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사탕이 불러 온 추억 

글 / 한영규(중국 흑룡강)

 

아마도 나는 서른살이 다 되어서야 솜사탕을 구경한 것 같다. 6.1절 운동회 하는 그날 애들한테 하나씩 사주면서 한 입 먹어 본 솜사탕, 입에 넣으려는 순간 고운 설탕실이 와작 무너지면서 설탕이 입술에 착 달라붙는 그 느낌, 먹어보지 않고선 그 신비한 맛과 미묘한 느낌을 형용할 수 없으리라! 

작년에 공원가에서 솜사탕 만들어 파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한 할머니가 손녀딸인 듯 해 보이는 녀자애 한테 솜사탕을 사서 건네주고 있었다. 내 딴에는 제법 름름해서 지나쳤는데 곁에서 걷던 눈치백단 남편이 제꺽 연한 핑크색 솜사탕 하나를 사다 안겨주었다.

" 우아~ 이건 왜 사왔어요? 그럼 당신도 한입 맛 보세요... " 

" 이런 건 애들이 먹는거요. 난 어른이니 안 먹지"

" 60대 중턱을 넘었는데 애라니 참 좋네요... 어른이 될 날들이 아직 앞에 남아 있어서... "

"당신 그래 애가 아니고 어른이야? 그때 한국에 그 농장사장도 당신을 애들 같다고 했었잖아... " 

솜사탕으로 이어진 남편과의 한단락 대화는 나를 십여년 전, 한국 전라북도의 어느 한 농장으로 끌고 갔다. 

그 당시, 한국에서 부부가 한 일터에서 장기적으로 함께 할수 있는 일이란 농장일 밖엔 없었다. 하지만 평생 안온한 실내에서 분필만 잡았던 여린 손으로 농장일을 한다는건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 농장에 있었던 10개월간은 내가 생전 맛 보지 못했던, 인생수업의 달고 시고 쓴맛을 골고루 다 맛 보게 했었다.

어느 대학교 교원출신이었다는 사장님은 일 솜씨도 아주 잽싸고 또 일군들을 무던히 잘 챙겨주는 좋은 분이라고 동네방네에 소문이 나 있었다. 명함장을 보니 놀랍게도 이름 두글자가 나와 같았는데 그 분은 '외국인'인 우리 내외를 무척 아껴주었었다. 첫 대면에 "저를 사장이라 불러도 되고 주인이라 불러도 됩니다"하며 시원스레 말문을 열었던 그 분은 마음씨가 아주 따뜻했고 전라도 남성의 직통배기 성격을 그대로 물려 받은 분이셨다.

잡거지구에서 살았던 우리는 그때까지 설에도 떡국을 먹는 습관이 없었고 또 만들줄도 몰랐었다. 농장에 도착한지 며칠 안되여 음력설이였는데 우리 내외는 설날 아침에 농장에 있는 사장님댁에 초대되었었다. 소고기볶음, 돼지갈비찜, 닭고기, 그리고 두가지 해산물 료리에 잡채... 상에 오른 여러가지 맛갈스런 료리 보다는 그날 사장님이 직접 나서서 끓여 주던 떡국이 나는 제일 맛있었다. 그날 수줍음을 많이 타는 내가 무슨 용기가 생겨 떡국이 별맛이라며 절로 한 국자를 더 떠먹었는지 지금도 '내가 참 대단했다'는 생각이 불쑥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그날 사장님과 사모님은 무척 기뻐하셨었다.

첫 만남부터 초면이자 구면같은 친근감이 우리한테서 느껴져서인지, 이렇게 시작된 우리의 인연은 사장과 직원이란 거리감이 없었다.

매달 월급과 식사 보조비를 꽁꽁 챙겨 주셨음에도 사장님은 내가 밤잠도 제대로 못 자며 고생한다며 종종 귤상자나 라면상자를 슬그머니 우리 집에 들여다 놓고 갔었다. 가끔 애들을 데리고 농장을 방문왔던 사모님도 김치와 밑반찬을 만들어 한 박스씩 갖다 주곤 했었고 늘 같이 따라 오던 여섯살 짜리 아들애는 번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료와 붕어빵 그리고 쏘세지를 살그머니 우리 집에 남겨두고 가군 했었다. 

규모가 큰 농장이라 농장에는 사장까지 직원이 모두 5명 있었는데 남편은 모돈사에서 새끼를 밴 어미돼지들을 관리했었고 나는 분만실에서 새끼를 당장 낳게 될 어미돼지 수백마리를 돌보면서 사람에 비하면 접산원과 아기보모와 (月嫂)같은 일을 주로 하게 되였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농장규모가 컸지만 설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이 신경 써야 할 일이 너무 많았었다. 어느날 저녁이였다. 다들 회식하러 시내로 가고 산 속에 자리 잡은 큰 농장에는 나 혼자만 남았었다. 그런데 참 공교롭게도 한겨울인데 갑자기 분만실 보온등이 몽땅 꺼져버려 금방 모체에서 떨어져 나온 새끼돼지 수십 마리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날 혼자 손전지를 비추며 전기선로가 차단된 곳을 찾으며 얼마나 긴장하고 두려웠던지 온몸이 물자루가 되었었다. 

