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화길 시인의 시가 연변문학 2024. 02호에 발표됐습니다. 시인의 시도 책 앞표지 뒷장에 실렸습니다.

 

숲이 좋은 길 

 

어느 때부터인가 숲길을 걸었다 
거리와는 완전 달랐다 느낌이나 
기분 상태가 아주 싱싱했다 
가슴이 뻥 뚫리 듯 가뿐했다 
작은 바람이라도 한들거리면 
몸 전체가 냉수욕한 듯 시원했다 
나만의 타고난 체질인가 했는데 
그런 같지 않았다 숲길을 걷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씌여져 있었다 
한결같이 땀이 송골송골 돋았지만 
속에서 치솟는 정서는 포만했다 
조깅하는 익숙한 얼굴은 줄지 않았고  
되려 생소한 얼굴은 늘기만 했다 
알게 모르게 태초로 향한 길에서 
서로 신분이 다르고 하는 일 다르지만 
꼭 같은 즐거움 함께 나누며 
나란히 걷고 있는 숲이 좋은 길 
숲은 그냥 숲으로 보이지 않았다 
말도 하고 손도 잡아주며 정을 나눈다 
숲은 외롭지 않고 사람들은 화기롭다 
매미들이 우는 소리 쓸쓸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반겨 맞는 환호소리 들렸다

 

가는 세월 

 

매일 반복하기에 
가는데 오는 걸로 착각한다 
물론 왔다 가지만 
가기 위해 잠깐 들렸을 뿐이다 

어디로 가는지는 
누구도 모르지만 일단 떠나면 
다시 돌아서지 않는다 
미련이란 꼬물만치도 없다 

온다는 말이 없고 
간다는 소리 없이 
바람처럼 왔다는 
꽃처럼 조용히 진다 

다만 너에게도 
나에게도 한치 차이 없이 
꼭 같이 나누어주고 
때 되면 빠짐없이 불러간다 

문뜩 청아한 새소리에서 
세월의 다정함을 읽는다 
곱게 비낀 무지개에서 
시간도 잠깐 멈추는 아량을 본다

 

푸른 낙엽 

 

때 아니게 떨어진 
푸른 잎에 이슬이 맺혔다 

한창 기름 찰찰 넘치고 
윤기 자르르 흐를 호시절 

웬 방망이에 정수리 깨지는 
당치 않은 참혹한 처형이냐 

나무 우는 소리 처량하고 
숲의 한숨소리 가슴 허빈다 

자갈밭에 굴러도 
팽개쳐선 안되는 소중한 생명 

매정한 바람을 탓하랴만 
즈려밟고 지나기엔 걸음이 무겁다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선택
한번도 주어지는 일이 없기를 기도한다

 

스물다섯 

 

나의 턱걸이는 오늘도 스물다섯 
스무고개 넘은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스물다섯 
자신이 세운 목표지만 
완성은 생각과 십 만리 
금방 스물다섯 고개를 넘어 
서른 고개로 치닫을 것 같았건만 
앉은 걸음 한 달째 
어쩜 스무다섯 고개에 깊이 빠져 
나올 수 없지 않을까 의심이 든다 
과연 한 고개 넘기란 원래 
이렇게 힘든 것이더냐? !
오늘도 열심히 턱걸이 한다 
1, 2, 3, 4, 5 ... 25 
또 한번 스물다섯 고개에서 내리지만 
적어도 어제만큼 씩씩했다고 
세월 앞에 당당히 서 본다

 

색안경 

 

눈 앞이 연푸른 색으로 펼쳐지네 
이렇게 화사한 줄 몰랐었는데 
보는 눈이 바뀌니 모두 바뀌네
눈총같은 햇빛도 살짝 가려주고 
심술같은 바람도 슬쩍 막아주네 
우리들의 일상도 모자람은 살짝 
연하게 가리워주고 드러났지만 
못 본 듯 아니 본 듯 스친다면 
결코 허물로 남지 않을 것이다 
지나간 어제의 그리움에 미련 접고 
오지 않은 내일에도 기대지 말고 
살고 있는 오늘을 포옹하는 자세 
세상을 보는 내 눈이 너그럽다면 
나의 눈엔 상서로움만 안기더라 
진실보다 더 아름다운 진실은  
누구 아닌 바로 내 눈에 있었구려 


