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신문=김창권 수필가】박두진 문학관은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에 위치해 있다.

문학관 건물이 예술적인 데다가 건물 앞에 박두진시비광장이 푸른 잔디로 조성되어 있어 다른 문학관에 비해 한결 정갈하고 포근한 인상을 안겨주었다.

문학관 1층과 2층은 박두진시인의 일생을 테마별로 구성한 전시실이다.

1부는 박두진시인의 문학적 로정과 시집을 한눈에 살펴볼 있는 '박두진의 시를 읽다'였고  제2부는 박두진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자료에 서재를 곁들인  '박두진의 일상을 보다'이고, 수석水石 수집과 서예 그림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활동한 박두진의 마음을 감상할 있도록 준비한3 '박두진의 예술세계를 만나다'였다.

3층은 탁트인 시야로 안성 최대의 시민공원인 안성맞춤랜드의 사계절을 감상할 수 있게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전망대에 서 있노라니 눈앞에 펼쳐진 안성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바로 시인의 문학적 자양분으로 안받침 되었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박두진의 시에서 , 양지, 밝음 같은 속성은 그의 세계를 긍정으로 끌고 가는 중요한 시점이였다. 그의 시가 삶과 죽음의 한계를 극복하고 미래에 대한 밝은 전망을 가진다고 했을 , 그것은 봄이라는 계절적인 배경과 해볕이라는 따듯하고 밝은 세계가 있었기에 가능한 아니였을까.

전망대에는 안성문학의 활성화를 위해 마련하는 문학관 년중행사의 하나인 문예 창작 교실 우리들의 글 쓰는 시간에 사용했던 홍보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행사를 갖 마무리 지은 흔적이겠다. 문학관 해설원은 필자의 눈길을 의식한 듯 환한 표정을 지으면서지난 주에 문학관에서 안성시 중소학생 글쓰기 행사를 진행했었어요. 2층 다공능실에 금상, 은상 수상자 사진과 행사 영상자료들이 전시되었어요. 다음 주 지역신문인 안성일보 문예지에 특간으로 게제될 거예요.” 라고 해석했다.

지방에서 글짓기 백일장 행사에 자주 평심으로 참석한 필자는 행사장 꼬마들의 글짓는 장면을 떠올리면서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우리 문학관은 문학 유산을 보존하고 전시하고 홍보하는 동시에 자라나는 새일대를 교육하는 상서로운 사명을 안고 지역민과 일반시민 청소년의 정서함양에 도움이 되는 문화행사를 속속 개발하고 있어요.  안성 출신 및 안성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문인을 발굴하고 양성하여 안성 문학의 우수성을 알리고, 안성시민들의 지역 문화예술의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자랑에 넘치는 문학관직원의 소개였다.

3층 전망대를 내려오면서 필자는 경상북도 안동시에 위치해 있는 조지훈, 경주시에 자리잡은 박목월 두 시인의 문학관에도 하루 빨리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조지훈박목월박두진 이 세사람을 하나로 이어주는 청록파 시집이 있음으로 인해 사람들은 친절하게 청록파 라고 부른다.

1940년대는 일제강점기 말기로,  많은 문인들이 친일과 변절의 길을 걷게 된다.그러나 한국문단에는 멀리 국외로 도피하여 국권 회복의 그날을 기다리며 분루를 삼킨 지사들이 있는가 하면 죽음으로 일제에 대항한 투사들도 있었다. 우리 문학은 이러한 지조 있는 문인들 덕분에 문학의 향기와 빛깔을 더욱 찐하게 할 수 있었고 , 청록파시인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이야말로 역사의 한 고비에 우뚝 서 있는 훌륭한 시인들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붓을 꺾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못하는 그 간악한 식민지의 1940년대를 침묵이 아닌 독백으로 고통의 열매를 다듬고 있었던 것이다.

모국어를 빼앗긴 불우한 시대를 살았던 세 시인은 자기들의 시로써 꺼져가는 모국어의 불씨를 일구었고 을유문화사의 기획을 거쳐 박목월이15, 조지훈 、박두진이 각각 12편 모두 39편을 시집에 수록하여 청록집을  간행하였다.

