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과 ‘금오신화 金鰲新話

조선 후기17세기부터 소설의 창작이 활발해지고 독자층도 넓어져 18, 19세기는 소설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질적、양적인 발달을 이룩하였다. 한국 문학사에서 근대적 의미의 소설이 창작된 것은 몽유계 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출현이다.

 매월당 梅月堂 김시습 金時習은 민간에 전해오는 설화를 모티브로 작가의 자유로운 상상과 허구를 활용해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 金鰲新話” 를 세상에 내놓았다. 최초로 소설적인 구성을 갖춘 “금오신화 金鰲新話”는 한국 전기체 소설 傳奇體小說 의 효시로 불리우고 있다.

​ 지금까지는 만복사저포기 萬福寺樗蒲記 , 이생규장전 李生窺牆傳 , 취유부벽정기 醉遊浮碧亭記 , 용궁부연록 龍宮赴宴錄 , 남염부주지 南炎浮洲志 등 5편이 전해지고 있다. 그것도 한국내에는 필사본밖에 없고 일본에서 간행된 것을 1927년 “계명 啓明 “ 제19호에 최남선 崔南善 에 의하여 소개되었다.

“금오신화”는 적극적인 욕망을 긍정하는 인물상을 구현하는 공간적 배경을 조성함으로써 주체 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또 주인공들의 비극적 결말을 통해 작가의 처지를 투영하고 있다는 점, 이는 작가의 애민적 왕도 정치 사상을 표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시습은 모순된 세계와의 부단한 조화를 꾀하는 인간적 허구와 그 가운데 발생하는 좌절을 표현하고자 노력하였다. “금오신화”는 전란이라는 비극적 배경, 현실과 비현실의 갈등상황이 어우러져 빚어낸 비극소설이다.

이는 곧 지은이 자신이 세조 정변을 통해 사회와 맞서지 않으면 안되었던 처절한 싸움이며 그 싸움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작가 정신의 문학적 표현이 곧 비극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금오신화 “는 매월당의 사상을 압축하고 있는 대표적 사상소설이다. 금오신화는 작가 자신의 철학적 사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서정성을 제거하였으며 다른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시적 문체를 거세하였다. 소설에서 매월당은 염라왕이라는 가상 인물을 통하여 작가가 처한 시대의 이념적 모순, 정치 사회의 모순을 극복해 보려는 의도가 깔려있다.

매월당 김시습의 기념관은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위치해 있다. 보통 문학관이나 기념관은 월요일이 휴무인데 여기는 월,화를 연이어 휴식하였다. 필자가 매월당 김시습기념관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8시였다. 개관시간은 9시였다.다행이 장원지기가 일찍 와서 대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으나 기념관내부는 9시 정식직원이 와서야 개관한다는 것이다.  

강원도 강릉은 김시습의 관향 貫鄕 이자 어머니의 시묘살이를 했던 곳이며, 김시습에게는 유랑시절의 거점이었다. 그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천재 문장가로서 불교 철학과 유교의 이념을 결합하려고 고심한 철학자였으며, 시대와 불화했던 지식인으로 고결한 인품과 지조를 지녔던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다. 개관시간을 기다리는 사이 기념관 정원을 거닐면서 필자는 김시습의 ‘乍晴乍雨 사청사우’ 를 속으로 읊었다.  인생철학의 깊이가 슴베인 좋은 시다. 

乍晴乍雨 사청사우

乍晴還雨雨還晴 【사청환우우환청】 

天道猶然況世情 【천도유연황세정】 

譽我便是還毁我 【예아편시환훼아】 

逃名却自爲求名 【도명각자위구명】 

花開花謝春何管 【화문화사춘하관】 

雲去雲來山不爭 【운거운래산불쟁】 

寄語世人須記認 【기어세인수기인】  

取歡無處得平生 【취환무처득평생】

잠깐 개었다가 비오더니 또 개는구나

하늘이 그러하니 세상 사람들이야

나를 추어올리던 사람이 이내 나를 헐뜯고

이름을 숨기던 사람이 명예를 되찾네

꽃이야 피거나 지거나 봄이 어찌 상관하랴

구름이 가고 구름이 와도 산은 다투지 않네

세상 사람들이여 꼭 기억해 두시오.

