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신문=김창권 수필가]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그나라에서 위대한 역사적 업적이 있는  인물들을 화페의 도안으로 선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정치적 지도자나 독립운동가나 과학연구일군、예술가、문학가 등 미래를 지향하여 헌신한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이 그 례이다.

화폐는 물물교환을 대체하여 거래를 편하게 하는 결제수단으로서 한국에서는 신라시대부터 사용됐다고 한다. 대통령에서 최하층의 서민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휴대하거니와 거의 매일매시 접촉하고 있기 때문에 화페에 대한 인지도도 날따라 높아가는 동시에 화페도안내용 즉 인물이나 화면설계에도 상응한 기대치가 높아가고 있는 현실이다.

오죽헌 기념관 앞에서
오죽헌 기념관 앞에서

특히 지페의 지면에 어떤 인물을 설계해 넣는가는 절대 다수 국민의 인지도가 따라가는 것이기에 특히 주목을 받고 있다.

이를테면 중국지페에는 모택동, 미국지페에는 링컨 , 인도는 마하트마 간디, 몽골은 칭키스칸 이와같이 낡은 제도를 뒤엎고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를 세운 건국원수들을 설계하는 경향에 반해, 영국에서는 진화론을 연구한 찰스 다윈、 프랑스에서는 에펠탑 설계자 에펠、독일에서는 곤충학자 마리아 지발라 메리안과 같은 과학자들을 또 그런가 하면 일본에서는 존경받는 소설가 나쯔메소세키를 지페의 도안으로   설계하여 인류 발전에 기여한 업적을 기리기도 한다.

한국지페에는 천원권, 5천원권, 만원권, 5만원권 네가지 종류가 있다. 여기에 주인공은 각각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세종대왕에 신사임당이다.

세종대왕을 제외한 세사람이 다 이번 문학기행 행선지중 탐방대상으로 일찍 선정되어 있었다. 이들은 문학사적으로 만군중의 애대를 받고 우러러보는 위인이란 것은 의심할 바 없으며 한국지페에까지 등장한다는 것은 이들이 한국사회의 제반분야에서도 가장 주목을 받고 존경의 대상으로 꼽히고 있다는 것을 립증해 주고 있다.

오늘 여기서는 문학이란 좁은 범위에서지만 한국지페 천원권에 오른 이황과  모자가 한국지페에 나란이 오른 신사임당과 률곡이이 세사람의 보람있는 인생을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필자가 률곡 이이 기념관으로 향하는 이날은 복이 있는 날이었다. 전날 종일 내리던 비도 뚝 그쳤고 쾌청한 하늘로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수 있어 아침부터 기분이 거뜬하였다. 첫 버스를 놓쳐버려 계속 기다리는가 지하철을 리용하는가고 망설이던 참에 머리가 더부룩한 한 20대 청년을 지하철 입구에서 만났다. 인사를 나누고 보니 마침 같은 방향으로 가는 친구였다. 젊은 청년은 “저도 그쪽으로 갑니다. 저를 따라 오세요.”하며 앞장서는 것이었다. 묘하게도 동행을 만난거다.어느차를 어디에서 오르고 내리고하며 낱낱이 체크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기에 마음 푹 놓고 다녀보기는 문학기행을 시작하여 오늘이 처음이다.

파주시 월롱역에 도착하자 버스600번을 갈아타고 다시 법원우체국에서 하차하였다. 예정대로 150번 마을버스를 환승하면 율곡이이 유적지에 닿을 수 있다. 그런데 마을버스가  종시 나타나지 않았다. 알고보니 여전히 배차간격이 긴 로선이라고 한다. 다시말해서 하루에 두세번에 그치는 로선이다.

