었다. 그는 온화하고 포근하고 자상했으며 그의 두꺼운 가슴은 요람이었다. 헤어스타일, 수염, 코끝, 턱, 가슴 털, 체취, 청결 감… 죄다 신기하고 그저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우연히 일본 사람이었을 뿐이지 일본 사람을 골라서 사랑한 것이 아닌데 왜 이 세상엔…!?

   모든 것을 잃은 후, 리혜는 다시 대학 시험을 보고 이번에는 북경대학 경제학과를 전공했다. 졸업 후 그녀는 도쿄에 있는 동시통역회사에 채용되어 마음껏 활약했다. 물론 세이치와의 첫 사랑을 잊은 적은 없었지만 아빠에게 죄짓는 것 같아서 떠오를 때마다 훌훌 털어 버리 군 했다. 그러나 태아의 초음파 사진만은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가끔 아기의 힘찬 심장의 고동 소리가 귓전에 울려 저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릴 때도 있다. 

  요즘은 인생 기로에 서서 헤맬 때가 빈번하다. 33살이나된 여자로서 자기가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어도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고민할 시기였다. 같은 세대에 비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아픔을 너무도 많이 겪다 보니 큰 꿈도 없고 그저 평화로운 환경에서 주어진 업무를 남들이 흠잡지 못 하도록 깔끔하게 완성하는 것에만 신경 써 왔지 금후에 대해서는 아직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때 일본 고객 한 팀이 큰 소리로 떠들면서 라운지로 들어왔다. 술을 마시던 손님들이 대부분 입구로 머리를 돌렸지만 리 혜는 여전히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손님들이 자리에 앉아 좀 조용해졌을 때 갑자기 리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목을 빼 들고 전신전령으로 유리창을 들여다보고 있는 거였다. 잭은 그녀의 시선을 쫓았으나 거울처럼 반사하는 유리창엔 라운지의 전체가 고스란히 비쳐 있어 그녀가 누구를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그녀의 시선을 확인한다. 아무래도 방금 들어온 일본인들의 테이블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리혜는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중년 사나이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잭도 그 사나이를 살폈다. 세상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점에서 우연히 손에 든 잡지에 위안부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었기에 리 혜가 흥취 가질 것 같아 사서 본 잡지, 저 남자는 거기에 실린 일본 연출가 토리고에 세이치였다. 저 인간이 바로 리혜가 지금도 잊지 못해 그의 정자를 훔치고 싶다는 그 배신자란 말인가?! 어쩌면!! 잭은 분한 듯이 두 손으로 자기 뺨을 쳤다. 그녀를 부산에 불러온 것도, 리혜에게 잡지를 준 것도 이 모든 힌트를 공손히 제공한 놈이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경험해 본적이 없는 끔찍한 불안감에 온 몸에 오싹오싹해 난다. 

  리혜는 남자의 등에 구멍이라도 뚫을 듯 까딱 않고 응시하고 있다. 

  라운지에는 기묘한 삼각관계가 생겼다. 

  12년전의 리혜의 비참한 연애사부터 영화 보다도 더 아찔한 눈앞의 이 긴장한 광경까지 그 자초지종을 다 속속 들이 아는 사람은 오직 잭 한 사람. 상황 판단을 냉정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데 추가한 와인 한 병도 바닥났으니 엄청 취한 상태이다. ‘어차피 큐피드 역할밖에 못하는 운명이 라면 게임이나 해보자’ 그는 볼펜을 꺼내 냅킨에 몇 글자 갈리고 바텐더를 불러 귓가에 뭔가 속삭인다. 바텐더는 곧바로 일본손님들의 테이블로 가서 세이치에게 쪽지를 건너 줬다. 

  “뒤에서 혼자 술 마시고 있는 저 쿨한 여자 누구일까?!”  쪽지를 읽은 세이치는 앉은 채로 뒤를 둘러보았다. 오른쪽 구석에서 혼자 술 마시고 있는 리혜의 등에 시선이 머물었을 때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목은 점점 길어지며 여자의 목덜미에 시선이 고정된다. 

  차밍 하면서도 우아하고, 도도하면서도 날씬한 저 뒷모습, 지금도 가끔 꿈에서 안으려면 사라지는 그녀, 꺾어질까 걱정될 정도로 가는 목덜미, 저 라인은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신이 만든 조각작품이다. 

  ‘리혜!!’ 세이치는 그녀를 향해 움직였다. 눈을 깜빡이면 저 아름다운 비누 방울이 금방 사라질 것 같아 숨도 못 쉬고 한발짝 한발짝 다가간다.

그의 모습을 한번만 멀리 서라도 바라볼 수 있다면 하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잡지에 실린 정보를 단서로 극단이 숙박하는 호텔을 찾아냈지만 라운지에서 그에게 발견될 줄은 예상 밖이었다. 도망 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숨이 막히며 혈액 순환이 멈춰 얼굴이 창백 해진다.

  “실례지만…” 그의 목소리가 귀에 닿는 순간 온몸이 떨렸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목소리!” 지금 뒤에 있는 이 남자는 틀림없이 그이 였다.