평생 누릴 즐거움은 아무 곳에도 없다오.

이 시는 잠깐 갰다가 또 비가 오는 날씨를 보고 지은 것으로 자연 현상에 비추어 인정세태가 무상함을 빗대여 풍자한 시이다. 비가 잠깐 내렸다가 다시 개고, 개는 듯 싶더니 다시 또 내린다. 이처럼 하늘의 道도 변화가 많은데 하물며 인정세테에 변화가 없으랴. 그래서 누군가 나를 칭찬하는가 했더니 어느새 나를 비방하고 명성을 피한다고 하더니 어느덧 명성을 구하고 있다. 그러나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봄은 상관하지 않고 구름이 가고 오는 것을 산은 다투지 않는다. 자연이 아닌 인간세상엔 평생 누릴 즐거움은 어느 곳에도 없다. 자연이나 인간세상이나 고정된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철학적 관념을 사람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다.

출근시간이 되자 기념관 녀직원이 다리에 붕대를 감고 불편한 걸음걸이로 들어선다. 하지만 관람객을 마주하자 환한 웃음을 띄우며 전시관 소개를 상세히 하였다.

매월당 김시습기념관은 부지 면적 3,117㎡, 건축 면적 358㎡의 1층 전통 한옥 으로 건립되었다. 전시관은 전시실 1칸, 애니메이션방 1칸, 포토존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념관 내에는 김시습의 일대기를 그린 ‘금오신화’ 애니메이션 영상자료, 매월당의 대표적인 한시 ‘동봉육가’ 를 감상할 수 있는 4개의 시설과 ‘이생규장전’ 포토존이 있으며, 그 밖의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유물로는 ‘금오신화’ 영인본, ‘매월당집’, 매월당 문학 사상 연구회 소장품 23점과 수장고에 보관 중인 24점 등 총 47점이 있었다.

기념관내부 전시를 다 돌아보고 나오면서 기념사진을 부탁하자 녀직원은 아픈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계단을 오르내려가며 알맞는 각도를 조절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마침 오전 해볕이 강렬할 때인지라 화면이 빛에 반사되여 효과가 잘 안나오자 몇번이고 반복하며 책임적으로 찍어주어 기념을 잘 남길 수 있었다.

매월당 김시습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행동했기에 그 많은 사람들의 존중을 받았을가. 사람들은 그를 방랑의 천재시인으로 꼽기도 하고, 절의를 지킨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꼽기도 하고, 선비 출신이면서 승려가 되어 기행을 벌인 기인이라고, 또 최초로 남녀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 “금오신화 金鰲新話” 를 지은 작가라고 한다. 그는 또 농민의 고통을 대변한 민족 시인으로, 철저하게 기일원론 氣一元論 을 주장한 성리학자로 평가 받기도 한다. 사실 매월당은 어느 것 하나 틀린 것은 없이 모든 모습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었다.

최초로 그의 전기를 쓴 율곡 이이는 그를 흠모해 공자에 비길 정도로 극찬했다. 그러므로 그를 단순한 시인이나 충절로만 평가해서는 그의 깊은 삶을 제대로 조명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세살 때에 이미 詩를 지었다. 어머니가 맷돌에 보리를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누런 구름이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   

이라는 詩를 읊었다고 한다.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깨닫는 말 그대로 천재이었다. 김시습은 다섯 살에 이웃에 사는 수찬 이계전의 문하에서 ‘중용’ 과 ‘대학’을 배웠다. 이계전은 고려의 학자 이색李穑의 손자요,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의 아버지이다. 신동이란 소문을 들은 정승 허조가 그의 집으로 찾아와 그를 시험했다. 허조는 내가 늙었으니 늙을 ‘ 노 ‘ 자를 넣어 시를 지어 보거라 하니, 김시섭은 망설임이 없이 다음과 같은 시구를 지어냈다.    

