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유흥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으면서 이번 여행을 계획하고 시간이 될 때마다 한국 문화유산 유적지를 많이 돌아보려고 했지만, 시간적 여유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고구려, 백제, 신라, 이 삼국시대는 한민족 국가들이 성장한 시기이자 고대문화가 꽃피운 시기다. 그중에서 나는 백제의 문화를 보기 위해 공주로 향했다. 공주 무령왕릉 탐방을 가을부터 계획 잡았으나 미루어져 올봄에야 갈 수 있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공주 휴게소를 몇 번 들른 적은 있지만 공주를 방문한 것은 처음이다.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2시간의 운전 끝에 웅진 백제 역사관에 주차했다. 공주는 선사시대의 유적부터 백제시대의 유적, 고려시대의 난, 조선시대는 순교의 역사가 담긴 곳이다. 

봄바람에 산속의 공기는 정신을 맑게 해준다. 산들바람이 불자 소나무는 겨우내 붙어있던 마른 솔방울은 새순의 힘에 무기력하게 내 앞에 떨어졌다. 무심히 떨어지는 솔방울이지만 백제의 것으로 생각하니 왠지 의미가 다르게 느껴지는 듯하다. 천년의 소나무라면 얼마나 좋을까? 긴 세월의 아픔을 품어온 역사를 간직해 오면서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었으면... 나는 솔방울을 주워 들었다. 가볍게 거칠고 차가움이 전달됐다. 마른 비늘 사이로 슬픔이 보이는 듯하다. 나는 솔방울을 주머니에 넣고 송산리 무령왕릉으로 들어섰다. 우선 무령왕릉 내부를 정밀하게 복원한 모형을 볼 수 있었다. 왕릉 내부는 연꽃 모양으로 그려진 벽돌이 정교하게 쌓여 있어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기 볼 수 있는 건 모형뿐이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내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왕릉 내부를 직접 보지 못한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무령왕릉과 주변 고분들이 곤한 잠에 빠진 듯 평화롭고 조용했다. 무릉왕령의 한 자락에 세상사 잊고 낮잠을 자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말이 낮잠이지 고분에 눕는다는 것은 위험할 것이다. 웅장한 왕릉의 혼이 저 산 비탈길로 인도할 것이다. 무령왕의 생애를 보고 나서 여러 생각들이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무령왕, 근초왕, 법왕 등의 역대 백제의 왕들이 백재를 부흥시키기 위해 아름다운 문화와 예술이 여러 나라에 영향력을 내세우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은 한 세력에 굴복하게 된 백제의 말기다.

무령왕릉 산길을 따라 내려오니 국립박물관이 보였다. 야외에 전시된 유물과 박물관 안의 전시실에는 백제 웅진 시대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역사 스페셜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살포, 판상철부, 치미, 수막새와 암막새, 부장품들, 태토까지  지나온 역사를 눈으로 직접 보고 배울 수가 있었다. 오후에는 정림사지로 향했다. 유흥준 교수님은 정림사지 5층석탑은 아침 안개가 가득한 새벽에 보는 것을 추천하셨다. 처연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아침 안개와 함께 못한 것이 아쉬웠다. 낮에 보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은 그래도 아름답고 세련됐다고 할까, 1500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석탑이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목탑의 양식을 취한 최초의 석탑이 미륵사지 석탑이라면 정림사지 석탑은 그 뒤를 잇는 또 하나의 과도기 석탑 양식을 보여주는 모델이라고 한다. 정림사진 5층 석탑에는 사연이 얽혀져 있다고 한다. 1층 몸돌에 ‘대당평백제국비명’글귀가 새겨져 있다.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면서 백제의 신부에 있던 사찰의 탑 몸돌에 자신의 공적을 새겨넣었다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사리를 찾겠다고 탑을 분해하는 과정에서 지붕돌 일부가 부서졌다고 한다. 

700년 역사를 가진 백제 왕조의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 부여 왕궁으로 짐작되는 관북리 유적과 금강 사이에는 부소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공주에서 부여로 수도를 옮길 때, 왕궁을 보호하기 위해 부소산성을 건설했다고 한다. 부소산성은 핵심 산성으로 백제의 몰락까지도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한다. 부소산성을 따라 산책길로 올라갔다. 거의 끝까지 올라가니 ‘낙화암’이 보인다. 조그마한 정자이지만 아래로 흐르는 백마강에 운치를 더해준다. 백마강의 발원지가 전라북도 장수에서부터 군산앞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전구간을 금강이라고 하지만, 그 가운데 부여읍 구간을 백마강이라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한 괴석이 강가에 걸터앉은 듯이 있는데 그 돌 위에 용이 발톱으로 할퀸 흔적이 있다.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강에 임하여 물을 건느려고 하는데 홀연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므로 흰 말로 미끼를 만들어 용 한 마리를 낚았으니, 잠깐사이에 날이 개어 드디어 군사가 강을 건너 공격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그 주위 강을 백마강이라 이르고 바위는 조룡대라고 부른다. 이보다 더 합리적인 주장이 있다. 백제보다 더 160여 년 앞선 무령왕 시대에 이미 금강을 백강으로 표기했다는 것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말을 ‘크다’는 뜻으로 썻다고 한다. 그러니 백강 혹은 백마강 ‘백제에서 가장 큰 강’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전해진다. 낙화암에는 의자왕의 삼천궁녀가 뛰어내렸다는 슬픈 사연이 깃들어 있다.  

"거기에는 별스런 의미를 찾을 것 없이 고목이 다 된 참나무와 잘생긴 소나무를 바라보면서 봄이면 새순의 싱그러움을 보고, 여름이면 짙푸른 녹음과 강바람을 끌어안고, 가을이면 오색 낙엽을 헤아리고, 겨울이면 나뭇가지에 얹힌 눈꽃을 보는 것으로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곳이다.”라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쓰여 있다. 부소산성을 걷고 낙화암을 거쳐 고란사 선착장에 도착하니 ‘꿈꾸는 맥마강’ 노래가 흘러나온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편엽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아래 울어나 보자
   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는데
   구곡간장 올올이 찢어지는 듯 
   누구라 알리오 백마강 탄식을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구나
 
 한(恨)은 슬픈 것도, 아픈 것도, 서러운 것도, 억울한 것도, 화가 난 것도, 울화병도, 자괴감도 아니다. ‘한’의 정서에는 관계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백제 말기의 백마강에는 ‘한’의 흘러가는 소리만 들렸다고 할 수 있다.

 배영춘 약력:  중국 서란시 출생. 재한동포문인협회  전 부회장, 사무국 부국장.  수필/수기 , 시 등 수 십 편 발표, 동포문학 수필부문 최우수상 등 수상 다수.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