  “저 말인가요?” 리 혜는 끄떡 않고 유리창에 비치는 세이치의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내가 아는 중국 친구 같아서요!” 세이치도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건네면서 리 혜의 앞으로 다가선다. 턱을 약간 치켜 올리고 천천히 얼굴을 왼쪽으로 돌리며 그를 쳐다보는 리혜, 12년만에 마주치는 눈동자, 그녀의 깊은 눈빛 속엔 쌓이고 쌓인 아픔과 원망, 그리고 아직도 은근하게 남아 있는 애틋한 감정…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이 얽히고 걷잡을 수 없는 가슴 속

의 파도는 창밖의 저 밤바다 보다 더 거세찼다. 몇 초간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다가 “그러세요?! 당신도 내가 아는 배신자와 똑 같이 생겼네요!” 목소리는 분명히 떨렸지만 그녀의 타고난 악마적 본성은 무자비하게 독을 내 뿜었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거만한 태도로 리 혜가 소파를 가리킨다. 

  두 사람의 주고받는 광경, 잭에게는 고문이었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뜻이기에 저항은 헛된 짓이다. 잭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라운지에서 나왔다. 그러나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는 순간 후회했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그녀의 손목을 끌고 함께 나왔 어야 했는데…

  “이거 리혜 글씨 아니죠?” 세이치가 쪽지를 보인다. 쪽지를 읽은 리 혜는 자리에서 일어나 라운지를 둘러본다. 하지만 그림자도 없었다. 어쩐지 제3자의 시선을 느끼기는 했으나 잭이 숙박하는 호텔이 아니었기에 그 시선이 잭일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리혜는 라운지에서 뛰쳐나와 잭을 찾았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이미 고독한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그림자도 안 보였다. 

  세이치도 뭔가 눈치는 챘지만 모르는 척하고 돌아온 리혜에게 묻는다.

  “......왜 여기에?”

  “당신은 왜 여기에 있어요?”

  “나는 리 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당신과 약속한 일이 있었던 가요!”

  “전쟁의 후유증을 차세대들에게 남겨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했잖아요.”

  “옛날 일은 깡그리 잊었어요.”

  “나는 잊을 수 없었습니다.”

  “저의 메모리는 완전 삭제해 복원 불가예요.” 리혜의 말투는 일본도(刀) 보다도 더 날카로웠다.

  “뭘 마실 래요?” 세이치는 슬쩍 화제를 돌린다.

  “맥주!”

  “지금도 베이징에 있어요?”

  “아뇨, 상해예요.”

  “어떤 일을 하시나요?”

  “무역회사에서 통역을.” 왠지 거짓말을 한다.  

  “어떤 업입니까?”

  “베이비 옷”

  “일본에는 업무가 없나요?”

  “1년에 한두 번 정도 출장 다녀요.”

  “그랬군요! 전혀 몰랐네요.”

  “알려고도 안 했죠?”

  “알아서는 안 된다고만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용서해 주세요!” 세이치는 머리를 가슴에 깊이 파묻고 사죄한다.

  “뭘 용서하라고 하는 거 에요?”

  “전부 다!”

  “내가 쩍하면 허리 굽히고 고개 숙이는 남자를 싫어한다는 걸 잊었나요?” 그토록 보고 싶었고 저 가슴을 때리면서 마음껏 울고 싶었는데 입만 열면 독을 내뿜는 것으로 마음의 밸런스를 잡으려 하는 것 같았다. 

  “부인은 잘 계세요?” 괴롭히려고 일부러!

  “그녀는 나를 포기한지 오랩니다.”

  “왜서요?” 조금은 후련한 느낌!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었어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이고 술과 여자를 좋아하고 그것도 모자라 종자까지 없다네요.”

  “불임은 당신 문제였나요?” 

  그의 아이를 가진 적이 있었기에 부인의 거짓말이라는 걸 확신했다.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가 보죠. 그녀와 아이를 가질 생각도 없었으니까.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었을 따름이었어요. 장소 바꿀까요?”

 

 

  인간이란!

 

  두 사람은 해변가를 향해 걸었다. 몇 걸음 앞서 걷고 있던 세이치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미소 지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리 혜는 그의 큰 손바닥 안에 자기 주먹을 넣었다. 옛날에 데이트할 때 항상 그랬듯이. 추운 겨울에는 세이치가 이렇게 리혜의 작은 손을 감싸 따뜻하게 덥혀 주군 했었다. 리 혜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남자의 손바닥 안에서 꿈틀거린다. 12 년간의 공백을, 모순되는 감정, 배신과 그리움과 허망한 믿음을 어떤 말로  전달해야 할지? 둘 다 벙어리가 되어 서로의 발끝에 시선을 떨구고 조용히 걷기만 했다. 

  드디어 리혜가 머무는 호텔 앞까지 왔다. 이렇게 계속 손잡고 걷기만 해도 좋은데… 영원이란 얼마나 길까? 죽으면 영원이라 하는가? 아니면 죽은 후에도 계속되는 혼을 영원이라 부르는가? 어떤 거라도 상관은 없는데 이 해안이 왜 이렇게 짧아!? 벌써 그와 헤어져 자기는 호텔로 들어가야 하나? 할말이 태산 같은데!”