老木開花心不老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

이렇게 해서 그는 신동으로 소문이 났고 마침내 대궐에까지 불려가게 되었다. 세종은 “내가 불러 보고자 하나 남들이 해괴하게 여길까 두렵다. 너무 드러내지 말고 잘 가르치도록 하라. 나이가 들고 학업이 성취되면 내가 크게 쓰겠노라.”
그리고 비단 50필을 내려주면서 혼자 힘으로 가져가라 했다. 그러자 김시습은 모든 벼슬아치들이 보는 앞에서 비단의 끝을 죄다 묶어서 끌고 나갔다. 이를 계기로 어린 그를 ‘오세’라고 불렀다. 이 ‘오세’라는 별칭은 평생 그를 따라다니는 이름이 되었고, 설악산에 있는 ‘오세암’이란 사찰명도 그로 인해 생겼다고 한다.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였고 또 누구보다도 애민의식에 철저했고 불우한 사람들의 벗이 되었다. 사육신들의 시체가 길가에 버려져 있을 때 누가 하나 감히 시체를 거두지도 못하는 절박한 현실일 때 한 승려가 나타나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노량진 길가 남쪽 언덕에 묻었다. 이 승려가 바로 김시습이였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비탄에 젖은 김시습은 현실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끝내 방랑의 길을 선택했다. 방랑 길에 나선 김시습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워낙 명성이 높았던지라 어디를 가도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가슴 한 구석에 맺힌 그의 회한은 지울 수가 없었다. 관서지방으로 방향을 정한 김시습은 이러한 자신의 울적한 심정을 詩로 지으면서 각지를 유랑하기 시작하였다. 세상을 방랑하면서 김시습은 관념으로만 알고 있었던 농민의 참상을 목도했을 때 이런 시를 남겼다.

10년 동안 떠돌이되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 보니
이내 몸은 도시 밭둑가의 쑥대로구나
세상 살아가는 길은 모두 험하고 위태로우니
아무 말 없이 꽃떨기나 냄새 맡고
지내는 것이 좋으리로다.

그는 일생을 남에게 관대하였지만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지나치게 엄격하여 때로는 자학적 自虐的 이기까지 하였다. 그의 자화상은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어떤 초상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인상이다. 정신의 긴장은 그의 몸을 지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일하지 않고 먹는 사람을 몹시 싫어했다. 지주를 싫어하듯 유식배를 미워했다. 때문에 그는 약한 몸으로 손수 밭을 일구고 씨를 뿌렸다. 애민의식을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의 로동이었다. 자신이 로동을 하여 먹고 살려는 의지가 평생을 통해 나타난 것을 보면 그는 결코 유식배나 기생寄生의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산가 山家 의 고통을 이렇게 읊고 있다.

물 건너 등성이 너머 10리쯤에
비탈진 쪽 눈에 띄는 작은 띠집
소 부리는 소리 공중에 울리니
화전민이 늦갈이하는 줄을 알겠도다
해 지면 호랑이 무서워 사립문 닫아 걸고
동이 트면 움직여 고사리나물 삶는도다
깊숙한 산골에 더 깊은 곳일지라도
부역이나 조세를 안 내고야 못 배기지

밭에 싹이 나면 산짐승이 먹어대고, 남은 곡식 거두어들이면 새나 쥐가 훔쳐 먹는다. 그러고 나서 관가에 세금 바치고 나면 남는 것이 없고 사채 때문에 소와 말마저 빼앗긴다고 농민들의 한탄은 한해한해 이어만 갔다.

이에 매월당은 또 이렇게 읊고 있다.

원님이 어질고 자애로워도 허덕이는 살림일 텐데
이리 같은 벼슬아치 만났으니 백성은 정말 가엾구나
며느리 짐 이고 시아비 손자 끌어 길에 가득하니
어찌 주리고 얼어 죽는 것이 풍년 아니기 때문이랴

수탈에 못 이겨 유랑하는 농민의 참상과 고통을 여러 모로 따져 고발하고 있다. 그는 부정한 관리만 고발한 것이 아니라 토지를 겸병하고 사채로 땅을 빼앗는 대지주 그리고 사치와 음탕으로 밤낮을 지새우는 위정자를 질타한 것이다.

김시습은 이런 농민 수탈에 대한 시들을 그 시대 어느 누구보다도 많이 남겼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또 사랑하는 아내마저 본의 아니게 버렸다. 세상을 떠돌면서 이름은 떨쳤지만 남녀의 오붓한 사랑을 나누지 못했던 그였다. 그의 대표작인 “금오신화”는 남녀의 사랑에 대한 유교의 속박을 빗대어 자유연애를 구가한 것으로, 사랑을 주제로 한 최초의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 그의 자유분방한 인생관과  폭넓은 사상은 독자들을 깊이 있는 경지로 끌고 갔다.