택시로10여분 달리니 산허리에 자리 잡은 율곡선생 유적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들떠있는 기분을 가라 앉히고 곁에 있는 신사한분을 청하여 액편이 걸려 있는 입구에서 기념사진을 먼저 남겼다. 혹시 다른 것을 준비하다가 사람이 없으면 기념사진도 남기기 힘들가 우려되어서. 이 동안 쌓은 경험 중의 하나다.  제절로 하는 일은 얼마든지 기회가 있지만 남의 손을 빌려야 할 일은 지체하지 않고 그 즉시로 처리해야 후회없다. 사람을 찿지 못해 기념사진을 남기지 못한 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유적지 입구에 들어서자 신사임당의 5-6미터 높이의 립체조각상이 한눈에 안겨왔다. 률곡이이의 조각상도 그곁에 나란이 세워져 있었다.

동양여인의 말쑥하면서도 어딘가에 도고한 기품이 스며있는 평온한 그녀의 표정은 뭇사람을 마음을 고스란히 사로잡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 나라 현처량모의 전형, 아들은 조선성리학을 구축한 대학자, 이 두사람의 모자관계를 떠나서 어느 모로 보나 그들은 당시 전 조선을 뒤흔드는 본보기가 틀림없었다. 존대와 흠모의 정분에 쌓여 있던 필자는 입구로부터 들려오는 어린이들의 떠드소리에 비로소 사색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국민학교 초급생들로 보이는 어린이들이 처녀선생 둘의 인솔하에 한창 유적지를 들어서고 있었다. 어린시절부터 위인들의 업적을 기리도록 교육차원에서 진행되는 견학활동 같았다.

율곡전시관 참관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칠팔명이나 되는 불구자를 보호용 밀차에 태우고 힘겹게 밀고 올라오는 특종학교 교사들을 만났다. 불구자들은 비록 말을 못하지만 보호차에 앉아 팔을 휘젖기도하고 머리를 뒤로젖히고 무어라고 표달을 하는 것 같으나 통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 얼굴에는 오늘 행사에 만족을 느끼는 표정이 역력히 찍혀 있었다. 저런 불구자들에까지 빠치지 않고  전통교육을 전수하고 있구나. 감개무량 했다.

신사임당의 호는 '사임 師任' 으로 13살 때 중국 상나라 주문왕의 어머니인 태임 太任을 자신의 롤모델로 삼겠다는 뜻으로 직접 지은 것이다. 자기가 여자임을 알기 쉽게 하려고 안주인이 기거하는 ‘별채’라는 뜻 '당 堂'을 붙여서 '사임당'이라 불렀다. 이것이 통칭이 되어 버렸는데 생전에는 '사임 신씨'였다.  신사임당이 속한 평산 신씨는 강원도의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로, 증조부가 성균관 대사성, 조부는 영월군수, 부친 신명화는 벼슬을 일부러 나가지 않았지만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신사임당은 조선 시대 저명한 화가、서예가、시인이다. 한국 화페도안 자문위원회에서 5만원권 지페의 주인공을 물색할 때   김구、김정희、신사인당、안창호、유관순、장보고、장영실、정약용、주시경、한용운 총 열명이 후보로 선정되었다. 전국적인 국민여론조사 결과 최종적으로 신사임당이 5만원권 지면화페도안으로 선정되였다.

