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산 윤선도 孤山 尹善道


고산 윤선도는 시조에 뛰어나 한국어의 새로운 뜻을 창조했으며, 송강 정철松江 鄭澈、노계 박인로蘆溪 朴仁老와 함께 조선의3대 시가인詩歌人으로 불리운다.

고산 윤선도는 일찍부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 어부사시사”를 비롯한 주옥같은 시조를 세상에 많이 남겼다. 그렇지만 그의 정치 생활은 순탄치 않아 부침이 거듭되였다. 성품이 강직한 그는 시비를 가림에 타협이 없어 17년을 유배지에서 보냈고, 19년 동안 세상을 떠나 자연 속에서 살았다.자신이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물러서지 않는 고집이였으나 백성을 아끼는 인정만은 봄날처럼 따뜻하였다.

6월 중순 필자는 윤선도문학관 탐방을 목적으로 전라남도 해남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길옆에 세워진 “ 땅끝, 윤선도문학관 “ 이란 안내판이 한눈에 안겨왔다, 남해바다와 잇다은 곳, 뭍으로 말하면  한국의 가장 남쪽 끝자락이다. 그래서 천하사람들로부터  “땅끝 “이란  영예를 고스란히 지니게 되였다.

문득 고산 윤선도가 해남을 찾게 된 일화가 머리에 떠올랐다.

때는 1637년 2월이였다.  고산 윤선도는 인조대왕이 청나라에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비탄에 빠진다.  이제 치욕의 땅이 된 이 육지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부끄러운 일로 되였다. 쉰살이 넘은 나이에  고산은 제주도로 건너가는 뱃길에 오른다. 뭍을 떠나 사방이 물로 에워싼 섬나라에 들어가 여생을 마칠 계획이였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우연히 보길도의 빼어난 풍광에 고산은 마음을 빼앗겨 마침내 이곳에 눌러 앉게 된다. 바로 전라남도 해남군이다. 이로부터 보길도는 어옹漁翁 윤선도가 현실에서 찾은 이상향이자 락원이 되었고 그는 이 아름다운 자연풍광속에서 시심詩心을 다시 얻었다고 한다.  

사색을 가다듬고 주위를 둘러 보니  맞은 편에 산이 보인다. 산밑에 집 몇채가 어렴풋이 눈에 띄였다. 외길로 쭉 벋은 도로 끝자락이 산밑이니 저기까지는 물을 것도 없이 내처 걸어야만 하겠다.

멜방을 메고 터벅터벅 몇발자욱 걷노라니  죽장망혜에 삿갓쓰고  조선8도를 방랑하던 김삼갓의 형상이 머리에 떠오른다. 이기회에 나도 한번 … 이렇게 각본없는 “남도 방랑기”가 우연히 탄생하였다. 처음에는 폰을 길가에 고정해 놓고 연기를 시작했는데 걸어가는 영상이 점점 멀어지면서 사람이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야 하겠는데 폰을 꺼줄 사람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필자 자신이 돌아와서 껐다. 반드시 다른 사람을 찿아야 했다. 두리번 살피다가 길 북쪽에 하우스가 있기에 그기로 발을 옮겼다. 마침 40대로 보이는 녀인이 아버지 나이벌인 노인과 함께 고추를 따고 있었다. 길가는 길손인데 기념사진 한장 부탁합니다 하니 금방 하던 일을 놓고 필자를 따라 포장도로에까지 나왔다. 간단히 희망사항을 교대하고 영상촬영에 들어갔다. 젊은 사람인 만큼 필자의 생각대로 금방 완성품이 나왔다. 삿갓을 쓰고 손에는 천으로 된 주머니를 들고  진흙이 묻은 신을 끌고 터버터벅 산자락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였다. 당연히 뒷모습만 보이는데 걸어가는 사람이 점차 작아지고 사라지는 과정이 생각대로 잘 찍혔다. 량쪽 어깨는 축 처져있고 걸음걸이는 천근이나 되는 다리를 옮기는 듯 힘겨워 보였다. 필자가 기획한 것과 딱 맞아 떨어졌다. 묘한 작품이 순간에 탄생한 것이다. 독보적인 문학기행으로 피곤한 육신을 달래우다가 우연히 떠오른 기발한 착상이였다.

조선시대 정철 、박인로와 더불어 삼대 시가인중의 한 사람이었던 고산 윤선도라 하면 그래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오우가”이다.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연시조 형식으로 완성된 이 시는 흐르는 물처럼 깨끗하게, 변함없는 바위처럼 꿋꿋하게, 사철푸른 대나무처럼 곧바르게, 만물을 골고루 비추는 달처럼 말없이 결백하게 살아가려는 시인의 생활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물、돌、대죽、소나무、달 이 다섯을 인간의 진정한 친구라고 하면서 자연을 예찬하고 있다. 그런데 근대에 와서 윤선도의 ‘오우가’를 또 다른 시선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자연을 벗 삼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정신적 욕구보다 심신건강으로부터 해석하는 것이다.  친환경의 필요성을  또 다른 측면에서 가르쳐 주고 있다.