3년여에 걸쳐 관서지방의 곳곳을 돌아 본 김시습은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을 쓰고 나서 다시 관동지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26살에 관동지방의 유랑을 마치고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을 정리한 후, 이번에는 호남지방으로 정처없는 나그네 길을 떠났다. 29살이 되던 해에 三南지방의 유랑을 끝낸 후 이번에도 역시 탕유호남록 宕遊湖南錄 을 지었는데 문득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니 어느덧 가슴 속의 회한은 희미해져 있었다. 오랜 기간의 객지생활로 몸은 쇄약해졌지만 심기일전하는 마음으로 새로이 공부하고 싶은 심정이 간절하였다. 그리하여 1463년에 책을 구하기 위하여 다시 한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전부터 자신을 아껴 주었던 효령대군孝寧大君을 만나게 되었다. 김시습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효령대군은 조카인 世祖에게 그를 적극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김시습은 世祖의 불경佛經 번역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조정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계유정난癸酉靖亂 때의 功臣들이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보고 세상사가 다시 역겨워진 김시습은 慶州에 있는 금오산金烏山으로 들어가 칩거하고 만다.

그 곳에서 김시습은 6년 동안 머무르면서 속세와 완전히 단절하고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 金鰲神話” 와 “산거백영 山居百詠” 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써냈다.   1471년 김시습이 37살이 되던 해 또 다시 효령대군의 요청으로 서울로 돌아왔으나 20여년을 세상과 겉돌았던 그로서는 서울생활에 잘 적응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듬해 서울 성동에 집을 짓고 이름없는 민초로서 농사를 지으며 살기로 하였다. 이 때 김시습의 나이는 벌써 40세에 들어서고 있었으나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天才의 가슴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역겨움만이 가득하였다. 세상의 명리를 생각하지 않고 명산에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말은 현실에서는 비록 실패자가 될 지라도 끝까지 자기의지를 굽히지 않고 세상으로부터의 횡포를 거부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낸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심정은 현실에 대한 야유로 나타나 당시의 고관대작들이 그에게 망신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영의정 정창손鄭昌孫과 달성군 서거정徐居正 등이 김시습에게 공개적으로 질타와 망신을 당하였지만 그들도 그리 노여워하지 않았다. 그들도 김시습의 天才의 恨을 이해하였다. 어느 하루 김시습은 한강을 지나다가 강변 압구정鴨鷗亭에 걸려있는 시 한수를 발견한다.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

젊어서는 사직을 짊어지고,

늙어서는 강호에 눕는다

한명회韓明澮의 詩였다. 이를 본 김시습은 실소를 금치 못하고 분통을 터트리다가 시구의 두 글자를 이렇게 고쳐 놓았다.

 靑春亡社稷, 白首汚江湖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

바라본 세상은 온통 비뚤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일 수 없어 奇異한 행동을 일삼았다. 그 시절 김시습은 책을 읽다가도 의분을 참을 수 없어 통곡하기도 하고, 詩를 지어서는 마구 찢어서 던져 버리는 등 바른 정신으로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여 魂이 나간듯 살아가는것이 당시 그의 모습이었다. 김시습은 이렇게 세상과 완전히 고립된 채 불안정한 심신으로 10여년을 보냈다. 원래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던 김시습은 얼마 안되어 다시 길을 떠나 關東의 각 지방을 발길 닿은 대로 떠돌아 다녔다.
이렇게 평생을 바람처럼 떠돌아 다니던 김시습이었지만 일정 기간 머무는 곳에서는 반드시 밭을 개간하는 등 손수 일을 하며 지냈다. 勞動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그는 자신에게 배우러 오는 제자들도 반드시 밭일을 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추악하고 가증스럽기만 한 현실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이었던 김시습은 표리부동한 세상의 人心을 비웃으며 살았다. 어려서부터 天才 소리를 들으며 자란 총명함과 학문에의 열정을 모두 묻어 버린채 영원한 이방인異邦人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삶의 회한은 엷어갔지만 가슴 속까지 서려오는 외로움만은 견딜 길이 없었던 김시습은 지친 몸을 이끌고 충청도 부여에 있는 무량사無量寺라는 한적한 절로 찾아 든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머리를 깎고 중처럼 살았지만 佛敎에 완전히 歸依한 것은 아니었다. 폭력적이고 부도덕한 世祖 등에게 저항하는 뜻으로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이었다.