그리고 그해 추석날 저녁에는 이튿날 새벽 3시까지 급성장염으로 설사하는 새끼돼지 백여마리에게 복강(腹腔)주사를 만들어 놔주느라고 돈사에서 꼬박 날을 밝혔었다. 설사하는 새끼돼지들 한테 주사를 놓으려고 뒤다리 두개를 모아쥐고 꺼꾸로 들면 애들이 물총을 쏘듯 맹물같은 변을 쫙 내갈기는 놈도 있었는데 마스크를 꼈으니 망정이지 내 입안에 막 들어갈 정도였다. 그래도 발견하는 즉시로 치료를 다그쳐 위험에서 벗어난 자돈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며 나는 위안과 고생한 보람을 느꼈었다.

또 한번은 사장님이 외출했는데 배가 남산만한, 미국에서 수입한 몸값이 아주 어마어마한 모돈 한마리가 고열에 시달리며 호흡이 정상이 못되었다. 나는 전화로 사장님과 문의하며 큰 바늘로 모돈의 귀등의 혈관을 찔러 피를 뽑아주고 모돈을 달래 눕힌 후 큰 주사기에 랭수를 재워 모돈의 항문으로 여러차례 주입하였다. 랭수가 직접 직장으로 들어가자 불덩이 같던 모돈의 몸이 서서히 식기 시작했고 따라서 크게 근심했던 모돈의 변비도 시원히 해결을 보았었다. 

이튿날 이 모돈이 언제 아팠던가 싶게 14마리의 포동포동한 새 생명을 무사히 탄생시킨 걸 보며 얼마나 뿌듯하던지... 

제일 크게 충격을 먹었던 그날은 아마 찜통더위가 시작된 7월 중순이였던 것 같다. 그날 점심을 먹고 인차 오후 출근시간 전에 돈사에 나갔는데 일주일 전에 자돈 12마리를 분만한, 내가 제일 이뻐하던 젊은 모돈 한마리가 꼼짝 못하고 죽어 있었다. 무슨 급병인지 오전까지도 아무 증상이 없었는데... 죽은 돼지는 돈사에서 인차 끌어 내가야 했기에 사장도 일찍 나왔고 직원들도 모두 모여왔다.

그러나 눈물 없이는 볼수 없는 정경이 벌어졌다. 새끼돼지 열두마리가 터질듯이 부풀어 오른 어미 젖가슴에 매달려 줄기차게 젖을 빨고 있지 않는가, 사장님의 분부대로 직원들이 젖을 한창 빨고 있는 새끼돼지들을 억지로 한 마리 한 마리씩 잡아떼서 젖을 당장 떼게 되는 세 모돈한테 갖다 붙여 주었다. 부득이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순식간에 친어미를 잃고 형제들과도 생리별한 새끼돼지들은 훗어미 가까이에 다가가지도 않고 한 구석에 몰켜서서 멍하니 울타리 바깥만 자꾸 살피고 있었다... 

참고 또 참았지만 돌아 서 있는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어느새 사장이 눈치 채고 나를 위로 했다.

"아줌마, 아줌마는 꼭 애들 같아요... 짐승을 많이 기르니깐 더러 죽기도 하고 그러죠... 아줌마는 친구나 또는 가족 중에 갑자기 죽은 사람이 없어요?... 이런 일을 하려면 마음을 크게 가져야 합니다 ..." 

'갑자기'란 그 말에 더구나 눈물이 쏟아졌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 할가 내가 만 여섯살이 되던 해의 동지달 열하루날, 바로 나의 생일날에 우리 엄마가 나의 두번째 동생을 낳으셨는데 사흘 후 스무아홉살 밖에 안된 나의 엄마도 저렇게 갑작스레 떠나가셨다. 내가 밖에 놀러 나간 둬시간 사이에 저렇게 총망히 다른 세상 사람이 되여 꼼짝않고 자리에 누워 계셨다. 그래서 나한테도 엄마젖을 찾으며 새끼제비처럼 입을 짝짝 벌리며 울어제끼던 핏덩어리 같은 동생이 있었었다. 뿐만아니라 우리 집에서도 그 동생을 키울 힘이 없어 남의 엄마한테 맡겼었다... 그날,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아물지 못하고 남아있는, 나의 제일 깊은 상처를 건드려놓아 내가 그토록 눈물을 비 오듯 쏟고 있다는 것을 그때 그 사장님이 어찌 아셨으랴?! 

아무튼 '어린애 같다'니 내 귀엔 예나 지금이나 칭찬처럼 들려서 좋다.

그리고 이 나이에도 내가 꾸밈과 가식을 모르는 깨끗한 '동심'을 그대로 고스란히 간직하고 살고 있다는게 얼마나 기특한 일일가? 때론 나이에 걸맞지 않게 너무 유치찬란하다는 말로 들려 얼굴이 살짝 붉어지긴 하지만, 이게 타고난 내 천성이라면 굳이 어르신 틀을 차리며 없는 틀거지를 만들어 잘난척 할 필요가 있을가?

나는 '어린애'가 좋은데... 

2024년 3월 8일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