병아리가 양계장에 팔려오게 되면 그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맨 땅을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하고 좁쌀이나 풀 같은 자연식품도 더는 맛보지 못한다고 한다. 닭들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밀폐된 공간에서 500 개 넘는 알을 낳은 후 폐계가 되어 삶을 마감한다고 한다.

그런데 한 자연주의자가 이런 재미난 실험을 하였다고 한다.  노화되어 더이상 쓸모없는 폐계 스무마리를 야산에 풀어놓고 어떻게 변하는 가를 지켜 보았더니 보름이 안 돼 깃털이 살아나기 시작하고 나무가지 위로 날아 다니기 시작했다. 두 달 쯤 되자 닭벼슬이 빳빳이 서고 눈매가 부리부리해 지면서 보기에도 위풍당당한 토종닭으로 변했다고 한다. 대자연의 정기를 받고 맑은 공기와 좋은 물을 마시고 풀과 야채를 먹으니까 죽어가던 기능들이 다시 회복 돼서 혈기 왕성한 젊은 닭으로 변신했다는 것이다.

원래 윤선도는 은일생활을 통하여 속세에서 감염된 인격을 대자연의 정기로 세탁하여 인간의 본연으로 돌아가려고 “다섯 친구”를 가까이 했다. 세척을 거쳐 정신상의 인간성을 정화시키려는데 목적을 두었다 .

그러나 위의 실험이 보여주듯이 지금은 인간의 본성을 되찾는 면보다 신체의 심신건강의 각도에서 여전히 대자연을 가까이 해야 한다는 도리를 강조하고 있다.
자연에 순응하는 식물의 적응력에 대해서도 새로운 제시를 받았다.
사람이 태양 빛을 너무 많이 쬐게 되면 자외선 때문에 피부암을 얻게 되는 것처럼 식물도 자외선으로 인해 결국 망가질 수 있다고 한다. 때문에 식물들도 과다로 섭취되는 태양 자외선을 방지하기 위한 자체 방위수단을 나름대로 마련 하는데 이것이 바로 색갈이다. 사과는 빨간색 양산을 쓰고、가지는 보라빛 양산을 걸치고、 귤은 노란색, 이렇게 각기 자기 나름대로 색갈의 옷을 산생시켜 태양의 자외선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 나무잎들이 푸른색인 것도 식물의 세포가 살아 남는데 필요한 화학 물질이 작용한 것이다. 이와같이 식물은 부동한 색갈로 태양의 자외선을 차단하고 자신을 보호하려는 목적에 도달한다.  이런 채소나 과일, 나물 야채를 사람들이 먹게 되면 식물의 화학 무기가 인간 세포의 산화를 막아주고 암세포와 맞서 싸우게 한다. 인간이 자연을 떠나 눈앞의 리익을 챙기느라 마구 자연을 훼손 하는 일이 비일비재 발생하고 있는 데 반해 자연은 인간을 거부하지 않고 가까이 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인간을 따뜻하게 품어준다.
 자연은 인종과 피부색을 가리지 않으며 또 재물과 권세에 따라  인간을 차별화하지 않는다. 친구를 가까이 하면 상호 닮는다는 말이 있다. 인간이 자연을 진정한 친구로 삼는다면 이 땅위에 넘쳐나는 다툼、시기、 질투、 반목、 질시 등은 사라질 것이고 우리의 삶은 보다 여유롭고 풍성하며 행복한 삶으로 탈바꿈을 할 것이다.  
 필자가 일껏 찿아 온 윤선도 문학관은 유감스럽게도 휴관이였다.

마침 직원들이 사무실에 있기에 중국에서 특히 찾아온 사정을 밝혀보았지만 내부수선을 하고 있기에 거듭 미안하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뒷산으로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무성히 자란 참대밭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겼다. 시비를 가림에 타협을 모를는 대쪽같이 굳은 절개는 고산 윤선도의 대명사였기에. 산에서 내려오다가 ‘명월정’에서 독좌하고 윤선도의 ‘오우가’를 조용히 읊조렸다.   (영상자료 참고)

내 벗이 몇이나 하니 수석에 송죽이라

동산에 달오르니 기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 빛이 좋다하나 검기를 자조있고

바람소리 맑다하나 그칠적이 하노메라

좋고도 그칠 일 없기는 물 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않음은 바회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피고 치우면 잎지나니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난다

구천의 뿌리 곧은 줄 글로하여 아노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시기며 속은 어이 비였난다

저렇고 사시에 푸르니 그를 됴하하노라

자근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밤중의 광명이 너만한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안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조선조의 문신文臣이자 국문학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고산 윤선도의 유적지는 오랜 력사와 전통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에는  사랑채인 녹우당、안채、 행랑채 、헛간 、안사당 、고산사당、 어초은사당、추원당、고산유물전시관 등 조선시대 양반가 중 가장 많은 유물이 보관되어 있었다.  수령이 500년 된 은행나무는 유구한 력사를 함께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조용히 그러나 남다른 무게를 보여주고 있었다.