5만원권 화페에는 신사임당 사진과 그 왼쪽에 그녀의 작품 묵포도와 초충도가 병행되어 있다. 묵포도는 포도 알갱이의 질감을 잘 나타낸 담백하고 우아한 작품이고 초충도는 왼쪽 하단에 희미하게 그려져 있는데 검은색 비단에 풀과 나비등을 수놓아 만든 병풍을 말한다. 신사임당은 어려서부터 시, 서예, 그림에 매우 능하였고 4세부터 글공부, 7세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하여 세종 시대의 화가였던 안견의 그림을 본따서 그릴 정도였다. 신사임당의 그림에 발문을 쓴 사람 중 조선 중기의 거물 정치가였던 송시열도 있다. 뿐만 아니라 먼 훗날 숙종대왕도 신사임당의 그림에 발문을 지었다고 하니 그림 실력이 대단했던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가 그린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고 여름 볕에 말리는데 닭이 그림 속 풀벌레를 부리로 쪼아 그림이 뚫어질 뻔했다는 일화가 있다. 신사임당은 글이나 그림이나 어느 쪽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그 실력이 뛰어 났지만 함부로 뽐내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번은 피치못할 장면에 부딛쳐서 남에게 그림을 그려 준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잔치집에 초대받은 신사임당이 여러 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국을 나르던 하녀가 치마자락에 걸려 넘어 지는  바람에 한 부인의 치마에 국물이 쏟겨 얼룩이 졌다. 부인은 “이 일을 어쩌나. 빌려 입고 온 치마를 더럽혔으니” 하며 걱정이 태산 같았다. 이때 신사임당이 그 부인에게 “부인 , 그 치마를 저에게 잠시 벗어 주십시요. 제가 수습해 보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신사임당은 인차 붓을 들고 치마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치마에 얼룩져 있던 국물자국이 신사임당의 붓이 지나갈 때마다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되기도 하고 싱싱한 잎사귀가 되기고 했다. 곁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은 감탄해 마지 않았다. 그림이 완성되자 신사임당은 치마를 내놓으면서 “이 치마를 시장에 갖고 나가 파세요. 그러면 새 치마 살 돈이 마련될 것입니다.” 했다. 과연 신사임당의 말 대로 시장에 치마를 내가 팔았더니 새 비단치마 몇벌을 살 수 있는 돈이 마련되었다. 그림은 마음을 수양하는 예술이라고 생각한 신사임당은 지금껏 그림을 팔아 돈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유교적인 규범을  내세웠던 조선 왕도시대에서는 여자는 아무리 뛰어나도 결혼과 함께 모든 재능을 묻어야만 했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고대의 뛰어난 여성 예술가들이 대다수가 기녀 妓女임을 보면 당시 여성들이 집안 일 대신 예술적 재능을 펼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신사임당은 어떻게 이런 사회적 제재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이  예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는가. 이는 아버지 신명화가 딸의 재능을 키워 줄 사위감을 고르려고 노력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는 유교사회에서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그런 남편이 아니었다. 사임당의 자질을 인정해 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 또 아내와의 대화에도 린색하지 않아 대화에서 늘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다.   

남편 이원수는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10년간 별거를 약속하고 산으로  들어갔다가 아내가 보고 싶어 다시 되돌아 온 적이 있다. 신사임당은 장부답지 못한 나약한 남편을 나무라면서 당신이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나는 머리를 잘라 비구니가 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남편이 학문에 정진하도록 갖은 방법을 강구하는 훌륭한 현처의 행실이라 하겠다.

1537년 사임당은 아들 율곡 이이를 데리고 강릉을 떠나 한성부로 돌아가게 되었다. 가는 도중 대관령 고개에서 멀리 고향마을 내려다 보던 그녀는 어머니의 자애로운 모습을 떠오리며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다음과 같은 시로 남겼다.

이시는 후세사람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폭넓게 애송되고 있다.

어머니 그리워 思親

千里家山萬疊峰 歸心長在夢魂中

寒松亭畔孤輪月 鏡浦臺前一陣風

沙上白鷗恒聚散 海門漁艇任西東

何時重踏臨瀛路 更着斑衣膝下縫

산이 겹친 내고향은 천리건마는, 자나 깨나 꿈 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 가에는 외로이 뜬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갈매기떼 모래 위에 흩어졌다 모이고, 고깃배들 모래위를 오고 가누나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 색동옷 입고 어머니 앞에 앉아 바느질 할고

신사임당은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시대를 앞서가는 걸출한 여성 본보기였다.        