  자전거 사고로 맺어진 인연, 세이치와 티베트 여행 가면서 달리는 열차 독실에서 체험한 첫 섹스, 세이치의 증발, 아버지의 사망, 선택의 여지도 없이 잔인하게 낙태할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핏줄, 잭의 프러포즈… 짧은 인생인데 왜 이렇게도 우여곡절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왜 나만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지… 리혜는 가슴 앞에 두 손 모아 조용히 바다를 향해 기도했다. 

  “하느님, 다른 욕심은 다 버릴 테니 제발 나에게 아이만 돌려주세요!” 속으로 소원을 비는 순간 쌓여왔던 외로움과 고통이 울컥 치밀어 올라 리 혜는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엷은 어깨가 물결치는 걸 보면서 세이치도 뒤에서 소리 없이 눈물 훔친다. 지금 두 팔을 벌리면 그토록 그립던 저 여학생을 이 가슴에 안을 수 있다. 하지만 무슨 염치로 저 애를 다시 포옹한단 말인가? 자기에게는 저 애를 안을 권리조차 없다. 또 다시 저 애를 놓아줘야 하는 운명이라면 오히려 다치지 말고 그냥 밤새며 이야기만 나누는 게 저 애를 위한 거라고 생각했다. 남자의 독선적인 생각이라는 것도 모르고 세이치는 뒤에서 또 “뚜이부치!” 를 반복한다. 처음 만난 그 날부터 세이치는 리혜에게 사죄할 줄 밖에 모르는 남자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순간 리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세이치의 감싸주는 포옹이 필요했다. 지친 몸을 그의 가슴에 기대여 몇 분, 아니, 몇 초라도 쉬고 싶었다. 저 하늘이 무너져도 좋고, 이 바다가 뒤집혀 져도 좋으니 자기가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한 건 그의 따뜻한 가슴팍이었다! 이건 지친 여인의 마음 속의 부르 짖음이다. 헌데 등뒤는 싸늘했다. 

  “세이치, 세이치!” 대답이 없다. 뒤를 돌아본다. 세이치는 거기에 없다. 믿을 수가 없었다. 또 사라졌다. 다시 한번 버림받은 느낌에 소름이 끼친다. 그때 그가 멀리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술과 안주를 가득 들고 뛰어오는 거였다. 그가 눈물을 감추기 위해 잠깐 떠났음을 리혜는 알아 차렸다. 일본 남자들은 참 이상해! 잭이 였다면 틀림없이 자기 정서 보다 여자의 감성을 다독이는 것을 우선했을 거야. 그 차이를 새삼스럽게 느끼는 순간 이였다.

  “저 바위 위에서 마셔요.” 그들은 계란 모양의 큰 바위를 골라 앉았다. 휴대폰이 울린다. “…임마, 아까 봤지? 난 지금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런 여인에게 납치당해 못 돌아가. 아무튼 난 실종이야.”

  날라리 같은 모습 옛날에는 본적 없는 그것마저 멋있어 보이는 건 왜 서일까?! 전원을 끊어버리고 가슴 주머니에 넣는 걸 보면서 리혜는 폰에 질투를 느낀다. 다음 생에는 그의 폰이 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하루 종일 그의 가슴에 딱 딸라 붙어 그의 심장과 같이 호흡할 수 있고 조금만 졸라대면 바로 키스하면서 속삭여 주는 저 핸드폰… 바보 같았다, 자신이!

  “자, 이제 건배합시다” 리혜에게 소주를 따르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세이치가 묻는다. “아이 있어요?” 긴장한 분위기를 깨려고 가벼운 화제를 꺼냈는 데 “아이” 라는 단어가 리 혜의 인생에서 제일 건드려서는 안 되는 키워드라는 걸 그는 알 리가 없었다. ‘하필이면!!’ 첫마디부터 상처에 소금을 뿌릴까! 가슴의 통증을 억누르면서 리 혜는 잔을 받았다.

  “결혼과는 인연이 없었어요”

  “애인은 있겠지요?”

  “사랑을 믿지 않는 냉혈동물이라서, 혼자 자유롭게 살아요!”

  “부럽네, 그런 자유가.”

  “당신은 자유가 없나요?”

  “바람 필 자유는 있어도 사랑에 빠질 자유는 없었어요”

  “즐거운 삶이시네.”

  “자기 가슴에 달린 하트인 데도 다른 사람의 지배에서 벗어날 자유가 없는 불상한 남자예요.” 그는 쑥스러워 '리 혜' 라고 찍어 말 못하고 다른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리혜에게는 그가 아내의 지배로 자유가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질투심에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입에서 또 뱀이 나오려는 걸 소주로 목구멍을 틀어 막고 못 들은 척했다.

  “관광입니까?” 모르는 척하는 리 혜.

  “아니, 공연 때문에 왔어요.”

  “무슨 공연?”

  “6년 전에 병원을 접고 그 후로는 연극 창작에 몰두해 왔어요.”

  “아, 옛날 꿈이었죠. 어떤 장르에?” 능청스럽게.

  “믿어 주질 안겠지만 나에게는 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무대 연극을 창작하는 과정이 리혜를 가장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어요.”

  “그런 말에 내가 용서할 것 같아요?! 다른 변명은 필요 없고 진실만 말해줘요. 왜 말없이 사라졌는가를?”

  “용서받을 권리조차 나한테는 없지만 진실한 이유는 당신 아빠와의 약속이기에 말할 수 없어요. 이해해 주세요.”