김시습이 죽은 지 18년 후 中宗의 명을 받고 이자 李藉, 박상 朴祥이 유고를 모아23권 6책으로 간행하였다. 23권 중 15권이 詩集인데 詩는 세간과 궁궐、 자연 등의 모든 분야에 걸쳐 생로병사 、성명이기 性命理氣 、 음양유현 陰陽幽顯에 이르기까지 다루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 가운데 遊關西錄、 遊關東錄、 遊湖南錄、遊金烏錄과 같은 記行詩는 울분을 가라 앉히기 위하여 천하를 돌아 다니던 청년시절에 쓴 것인데 관서록에는 이러한 강개시慷慨詩가 많다. 관동일록은 김시습의 나이 49세 때에 농사나 짓고 살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방랑의 길을 떠나 지은 것으로 높은 경지에 이른 뛰어난 詩들이다.

탈 의 脫 意

萬 壑 千 峰 外 만학천봉 저 너머

孤 雲 獨 鳥 還 외로운 구름과 새가 돌아 오는구나

此 年 居 是 寺 올해는 이 절에서 지낸다지만

來 歲 向 何 處 이듬 해는 어느 곳으로 갈꺼나

風 息 松 窓 靜 바람이 자니 솔 그림자도 창에 고요하고

香 鎖 禪 室 閑 향은 스러져 스님의 방도 한가한데

此 生 吾 己 斷 이 生을 내 벌써 끊어 버리니

樓 迹 水 雲 間 발자취를 물과 구름 속에 남기리라.

김시습은 유儒, 불佛, 선仙이라는 동양의 3대 정신을 아우르는 사상가이자, 타고난 천재성과 뛰어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한 奇人이었다. 김시습은 현실에서는 이룰 길이 없는 포부와 력량을 한탄하며 ‘時代의 孤兒‘로 일생을 마쳤지만, 그는 자기의 꿈 인 이상세계를 작품을 통하여 승화시킨 고귀한 예술혼의 소유자였다.

 

​2,  허균과 ‘홍길동전 ‘

조선 후기 문학의 가장 뚜렷한 변화는 소설의 발달이다. 국문 소설의 효시인 “홍길동전 洪吉童傳” 이 나오면서부터 본격적인 소설 시대가 전개되었다.

‘홍길동전’ 은 사회 비판적 소설로서 조선 근대 소설의 선구적 작품이다. 첩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영웅적 일대기를 통해 조선 후기 적서 차별 문제와 사회적 부패상을 지적하고 봉건적 가족 제도와 평등하지 못한 사회 제도를 비판하였다.

홍길동전은 당대 실제 사회 문제가 주인공을 위기로 빠뜨렸다는 점에서 다른 영웅 소설과는 다른 구조를 보이고 있으며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서 위기를 극복하기보다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통해 스스로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율도국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여 결말을 맺는 것도 다른 작품들과 다른 점이다.

‘서얼’은 정처正妻의 자식이 아닌 첩妾의 자식들을 통칭적으로 지칭하는 이름이다. 이러한 서얼 제도는 지배 계급으로서 양반의 위치를 더욱 굳건하게 하기 위함이었는데. 이 신분에 속한 사람들은 관직에 진출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했고, 재산 상속 등에서도 법적으로 차별을 받았다. 이들은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고 조선 후기에는 하나의 사회 문제로까지 쟁점화되었다.

특정 문학 작품 속에는 그 작품을 창작한 작가의 사상적인 측면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홍길동전’ 역시 작가 허균의 현실관과 정치관 등이 잘 반영된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지은 ‘유재론 遺才論’ 과 ‘호민론 豪民論’ 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유재론遺才論’ 에서 능력 있고 재주 있는 자를 버리는 당대의 사회 제도를 비판하였다. 또한 ‘호민론豪民論’ 에서 목민자牧民者가 정치를 잘못하면 호민이 그 틈을 노려 무도無道한 자를 죽이게 된다고 하였다. 활빈당이 대오를 이끌어 탐관오리를 응징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것이 바로 불의와 비리가 판치는 당대 사회에 대한 반항이다.

