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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60년 방송인생

글 / 김선녀(중국 연변)

 

[동북아신문=석서아 기자] 2021년 9월의 어느날, 연길시흥안소학교에서 조선어문을 가르치는 최선생한테서  조선어문시간이 일주일에 2교시 밖에 안되여 많은 조선족애들이 한족학교로 전학 가고 있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듣게 되였다. 

내 나이 여든한살, 이 나이에  무슨 일을 할 수 있단말인가?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며칠째 밤잠을 설쳤고 밥맛도 없어 끼니도 챙기네마네 했다.

하지만 그게 어쩐지 남의 일 같지 않았고 나라도 뭔가 마지막 끈이라도 잡고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그게 주책이라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며칠째 고민에 고민을 하던 중 갑자기 머리 속에 60년대의 어느날 목숨으로 사수했던 <9시뉴스방송> 일화가 떠올랐다...

평강벌 모내기가 한창 마무리단계에 들어선 1964년 5월31일, 당시 화룡현방송국 조선말방송원이였던 내가 룡포촌에 내려가 모내기현장취재를 끝내고 나니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졌다. 가난한 농부의 집 9남매 맏이인지라 손목시계도 없어 몇시인지도 모르고 5시에 화룡으로 가는 막차를 놓칠가봐 스무근도 넘는 록음기를 짊어지고 부랴부랴 숨차게 서성뻐스정류소로 달려갔다.

아불싸! 화룡행 막차가 금방 떠났단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저씨 서성에서 화룡까지 가려면 몇시간 걸려요?”

“걸어가려고? 안돼! 겁도 없이 처녀애가  밤에4~50리 산길을, 절대 못가오!"

“저는 꼭 가야 해요. 안가면 오늘저녁 9시뉴스방송이 펑크난단 말이예요?!”

나는 뻐스정류소 박소장 아저씨를 붙잡고 방법을 대달라고 애원했다.

“기어이 가려거든 록음기는 래일 첫 뻐스에 올려보낼테니 두고가오. 걷다보면 화룡가는 트럭이나 찦차를 만날 수 있으니... 하지만 이건 목숨을 건 ‘도박’ ...”

나는 박소장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마이크와 록음테이프가 든 가방만 달랑 메고 화룡 쪽으로 걸음을 재우쳤다. 한참은 뛰다가 걷다를 반복하면서 구산촌과 명암촌을 지나 토산자 산 고개에 올라서니 해는 벌써 서산으로 꼴깍 넘어가고 날은 바야흐로 캄캄해 지는데 을씨년스럽게 비까지 구질구질 내렸다. 

한참 걷다보니 빗물인지 콧물인지 눈물인지 짭짤한 것이 입속으로 흘러들고 마음은 조급해나고 무섭고 오싹해났다. 요행을 바랬건만 연길방향으로 가는 차는 4대나 지나갔는데 화룡 쪽으로 오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산짐승들 울음소리 들리는 것 같고 손전지불인지 도깨비불인지 저 앞쪽에서 뭔가 번쩍번쩍거렸다.

급기야 무시무시한 토산자다리에 이른 것이다. “범의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잃지 않으면 산다”고 했던가. 나는 처녀티를 감추려고 치렁치렁한 머리태를 정수리에 틀어올렸다.

"잡아라ㅡ 빨리빨리 놓치지 말고 잡아라..." 다리밑에서 남정네들의 고함소리가 밤 정막을 뚫고 내 고막을 쨌다.

"아이구, 난 인젠 죽었구나." 온 몸이 전률 하면서 한 발짝도 걸을 수 없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그 숨막히는 공포의 순간,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보였다. 이판사판이다, 나는 다짜고짜 두 팔을 벌려 차를 막았다. 놀란 운전기사가 ‘화룡림업국’이라고 씌여 있는 차문을 열고 급히 뛰어내렸다.

“저는 화룡방송국 방송원입니다. 오늘저녁 9시뉴스를 해야 하니 태워주세요.”

못하는 중국어로 입술을 덜덜 떨며 하는 말을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후덥게 생긴 한족기사가 나를 조수석에 앉으라하고 손목시계를 보더니 자동차엑셀을 밟았다. 부르릉... 요란한 자동차의 동음소리와 함께 차가 쏜살같이 달렸다.