  “뭐 라 구요? 우리 아빠와 약속?!”

  “네. 학교까지 찾아오셔서 리혜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조용히 떠나 달라고 하셔서. 그래서 쪽지 한 장 남기지 못 하고 북경을 떠났지요. 너무너

무 죄송해요!”

  “당사자인 나한테는 알 권리가 있어요.”

  “이해하지만 무덤까지 가져가겠다고 다짐했으니 남자들끼리 한 약속을 어길수 없잖아요.” 

  “좋아요, 그럼 내가 먼저 말할 게요!” 소주 한잔 쭉 들이켰다. 슬픔에 젖은 깊은 눈동자속으로 바닷물을 빨아들일 듯한 강렬한 눈빛으로 파도 치는 밤바다를 한참 쏘아보다가 또 한잔 입에 쏟아 넣었다. 그녀의 가슴속에서는 아직도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당신이 사라진 직후 임신을 알게 되었어요. 한 남자를 깊이 사랑했다는 유일한 증거였기에 혼자 낳아 키우려 결심했지요. 그래서 졸업을 앞두고 퇴학처분 받고 캠퍼스에서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아빠와의 싸움이 시작되어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가출했더니 이에 격노한 아버지는 심장병이 발작해 저 세상으로 영영 가버렸어요. 나에게 용서를 빌 기회도 안 주고! 아빠의 유언은 “마지막 부탁이다. 제발 일본 놈의 종자를 남기지 마! 아빠는 저 세상가서도 용서 못 해!” 사랑을 선택한 결과 아빠를 잃고, 아빠의 목숨을 앗았기에 그 죄로 아기를 잃어야 하는 21살의 퇴학당한 여대생! 나의 아픔을 상상해 봐요!!”

  세이치는 무릎 꿇고 소리도 못 내고 흐느끼고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아픔과 죄책감. 하지만 리 혜는 지독하게, 무자비하게 12년동안 참고 견뎌온 사연들을 그에게 쏟아 낸다. 

  “시골 산부인과 수술실은 더럽고 피 냄새가 풍기는 도살장 같았어!” 

  파도가 멈췄다. 바람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후~, 오장육부가 송두리채 뽑히는 것 같은 통증, 수술 도구들이 부딪히는 금속 소리, 이어서 수술대 아래에 놓은 버킷에 피덩어리가 쏟아지는 소리… 그때 겨우 초음파에 비추던 작은 생명, 뱃속에서 그토록 건강하게 꿈틀거리던 내 아기가 어떻게 되는 지를 알게 됐어…”

  “그만해, 진정해, 리혜! 다 내 잘못이야!” 흥분해 바다에 뛰어들 것만 같은 리혜를 세이치는 꽉 끌어안고 안착 시키려한다. 

  “아니야, 똑바로 들어! 왜? 아프지?! 아픔에서 또 도망 치려구?!” 리 혜는 세이치의 팔을 뿌리치고 바위 끝으로 기어가 무릎을 꿇고 목 메인 소리로 또박또박 내 뱉는다.

  “5 개월 동안 내 뱃속에서 나와 함께 숨 쉬고 있었어. 그런데 그 작은 생명은 잔인하게도 튜브에 빨려 버킷으로…돌려줘! 이봐, 세이치, 내 아기를 돌려주란 말이야~!” 리 혜는 가슴 치며 통곡한다.  

  동트기 전의 해변가에 지옥에서도 들을 수 없는 비참한 통곡 소리가 울려 퍼진다. 세이치는 광란상태에 빠진 리 혜를 바위 안쪽으로 안아 당기며 “미안해, 죄송해!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지켰 어야 했는데. 난, 아무것도 모르고… 미안해! 나 어쩌면 좋을까?! 정말로 죄송해…!” 

  마침내 세이치의 가슴에 쓰러져 흐느끼는 리 혜. 끝내 세이치도 사실을 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목숨 걸고 반대한 이유는 엄마가 종군 위안부였던 과거로 사람들의 멸시와 희롱을 받다가, 자기가 없어지는 것이 딸을 위하는 거라며 자살했기 때문이래! 그래서 일본인에게 절대 딸을 줄 수 없다며 딸의 우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니 나더러 잠자코 사라지라고 하셨어. 중국에 머물러 있는 한 너를 만나지 않겠다고 한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킬 자신이 없어서 일본으로 돌아가 결혼함으로써 너를 포기하려고 했지.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겠어! 혼자서… 어떻게 견뎌냈을까!!!” 세이치는 인생에서 이토록 가슴 아파본 적이 없었다. 리혜에게는 너무나도 억울하고 불공평했다! 부모와 아기까지 죄다 잃은 리혜가 너무나도 가슴 아프고 지금까지 책임회피 하면서 살아온 자신이 비열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볼을 리혜의 머리에 비비고 손으로 머리를 끝임 없이 쓰다듬으면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또 “뚜이부치!”를 반복한다.

  어느덧 핑크색이 살짝 물든 하늘과 바다 사이에서 아침 해가 파도에 흔들리고 있다. 거대한 스크린을 배경으로 남녀가 무릎을 꿇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이 순간, 하늘・바다・바위・모래… 세상의 모든 것이 그들 둘 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시공과 국경을 초월해, 세기를 넘겨 품어온 첫사랑, 둘은 웅대한 자연 속에서 다시 알몸으로 마주했다.