‘홍길동전’ 은 교산 허균이 지은 조선의 최초의 한글 소설이다. 주인공 홍길동은 머리가 총명하고 재간 이 많은 명문 가문의 자식이었다. 하지만 서자였기에, 적자와 서자의 차별이 일반화된 조선 사회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고도 부르지 못할’ 정도로 차별 대우를 받았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 염오를 느낀 홍길동은 집을 떠나 정처 없이 떠돌다가 도적 떼를 만나 그들의 우두머리가 된다. 무리 이름을 활빈당이라 칭하였는데 ‘활빈活貧’이란 가난한 백성을 살린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허균이 이 소설을 지은 의도를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 즉, 허균은 소설에서나마 지배층의 수탈 속에 어렵게 살아가는 백성의 입장을 대변하고 싶었던 것이다.

활빈당은 백성을 착취하던 관리에게 치도곤을 먹였고, 수탈을 일삼는 부자에게서 재물을 탈취하여 어려운 백성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따라서 홍길동이 이끈 활빈당은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고 백성들의 의리를 수호하는 ‘의적’으로 불리웠다.

반면에 조선 조정의 입장에서는 ‘활빈당‘ 은 골치 아픈 존재였다. 나라 전체를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왕은 신출귀몰하는 홍길동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홍길동은 신묘한 재주로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니, 전 군사를 동원해도 도무지 그를 잡을 수 없다. 왕은 결국 홍길동의 형을 특사로 보내 그와 담판을 지으려 했다. 아버지와 형의 간절한 애원에 길동은 서울로 와서 임금을 만난다
 “병조 판서로 임명해 주면, 무리를 데리고 조용히 떠나겠습니다.”
 병조 판서는 정부 직제로 오늘날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된다. 홍길동의 제안를 받아 들인 임금은 서둘러 그를 병조 판서로 임명했다. 그때서야 길동은 무리를 이끌고 홀연히 사라진다. 홍길동은 부하들과 함께 율도국으로 가서 그곳에서 자신의 리상국인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든다.


이런 소설이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씌여졌다는 자체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자기 목숨을 담보하지 않고서야 강심장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야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에는 그의 가정환경과 받은 교육을 떠날수 없으므로 그의 이런 사상관념이 형성할 수 있는 과정을 살펴보자.

허균 집안은 당대 최고의 명문 집안이었다. 아버지 허엽은 뛰어난 문장가이자 학자였고, 큰형 허성은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지낸 대정치가였다. 여기에 그의 누나 허난설헌은 한국을 대표하는 여류 시인으로 자리매김할 정도로 시를 잘 지었던 명문장가였다. 이런 집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사람이 허균이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문장을 잘 지어 광해군 일기에 “글 쓰는 재주가 매우 뛰어나 수천 마디 말을 붓만 들면 쭉쭉 써 내려갔다”고 적혀 있었다.

허균은 17세에 한성부에서 치르는 초시에 급제했고 26세에 문과에 뽑혔으며 29세에 중시重試에서 장원급제를 하여 당시 예원藝苑을 놀라게 했다. 이후 여러 관직에 임명되어 최종적으로 좌참찬까지 역임했다. 하지만 그의 관직 생활은 굴곡이 매우 심했다. 황해도 도사직에 있을 때 상소 때문에 관직에서 쫓겨났는데, 이유가 서울의 기생을 데리고 가서 함께 살았다는 것이다. 또한 성리학을 고집하는 일반 사대부와 달리 복직 이후에도 불교를 신봉하고 일탈행동을 자주 해서 관직에서 여섯 번이나 쫓겨났으며 무려 세 차례나 귀양살이를 했다.
 

이러한 삶의 행보로 보았을 때, 허균은 명석한 두뇌를 지닌 천재였으나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고 사사건건 충돌을 자아냈던 시대의 이단아, 부적응아였음이 분명하다. 유배지에서 쓴 글 중에 “당신들은 당신들의 법대로 사시오. 나는 내 멋대로 살겠소”라는 대목에서 보여지듯, 그가 얼마나 당대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했는지 알 수 있다.

예절의 가르침에 어찌 자유를 얽매리요.