체념처럼 친일을 하거나 입을 다물고 붓을 꺾거나 하는 문학인들이 부지기수였지만 이 세 시인은 자연을 통해 저항의 의미를 부여하고 애끓는 한의 정서를 시 속에 쏟아 넣으며 암흑의 시대를 견딘것이다. 해방이 되자마자 노력의 열매가 세상에 드러날 수 있은것은 그들이 결코 암흑기의 터널속에 주저앉아 공허하게 태평성세만 불러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들의 시에는 한결 같이 식민지시대 한민족이 처한 얼과 혼이 끈끈한 민족적 유대감으로 녹아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청록파의 시는 한국 현대시사의 값진 수확으로 기록된다.

그들의 공통한 특점은 자연을 대상으로 노래한 점 외에도 그들이 등단한 시대가 일점강점기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한국어 말살정책과 대동아 식민정책의 살벌한 시대였지만 자랑스러운 민족언어로 사람들의 가슴속에 고유의 정서와 미감을 주입시켰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청록집에 수록된 다수의 시를 일반적으로 해방 이전의 시사로 다루고 있다.

청록이란 의미는 푸른 사슴이라는 뜻인데 사슴이 푸른 색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푸른 자연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사슴을 의미하는 말로 일제의 치하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겉보기에는 자연을 노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일제로부터의 한국의 독립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청록파 시인들이 모두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박두진의 자연에 대한 시선은 다른 두 시인과 달랐다. 그의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소박한 자연’ 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에서 빚어진 의연하고 당당한, 그리고 강렬한 의지로서의 자연이다.

시인 자신의 말에 따르면 “온 우주에 편만遍滿해 있고 그 위에 초월해 있는 한 법칙”의 “주재자主宰者의 의지”로서의 자연이다.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난 박두진은 1939년에 향현香峴’ ‘묘지송墓地頌’  ‘낙엽송落葉頌, 다음해인 1940년에 의蟻’ ,’들국화문장에 추천되어 청록파 시인 가운데 가장 먼저 완료 추천을 받는다.

문장지는 전통적 정신주의와 문화적 민족주의를 지향한 문학지로 청록파 세시인의 등단 자체가 이 지향점의 완성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박두진 시인은 문단에 등단 이후에도 꾸준히 ‘도봉道峯‘ 、 ’별‘ 、 ‘푸른 하늘 아래‘ ’설악부‘ 등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시들을 발표한다.

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박두진에게도 오랜 암흑기에서의 해방은 강렬한 동적 심상을 불러일으켰다. 1949년에 펴낸 첫 단독 시집인 에서는 여전히 산을 소재로 하면서도 예전처럼 누워 침묵하는 산의 이미지와는 판판 다른 이글이글 타는 해를 솟아오르게 하는 생명력으로 충만된 산을 노래한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어두운 현실을 감내하면서도 내일에 대한 희망을 소망하는 박두진의 첫 단독 시집 이다. 이처럼 는 상징과 의인화를 통해 어두운 과거를 뒤로하고 밝고 활기찬 내일에 대한 희망을 노래한 시다. 이런 소박한 의미를 좀 더 파헤쳐 들어가 보면 ‘해’는 근원적이며 영원한 절대자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해’가 솟기를 기다리는 신념에 찬 시인을 만날 수 있다.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박두진은 박두진 시선을 펴내 같은 해 제4회 자유 문학상을 받는다.1962년과 1963년에 각각 발간한 시집 ‘거미와 성좌星座‘ 、 ’인간 밀림‘에서 그는 현실에 대한 자각을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거미와 성좌’에서는 여덟 개의 발끝으로 하는 여덟 차례의 간음’ , 추녀 끝에서 벗나무 가지까지 점착성 분비물과 포망을 치며 일하는 거미의 생태를 통해 고통스러운 현실과 그 속에서 로동으로 살아가는 집요한 삶의 의지를 그려낸다.

1967년에 발간한 시집 하얀 날개에서 그는 다시 자연으로 귀의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그러나 이 시집에 담긴 자연은 과거의 이나 또는 바다같은 광활한 대상이 아니라 꽃이나 새 같은 소박한 자연이다. , 꽃이 지거나 피는 일 같은 작고 순간적인 대상을 통해 영원을 발견해나가는 것이 시인의 몫이 된 것이다.

한동안의 공백을 거쳐 1973년에 펴낸 시집 고산 식물高山植物수석열전 水石列傳에서 박두진은 자연과 인간 및 사회 현실을 두루 시 속에 담게 되며 아울러 이들을 절대 경지로 끌어올리려는 끈질긴 노력을 보여준다.