  “더 이상 너를 울게 하지 않을게! 이젠 네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쫓아 갈 테니까 용서해줘!”

  말도 끝나기 전에 리 혜는 오른손으로 세이치의 왼쪽 뺨을 쳤다. “이건 아기 거”, 이어서 왼손으로 반대편을 하나 더 친다.  “이건 도망간 죄값!”  

  세이치는 리혜를 확 끌어당겨 힘껏 포옹하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인다.

  “너를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어. 정말이야! 네가 울면서 나를 찾아 헤매고 길목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걸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 당장이라도 북경에 가서 너를 만나고 싶었어!” 세이치는 리혜의 얼굴 파츠 하나하나에 가볍게 키스했다. 달리는 열차의 독실에서 처음으로 그녀의 귀중한 몸을 조심스럽게 다루던 그날처럼… 그에게 버진을 준 여자, 얼마나 그리웠던 여인인가!! 세이치의 입술이 그녀의 귀에서 목으로, 쇄골에서 가슴으로, 자기 아이를 품었던 위대한 배와 자궁으로 미끄러진다…

 

 

  돌아온 천사

   “리혜님, 들어오세요.” 간호사가 부른다. 최근 컨디션이 안 좋아 병원 나들이를 자주하고 있는 리 혜.

  “이름은?” 

  “리혜입니다.” 성명확인후 의사선생님은 상관없는 질문을 한다.

  “한국 분이세요?”

  “아니요, 중국조선족입니다.” 

  “내일 가족과 함께 다시 오세요.”

  “가족이 없는데요.”

  “실례했습니다. 친척은요?”

  “저는 중국에도 친척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리 혜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다가 묻는다. “그럼 검사 보고를 지금 말해야 되겠네요. 좋은 것과 나쁜 거, 두가지 결과가 있는데 어느 거부터 듣고 싶어요?”  

  “좋은 거부터 알려 주세요.” 이상한 예감. 

  “임신56일째입니다.”

  귀를 의심했다. 무의식적으로 하복부에 두 손을 얹으면서 “선생님, 지금 뭐라고 하셨죠? 다시 말씀해 주세요.”

  “리혜 님은 임신했습니다.”

  “선생님, 진짜예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 기뻐 어쩔 줄 모르는 리혜. 그러나 선생님은 전혀 축복해주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반대로 너무나도 무표정했다.

  “기다리던 임신이라면 축복 드려야 하는데… 미안해요. 당신은 지금 아기를 낳을 몸이 아닙니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선생님은 리혜를 바라본다.

  “왜요? 왜서요?!” 배를 감싸는 두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준다.

  “진정하고 들으세요, 미스 리. 당신은 지금 암이라고 진단이 나왔습니다” 오늘은 귀가 참 이상해. 리 혜는 농담이죠? 라는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선생님의 눈을 들여다본다.

  “신장암입니다. 내일이라도 금방 입원해야 하니 아기는 포기하세요!”

  선생님의 목소리는 마치도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우리 엄마는 자살로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심장병으로 돌아가셨어요. 우리 가족에는 암이라는 DNA가 없습니다. 뭔가 잘못된 거 아닌가요?!” 혈연 관계가 없는 가족관계를 그녀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선생님, 저는 아주 건강합니다. 몇 년 동안 감기도 한번 안 했거든요!” 

  “부정하고 싶은 심정은 알고도 남음 있지만 즉시 입원해야 합니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배를 감싸고 있는 손은 벌벌 떨리고 있다. “안돼요, 절대로 안돼요. 두 번 다시 아이를 잃을 거면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지!” 라고 소리지른 것 같은데 그 후에는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기억 안 난다.

 

  부산사건이후, 리혜는 세이치에 대한 감정을 미련없이 정리할 수 있었다. 그날 리혜는 이성(理性)과 인성사이에서 오가며 조금 흔들리기는 했다. 그런데 속에 쌓였던 독소를 세이치 앞에서 깨끗이 토하고 나니 흐리멍덩하던 정신이 말끔하게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자기가 진정 원했던 것이 세이치가 아니라 잠재의식속에 깊이 숨어 있어 감지 못했던 진실이 따로 있은 것 같았다. 그날 새벽 동틀 무렵에 그의 뺨을 치면서 영혼 속의 악마가 얼굴을 내미는 걸 자각했다. 그것이 바로 잃었던 생명을 다시 찾아오겠다는 강렬한 소망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세이치와의 마지막 사랑을 거절 안 하고 받아들였던 거다.

 

  잭과는 상사와 부하, 원래자리로 돌아와 편한 사이로 일에 몰두해왔다. 그렇지만 리 혜의 상태는 잭의 눈을 속일 수 없었다. 확인하려고 한번 이야기하려던 참이었는데 리혜가 먼저 집무실로 찾아왔다.

  “오, 반가운 손님이시네. 어서 앉아.”

  리혜는 선채로 잭 앞에 하얀 봉투를 살짝 내민다. 

  “놀라지마.” 사표였다.

  “뭐야 이거?!” 잭은 의자에서 벌떡 튀어 일어나면서 소리지른다. 경고도 없이 폭탄 던지는 담대한 여자라는 건 수없이 경험해봐서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지만 이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큰 소리로 “너 미쳤어? 말도 안돼! 왜? 내가 그렇게 보기 싫어?”

