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화강 문학지 2023. 04호

인왕산을 품고 있는 서울 도심의 산 중턱 공간이 온통 연기로 하늘을 뒤덮고 여러 대의 소방 헬기가 진화하는 장면이 티비 화면을 채운다. 산불을 보면서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나뿐일까? 일상생활에서 순식간에 모든 걸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에 삶의 목적과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앞선다. 산란하고 우울해지는 마음에 내 삶도 파괴되는 것만 같다. 아직은 견딜만한 고통과 모순 속에서 우울함을 떨쳐버릴 생각으로 등산을 나섰다. 

  봄꽃은 아름다움을 발산하며 나의 마음을 유혹한다. 야산의 진달래부터, 꽃비가 되어 하늬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의 아름다움까지 나이도 잊은 채 가슴을 설레게 한다. 나는 서울에서 가장 먼저 봄소식을 알린다는 인왕산 둘레길을 돌아보려던 생각을 접고 집에서 가까운 관악산 수목원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일반인에게 한시적 개방되어 ‘비밀의 숲’이라고도 불리는 서울대관악수목원의 봄 정취를 즐기고 싶었다.

서울대수목원은 오염되지 않은 청정지역처럼 맑고 깨끗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아름다운 산림과 꽃들의 향연이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나를 도와준다. 짧은 산행 중에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오는 봄바람을 느끼고 들으며 잠시 속내의 시끄러움과 답답함을 푼다.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바람이 전해주는 꽃향기는 소나무향기와 더불어 찌들어 살던 세상 속 내 마음을 잠시나마 포근함에 빠져들게 한다. 인터넷사진으로만 보았던 희귀식물과 멸종위기식물을 직접 보고 만져볼 수 있는 것이 신기함을 자아냈다. 수목원의 유혹에 빠져 걷다 보니 어느새 수목원 후문을 벗어났다. 길도 평탄하고 경치도 아름다워 조금만 더 올라가면서 구경하고 되돌아갈 생각이었다. 불성사로 가는 이정표가 눈에 띄었다. 아. 맞다! 마애부도가 있는 불성사를 언제 한번 찾아가보기로 생각했었지.

나는 곧바로 올라가기로 맘먹었다. 후문에서 1.5km 정도 되니 멀지도 않는 거리다. 숲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이정표와 길이 나왔다. 빠르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게 발걸음 하나하나에 느껴지는 땅의 기운을 전달받으니 어릴 적 시골에서 맨발 바람의 느낌이 든다. 초행길인 나는 능선에 두 갈래 길이 있어 왼쪽으로 가려다가 지도를 확인하니 아닌 것 같아 다시 내려와 옆길로 올라갔다. 팔봉 능선을 배경으로 아담한 절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원하게 뚫린 병풍 같은 산을 둘러싼 불성사다. 하늘은 나에게 명상과 휴식을 허락하듯 따뜻한 봄볕을 비춘다. 몸과 마음은 잠시 평온함과 시원함을 안겨준다. 확 트인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그리고 눈부신 햇살이 마음을 포근하게 만든다. 일이 풀리지 않거나 쉽게 해답이 풀리지 않으면 주위의 작은 사찰이라도 찾아 마음의 안정을 찾기도 한다. 

  내가 살고 있는 고향에도 지금의 푸른 하늘이 있고 자유로이 떠도는 구름, 지금의 포근함을 전하는 햇살도 있는데, 언제 적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타향살이에 힘들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사는 게 힘들고 무거워서 비겁하게 사람 만나는 걸 피하려고만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지만, 또한 무관심이 익숙함으로 살아왔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 나의 주위에는 훌륭한 사람들이 많다. 그 훌륭한 분들에게(나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배워야 하는데 나의 부족한 모습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피해온 것 같다. 그래서인지 아직 혼자 산타기를 좋아한다.  

  5층 석탑이 눈에 들어왔다. 좀 특이한 점은 석탑의 경우 대개 대웅전 정면으로 세워있는 곳이 많은데 좌측으로 살짝 비켜져 세워져 있다.

  기록에 보면 불성사 뒤 팔봉 능선 봉우리를 불성봉, 이상대라 불렀다고 한다. 봉은 본말사지에 전하는 불성사약지에는 신라문무왕 15년(675년) 의상대사가 소암을 짓고 자리했다고 한다. 또한 불성사는 선조 때(1590년)에 불에 타서 재창하였고 1905년에 또 불이 나서 연로한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소사했다고 전해지고 1936년에도 불에 타는 아픔을 겪은 절이라고 한 것 같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관악산은 화상산이라고 해서 오직 불성사만 화재의 아픔이 많았다 한다. 지금의 불성사는 등산객이 관악산 삼성산 11국기봉 종주 때 물 보충을 많이 해주는 중요한 위치다. 불성사는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역사적 가치만으로도 아름다운 절집이다. 그저 시간을 견디고 역경 속에서도 살아낸 흔적들이 보물이 되고 역사가 되고 있다.

  나는 대웅전 앞에 한동안 서있었다. 고요한 사찰 마당에서 부처님 앞에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지난 일에 대한 후회나 원망이 비워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불성사에서 조금 내려와 왼쪽으로 돌아 세월에 바란 바위벽에 새겨진 마애부도를 보니 이 부도의 주인이 각원선서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구조와 생김새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높이여서 사리함을 넣기 위한 사리공과 감실의 모양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지나온 일들을 생각해보면 실수를 많이 하며 살아왔다. 가끔 지혜로운 생각으로 일이 순조로울 때도 있었으나, 행동이 머리를 따라주지 않아 실수를 연발하기도 했다. 즉 일을 하거나 사람을 만날 때에는 머릿속의 생각들을 지워야 하는데 머리와 행동이 따로 놀 때가 많으니, 지혜와 수양이 부족한 것 같다. 

  내 가족이 행복하고 지혜로운 행동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도 기도를 했는데 이 기도는 왠지 들어줄 것 같지 않다. 나 자신을 어느 정도나마 알고 있으니 말이다.

  불성사를 떠나 다시 복잡미묘한 세상살이에 돌아오면 또 마음의 복잡다단한 감정에 휘말릴 것이다. 그것이 나의 모습이고 속세에서 살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끔 이렇게나마 모든 걸 내려놓고 산이 되어보고 물이 되어보고 부처님 마음이 되어보는 것도 좋다. 아주 잠깐이라도.

 배영춘 약력:  중국 서란시 출생. 재한동포문인협회  부회장, 사무국 부국장.  수필/수기 , 시 등 수 십 편 발표, 동포문학 수필부문 최우수상 등 수상 다수.
 배영춘 약력:  중국 서란시 출생. 재한동포문인협회  전 부회장.  수필/수기 , 시 등 수 십 편 발표, 동포문학 수필부문 최우수상 등 수상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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