2010년 개관한 고산윤선도 유물전시관은 연면적 1830㎡에 지하 1층 지상 1층 규모로4천여점의 유물과 고문헌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특히 녹우당을 중심으로 한 고산 윤선도 유적지는 조선후기 호남문화예술의 산실로 해남의 대표적인 력사문화 체험 공간으로 손꼽히고 있다.  비록 휴관한 상태이지만 필자가 유적지의 북산을 올라 갈 때 관람을 마치고 내려오는 십여명의 고등학교 학생들을 만났다. 문화체험을 하러 온 것이다. 해남군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이제 전시관에서 한단계 높은 박물관으로 승격되면 높아진 위상에 걸맞게 특별 기획전시、 학술세미나、답사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확대 운영해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 체험의 공간으로 조성될 것이라 한다.

2.   송강 정철 松江 鄭澈

송강 정철 松江 鄭澈 은1566년에 사간원 헌납을 시작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하게 된다. 선조 즉위 이후 1568년 이조좌랑, 1570년 이조정랑에 오르면서 중요 인물로 성장 하였다. 이 무렵  동서분당이 시작되면서 조정에 당쟁이 끈기지 않는 와중에 한차례의 강경한 발언이 빌미가 되어서 정철은 결국 삭탈관직 되고 5년간 벼슬을 못하게 된다. 그러다 1578년 복귀하는 데 이 때부터 정철은 철저하게 서인의 입장에 서게 된다. 이 때부터 정철은 강원 감사、함경 감사 등 외직을  맡고 떠돌게 된다. 비록 조정을 멀리한 시기였지만 오늘날까지 인구에 회자되는 가사문학을 가장 많이 남긴 시기였다.

1583년,   이조판서에 있던 친구 율곡의 추천으로 정철은 예조참판으로  중앙에 복귀하고 곧바로 예조판서가 된다. 그는 대사헌에 우찬성까지 올랐으나 친구 이이가 죽은 이후 동인이 득세하게 되면서 결국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

정철은 1536년 권력의 중심부 집안의 자녀로 한성부에서 아버지 정유침 鄭惟沉 과 어머니 사이의 4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누나는 인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로 , 권력과  아주 친밀한 집안이었다. 어린 시절 명종과 정철은 궁궐에서 뛰어다니며 함께 자랐다.
삼공(三公: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을 지낸 대 정치가 송강 정철은 일생을 크게 관로의 생활, 은거의 생활, 적소謫所의 생활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정철은 선조에게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평안북도 강계로 유배된 적이 있다.

이때 강호에 유배되어 은둔하는 그에게 어두운 심연에 불을 밝혀주듯 강아란 기생이 그의 생활에 뛰어든다. 전라도 기녀 진옥 眞玉 은 파란많은 인생을 살다간 송강 정철로 인해 이 시대에 기억되는 여인으로 탈바꿈을 한다. 원래 이름은 ‘진옥’이었으나 정철의 호인 송강松江의 ‘강 江’ 자를 따서 강아江娥라고 불렸다.  강아는 시조문학에 '송강첩 松江妾'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시조 문헌 중에  '누구의 첩' 이라고 기록된 것은 오직 강아 한사람 뿐이다. 대개는 기녀가 속한 지명을 따라 '남원명기’ 、'평안기' 등 기명을 적었으나, 강아는  기녀였음에도 불구하고  '송강첩'으로 기록돼 있다.  분명 이러한 기록은 송강의 명성과 지위 때문에 획득되였을 것이다. 이를 반추해 보아도 송강 정철과 강아의 사연이 당시 사람들 기억속에 남다른 의미로 남아 있었음을 증명해 준다.

전라도 관찰사로 등용된 송강 정철이 전라 감영에 있을 때 노기老妓들의 청을 들어서 당시 동기였던 강아를 만나게 된다. 불과 십여 세 남짓의 어린 소녀였던 강아에게 머리를 얹어 주고 하룻밤을 같이했으나 청렴결백했던 정철은 어린 강아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고 다만 명예로운 첫 서방의 이름을 빌려주었다.  정철의 인간다움에 반한 강아는 어린 마음에도 그가 큰 사람으로 느껴졌다. 정철 또한 어리지만 영리한 강아를 마음속으로 사랑하며 한가할 때면 강아를 앉혀 놓고 틈틈히 자신이 지은 ‘사미인곡’ 을 외어 주고 ‘장진주’ 가사를 가르쳐 주며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었다.

강아는 기백이 넘치고 꼿꼿한 정철에게서 다정한 사랑을 받으며 그를 마음 깊이 사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582년  도승지로 임명받은 정철은 열 달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가게 된다. 정철이 서울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강아는 그를 붙잡을 수도 쫓아갈 수도 없는 자신의 신분과 처지에 낙담한 채 체념의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러한 강아의 마음을 눈치챈 정철은 서울로 떠나면서 작별의 시를 지어 그녀의 마음을 위무한다.