(맙시사! 이젠 살았구나!...) 나는 감사하다는 말 대신 그만 펑펑 울고 말았다.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방송시간 5분 전에 스튜디오에 들어가  마이크앞에 앉았다.

60여년 세월이 흘러지난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봐도 ‘천방야담’같은 이야기다.

그 뒤 1965년에 연변인민방송국에 전근했지만 시대의 사정상 남편이 근무하는  서북변강 신강 석하자생산건설병퇀에 가서 채농으로 일하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10년만에 끝내 다시 방송국으로 돌아왔지만 그렇게 사랑하던 방송원일은 못하고 연변방송국의 광고부기자로 동분서주했는데 하도 평판이 좋아 1981년에 연변의 첫 녀성TV기자, 프로듀서(연출)로 되었다. 나는 조선족어린이들을 위한 <꽃봉오리프로>를 개설하고 이어서 <꽃봉오리예술단>을 창단하여 조선족어린이들 프로가 중앙 TV에 많이 방송되게끔 최선을 다했다. 특히 그 당시 내가 기획하고 제작한 가무특집 <장백의 진달래>, 아동가무풍경영화 <아! 장백산>, 다큐멘터리 <조선족어린이 설맞이>, 드라마 <별찌> (박준희연출)등 프로가 전국소년아동 TV종목 <금동상> 1등상, 전국 소수민족<준마상> 1등상,  동북삼성 <금호상> 2등상을 수상했다. 뿐만 아니라 <꽃봉오리예술단>을 거느리고 조선, 한국, 미국 등 해외방문공연을 가서  "아리랑" "고향의 봄"을 부르면서 우리 조선족어린이들의 지혜와 높은 예술기교를 세상에 널리 알렸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나는 37년 간 방송인으로 우리 말과 우리 글 그리고 우리 문화를 지키기 위해 발버둥질을 해왔다. 하지만 1997년에 정년퇴직을 하자마자 고혈압, 심근경색, 압축성 척추골절로 수차 수술대에 오르다보니 근20년간 병마와 싸우는 락엽이 되여가고 있었다.

내 비록 팔순이 넘는 할망구이지만 그저 손 놓고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갈마들었다. 누가 뭐라하든 또 내 나이가 팔순이든 구순이든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에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뇌리에 떠올랐다.

고민에 고민이 이어지던 중 헤성 같은 섬광이 나의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그러면 그렇지! 독불장군으로 온라인방송을 하면 될게 아닌가!”

순간 나는 무릎을 탁 내리치며 나의 생각을 령감님한테 얘기했다.

다행히 령감과 딸네부부가 적극 나서서 지지해주면서 즉각 연길시중관촌 전자상가에 가서 3천원 짜리 새 휴대폰과 작은 마이크를 사왔다.

2021년 10월 6일, 내 나이를 따서 <8학년 1반 친구방송>이란 타이틀로  내 인생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 <9시뉴스방송스토리>를 첫 시험방송으로 친구위쳇방에 올렸다. 이어서 <연변문학>, <연변녀성>,< 로인세계>,<길림신문>,<연변일보>에서 좋은 글을 선정하여 매주 토요일 아침 7시부터 8시 사이에 어김없이 방송을 진행했다.

“지상파방송은 그 시간이 지나면 들을 수 없지만 휴대폰에 저장돼 있는 선생님의 온라인방송은 아무때나 들을 수 있고 특히 눈이 어두워 책을 읽을 수 없는 늙은이들에게 아주 친근한 동반자네요.”라는 댓글을 받고 나는 얼마나 기뻣는지 모른다. 이 늙은이가 인생 끝자락에 와서 하고싶은 보람 있는 일을 찾았으니 말이다.

어느날 연변시랑송협회 송미자 회장이 방송을 잘 들었다 하면서 자기네 시랑송계정에 올리면 전국, 나아가서 외국에까지 방송이 나갈 수 있다는 반가운 조언을 주었다. 이렇게  되여 <8학년 친구방송>은 연변시랑송협회의 공식계정으로, 후에는 연변도서관 공식계정에서도 <듣는 도서관방송>이란 타이틀로 널리 울려 퍼질수 있게 되여 엄청 뿌듯하고 행복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였다. 지금은 연변도서관의 책을 빌려다 읽고 좋은 내용을 선정하여 줄이고 편집하여 방송하는 경우가 다반이지만, 초창기에는 신화서점에 가서 책을 사다 방송하였다. 이를테면 우리 민족문학의 거장 김학철작품은 <김학철전집> 10권을 전부 사다 읽고 선택했으며 저명한 원로작가 림원춘의 <몽당치마>는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작품집>을 사다가 편집하여 방송했다.