뜨고 가라앉는 것은 다만 천성에만 맡기노라.

그대는 모름지기 그대들의 법을 지키게.

나는 나름대로 내 삶을 이루겠노라.

이것은 세상의 습속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천성대로 살겠다는 과감한 그러나 만용에 가까운 “홀로  서기” 선언이기도 하다. 허균은 창의에 의한 개성적 문학을 지향했다. 그의 이런 문학관은 한국 버전의 르네상스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허균은 시대와의 불화를 ‘귀거래歸去來’ 로 품하기도 했고, 시를 빌려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有懷 유회 ( 1 )  

功名非我辈  书史且相亲  

泉壑待逋客  津梁谁故人  

危途青鬓换  旧业白云贫  

但自赋归去  山中瑶草春  

감회가 있어  ( 1 )

공명은 우리들 것 아니니, 책이나 우선 가까이 해보자

자연은 은자를 기다리는데, 진량에는 친구들 누구 있던가

위태한 인생길에 푸른 귀밑 변해가고, 옛 살림살이 흰 구름 따라 점점 빈한하다

다만 귀거래를 노래한다면,  산속의 아름다운 풀들은 봄빛이라네

광해군 5년인 1613년에 발생한 ‘칠서지옥七庶之獄, 계축옥사 ’ 라는 사건은 그의 인생의 일대 전환점으로 되었다. 당대에 한가락 한다는 집안의 서자 일곱 명이 신분차별에 항의하여 란을 일으키려다 실패하고 말았는데, 이 란에 허균이 말려들었다.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평소에 이들과 친하게 지냈기에 일곱 서자들 뒤에 허균이 있다는 소문이 시중에 떠돌았다. 이로 인해 허균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는데 다행히도 별 탈 없이 넘어갔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 이이첨이 지켜 주었기 때문이다.

광해군 10년, 허균은 반역질을 했다는 이유로 죽게 되는데 그 이유가 참으로 황당했다. 허균이 매일 밤 부하를 남산에 올려 보내 “북방 오랑캐는 벌써 압록강을 건넜으며, 유구국 사람들은 남쪽 섬에 와서 매복하고 있으니, 서울 사람들은 지금 피해야 죽음을 면할 수 있다”고 외치게 했으며, 소나무 사이에 등불을 달아 놓고 “살고자 하는 사람은 성 밖으로 나가 피신해라” 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죄목이었다.
광해군이 직접 나서서 심문했는데 허균은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허균은 변명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전격 처형되고 말았다.

당시 세자빈이 자식이 없어 허균 딸이 세자의 후궁으로 간택되었는데, 이 딸이 아이를 낳게 되면 허균에게로 권력이 이동할 것을 우려한 이이첨이 죄를 일부러 만들었다는 것이다. 허균은 자신의 초고속 출세를 이끌어 준 이이첨에 의해 결국은 토사구팽되고 말았다.

허균은 조선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박학다식했던 사람이다. 그는 책 수천 권을 읽고 내용을 기억했으며 중국 사절단 앞에서 시 수백 편을 통째로 외워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중국 국가 도서관에 “조선시선” 이란 책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 책은 허균의 구술을 통해 중국 사신이  편찬한 조선 한시들이다. 신라 최치원부터, 고려 이규보, 조선 허난설헌에까지 조선을 대표하는 시인들의 시 332편이 실려 있다. 이것만으로도 허균이 참으로 명석한 두뇌를 가진 천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허균의 생각 또한 무척 혁명적이어서 그는 수많은 서출과 기생, 무사, 심지어는 노비를 친구로 사귀였다 . 평소 “귀천에 따른 차별이 없어야 하며 우리나라처럼 작은 나라, 더군다나 양편에 적을 둔 나라에서 서얼이라거나 개가녀의 자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재능 있는 자를 등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라 발전에 해가 된다”고 주장했으며,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오직 백성뿐” 이라며,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백성을 무서워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러나 허균은 당대 사대부들과 다른 생각 다른 삶을 꿈꾸었기에 시대와의 불화 속에 처참히 죽어야 했다. 어찌 보면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을 생각켜 하는 사람이 교산 허균이 아니였던가 싶다.