  “그런 게 아니야, 이유는 저녁 식사하면서 말해 줄게”

 

  레스토랑에서 리 혜는 잭에게 임신과 암, 그리고 항암치료 받지 않기로 결단한 것도 몽땅 털어놓았다. 

  청천 벼락을 맞은 잭은 상황판단이 잘 안 되는지 멍하니 리 혜를 쳐다보기만 했다. 처음 보는 표정이다. 

  잭 앞에서 리 혜는 언제나 자유롭고 편했다.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인정해 주고 평가해 주니까. 일본에서 살면서 공사를 불문하고 가치관이나 사고방식, 깔끔한 업무처리 방식까지 호흡이 맞아 눈빛 하나, 표정 하나로 의사소통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파트너였다. 그는 국적이나 인종차별, 가면을 싫어하는 상사였고 공평과 협조, 관대와 조화를 늘 강조하는 누구 한테서도 존경받는 임원이었다. 

  다만 리혜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잭은 유명한 플레이보이였다. 때문에 잭을 결혼상대로 생각해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리혜를 알게 된 후 그는 플레이보이를 졸업하고 2년동안이나 흔들림 없이 리 혜만 쫓아왔는데도 지독한 그녀는 《친구 이상, 연인 이하》 관계를 승화시켜 주지를 않는다. 리 혜는 잭이 고통스럽든 말던 자기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자기가 약해지니까, 기댈 데가 없으니까, 기어이 아기를 낳고 싶어서, 잭을 이용하려는 교활한 마음이 아닌지. 잘은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잭에게도 사랑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느낌이었다. 

  “항상 거만하고 무례한 태도로 대해서 미안해, 진심으로 사과할 게. 잭을 통해서 남자란 어떤 생물이며 왜 여자를 좋아하는지? 많이 배웠어. 잭은 플레이보이가 아니라 나의 거울이었어.”

  “지금은 당장 병원을 찾는 것이 제일 우선이야. 같이 찾자. 하지만 출산후엔 꼭 컴백해야 돼. 약속 할거지?” 잭은 리혜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상냥하게 속삭인다.

  “약속할 게.” 

  그토록 자존심이 강하고 건방 지고 누구의 앞에서도 기죽지 않던 리 혜가 마치도 유치원 아이처럼 머리를 끄덕인다. 3개국어를 구사해 깔끔하게 통역하는 그녀의 탁월한 능력은 회사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카리스마 직원이다. 언제나 자신감에 넘쳐 당당한 리혜를 존중하는 동료로 사랑스러운 여성으로 동등하게만 생각해 왔는데 오늘 처음으로 그녀도 연약한 여자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가슴이 뭉클해 콧등이 저려 온다. 

 

  “태아의 안전을 우선, 항암제치료는NO” 라는 임신부를 받아들이는 병원은 당연히 없었다. 

  낳아 준 엄마, 키워준 부모, 그리고 첫 아기를 낳을 권리를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오는 생명 가는 생명까지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하리라 굳게 다짐했다.

  화교친구의 소개로 리 혜는 유명한 중의학교수와 변호사를 끼워 계약을 맺었다. 집에서 병마와 싸우는 리혜의 모습은 말그대로 비장했다. 침대에 누우면 바로 보이는 천장에 태아의 초음파사진을 크게 확대해 붙이고 너무도 아플 땐 입에 탁구공을 넣고 씹는다. 중의요법으로 

  오는 생명과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생명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아기는 누가 키워주는가? 이 문제가 제일 가슴을 아프게 했다. 하지만 리 혜는 이젠 종이 한 장 들어 올릴 힘도 없었다. 배속에서 꿈틀거리는 새 생명, 다시 엄마를 찾아와 내 뱃속에서 싹트고 고동치며 이 세상으로 와서 엄마의 삶의 힘이 되겠다고 버둥거리는 아기…!

  임신 8개월째에 접어들어 결국 입원을 해야 했다. 잭은 휴가를 맡고 하루도 빠짐없이 병실에서 그녀의 간호를 하고 있었다. 손을 잡고 배를 쓰다듬으며 아픔을 나누고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었지만 적당한 운동과 매일매일의 스케쥴 관리, 그리고 마사지하며 미래를 속삭이는 것만으로도 리혜에게는 큰 정신적 안정과 위안이 되었다. 뭐든지 혼자서 견디고 해결해 나가는 게 몸에 뱄던 그녀는 잭의 존재가 얼마나 감사하고 힘이 되는지 몰랐다. 

  그날 잭은 리혜에게 백합 꽃무늬가 프린트된 잠옷을 선물이라며 갈아 입혔다. 침대 머리를 높이 올리고 화장도 살짝 해주는 거였다. 그런 다음 부드럽게 속삭이며 머리를 빗어 준다.

  “리혜는 어느 모로 봐도 동양인형이야, 이렇게 검은 머리를 빗고 있을 때면 꼭 인형놀이를 하는 느낌. 세상에 어쩌면 너처럼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여자애가 있을 까!!”