한국의  5천원권 지폐 주인공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이다. 그는 5만원권 지페의 주인공인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다. 이렇게 모자 母子 둘이 나란이 국가지폐의 인물로 선정된 사례는 고금동서 력사상 처음이다. 5천원권 지페 앞면에는 율곡 이이가 태어난 집이자 신사임당의 친정인 ‘오죽헌 乌竹轩’ 그림이 있다. ‘오죽헌’ 은 검은 대나무가 자란 것을 계보로 지은 한국식 고옥을 말하는데 ‘검은 대나무’를 까마귀 오乌자 를 써서 ‘오죽 乌竹’이라고 했다. 헌은 집을 가르킨다. 강릉시 율곡로에 위치한 오죽헌은 율곡 이이가 태어난 몽룡실이 있는 별당건물이다. 

집주변에 검은 대나무가 둘러싸고 있어 ‘오죽헌’ 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 전기에 서류부가혼 壻留婦家婚이란 제도가 있었는데 남자가 결혼을 하면 부인의 집이나 그 근처에 살면서 처가의 재산을 물려받는 풍습이다. 이 제도에 따라 신사임당의 외조부 이사온李思溫도 처가의 재산을 물려 받았고 이사온은 외손자인

율곡 이이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 중에 오죽헌이 속해 있었다.

본가와는 담장으로 구분되어 별도의 영역에 자리한 오죽헌은 동남향을 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4칸 크기의 대청과 1칸 반 크기의 온돌방, 그리고 반칸 너비의 툇마루로 된 단순한 一자형 평면의 건물이다. 바로 이 온돌방이  이이가 태어난 몽룡실이다.

이이의 율곡 栗谷이란 호는 밤이 많아 율곡이라 불렸던 외가 동네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신동으로 불렸던 율곡 이이는 퇴계 이황과 더불어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꼽힌다. 6세에 어머니 신사임당과 함께 서울 본가로 올라와 어머니 슬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3세가 되던 해 율곡 이이는 진사시 進士試에 합격하는 놀라운 성적을 따냈다. 어머니 신사임당의 박식과 남다른 교육방법의 결과임을 방증하고 있다. 어머니로부터 학문의 탄탄한 기반을 닦은 률곡 이이는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 九度壯元公이라는 아름찬 명예를 가지게 되었다.  

29세에 호조좌랑에 처음 임명된 이후, 황해감사、 대사헌、 대제학、 호조、병조、이조판서를 선후로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견한 그는 십만양병설 十萬養兵說을 주장하였으며, 대동법 실시와 사회제도의 개혁에 정력을 몰부었다. 학문에 있어서는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룬 유학자로 근본원리를 종합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학문연구의 태도로 삼았으며 학문을 이론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책으로 민생과 국가 재정 문제에 적용하려고 애썼다. 조선에서 거론된 수많은 정책과 개혁론은 거의 다 율곡 이이의 사상과 정책에 뿌리를 두고있다.

16세기 후반 조선사회는 주쇠기에 처해 있었다. 공물납부와 진상의 페해, 군역의 불균형, 관리들의 부정부페 등으로 나타나는 시페를 반드시 개혁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아울러 이런 개혁은 반드시 군주의 의지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덧붙혔다. 선 善을 고양하고 성정을 몸으로 닦아 덕행을 이루고 그것을 정사에 베풀어야 왕도가 된다는 학문이다.

율곡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천재 중 한사람으로 책을 읽을 때 무려 10줄을 1번에 읽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였다. 이 시대 책들은 거의 전부가 한자로 적혀 있던 시절이기에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 선비라도 한번에 1줄 읽는 것도 어려워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조선에서 백번을 읽고 백번을 익히는 ‘백독백습 百读百习’의 습관을 지닌 세종대왕을 위수로  율곡 이이, 퇴계 이황, 백곡 김득신. 형암 이덕무를 5대 독서광 读书狂 이라 부르는 데는 그럴만한 실력과 사례들이 있었기에 그런 칭호를 얻은 것이다.

아래에 율곡 이이가 여덟살때 화석정을 두고 지은 시를 흔상해 보자.

화석정  花石亭 

林亭秋已晩 숲 속 정자에 가을이 저물어 갈 때,

騷客意無窮 거니는 이의 마음엔 부족함이 없구나.