一園春色紫薇花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펴

纔看佳人勝玉釵     그 예쁜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

莫向長安樓上望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말라.

滿街爭是戀芳華     거리에 가득한 사람이 모두 네 고움을 사랑하네.

그가 남기고 간 시에는 강아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당부의 마음이 담겨져 있었다.

좋은 낭군을 구해서 시집을 가 잘 살고 서울 장안의 자기를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 담긴 시였던 것이다. 하지만 순진한 강아는 정철의 당부를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채 그를 향한 그리움으로 긴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로부터 10년, 철부지 어린 나이에 정철을 만나 머리를 얹은 이후로 단 한순간도 그를 잊지 못했던 강아는 관기 官妓 노릇을 하면서도 언제든 다시 정철을 만나겠다는 열망으로 십년고절의 세월을 버텨낸다. 기생의 처지로 다른 남자의 유혹을 거부하며 수절을 한다는 것은 그렇게 녹녹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녀의 깊은 애모와 여심의 끝에 들려온 소식은 정철이 북녘 끝 강계로 귀양을 갔다는 기막힌 소식이었다.

정철의 귀양소식을 들은 강아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야 정철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귀양살이를 하는 정철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서둘러 행랑을 꾸리고 길을 나섰다.

작은 발로 삼천리 길을 걸어 강계로 달려온 강아는 위리안치围篱安置되어 하늘 한자락 보이지 않게 가시나무로 둘러쌓인 초라한 초막에 홀로 앉아 책을 읽는 정철을 확인하고 눈앞이 아찔해 났다. 정철의 초췌한 모습에 진주같은 눈물만 뚝뚝 흘리며 그 앞에 엎드린 강아는 기쁨과 설움이 어우러져 통곡이 목구멍을 짓눌러 오르는 것을 느껴야 했다.

자기 앞에 엎드려 우는 어여쁜 여인을 본 정철은 당황해하며 그녀가 누구이냐고 물었다.

정철이 강아를 몰라본 것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10년전 강아는 십여세 안팎의 어린 소녀였으니 성장한 강아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었다.

유배지의 적소謫所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 오고 이내 달이 떴다.

달빛아래 엎드려 우는 여인을 보던 정철은 그녀의 모습이 한 마리 백학처럼 느껴졌다.

울음을 그친 강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를 몰라보시는지요. 10년 전 나으리께서 머리를 얹어 주셨던 진옥이옵니다.”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정철은 다시 한번 여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네가 정말 진옥이더냐?...몰라보겠구나.그런데 어떻게 이곳까지 찾아왔느냐?”

정철은 자신도 모르게 강아의 맑고 아름다운 모습에 끌려들고 있었다.

강아는 지난 세월동안 그를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는 것과 그의 귀양소식을 듣고는 적거 謫居 생활을 보살피고자 부랴부랴 달려왔다는 것을 고백했다. 대 정치가이자 일세의 문장가인 정철의 유배생활은 보기에도 가혹해 보였다. 그러나 정철은 실의와 비탄속에서도 꼿꼿한 자세로 모든 현실을 받아 들이고 있었다.

침침한 호롱불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강아는 정철을 앞에 두고도 정녕 믿기지 않았고 정철은 강아를 볼수록 살풋한 여인의 향기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말을 잃은 두 사람 덕분에 방안엔 정적만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때 조용히 강아가 입을 열고 어린 시절 정철에게서 듣고 외웠던  ‘사미인곡’ 가사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꾀꼬리처럼 청아한 울림을 주는 목소리였다. 기백 넘치던 정철의 얼굴이 놀라움과 기쁨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것을 네가 아직도 외우더냐?” 정철이 물었다.

“예, 나으리께서 배워 주신 것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나으리가 그리울  때면 가야금을 타고 마냥 불렀던 노래이옵니다.” 강아의 뺨은 이미 붉은 홍시처럼 물들고 있었다. 그런 강아의 모습을 바라보던 정철의 입가에도 빙그레 미소가 넘쳤다.

  두 사람이 술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거나해진 정철이 입을 열었다.

 "진옥아, 내가 한 수 읊을 테니, 너는 그 노래에 화답을 해야 한다."

 "예"

 "지체해서는 안 되느니라." 

 강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정철이 목청을 가다듬어 시를 읊는다.

    옥 玉이 옥이라커늘 번옥 燔玉 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 眞玉 일시 적실(분명)하다

    나에게 살송곳 있으니 뚫어볼까 하노라

탁월한 시인이었던 정철은 강아에게 흠뻑 빠져 노골적인 음사 淫辭 를 시의 옷을 빌어 내비쳤다. 번옥이란 가짜옥 즉 천연옥이 아닌 인조옥을 가르킨다.  진옥을 은유한 것으로 남녀간의 육체적 합일을 바라는 정철의 육정이 배어 있는 시였다.