그는 시집 외에도 틈틈이 수필집  시인의 고향생각하는 갈대언덕에 이는 바람과 시론집 한국 현대 시론등을 내놓아 성실한 문학인으로서 많은 동료와 후학들에게 귀감이 된다. 1993년 제15외솔상’, 1997년 제1아시아 기독교 문학상등을 받은 박두진은 1998년에 여든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청록파 가운데 한사람인 조지훈은 경북 안동시 영양군 사람이다.

그는 '승무'의 시인이다. 시의 순수성을 지키려 했던 청록파의 한 사람이고,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에 주저함이 없는' 지조론'의 선비였다. 시인은 세속적인 타협을 거부하고 조선시대의 대쪽 같은 선비 정신을 그대로 보존하고 계승해 나갔다.조지훈의 고향 안동시 영양군에는 세 가지가  없다고 한다. 4차선 도로가 없고 ,고속도로가 없고, 철도가 없다. 아무리 서툰 운전기사라도 여기서 초보를 떼면 금방 베테랑이 된다 라고 할 정도로 악명 높은 꼬부랑 고갯길을 자랑한다. 그러다보니 여기는 삼재 (전쟁, 역병, 재해)도 미치지 않는다는 경북 3대 오지 ‘봉화, 영양, 청송’ 중 하나이다.

조지훈 문학관을 찿아가는 길은 명실공히 꼬부랑 지팽이를 짚고 가는 꼬부랑 할머니의 꼬부랑 길이었다. 택시기사의 말에 의하면 오후 세시가 되면 이곳을 지나기가 겁부터 난다는 것이다. 남 제천을 지나자 구렁마다 산안개가 하늘에 닿는다. 승무를 추듯 바람에 떠밀리는 부드러운 안개의 몸짓에 꼬부랑길을 달리는 긴장이 다소 풀리는 같기도 했다. 저 멀리 강다리가 보인다. 낙동강이 여기서부터 강이란 이름을 갖추는 곳이다. 조지훈의 시 완화삼중의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 백리’ 라는 구절이 이 낙동강 칠백리 길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차운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 백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이냥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박목월의 시 나그네를 낳게 한완화삼의 주인공 조지훈도 아마 어린 시절 나룻배로 이 강을 건너며 영주나 서울 나들이를 하였을 것이다. 강을 건너 고티재를 넘으니 ‘술 익는 마을’ 과 같은 동리가 나온다.

주실 마을은 산골이라도 산세가 좋아 시인 학자 (장군)들이 많이 나온 동네라고 자랑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이 우뚝하고 물이 유장하며  공기가 투명한 이 땅을 문향文鄕 이라 부른다. 마을 입구에 그리 크진 않지만 잘 정돈된 조지훈 광장이 있다. 광장에는 민들레꽃’  ‘ 풀잎 단장등 다섯 개의 지훈 시비가 있고 주실 마을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지조 있는 선비들의 고향 영양군 일월면 주실마을은 북쪽으로 일월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영양읍과 맞닿아 있다. 이 마을은 실학자들과의 교류로 일찍 개화한 마을이면서 또한 일제 강점기의 서슬 퍼런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던 지조 있는 마을이다.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요, 냉철한 확집이기도 하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 없다.'

이 글은 1960 '새벽' 3월호에 실린 조지훈의 '지조론'이다.  어느 정권하에서든 불의와 부정에 맞서는 그의 비평은 추상 秋霜  같았다.  그는 항상 사직서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한다 . 그는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시대적 양심인이었고 이러한 그를 세상은 '마지막 선비'  또는 '지사문인 志士文人 ' 이라 불렀다.

조지훈의 생가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지훈문학관이 있다. ㅁ자 형태로 된 단아한 한옥단층 건물은 마당에 붉은 배롱나무 꽃(목백일홍) 까지 피어 더욱 우아해 보였다. 미망인 김난희 여사가 직접 현판을 쓴 문학관은 대지 4,000여평 건물 500여평 규모의 목조건물이였다.

  •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시인의 조각상이 한 눈에 안겨왔다. ‘승무의 랑랑하지만 착 가라앉은 음악이 흐르고 하얀 고깔을 쓰고 춤을 추는 여인의 영상이 두 대의 모니터에 비쳐나왔다.