무엇보다 제일 어려운 일은 방송실로 사용하는 우리 집 작은 서재가 방음시설이 잘 안된 것, 록음할 때 발음 한글자 틀려도 단어 하나 중복되여도 편집기가 없으니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시다시 하면서 때론 30분 내용을 온하루 록음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짜증내거나 실망하지 않았고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독촉하는 사람도 없지만 한번 펑크냄이 없이 청취자들과 약속한 방송시간을 철같이 지키면서 4년째 무난히 견지하고 있다.

어떤 친구들은 롱담반 진담반 이렇게 말한다. “우리랑 같이 10전치기 마작이나 놀 것이지, 늙은이가 그렇게 제 돈 팔면서 봉사를 하는데 어디서 돈잎이나 무슨 명예, 계급장이라도 주나? “

“돈, 명예, 권력이 뭔데...?”

솔직히 나는 지금 누구나 상상 할 수 없을만큼의 소중한 경험을 하고있다.  매일매일 벅찬 감격 속에서 마음의 부자로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 나의 목소리가 국내는 물론 한국, 미국, 일본 등 외국에 나가 살고있는 조선족들에게 전파를 타고 전달되고 있다니 이보다 더 의미있는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8학년 친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듣노라면 그 방송원이 팔순 넘은 할머니라고 전혀 믿겨지지 않아요. 주덕해 주장, 조남기 상장 등 우리민족의 우수한 지도자분들과 정률성, 리홍광, 김산 등 길이 빛날 영웅들의 사적에서 감동과 교육을 받았고 잘 모르던 조선족의 력사와 혁명투쟁사를 새롭게 알게 되여 너무 좋았습니다. 이 멀리에서까지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해주어 정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감동적이고 인정 넘치는 댓글이 줄을 잇는다. 북경 애심협회의 한 지인은 “선생님은 영원한 스승이고 언니고 로인들의 롤모델입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존경합니다.” 라는 분에 넘치는 찬사와 격려의 댓글을 보내왔다.

참!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을 했다고, 민망스럽게 스승이며 롤모델이라고?! 그저 내가 사랑하고 지키고 싶은 우리말 방송을 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여서, 좋은 이야기를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서 기꺼이 했을 뿐인데 ...

오히려 나 자신은 방송을 하기 위하여 더 많은 책을 꾸준히 열독하면서 식견을 넓힐 수 있어 좋았고 방송을 하면서 좋은 친구들도 많이 사귀게 되고 꼬부랑 허리도 많이 펴졌고 아픈데도 많이 나아지니 심신이 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 ‘일거량득’이 아니라  ‘일거다득’이라 해야겠다.

비록 내가 하고 있는 온라인방송은 지상파방송국의 라지오 테레비방송원들보다 수준이 낮고 서툴지라도 나의 목소리는 가끔 눈물에 젖어 떨리고 마음속에 솟구치는 격정과 환희가 그대로 진솔한 말이 되고 힘이 되여 듣는 사람들에게 감동과 희망, 용기와 힐링을 주고 있다고 자부한다.  

방송은 내 인생의 전부이다. 60년 전에는 꿈과 희망에 부풀어 겁없이 날뛴 20대 아마추어 방송원에 불과했다만 60년 후인 오늘은 성숙된 자세로 자료 선정, 편집, 방송, 록음, 전송까지 혼자 해내는 용기있고 당돌한 온라인방송국 국장이다. ( ㅎㅎㅎ)

민족시인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라고 서시에서 읊었다.

나는 자랑스런 조선족으로서 죽는 날까지 한점 부끄럼이 없는 인생을 살기를 기원하는 마음가짐으로 오늘도 래일도 마이크 앞에 정중히 마주 앉는다. "아리랑"노래 부르며 하나로 뭉친 우리 민족의 희망과 행복을 만천하에 자랑 떨치기 위하여!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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