지체없이 강아가 그의 시에 화답한다.

    철鐵 이 철鐵 이라거든 석철錫鐵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 正鐵일시 분명하다

    마침 내게 골풀무 있으니 녹여볼까 하노라

화답을 들은 정철은 탄복했다.

강아의 시는 당대의 대문장가인 정철을 깜짝 놀라게 할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강아는 정철을 쇠로 비유하며 멋지고 견고한 남성을 만나면 자신의 골풀무로 녹여낼 수 있다며 그에게 응수했다.

'골풀무'란 불을 피우는데 바람을 불어 넣는 풀무인데, 강아는 이를 '남자를 녹여내는 여자의 성기性器'로 은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만하면 글자 그대로 강아는 '명기名妓'요, 뛰어난 시인이었던 것이다.

이윽고 살송곳을 가진 멋있는 사내와  골풀무를 지닌 기생의 하룻밤은 뜨거운 정염으로 하얗게 무르익어 갔다.

이에 대한 일화는 시조집  “권화악부 權花樂府” 에 ‘鄭松江與眞玉相酬答'의 기록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그후 정철의 적소생활은 조금도 괴롭거나 우울하지 않았다. 마음이 울적할 때면 강아는 늘 그의 곁에서 기쁨을 주었고 가야금을 연주해 주었다. 그러면 헝클어진 정철의 마음에 한 줄기 빛이 흘러들었다. 강아는 단순히 생활의 반려자 혹은 기녀가 아니었다. 정철에게 강아는 그 이상의 존재였으며 예술적 호흡을 가능케 만들어주는 지혜로운 여인이었던 것이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정철을 서울로 부른다. 정철은 유배지의 생활을 청산하는 기쁨과 나라에 대한 우국 그리고 강아와의 이별 때문에 마음이 복잡했다.

강아의 심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정철을 보내면서 강아는 아쉬운 마음을 이렇게 읊었다.

          오늘밤도 이별하는 사람 하 많겠지요.

          슬프다 밝은 달빛만 물 위에 지네.

          애닯다 이 밤을 그대는 어디서 자오.

          나그네 창가엔 외로운 기러기 울음 뿐이네.        

정철은 가사문학의 대가로 알려진 바,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 등 가사 외에도 백여 수의 시조를 세상에 남겼다.가사도 시조도 주옥같은 작품이였다. 그 가운데 ‘관동별곡’은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할 때 지은 가사로 이 가사를 지은 이유는 강원도 백성들의 풍속이 우매한 것을 보고 교화를 위해 지었다고 한다. 1585년 정철은 관직을 떠나 고향에 돌아가 4년 동안 작품 생활을 하였다. 이 때 국문시가의 질적、양적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가사작품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린 걸작이라는 평을 받고있다.

광주 무등산 자락에는 조선 중엽 권력 다툼의 와중에 물러난 선비들이 세운 송강정, 식영정, 등 많은 정자와 원림이 남아있다.

정철은 송강정松江亭  에서 “사미인곡 思美人曲” “속미인곡 續美人曲” 등  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썼는데 호탕하고도 원숙한 시풍으로 가사문학의 최고봉을 일궈냈다.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 라는 뜻의 식영정息影亭은   기대승, 송순,  송익필 등 우리에게 익숙한 시인묵객들이 스쳐 지나간 장소이다. 오늘날 윤선도, 박인로와 함께 조선의 3대 시인으로 손꼽히는 송강 정철이 “성산별곡”  을 지은 곳이기도 하다.

이런 문학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정철은 평생 정계에서 부침浮沉을 거듭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는 할 말이 있으면 반드시 입 밖에 냈고, 사람의 허물을 보면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용서하지 않았으며, 화를 산처럼 입더라도 앞장서 싸우기를 불사했던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정적이었던 동인들은 그를 ‘동인백정、간철、독철’ 이라고 별명을 달았다. 반면 정치적 동반자였던 서인들은 그를 율곡이나 성혼에 버금가는 인물로 대접했다.

1551년 순회세자가 태어나자 대사령으로 풀려난 정철의 아버지 정유침은 가족들과 함께 담양의 창평으로 이사했다. 그는 성산 근처에 있는 ‘환벽당 環碧堂’ 에서 운명처럼 스승 김윤제를 만난다. 13개 고을의 수령을 지냈던 김윤제는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나주 목사직에서 물러난 다음 성산 맞은편 구릉에 환벽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살고 있었다.

정철은 그때부터 김윤제의 사촌조카 김성원과 함께 김윤제 문하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김윤제는 정철이 17세가 되자 김윤제의 사위 유강항의 딸과 결혼시킨 다음 관계 官界에 진출할 때까지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얼마 후 김윤제의 후원으로 대학자 고봉 기대승의 문하에 들어간 정철은 “근사록”  을 배웠고 선비가 지녀야 할 심성과 도리를 익혔다.