얇은 하이얀 고깔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깍은 머리

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설어워라.

臺에 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전시장 입구 쪽엔 조지훈이 소년시절에 읽던파랑새’, ‘ 행복한 왕자등 세계명작 동화들이 놓여 있고, 청록시절 문장지에 추천받던 때의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곁의 진렬장에는 시인이 생전에 사용하던 부채、 안경、라이터、 도장、벼루 등 소품들이 정리되어 있고  영양중학교 교가 원고와 영양 군민의 노래 원고 등이 차례로 진렬되어 있었다. 벽쪽으로 조지훈 시화、저명시인들의 친필 시를 액자에 진열해 놓았으며, 벽 마지막에 지훈의 시 세계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문학관 내부는 시보다는 지훈의 생애를 위주로 꾸며져 있었다. 조지훈 삼남매(형 조세림, 조지훈, 여동생 조동민) 합동시집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와 지훈의 장남이 쓴 회고록 승무의 긴 여운, 지조의 큰 울림 - 아버지 조지훈”, 등도 눈에 띄였고  지훈 육필 시집도 눈길을 끌었다.

문학관을 나와 문학관 뒷산 기슭에 있는 시 공원을 올라가니 경사진 시 공원에는 조지훈의 금빛 동상이 주실 마을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고, 그 옆으로승무’ ‘낙화’ ‘봉황수등이 조각을 이룬 작품으로 , 그주변에  ‘완화삼 ‘  ‘절정 ‘  ‘종소리 28편의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조지훈은 저항시인 만해 한용운을 두고 시인 、 선사 、 혁명가로서의 정삼각형을  이루었다고 했다. 그도 한용운 못지않게 시인으로 학자로 지사志士로서 삼각형을 이루고 각기 그 정점을 이룩했다.

사람들은 조지훈 시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4가지로 분류 정리하였다.

  1. 아려 雅麗한 시어와 유민한 가락에 얹혀 드러나는 한국의 고전적인 미의식,
  2. 잊혀 져 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슬픔,
  3. 동양적인 사상과 정신에서 비롯된 자연관,
  4. 그리고 불교의 한 줄기인 선禪의 경지를 은근하게 그려낸 것이다.

조지훈은 정지용에 의해 3차례 추천을 받아 정식으로 시단에 올랐다. 그의 첫 번째 추천 시는고풍의상이다.

탁월한 선자 정지용의 충고로 조지훈은 서구시를 모방하던 자신의 습관에서 탈변하여 새롭게 자신의 시를 정립하였다. 그해 11월에승무다음해 2월에 봉황수가 추천되어 신고전적新古典的시인으로 시단에 우뚝 서게 된다.

광복이 되자 조지훈은 고향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와 조선어학회의 중등국어교본편집위원으로 위촉받았다. 그는 사회활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한편 시인으로서 창작도 활발히 하고 교육자로서의 삶도 시작하였다. 경기여고 교사, 서울 여대 교수를 거쳐 평생의 직장인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27세의 나이에  누구의 도움없이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부임 한 것은 그의 뛰어난 학문적 영향력에서 얻은 결과였을 것이다.

이 무렵 조지훈은 시 창작보다는 학문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자유당 독재정권을 논설과 참여시로 질타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승만 박사가 두 번째 대통령으로 취임할 당시 조지훈은 정부 당국으로부터 이 대통령에 대한 송시頌詩를 쓰라는 교섭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박사든 누구든 살아있는 사람의 송시는 쓰지 않는다. 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요 냉철한 확집 確執 이기도 하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 없다. 자기의 명리 名利 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하루 아침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망의 고배를 마셔야 하였던가. 그는 지조론에서 이러한 세태를 냉정한 지성으로 비판하였다.

조지훈이 평생 동안 사표로 삼은 이는 매천 황현과 만해 한용운이었다.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한 일송 김동삼의 시신을 만해가 자신의 집인 심우장牛莊에 거두어 장례를 치룰 때 ,조지훈은 일제의 감시도 아랑곳 하지 않고 떳떳이 참석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겨우 17세 때였으니 어린 시절부터 지사로서의 뜻을 세운 것이다.

