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놓고 봐야지


글 / 주덕진(중국 연변)


역사적 조류를 타고 불어 온 개혁 개방 봄바람에 가난의 모자를 훌쩍 날려보내고 농촌에서 실시된 호도거리 생산책임제에 농민들의 생산적극성이 한창 상승세를 타고 있던 그 이듬해인 1983년도는 공연히 보기드문 저온랭해의 재해년이였고 재해를 전승하는 과정을 통하여 아무리 큰 재해일지라도 사람하기에 달린, 정신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된 한해이기도 했다.

6월의 문턱 들어서자부터 매일 개이는가 싶다가도 흐리며 비가 구질구질 내린 것이 한달 반 동안 지속되어 방금 낸 벼는 모살이도 방정히 못한 채 물앉고 밭 곡식은 땅에서 나와서 제자리 지킴만 했다.

6월 초순부터 사람들은 해바라기처럼 기대감을 가지고 목대가 부러지게 하늘을 쳐다보며 하늘에 어떤 변화가 일기를, 평시에 태양에 대해 그처럼 민감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고도로 되는 민감과 관심을 가지고 태양보기를 갈망했지만 무정, 무심한 하늘은 변화는커녕 지긋지긋 그냥 진저리 나는 비만 쏟는다.

날씨가 음침해지니 사람들 정서도 따라 음울해진다. 처음엔 행여나 하고 호미들고 김매던 사람들도 20일째 날씨가 계속 덮고있자 하나 둘 희망을 포기한채 호미를 팽개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정황은 우리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논에 벼는 땅에서 잡아 당기듯 늘어 못난데다 번대머리처럼 군데군데 녹아 없어지고 한전 곡식도 난쟁이처럼 키가 작은데다 벌레가 빨아놓은 듯 초췌한 모습이였다.

상황을 당장 돌려 세울 뾰죽한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일손놓고 한숨만 풀풀 토하며 집구석만 지킬수도 없다. 또 별도의 돈벌 구멍수도 없다.  

당시 촌당지부、촌민들의 추천으로 촌、생산대부기원공작을 겸임하고, 연변일보、연변인민방송등 매체들의 통신원으로 활약하며 앞선 의식의 사회인으로써 긍지와 의무를 느끼고 있던 나는 닥친 재해앞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안해를 설복하여 논으로 밭으로 부지런히 김매러 다녔다.

비록 비에 옷이 젖어 개운치 못하고 지꿋은 날씨 을씨년스러워도 농민의 출근은 밭이라 놀아도 밭에서 놀자며 앞장서는 남편의 측은한 모습을 보는 안해는 남편도 결코 쉽지만 않으려는 생각에 두말없이 그림자처럼 잘 따라 주었다.

하늘이 저기압이자 사람들 정서도 저기압, 이런 정서는 전염병마냥 한사람, 두사람 전파를 타고 퍼져 나가며 전반 제초생산에 영향 주었다. 사람들은 이미 만회하기 어려운 작황을 보면서 반작이라고 했다. 어림짐작으로 봐도 전촌 300여 농호중 김매다 중도 이페한 호가 절반은 되는상 싶었다.

농업생산에서 전례없는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농민들의 재해대처 정황에 대해 무척 신경이 쓰여지고 있던 나는 어느 날 다른 농가들의 정황여하를 알아보려 집을 나섰다. 제3생산대의 밭을 찾았을 때 마침 김성만, 전문순등 집들에서 논김매기에 열중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김동무, 잘 하는구만!》

논이 길가 멀지않는 곳에 있는지라 그들 한테로 다가간 내가 인사라고 하기 보다 찬사에 가까운 어조로 말을 건넸다.

《어쩌겠소, 매놓고 봐야지.》

그러자 두 딸과 함께 김매고 있던 김동무가 일어서 말하며 허구푼 웃음 지었다. 나는 김동무의 말에 동감이 되면서 대견스레 느껴졌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지금까지 밭 1헥타르의 두벌 김매고 5짐의 논 애벌 김을 맨 상황이었다.

《아저씨 밭 보러 나왔어요?》

내가 전문순네 밭에 이르자 한창 안해와 합께 김매고 있던 문순이(조카벌 된다) 허리 펴며 반가이 맞아 주었다.

《어찌 하늘이 심술 쓰는데 매 놔도 먹을수 있을가?》

《그래도 매놓고 봐야지요.》

내가 문순이의 심중 떠 보느라 일부러 한 말에 문순이는 별 고려 없이 말했다. 그들도 지금까지 1헥타르 밭 두벌김 끝내고, 4무의 논 두벌김을  다그치고 있는 중 이였다.

이상한 것은 안일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신심이 부족했지만 부지런한 사람들은 모두 신심을 가지고 드팀없이 자기의 궤적에 점을 찍어가고 있었다.

김성만、전문순의 《매 놓고 봐야지》 정신은 당면에 있어서 매우 보귀한 정신이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당시 전주적범위에서 저온랭해로 인한 피해가 속출되고 있었는데 이런 정신을 제창, 발양하여 재해로부터 한포기 곡식이라도 더 구해내고 재해를 감소시키는 것은 매우 큰 의의가 있는 것이였다.