 정철은 25세 때 김성원이 서하당에서 보낸 풍류생활을 그린 가사 “성산별곡” 을 지었다. 당시 그는 성산 앞을 남북으로 흐르는 죽계천의 다른 이름 송강 松江 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그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을 사귀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26세 때 정철은 진사시에 일등 5위로 급제했고, 이듬해에는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이때 명종은 소꿉동무의 등과를 축하하며 성균관 전적 겸 지제교에 임명했고, 곧 사헌부 지평으로 승진시켰다. 당시 명종은 사촌형인 경양군이 처가의 재산을 탈취할 목적으로 처조카를 죽인 사건이 일어나자 정철에게 관대한 처분을 부탁했다. 하지만 정철은 법률에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된다면서 맹렬한 어조로 경양군 부자를 탄핵하여 사형에 이르게 했다. 그러자 분개한 명종은 그를 지방으로 좌천시켰다.  행형에 있어 임금의 부탁조차 냉정하게 외면했던 이 사건은 훗날 권력지향주의자로 지탄받았던 정철을 해방시키는 주요 근거로 작용하였다.  정철은  형조, 예조, 공조, 병조의 좌랑,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율곡 이이와 함께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가게 된다. 나라에서 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도록 세운 제도였다. 이는 송강 정철이 당대의 준재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

정철은 그렇듯 청렴하고 용맹스러웠지만 지독한 음주습관 때문에 관료사회에서 내내 손가락질을 받았다. 대낮에도 만취한 탓에 사모가 늘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임금이 불러도 술이 깨지 않아 등청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송강 정철의 유물 중에 선조로 부터 하사 받았다는 은잔이 있다. 항상 과한 술과 술버릇으로 정적에게 공격 당하는 그가 딱하여 선조가 그를 불러 작은 은잔을 하사하며 하루에 딱 세잔만 마시라 명하였고, 송강 정철은 암만해도 그의 주량에 기별도 가지 않아,  머리를 굴려 은술잔을 최대한 크게 두드려 넓혔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송강 정철의 대표작 중에 '장진주사 將進酒辭 '가 있다.

한잔 먹새그려 또 한잔 먹새그려

꽃 꺾어 산算 놓고 무진무진 먹새그려

이몸 죽은 후면 지게위에 거적 덮어 쭈그려 메어가나

유소보장 流蘇寶帳 에 만인이 울어주나  

억새풀, 속새풀, 떡갈나무,버드나무가 우거진 숲에 가기만 하면

누런 해와 흰 달 뜨고 가랑비와 굻은 눈, 소슬바람 불 때

그누가 한잔 먹자고 할고.

하물며 무덤위에 원숭이 휘파람을 불때 뉘우친들 어떠하리

죽록천이라고도 불리우는 송강松江 (강의 이름)은 정철이 정치적으로 불우한 일을 당할 때마다 안식처가 되어 주었던 전남 담양군 봉산면에 있는 강이다. 이 강의 이름을 따서 자신의 호를 송강松江이라 지었다.

송강정에서 쓴 사미인곡 思美人曲 과 속미인곡 續美人曲 두 작품의 문학적 가치는 탁월하다.  전남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송강전 옆에 ‘사미인곡’ 시비가 세워져 있다.   평생 거친 성정을 발휘하면서 정적들과 이전투구를 벌였지만 청렴결백했던 그는 만년에 가난에 시달렸었다. 끼니조차 잇기 힘들게 되자 교분이 두터웠던 이희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외로운 나그네 신세 해초차 저무는데  

남녘에서는 아직도 왜적 물리치지 못했네.

천리 밖 서신은 어느 날에나 오려는지  

오경 등잔불은 누굴 위해 밝힌 건가  

사귄 정은 물과 같아 머물기 어렵고   

시름은 실오라기 같아 어지러이 더욱 얽히네   

원님께서 보낸  진일주真一酒 에 힘입어  

눈 쌓인 궁촌에서 화로를 끼고 마시네

정철이 생애 마지막으로 쓴 시 “섣달 초엿새 날 밤에 앉아서” 이다. 이 시 에서 정철의 궁핍하지만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늙은 대신의 충심이 절절히 배어있다.  

 

노계 蘆溪  박인로 朴仁老

노계  박인로의 생애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보면, 전반생은 임진왜란에 종군한 무인으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지고  후반생은 독서와 수행으로 초연한 선비, 문인 가객歌客 으로서의 모습이 지배적이다.

노계  박인로는 조선중기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 향반 鄕班 가문에서 태어났다.

노계는 어려서부터 시재가 뛰어나 열세살되던 해 ‘대승음 戴勝吟 ‘이라는 칠언절구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동래、울산、경주、지방을 비롯해 영양군까지 잇따라 함락되자 그는 분연히 붓을 던지고 의병활동에 가담하였다. 38세에는 강좌절도사江左節度使인 성윤문成允文의 막하에서 수군水軍으로 종군하여 여러 번 공을 세웠다. 1599년 무과에 등과하여 수문장守門將 、선전관宣傳官을 제수받았다. 거제도 말단인 조라포助羅浦에 만호萬戶로 부임하여 군사력배양에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다. 그는 무인의 몸으로서도 언제나 낭중에 붓과 먹이 있었고 사선을 넘나들면서도 시정詩情을 잃지 않았다.