遠水連天碧 멀리 물빛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 단풍은 서리에도 해빛 향해 붉었구나

山吐孤輪月 산엔 외로운 둥근 달이 솟아오르고,

江含萬里風 강은 끝없이 부는 바람을 머금었네.

塞鴻何處去 변방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聲斷暮雲中 그 소리 저녁 구름 사이로 잦아드네!

화석정은 원래 고려 말의 유학자인 길재 吉再가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었는데 사후 그를 추모하여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율곡 이이 때에 이르러 다시 중수된 유서깊은 곳이다. 정자 주변에는 느티나무가 울창하고 그 아래 임진강에는 밤낮으로 배들이 오락가락 하였으며 밤에는 고기잡는 등불이 호화찬란 하였다고 한다.

율곡선생은 국사의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여생을 이 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보냈다.

퇴계 이황은 한국 지페 천원권의 주인공이다. 조선에서 “ 주자대전 “ 을 최초로 완독하고 연구한 학자가 바로 이황이다.

율곡 이이가 조선중기의 저명한 철학가、정치가로서 윤리적 원칙、도덕적 수양 및 지식 추구를 강조한 문인이라면, 조선 성리학의 체계를 구축한 최고의 학자는 퇴계 이황 선생이다.  

이황은 “ 주자대전 ” 을 읽고 연구한 지 13년만인  56세 때 “ 주자서절요 ” 를 완성하였다.

이 책은 “ 주자대전 “ 의 편지 중에서 정수를 추려 모은 것으로 비록 편저이지만 이황의 주자학 연구의 깊이를 유감없이 보여준 명저이다. 이 책이 간행되자 학계의 신진 학자들이 크게 호응하여 속속 이 책을 통해 주자학에 입문했으니, 조선에 본격적인 주자학의 시대를 연 것은 거의 이 책에서 비롯했다 해도 과인이 아니다. “ 주자서절요 ” 는 조선에서만 도합 8차례 활자와 목판으로 간행되었고, 일본에서도 4차례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실로 ‘사서삼경 ’ 에 버금가는 권위와 영광을 누린 것이다.

천원권 지면에는 이황의 사진 왼쪽으로 명륜당과 매화가 그려져 있다. 명륜당은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대웅전이다. 명륜당을 통해 교육의 중요성을 상징하고 있다. 매화는 이른 봄에 피는 섬세한 꽃으로 회복력、지구력、새로운 시작을 상징한다. 지페 뒷면에 계상정거도 溪上静居图가 인용되었다. 계상정거도는 퇴계이황이 후학을 양성했던 도산서원의 풍광과 주변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구불구불한 언덕、 울창한 숲、흐르는 시냇물 등이 어우러진 고요한 자연환경 속에 자리잡은 도산서원을 묘사하고 있다.

도산서원은 조선 최고의 학자 퇴계 이황이 직접 설계하고 지은 서원으로서 건축 미학을 실감할 수 있는 한국 서원 중 유네스코에 등록된 세계적인 문화재산이다.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은 안동시 도산면에 위치해 있다.

이황의 도산서원은 이육사문학관과 더불어 필자의 이번 문학기행 행선지로 지정되어 있었다. 도산서원은 이육사문학관에서 약 십키로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지만 버스로는 이동이 불가능하여 오로지 택시로 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육사 딸의 고택을 나올 때 이옥비여사가 택시기사 전화번호를 적어 주면서 필요할 떄 연락하라고  했었다. 이육사문학관에서 연락이 닿은 이 택시를 이황도산서원에 가는 걸로 끝날 줄 알았는데 이날 온종일 쓰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다시 말하면 이황 도산서원탐방이 끝나면 그만인 줄 알았는데 다음 코스인 안동시일월면 조지훈문학관까지도 여전히 이 택시를 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코로나로 인해 지역교통이 마비된 시절인지라 택시를 떠나선 촌보난행의 경지였다. 나의 행선지를 마치 꿰뚫고 있는 듯이 택시기사가 일보일보 죄어오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번이 끝나면 다음코스 또 그 다음 코스하고 ….