조지훈은 어느 정권에서도 불의와 부정에 지사적 논객으로 맹활약하였고 어두운 사회현실을 매섭게 비판하였다. 시대의 지성으로 추상같은 정치비평 등을 많이 남겼으나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다. 1940년,조지훈은 아침등의 시편을 쓰지만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오대산에 들어가 월정사 강원月精寺講院의 외전 강사外典講師로 일하며 당시唐詩와 불경佛經을 탐독하는 등 현실 세계와 일정한 거리를 두는 관조적 생활을 한다. 이 무렵에 조지훈은 경주에 있던 박목월을 찾아가는데 박목월은 그 첫 만남을 이렇게 돌아본다.

그가 나를 찾아온 것은 1940년 봄이었다. 그의 나이 21, 우리가 문장지 추천을 거친 이듬해였다. 그가 온다는 전보를 받고 ‘조지훈 환영’이라는 깃발을 들고 역으로 나갔다. 밤물결처럼 치렁치렁한 장발을 날리며 경주 역두에서 내게로 걸어오던 지훈은 틀림없이 수수한 흰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이렇게 처음 만난 다음 해방후인 1946년 서울 성북동 조지훈의 집에서 박목월 박두진 세 사람이 모인다. 이 자리에서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은 공동 시집 발행에 뜻을 모으고, 박두진이 근무하던 을유문화사를 통해 청록집 을 펴내기에 이른다. 한국 서정시의 큰 산맥을 이룬 이 세시인은 모두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올랐다.

조지훈이 민족의 가치를 찿고, 박두진이 삶의 궁극적 가치를 찾았다면, 박목월은 오히려 ‘일상’에 많은 비중을 둔 시인이다. 박목월의 시 세계가 청록파의 다른 두 사람에 비해 스케일이 작고 소박한 것도 이런 성향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그러나 같은 청록파라고 해도 세 사람의 시 세계 속에 나타난 자연은 조금씩 빛깔이 다르다. 박목월의 자연은 전통 율조와 회화적인 감각, 그리고 향토성이 짙게 배어 있는 자연이다.

청록파 가운데 가장 늦게 나와 다른 누구보다 인간적인 냄새가 짙게 풍기는 시를 선보인 박목월의 본명은 영종泳鍾인데 1916년 경북 월성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수리 조합장을 지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비교적 넉넉한 환경에서 자란다. 어릴 적에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한 그는 경주에서 좀 떨어진 보통 학교를 졸업한다. 1930년 대구 계성중학에 들어간 그는 하숙 생활을 하며 습작기를 보낸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어린이 에 동시 통딱딱 통딱딱신가정제비맞이라는 글이 실리면서 아동 문학으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지만, 1935년 졸업 뒤 집안이 기울어 고향으로 돌아와 동부금융조합에 입사한다. 목월木月이라는 필명은 그가 좋아하던 수주樹州 변영로의 아호 중 수樹자에 포함된 ‘목木’과 소월素月로부터 ‘월月’을 따서 지은 것이다.

1939문장에 작품을 투고해 청록파 시인 중에서 가장 늦은 1940 9월에 등단하는데, 이 때 그는 정지용으로부터 북의 소월, 남의 목월 이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기성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1953년부터 그는 다시 서라벌예대와 홍익대에 출강하는 등 교직에 몸을 담으며, 시집 산도화 를 펴낸다. 1962년에 그는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로 임용되며, 1963년에는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개인 교습을 맡기도 한다. 고향으로의 회귀란 곧 삶의 본질을 찾아 시공을 거슬러오르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과정을 거치는 동안 짙은 허무가 배어나기도 하지만, 그 허무의 끝에서 좌절이나 체념을 넘어 삶과 죽음을 여유 있게 바라보는 달관의 자세를 만나게 된다.

1976년 삶을 다하기 전까지 박목월은 출판인으로서, 교육자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청록파’라는 이름을 지상에 남긴 한 시인으로서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그의 대표 시 중 하나인  “나그네를 보기로 하자.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우리나라 낭만시의 최고의 것이라는 찬사를 받은 바 있는 목월의 작품 나그네는 조지훈의 완화삼 玩花衫에 대한 화답시로 씌여졌다이 시는 7.5조의 음절수를 기초로 한 3음보 율격의 민요조 가락과 친근한 언어구사, 그리고 간결한 표현방법을 사용하여 체념과 달관으로 유유자적 悠悠自适 하는 나그네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시에서 중심을 이루는 이미지는 2연과 5연에서 반복되는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이다.