그의 후반생은 독서수행의 선비였었고 가객으로서의 삶이 이어졌다. 노계 박인로가 본격적으로 문인생활을 한 것은 은거생활을 시작한 40세 이후, 성현의 경전 주석 연구에 몰두할 때였다. 당시 그는 밤중에도 분향축천焚香祝天하며 성현의 기상氣像을 묵상하기 일쑤였다. 만년에는 여러 도학자들과 교유하였는데 특히 이덕형李德馨과는 의기가 상합하여 수시로 종유하였다. 1611년 이덕형이 용진강龍津江 사제莎堤에 은거하고 있을 때 노계는 그의 빈객이 되어 가사 ‘사제곡莎堤曲  、누항사陋巷詞 ’를 , 1635년에는 가사 ‘ 영남가嶺南歌 ’를 , 그 이듬 해는 ‘노계가’를 연달아 지었다.  말년에는 천석 泉石을 벗하여 안빈낙도하는 삶을 살다가 1642년에 세상을 떠났다.  

노계 박인로가 죽은 뒤에 향리의 선비들이 그를 흠모하여 생장지인 도천리에 도계서원道溪書院을 세웠다. 서원에는 노계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그의 문집을 인쇄한 목판각인 ‘박노계집 판목 朴蘆溪集板木’ 도 보관돼 있다. 이 목판은 당시의 인쇄문화사 연구자료로서 뿐만이 아니라 국문학사의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도천리의 나지막한 산자락을 끼고 있는 도계서원 앞에는 저수지가  있고 1980년 전국 국어국문학 시가비건립동호회가 세운 ‘노계가’ 비가 있다. 앞면에는 경주 산내 노곡의 경치를 노래한 가사가 새겨져 있고 시비의 뒷면에는  노계의 시조 ‘조홍시가 早紅詩歌’ 가 새겨져 있다.  

도계서원道溪書院  서남쪽에 위치한 노계문학관은 총면적 441㎡ 규모로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에 기와를 얹은 1층 건물이다. 문학관에는 노계 선생의 80여 년 생애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시장과 영상실, 소강의실, 다목적실 등을 갖췄다. 또, 소공원, 원두평저수지 주변 산책로와 전망대, 팔각정, 노천광장도 조성되었다.   노계가  13세 때  지은 시 “대승음戴勝吟” 을  흔상해 보자.  

午睡頻驚戴勝吟   뻐꾸기 울음소리 낮잠 자주 깨우니

如何偏促野人心  어찌 시골사람 마음을 이리 재촉하는고  

啼彼洛陽華屋角  저 한양의 좋은 집에 가서도 울어

令人知有勸耕禽 밭갈이 권하는 새가 있음을 알리려무나 

13세의 소년으로 당시 농촌의 어려운 실정을 은유적으로 나타냈는가 하면  농민과 지배층 지간에 존재하는  거리감을 이미 감지한  놀라운 안목을 엿볼 수 있다. 노계 박인로는 송강 정철을 잇는 뛰어난 문인이면서도 무신 武臣 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군대소리 진동하여
산악을 흔드는 듯
섬 오랑캐 백만이 일조(一朝)에 충돌하여
억조의 놀란 혼들 칼빛을 좇아나니
들판에 쌓인 뼈는 산보다 높아 있고
웅도와 큰 고을은 승냥이와 여우의 소굴이 되었더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전장에 투신한 경험을 살려 그려낸  ‘태평사 太平詞 ‘ 의 한 단락이다. ‘태평사’는 한민족의 순박한 풍속을 드러내면서 두 차례 왜적의 침략에도 굴하지 않고 대항하여 태평성대를 누리자는 념원을 담은 웅건하면서도 기상이 넘치는 가사다.

박인로의 문학에 큰 계기로 되는  ‘사건’ 이라면 그가  이덕형과의 만남일 것이다.   이덕형은 41세 때 사도체찰사로 임명되어 영남의 여러 고을을 순찰하는 중 영천에 이르렀다. 영천은 이덕형의 시조묘가 있는 곳이어서 성묘를 했고, 이에 영남 지역의 유림들이 대거 모여들었는데, 그 가운데 묘소와 가까운 도천에 살던 박인로가 참석하였다. 그들 둘은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 친교가 시작됐다. 이 때  좌석에  홍시가 나오자 이덕형이 불현듯 타계한 어머니와 멀리 계신 홀아버지에 대한 사친의 정을 내비치며 박인로에게 그 정을 표현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렇게 지어진 시가 바로 유명한 ‘조홍시가’ 이다.    박인로가 남긴 시조 “조홍시가 早紅枾歌” 는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반중 盤中 조홍早紅 감이 고아도 보이나다

유자 柚子 아니라도 품음직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을 새 글로 설워하나이다.