조치훈 문학관 탐방이 끝나고도 영덕군, 영천군 코스를 완성하려면 부득이 택시를 써야 했다. 다른 택시도 많은데 하필이면 하겠지만 정작 목적지에 도착해서 이 택시를 되돌려 보내고 나면 다시 다른 택시를 부를려고해도 마음대로 안되는 판국이다. 마치 수렁에 빠진것처럼 허우적거릴 뿐 한발자국도 빠져나오지 못할 처지다. 내친김에 쭉 영천군까지 흥정을 걸었다. 총키로수에 소요되는 기름값을 기본으로 중간에 점심까지 대접하여 총25만원에 선을 그었다. 돈도 돈이지만 이렇게 단숨에 해결하니 원래 계획은 삼일이 걸릴 예산이었는데 하루에 네 곳을 마칠 수 있어 시간과 정력을 절약한 셈이다. 고희의 나이에 돌발적인 사건앞에서 누구와 토론할 사람도 믿을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짧은 시간에 제요소를 검토、 정리、 추리、 판단 하기는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였다. 왜냐하면 ‘엣스’ 냐 아니면 ‘노’ 냐 를 짧은 시간내에 결단해야만 택시기사도 남느냐 마느냐가 결정되기에. 망설이는 시간도 도를 넘으면 장사하는 택시로서는 필요이상의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필자 스스로도 믿기 힘들 정도로 순발력을 갖춘 현대적 사유방식이라 할 수 있겠다. 만년이지만 아직 늙지 않았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다름아닌 퇴계 이황의 만년을 묘사한“도산서원에서의 만년”이였다.

花發巖崖春寂寂   꽃은 바위 벼랑에 피고 봄 고요한데
鳥鳴澗樹水潺潺  새는 시냇가 나무에 울고 물은 잔잔해라

偶從山後攜童冠  우연히 산 뒤로부터 제자들을 데리고서

閒到山前問考槃  한가로이 산 앞에 이르러 서당을 보노라

계상 溪上의 집에서 산을 넘어 도산서당에 이르러 읊은 시로 이황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회갑 해인 1561년에 지은 시로 학문이 원숙한 경지에 이른 로학자의 정신세계가 담담한 필치로 잘 그려져 있다.

퇴계 이황이 단양군수로 부임한 것은 그가 49세 때 일이였다.

이즈음 이황은 정실부인에 이어 두 번째 부인과도 두해전에 사별한 뒤 홀아비생활을 하고있었는데 부임 1개월 만에 둘째 아들마저 잃게 된다. 련이어 들이 닥치는 불행으로 그의 인생은 극도의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때에 이황은 우연하게 단양의 관기로 있던 두향과 만나게 된다. 두향은 거문고도 잘 탔으며 시도 잘 지었고 매화를 기르는 데 남다른 취미를 가지고 있어 이황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매화를 특히 사랑하는 이황은 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는 두향이 귀여운 데로부터 점차 정신을 기탁하는 대상으로 여기다가 마침내 두향의 매력에 빠져 들어간다. 이황은 두향과 매화를 흔상하면서 시화詩畵와 음률音律을 자주 논하기도 했다.

이른 봄이지만 때마침 두향 杜香이 애지중지하던 분매盆梅의 매화꽃이 곱게피었다. 누군가가 두향의 분매盆梅를 퇴계 이황의 처소에 옮겨 놓았다. 이를 본 퇴계 이황은 은은하게 풍기는 매화향에 반기는듯 했으나 곧 가져온 사람에게 돌려줄것을 명한다.