행복 

 

청쾌한 아침에 새겨지고
청아한 새소리에 비낀다 
어제보다 몇 방울 더 흘린 
구슬땀에서도 반짝인다 
시답지 않은 일상이지만 
그 일상들에 촘촘히 깔려있다 
고르론 숨결에도 숨어있고
물안개 보는 눈에도 어려 있다 
오늘 사는 일이 축복이라면 
차례진 오늘에서 숨쉬고 
어제보다 단 하나 더 깨달았다면 
그 자체 또한 환희 아니랴! 
산 중에 외롭게 핀 꽃 한 송이 
외로움도 잘게 씹으면 
단물이 곱게 흐르나니 
가다 다시 되돌아보면 
너무 많은 순간들을 헐값에 스쳐버렸다 
다시 돌릴 수 없는 소중한 순간들이다 
어쩜 순간마다 부여된 보배들을 
찾을 념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스쳐버린 아쉬움이고 
그 아쉬움 되찾는 스릴이다

 

행운 

 

한여름 땡볕의 시원한 바람 
낱말로 형용이 어렵게 감미롭다.
어쩜 요렇게 때를 알뜰히 맞춰줄까?
약속한 일이 아니건만 약속한 듯이
돋아나는 땀 훔쳐주는 시원한 바람
어디 그 시원한 바람만이랴!
음지와 양지가 분명한 대지에서 
선택의 여지를 한껏 누리며 
햇볕의 넉넉한 마음에 감동한다. 
철 따라 푸르렀다 누르렀다 붉어지고 
한 점의 오차가 있을 세라 돌아가는 세월 
눈으로 환히 보고 속으로 절실히 느끼도록 
유리처럼 안팎없이 투명하기에 절대 
속이는 아픔이 없도록 베푸는 선심이다. 
너와의 만남 자체가 감사하다.
눈에는 울긋불긋 풍경이 주어지고 
귀에는 맛을 당기는 청아한 새소리 
내 마음이 미치는 곳마다 내여 주고 
내 희망이 닿는 곳마다 맞아주는 천지 
높이가 필요하면 하늘이 주고 
깊이가 요구되면 바다가 준다 
오직 나를 위해 만들어진 듯 
내 주변은 항상 고마운 존재다.
하도 고마워 고맙다고 인사 올리면 
더더욱 쏟아 붓는 무한한 사랑, 그 사랑에 
한없이 감사하며 오늘이 그림처럼 화사하다.

 

꽃이 지네 

 

혼을 쏙 빼 가던 
꽃이 지네.
서슴없이 몸을 날리네. 
필 때는 조용히 
밤 사이 곱게 피우더니 
질 때는 와자자 
소리치며 지네.  
오죽 아팠으면 
눈꽃 몸부림일까?
숙명으로 가야 하는 
그 길에 피를 뿌리며 
유유히 흐르다 
쏟아지는 폭포처럼
꽃은 피였다 
하얗게 지네.

 

숲 속의 길 

 

어수선하다
갈피가 잘 안 잡힌다
잠깐 망설이게 하고  
알려지지 않은 신비에 
설레고 또 부풀기도 한다. 

불만이나 부정이다
새롭게 출발한다는 건 
그렇게 살 수 없다는 
어떤 실수의 보충이고
기정의 탈출이고 의지이다. 

심히 무겁다
배려가 있는가 하면 
우려나 공포도 있다
한번쯤 판을 가려보려는 
두둑한 배심이 필요하다. 

결과에서 이어진다
시작은 이루기 위한 것이고
이루어진 후의 새로운 도전이다
숲 속에 생겨난 길처럼 
삶은 항상 또 다른 선택이다. 

 

기다림 

 

아니 온다는 사실 
번연히 알면서도 
은근히 바라는 아픔이다. 

지워지지 않아 
지우려고 애쓰는 발버둥 
사서하는 고생이 아닐까?

인이나 박힌 듯
이맘 때면 계절처럼 바뀌는 
지독한 그리움이다. 

가면 다시 안 오는 
무정 세월 앞에서 
기억이란 한낱 사치 아닐까?

오늘도 이 시간 이 자리에서 
혹여 나에게 베풀지 않을까?
기대하고 미련하며 나무처럼 크고 있다.

연변문학 2024년 2월호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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