  “잭, 사실 당신은 유머러스하고 항상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이상적인 상사이고 쿨 한 남자라 관심은 있었어. 다만 첫 인상에 ‘건방진 미국인, 한심한 플레이보이’ 라는 낙인이 찍혀져 당신과 멀리하는 것이 두 번 다시 상처 안 받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고 의식적으로 자기 눈빛을 피해 왔어. 내 자존심은 단순한 여자의 자존심과 좀 다르다는 걸 알지? 엄마아빠는 조선족; 나는 버림받은 아기였으니 한족이나 조선족일 수도 있겠지만 만족이나 회족 일 가능성도 있잖아? 생각 해봐, 나는 부모도 형제도 없고, 가정도 없고 조국도 떠났어. 생각 해보면 그래서 더더욱 자기 핏줄, 자기 골육에 집착하는 것 같아. 후~, 요즘은 이상하게 아빠가 꿈에 자주 보여. 어쩌면 우리 아빠가 딸이 너무 불상해서 빼앗아갔던 아기를 다시 나한 테 돌려준 것 같은 느낌이 자꾸만 들거든. 이상하지?!...” 

  리혜의 목소리는 점점 약해진다. 숨을 가쁘게 쉬면서 말을 겨우 잇고 있다. 잭은 리 혜의 뺨을 쓰다듬으면서 애틋하게 속삭인다. 

  “넌 정말 이 지구에서 제일 와일드하고 특별한 여자야. 너의 속마음을 다 이해하고 있어. 그래서 내가 플레이보이를 그만두고 너만 사랑하게 됐지.”

  “잭, 나 조금만 더 살고 싶어, 이 아이가 나를 엄마라고 불러주는 날까지…” 살 욕망을 처음 입밖으로 내는 소리에 잭은 가슴이 조여 드는 통증을 삼키면서 “당연하지, 야, 너 너무한 거 아니니? 우리 둘의 작품도 만들어야지~, 봐봐, 너는 중국 조선족의 딸; 나는 미국과 독일의 혼혈; 우리 큰 딸, 이 애는 중국과 일본의 후대. 우리 둘이 딸과 아들 하나씩 더 만들면 동양과 서양의 천사들이 날마다 마당에서 떠들썩 뛰어 놀고 할거잖아. 상상만해도 살 힘이 생기지? 우리 가족은 미니 연합국! 어때? 상상만 해도 신나지?!” 

  잭은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한다. 그는 오늘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리혜는 오늘 자꾸만 졸려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잤다 깼다 정신 못 차리고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얼굴에 찬물이 떨어지는 감이 들어 눈을 뜨려고 애쓰지만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서 뜰 수가 없다. 얼굴 가까이에서 누군가 흐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잭인가? 아니, 냄새가 달라. 바다처럼 상쾌하고 시원한 향수. 하지만 그 향기가 또다시 리 혜를 꿈속으로 초대하는 듯 희미한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 가는 듯 가물가물한 의식… 

  …길가에서 부딪혀 얽힌 자전거, 달리는 열차 창문으로 쏟아 들어오는 불타는 석양, 해운대의 일출… 흩어진 기억의 영상들이 흐리터분한 눈 앞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흡혈귀 튜브, 핏덩어리, 수술도구들이 부딪치는 소리… 

  깊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려고 하는 가는 영혼 앞에 바위처럼 큰 물체가 조금씩 모양을 드러내고 있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오, 잭, 불쌍한 잭, 왜 자꾸 울어? 내가 진짜로 나쁜 여자인 가봐.’ 리 혜는 잭에게 자꾸만 미안하기만 했다. 힘껏 눈을 뜨려고 애쓴다. 두 남자의 얼굴이 엇갈리다 겹쳐서 하나로 됐다가 또 다시 둘로 보인다.

  “으하~, 으~후-우~, 내 아기! 잭, 잭, 아기가 차고 있어! 나 죽으면 안 되는데…” 말도 바로 못하는 리 혜는 다시 정신을 잃는다.

  “나야, 나! 빨리 눈 떠봐!” 세이치의 얼굴은 눈물에 콧물에 엉망이었다. 

  ‘그래 이 향수 세이치 구나. 또 잭이 한 짓이네.’ 

  “리혜! 리 혜야! 눈을 떠봐. 나야, 나!” 세이치는 리 혜의 어깨를 흔들며 감정을 컨트롤 못한다.

  리혜가 가냘픈 소리로 사과한다. “아이만 찾아오고 싶었어. 그때 억울하게 지워버린 그 아이! 이제 저 세상 가면 그 애와 다시 가족으로 만날 수 있겠지?”

  “코밑에서 이런 고통을 받고 있는 줄도 모르고 상해와 북경에서 너를 찾아 다녔어. 왜 이렇게 지독하니? 혼자서… 혼자서 얼마나 아팠겠어! 너무 끔찍해! 난 그래도 의사였단 말이야!”

  “오해하지 마, 내가 원한 건 당신이 아니라 이 아이였어. 그리고 지금 내 사랑은 당신이 아니라 잭이에요. 나의 과거, 현재, 미래 모든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사람. 잭은 좋은 아빠가 될 거예요.”

  “부산에서 약속했지, 같이 살기로. 재판이 곧 끝날 거야!” 그들의 대화는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는 잭에게도 들렸다…

  “리혜! 리혜!!” 갑자기 세이치의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잭은 즉시 의사를 부르고 정신 잃은 리혜의 옆으로 뛰어와 얼굴과 배를 쓰다듬으며 귀를 가슴에 대고 숨소리를 체크한다.