이에 두향은 퇴계 이황선생이 6년전에 지은 매화시를 읊으며 아뢰기를, 매화는 고상하고 아담하여 속기俗气가 없습니다. 추운 때에 아름답게 꽃을 피우며 운치와 향기가 호젓합니다. 매화는 격조와 기품이 있으며 찬 바람과 눈보라에 시달려도 곧은 마음이 변치 않기에 곁에 두시고 심신의 안정을 찾아 단양 고을을 잘 다스려 주시옵소서 하였다. 퇴계 이황 선생은 두향의 간청을 더 이상 물리치지 못하고 두향으로부터 받은 청매를 동헌의 뜰에 심게되었다. 당시 두향이 선물한 매화나무를 보고 지은 이황의 시다.

獨倚山窓夜色寒  홀로 산창에 기대니 밤기운 차가운데

梅梢月上正團團  매화나무 가지 끝에 둥근 달 걸렸구나

不須更喚微風至  구태여 소슬바람 다시 불러 무엇하리

自有淸香滿院間  맑은 향기 저절로 뜰에 가득한데

단양은 도담삼봉、구담봉、옥순봉、석문 、사인암、상· 중· 하선암 등 팔경을 비롯해 기암괴석과 옥류계곡이 곳곳에 널려있는 산수가 빼어난 아름다운 곳이다. 이 팔경 중 옥순봉이 여하이 단양으로 귀속되였는가에는 하기와 같은 미담이 전해진다.

옥순봉 근처에서 태어나 자란 두향은 옥순봉이 단양 땅이 아니라 청풍땅 임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이황이 청풍군수를 찾아가 협조를 구한다면 옥순봉을 단양땅으로 편입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당시 청풍군수는 아계鵝溪 이산해의 아버지 이지번이었다.

이황은 두향의 말에 따라 청풍군수를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협조를 구하였다. 그 결과 옥순봉은 마침내 단양군 관할로 바뀌고 이때로부터 단양은 온전한 팔경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이황은 옥순봉 아래 석벽에 ‘ 단구동문丹丘洞門 ‘ 이라는 글을 새기게 해 단양의 관문임을 표시했다.

이황과 두향은 특히 남한강가에 있는 강선대 降仙臺 바위에 올라 종종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으며 노닐었는데 이런 꿈같은 시간은 오래가지 못하고 가을이 미처 다 가기도 전인 10월, 두 사람이 만난지 불과 9개월 만에 이황이 풍기군수로 임지를 바꾸게 되었다. 이황의 형인 이해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되어 오면서 한형제가 동일지역에서 근무할 수 없다는 상피제 相避制度국법에 따른 것이었다.

두향과 이별을 앞둔 마지막 날 밤 퇴계는 두향의 치마폭에 다음같은 시를 써준다.

死別己呑聲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生別常惻惻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 없네

내일이면 떠난다. 다시 만날 기약이 없으니 두려움 뿐이다. 이에 두향도 말 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제

어느듯 술 다하고 님 마져 가는구나

꽃 지고 새우는 봄 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그후  두향이 정성껏 키운 매화를 치마복에 싸서 도산으로 보내오자 이황은 곧 그 치마폭에 다음과 같이 단시를 써주었다.

相看一笑天應許   서로 보고 한번 웃은 것 하늘이 허락한 것이었네

有待不來春欲去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봄날은 다 가려고 하는구나

이 시는 단양을 떠나올 때 써준 시와 합하면 전구와 결구가 완결된다.

(전구)

死別己呑聲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生別常惻惻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 없네

(결구)

相看一笑天應許   서로 보고 한번 웃은 것 하늘이 허락한 것이었네

有待不來春欲去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봄날은 다 가려고 하는구나

이황은 1569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이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고 귀향하게 된다.  이황은 말년에 고향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의 삶이 퇴계라는 호와 맞물리면서 권력욕 없는 학자로 각인되였다.

안동시 도산면에 자라잡은 도산서원의 툇마루에 서게되면 바로 앞으로 낙동강 줄기가 유유히 흐르는 게 보인다. 안동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수많은 명사名士와 현철賢哲을 배출시킨 인재의 보고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안동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라는 자부심을 갖고 산다. 그 중심에 퇴계 이황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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