본래 나그네는 떠도는 구름의 심정으로 여기저기 그저 발길 닿는 대로 흘러가는 사람으로 구름을 따라 흘러가는 달과 함께 세속적인 집착과 속박에서 벗어난 동양적 해탈의 경지를  상징한다.

유유자적하고 행운유수 行云流水 한 서정을 짙게 풍기는 이 나그네는 작품이 씌여진 식민지 말기의 암울했던 시대적 배경과 관련되는데 , 그것은 바로 나라 잃은 백성들의 체념과 달관을 뜻하는 동시에 현실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시인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강나루를 건너가면 밀 밭 사이로 외줄기 길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고적한 풍경이 나타나는데 , 이것은 강의 푸른 색과 밀밭의 푸른 색조가 어울려 짙은 색감을 드러내며 작품의 배경이 되고 있다. 그리고 외줄기 길에서 느껴지는 나그네의 고독은 삼백 리로 더욱 깊어진다. 여기서 삼백리는 실제적 거리라기보다는 화자가 느끼는 고독한 정감을 나타내는 추상적 거리를 의미하며 삼三 이란 수 역시 한국적 정감을 나타내는 친숙한 숫자로 향토적 분위기 형성에 이바지 하고 있다.

외줄기로 길게 뻗어 있는 쓸쓸한 황토길을 밟으며 술 익는 어느 마을을 지날 때 , 마침 서산 하늘 가득히 타고 있는 저녁노을이 고독한 나그네의 가슴을 한층 서럽게 불태우고 있다. 이렇게 노래되는 자연풍경은 분명 한국인의 의식속에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정경이다. 이시는 강나루→밀밭길→ 술→ 저녁놀로 시상이 발전되고 있는데 이것은 술의 재료인 밀에서 실제의 술인 술 익는 마을, 그리고  익은 술 빛을 연상하게 하는 저녁놀로 이미지가 확대된 것이다.  따라서 술 익는 마을 의 서정 , “타는 저녁놀서경 의 조화로 자연과 인간이 동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푸른색과 붉은 색이라는 색채의 대비와 함께 후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이미지의 결합으로 한층 더 승화된 미감을 자아내고 있다.

한편 첫련의 밀밭 길이 삼련의 외줄기 길로 변형되고 발전된 것은 밀밭길의 아름다움이 남도 삼백리로 뻗은 외줄기 길의 고독으로 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고독한 길과 그 길을 가는 나그네 사이에 저녁노을이 타고 있는 것으로부터 나그네의 고독한 길이 단순한 고독으로 그쳐 버리는 것이 아닌 , 술과 관련된 황홀 속에 번져가는 차원 깊은 고독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는 첫련을 제외한 나머지 련을 모두 명사형으로 끝맺고 있는데  이것은 련과 련 사이에 여백을 줌으로써 시상을 함축하여 각 련 사이의 류동성 流을 막고 감도의 여운을 주는 효과를 지니는 것이다.

만약 완화삼이 나그네의 구슬픈 우수 憂愁 드러내면서 가야 할 앞길의 정서적 거리를 ”물길은 칠백 리“로 표현했다면,  ‘나그네에서는 물처럼 바람처럼 걸림 없이 ”남도 삼백 리“ 의 길을 표표히 가는 나그네의 심사를 부각했다.

강나루란 배가 건너 다니는 강가의 일정한 곳을 의미한다. 남도란 경기도 이남의 땅. 곧 충청, 경상, 전라의 3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나그네는 고독한 자아이고 길은 나그네가 가야 할 행로이다. 이 행로는 강나루와 남도이며 곧 조선의 백성이 사는곳 전부를 말하는 것이다.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이라는 4연을 보면 조선의 마을을 바라보는 시인의 애정이 느껴지고 시인의 행로를 하나로 연결시키려는 민족주의가 숨어있음을 알 수 있다.

조지훈은 박목월의 시에 대해 ”압운이 없는 현대시에도 이렇게 절실한 심운 心韻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목월에게 지훈이라는 친구가 없었다면 이 시 역시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친구는 그래서 위대하다. 친구가 친구로 하여금 명시를 탄생하도록 디딤돌이 되어 주었기에 세상에는 꽃과 같은 친구, 저울과 같은 친구 그리고 산과 같은 친구가 있다고 한다. 목월에게 있어서 지훈은 무게있고 온당한 산과 같은 친구임에 의심할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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