낮에 비록 강남밭(훈춘강), 강북밭 이렇게 여러 곳을 돌아 보느라 지쳤지만 저녁 술 놓자 두리밥상에 마주 앉은 나는 낮에 돌아보는 과정에 보고 들은 사실을 소재로 당면 저온랭해로 인한 소극적인 정서를 극복하고 제초생산을 추동하는글- 제목을 《찬양할만한 정신》이란 통신을 써서 이튿날 연변일보 편집부에 투고하였다.

이 통신은 10여일후인 7월 12일 연변일보 2면에 게재되었는데 설복력있고 가치있는 글이라는데서 편집부의 평어를 달아 내였다.

이렇게 화를 복으로 전환시키려 노력하는 사람 있는가 하면 하늘이 못 먹게 하는데 김매서는 뭘 하겠는가 하면서 차라리 때가 되기나 한 듯 모여앉아 마작을 만지작거리거나 강가、호수가를 전전하며 현대판의 강태공이 되기에 손색없는 사람도 있었다.

《주회계, 김매두 먹겠소. 허허?》

하루는 내가 철길(오래된)옆 논밭에서 소료박막 쓰고 안해와 함께 논김 매고 있는데 낚시대 들고 지나가던 양길원이 못 미더운 어조로 물어왔다.

《어쩌겠소, 매놓고 봐야지.》

나는 확고부동하게 말했다. 

《세월이 이런데 글 재간있는 주회계는 글이나 쓸게지...》

길원이 무척 관심을 보이며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이 못 되는 말이였다.

《글은 저녁에 써도 되지만 김은 낮에 매야 되지 않겠소?》

나는 길원이의 말을 좋게 받아 들이며 이렇게 말했다.

《글쎄 그러면야 더 좋겠지. 허허...》

길원이 다소 멋적은 표정 지으며 자리를 뜬다.

《정말 먹을수 있을까요?》

그가 지나가자 안해도 다소 신심이 적은 듯 말했다.

《우리가 포기하면 기다릴 희망도 없지만 김매놓으면 기다릴 희망도 있게 되지 않소. 허허...》

나는 짐짓 이렇게 말하며 안해에게 웃어 보였다. 안해는 남편의 충만된 신심에서 힘을 느끼며 일손을 다그쳤다.

우리는 이처럼 “종이장도 맞들면 가볍다”는 정신으로 부부가 일심협력하여 비오는 날엔 서로 우산이 되여주고 바람부는 날엔 바람막이 되어주며 제초생산을 견지한 보람 1헥타르반의 밭 두 벌김, 5무의 논 두 벌김을 제때에 끝내며 재해로 인한 손실을 최소화했다.

그럭저럭 인젠 해를 못본지 한달 반 된다. 해를 44일 못보니 곡식들은 염병을 앓는 환자처럼 초췌해지고 5분의 2정도는 궤사해 죽었다. 곬을 메워야 할 밭, 논판이 휑덩그렁해지여 꼴불견이 되였다.

특대희소식 기적이 나타났다!! 곡식들이 애절처절 인젠 정말 더는 지탱하기 어려울 무렵, 45일만에 마침내 생명의 화신 태양이 구름을 쫙 헤치며 눈부신 미소를 보내왔다!

태양의 싱싱하고 따사로운 열과 빛이 대지를 보듬자 금시 마술과도 같은 신기한 효과가 나타났다.

만물은 대뜸 생기를 회복했고 죽다 남은 곡식들은 영양제라도 주입한 듯 푸르싱싱 하루가 몰라보게 키돋움했다. 이미의 과실(잘못)에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태양이 매일이다 싶이 얼굴을 선 보이자 태평성세 타령속에서 곡식들은 마디에서 소리가 날 지경으로 성숙을 다그쳐 가고 있었다.

결국 확고한 신념으로 밭을 지키며 비바람의 세례를 이겨 낸 사람들이 수확을 기대할 수 있게 되고 최종 웃을 수 있게 됐다!

가을은 재판관마냥 견지와 포기에 공정한 판결을 내려주었다. 김을 포기한 논과 밭들에는 잡초가 무성한 가운데 왜소한 곡식이 간들간들 간혹 보였고 손이 기름이라고 손이 휘저으며 다닌 논과 밭 들에는 곡식이 누렇게 익어 풍수는 아니여도 자급자족은 할수 있게 되였다.

이는 또 하늘이 사람들 의지 여하를 고험하는 고험끝에 내려 준 각자 해당된 분배가치라고 하겠다. 농민의 본분을 지키며 밭을 꾸준히 가꾼 사람한테는 그 대가로 죽그릇이라도 차례졌지만 하늘을 원망하며 자기본분 다하지 못한 사람들에겐 그 벌칙으로 죽물마저 차려지지 않아 결국 국가에 벌건 손 내밀게 됐다.

견지는 적극적인 인소를 내포하고 있고 포기는 소극적인 인소를 내포하고 있다. 적극적인 인소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성공을 이끌어 낼수 있지만 소극적인 인소는 가능을 불가능으로 실패를 자초하게 할수 있다.

1983년도 여름 력사상 보기 드문 저온랭해와의 투쟁에서 사람들이 보여준 정면, 반면의 실천이 이 점을 충분히 증명해 주고있다.

나는 비록 아마추어 수준급의 글쟁이지만 나에게 있어서 이 한해는 또 《글쟁이는 게으르다.》고 한 글쓰는 사람들에 대한 항간(사회 사람들)의 고루한 편견에 도전、자신의 의미지를 살린 기회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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