  “분만실!” 의사의 긴장된 목소리가 병실에 울린다. 돌변한 리혜의 상태에 간호사들이 침대를 밀고 분만실로 달린다.

  순식간에 리혜는 침대채로 사라졌다. 대기실에서 잭은 두 손으로 얼굴을 싸 쥐고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뭐가 어떻게 된 판인지 어리둥절해 멍청하게 서있는 세이치의 낯을 젖 먹던 힘까지 넣어 때렸다. 벽에 머리를 박으면서 세이치가 엎어졌다. 이번에는 자전거가 아니라 윤리도덕 앞에서 그는 엎어졌다. 엎드려 이마를 바닥에 대고 “죄송하다~ 리혜, 미안해 리혜! 다 내 탓이야. 어엉, 엉엉…” 

  “네놈이 남자 노릇 똑바로 했으면 이런 일 없었어. 개새끼!” 잭은 손에서 피가 흐를 때까지 벽을 두드리며 부르짖었다. 

 

  “응아... 응아...” 희망의 울음 소리가 경악한 분위기를 깨트리며 들려왔다. 마침내 의사가 수술실에서 나온다.

  “리혜는?” 둘이 동시에.

  “아기는 잘 견디고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거.” 선생님은 머리를 가로 젖으면서 잭에게 DVD를 건넨다.

  견강한 여자이기에 적어도 한 번은 자기 품으로 돌아오리라 믿었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그 보석 같은 눈을 영영 감아버렸다. 숨쉬는 얼굴을 뜯어볼 틈도, 사랑한다고 말할 시간도 안 주고 리혜는 숨을 거두었다. 잭은 아직 따뜻한 리혜의 몸을 가슴에 안고 어처구니없는 듯 통곡하였다. “NO, 안돼, 말도 안돼! 너무 불공평해!”

 ‘상해에 있어야 할 리혜가 도쿄에서 살았고, 아이를 되 찾아오기 위해 암 치료를 거부했다고? 그럴 리가, 이거 다 거짓말이야!’ 세이치는 눈 앞의 상황들이 보이지도 듣기지도 않았고 언어까지 잃었다. 오감은 기능을 잃고 영혼은 송두리채 뽑혀 말 그대로 유령이었다…

 

  유언에 따라 장례는 파티식으로 진행되었다. 동료들과 한중일친구들, 그리고 거래처회사 사람들, 100여명이나 왔는데 그 속에서 갓난아기, 사랑만이 리혜의 유일한 육친이었다!!

  잭이 아기를 안고 제일 앞줄에 서 있다. 엄마와 마지막 고별을 시키려고!

  세이치는 부은 얼굴로 그 뒷줄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다.

 

  비장한 분위기속에서 커다란 스크린에 제왕절개 수술 화면이 투영된다.

   “응아… 응아…"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로 오가는 리혜에게 아기의 얼굴을 보여 주려고 간호사가 엄마의 가슴에 아기를 안기며 리혜를 부른다. “이봐요, 아기가 엄마를 보고 있어요!” 리혜의 눈꺼풀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녀는 혼신의 힘을 눈에 집중하여 가까스로 눈을 뜬다. 아기와 마주하는 순간, 핏기 없이 파란 얼굴에는 이 세상 모든 엄마들과 마찬가지로 끝없이 온화하고 행복한 미소가 떠오른다. 아기를 바라보는 눈은 유성처럼 반짝였고 눈가에는 눈물이 쭈룩쭈룩 흘러내린다.

  식장의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클로즈업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본다. 가늘고 숨찬 목소리가 음향의 보조로 가냘프게 흘러나온다.

  “오, 사랑아… 내 사랑…, 네가 사랑이었구나! 오… 우리 천사! 엄마가 얼마나 사랑이를 만나고 싶었는지 알지? 엄마한테 와 줘서 고마워…” 아기를 만지려고 애쓰지만 손을 들어 올릴 힘이 없어 손가락만 움직거린다. 간호사는 리 혜의 손을 당겨 아기의 작은 손을 잡도록 서포트 한다. 엄마의 식지가 겨우 아기의 작은 손가락에 닿았다. 엄마는 드디어 아기의 손가락에 자기 손가락을 걸었다. 마침내 엄마와 아기가 이어졌다. 혈연으로, 육친으로, 핏줄로! 

  그 순간 어디서 솟아나오는 힘인지 리혜의 목소리가 똑똑히 식장에 울려 퍼진다.

  “선, 선생님… 조금만… 하루만 더 살려주세요… 잠시만이라도 내 아기 안고 옆에서 자게 해 주세요… 오, 이 작은 생명 내가 지켜줘야… 하는데…”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엄마를 찾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장식장에 우렁차게 울려 퍼진다…

 

송월 약력

북경사범대학교 외국어학부 일본어학과 졸업,

북경중앙민족대학교 외국어학부 일본어 교사,

교토부립대학교 문학부동양사학과 석사 연구생 수료,

일반사단법인 세계여성기업연맹 대표.

장편소설  『내 침대 놓을 자리』『私のベッドどこに置く』) 일본어로 출간, 日本(株)文芸社(2007 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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