이 시조가 세상에 나올 수 있는 데는 박인로와 이덕형지간의 아름다운 친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음 이덕형이 박인로에게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요?” 라고 묻자  박인로는 만년의 삶의 어려움을  솔직히 토로했다.   

“아니, 그렇게 삶이 어렵단 말이오?”   

“사람이 어리석어서 평생 빈한함을 면치 못하나 봅니다.”    

 이 때 박인로는  ‘누항사’ 를 지어 자신의 곤궁함을 드러내였는데  ‘누항사’는  어리석고 못나기는 나보다 더한 사람이 없다 라는 자조적인 말로 시작된다.  가난과 병화로 늘 고통스럽고  그것이 풀릴 전망도 없는  삶을 가누어 가는 선비의  처지를 아주 생생한 묘사로 보여주었다.

소 한 번 빌려 주마 하고 엉성하게 하는 말을 듣고
친절하다고 여긴 집에
달 없는 저녁에 허우적허우적 달려가서
굳게 닫은 문 밖에 우두커니 혼자 서서
“에헴” 하는 인기척을 꽤 오래도록 한 후에
“어, 거기 누구신가?” 묻기에 “염치 없는 저올시다.”
“초경도 거의 지났는데 무슨 일로 와 계신가?”
“해마다 이러기가 구차한 줄 알지마는
소 없는 가난한 집에서 걱정이 많아 왔소이다.”
“공것이거나 값을 치거나 간에 주었으면 좋겠지만
다만 어젯밤에 건넛집 사는 사람이
목이 붉은 수꿩을 구슬 같은 기름에 구워 내고
갓 익은 좋은 술을 취하도록 권하였는데
이러한 은혜를 어떻게 갚지 않겠는가?
내일 소를 빌려 주마 하고 굳게 약속 하였기에
약속을 어기기가 편하지 못하니 말씀하기가 어렵구료”
정말로 그렇다면 설마 어찌 하겠는가
헌 모자 숙여 쓰고 축 없는 짚신 신고
맥없이 물러나오니
풍채 적은 내 모습에 개가 짖을 뿐이구나.

‘누항사’ 의 한단락이다.  농사를 짓기 위해 소를 빌리러 갔다가 수모만 당하는 광경이 선연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누항사’ 에는 생활의 어려움만이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삶속에서도 ‘안빈낙도’ 를 추구하며 살고자 하는 박인로의 삶의 가치관도 나타난다.

이 작품은 박인로가 남긴 7편의 가사 가운데 가장 나중에 쓴 작품으로 알려져있다. 섬세한 필치, 풍부한 어휘로 사대부의 가사 문학을 완성한 점에서 높이 평가되는 작품이다.  ‘산수 山水 의 벽 癖 ’ 이 있는 노계는  늘그막에  궁벽한 냇가  바위 아래 집을 짓고 은거 했다. 그 때 그의 나이 76세였다.  노계의 말에 의하면  그곳은 산에 핀 꽃들이 비단을 수놓은 듯하고, 물가 늘어진 수양버들이 초록 휘장을 친듯 아름다운 곳이라고 찬탄하였다.  그곳에서 박인로는‘노계가 蘆溪歌 ‘ 를 지었다. 

고전시가 ‘노계가 蘆溪歌 ‘는 박인로가 남긴 최후의 가사 작품으로 임금에 대한 충성과 평화에 대한 념원을 나타낸 작품이다. 두 차례의 전란을 겪은 작가 박인로가 말년에 비로소 경상도 영천의 노계에 머물면서 은거지를 개척하게 되는 감회를 시작으로 노계의 아름다운 경치를 례찬하고 그 속에서 자연에 몰입하는 삶의 흥취를 노래했다.

이 처럼 만년의 박인로가 강호 자연을 벗하며 유가 이념에 의한 고고한 삶을 추구하는 자세는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알고 적극적으로 찾아 든 능동적인 은둔이라 할 수 있다.

절박했던 현실의 문제를 뒤로 젖히고 자연에 은거하기로 결심한 박인로는,  ‘누항사’에서 보여주었던 가난하고 초라한 향반의 모습에서 벗어나 청풍명월과 벗하고 성리학적 도 道 를 추구하는 초연한 사대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박인로는50대에는 「사제곡」, 「누항사」, 「독락당」, 「소유정가」 등을 지었고, 회갑을 넘겨서도 예술적 정열을 그대로 간직하며  「노계가」, 「영남가」 등을 지었다.  

박인로는 생전에 시조 68수와 가사 11편, 다수의 한시를 남겼다.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장진주사」 등 5편에 그친 데 비하면 훨씬 많은 편이다.

김창권 프로필 

1974_1977 연변대학조문학부
1989_2000 치치하얼시정부외사판공실
2000_2011 치치하얼대학외국어학원
2011 정년퇴직, 현재 대련시조선족문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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