 

3.   백호 임제 白湖 林悌 와 우화문학

백호 임제 白湖 林悌는 조선중기 허균과 쌍벽을 이룬 대문장가요, 한문소설의 창시자요, 호남이 배출한 조선의 위대한 사상가이다. 호는 백호, 본관은 나주. 16세기 조선 시문학계의 맹주였으며 소설문학에서도 독보적인 작가였다.

전남 나주시 다시면 회진길8 에 백호 림제白湖 林悌의 문학관이 있다. 백호문학관은 나주시 회진마을 초입에 세워져 있으며 2013년 5월에 개관하였다. 노령산맥 한가닥 힘찬 줄기가 혈을 맺은 신걸산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도도하게 흐르는 영산강을 앞마당 삼아 현대적 감각의 3층 건축물로 준수하게 자리 잡고 있다. 백호문학관 바로 위쪽에는 나주 임씨의 상징인 영모정이 빼어난 자태로 푸른 물이 굽이쳐 흐르는 영산강을 바라보며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이 임제의 어린 시절 시심을 키워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백호문학관 앞뜰에 시비 '무어별'이 세워져 있다. 임제가 16살 때 지은 시다. 소설가 이명한은 자기의 소설 ‘달뜨면 가오리다’를 통해 임제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합강 모래밭에서 첫정을 나눈 ‘아지’를 애닲아 잊지 못하고 지은 시로 묘사하고 있다.  

수줍어서 말 못하고  無語別

十五越溪女 열다섯살 아리따운 아가씨

羞人無語別 수줍어 말 못하고 이별이려니

歸來淹重門 돌아와 겹문을 꼭꼭 닫고선

泣向梨花月 배꽃 사이 달을 보며 눈물 흘리네

임제는 당시 법도대로 부모가 정해준 대사헌 김만균의 여식과 혼인을 하고, 22세에 충청도 보은의 북실에서 훈학을 하고 있는 대곡 성운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된다. 스승 대곡은 임제의 걷잡을 수 없이 격정적이고 자유분방한 성격을 누그려뜨리려고  중용을 천번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고 했다. 법주사 경내의 한 암자에서 6년동안 중용을 읽고나서야 ‘망아지처럼 온 천하를 뛰어다니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다잡아 보라는 스승의 의중을 깨닫게 된다. 29세에는 알성문과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나아가 예조정랑까지 오르지만 평안도사를 제수 받아 임지로 가는 길에 송도에 들러 죽은 황진이 무덤 앞에서 추모제를 지낸 것이 탈이 나 훗날 벼슬을 그만두게 된다.

이 때 지은 추모시 때문에 임제의 파격적인 기행이 겯들어져 황진이를 사모했다거나 연모한 것으로 회자되지만 임제보다 30여년 앞서간 황진이는 송도삼절로 일컬어진 인물이며 많은 시인묵객들이 한번쯤 시를 대작해보고 싶어 했던 천하명기였으니 천하 대장부 임제도 마주앉아 지필묵을 앞에 놓고 어찌 회포를 풀고 싶지 않았겠는가?

청초 욱어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조선시대 우화소설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으로 “서옥설 鼠獄說”이 꼽힌다.백호 임제가 쓴 소설이다. 우화소설 “서옥설” 은 84종의 동식물을 의인화하여 그들의 형태, 생태, 장점과 단점들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소설은 늙은 쥐가 족속을 거느리고 나라의 창고 벽을 뚫고 들어가 쌀을 훔쳐 먹다가 발각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재판 중에서 도적질한 죄를 추궁 받게 되자  늙은 쥐는 간교한 지혜로 고양이、여우、 원숭이와 같은 동물, 또 앵무새 、까마귀、 독수리와 같은 날짐승 그리고 갖가지 식물들을  라렬하는데 도합80여종에 달한다. 늙은 쥐는 마침내 도덕질한 죄과를 죄다 동식물에게 덮어 씌우고 만다. 늙은 쥐의 교활하고 음흉한 심보에 반해 재판관인 창고신은 너무나 우매하고 무능하여 량극에 처해 있는 두 전형을 남김없이 폭로한다.

백호 임제는 소설의 해학적인 표현으로 당시 사회의 부패성을 폭로하고  권력층의 무능함을 신랄하게 꾸짖고 있다.

불은 당장에 꺼버리지 아니하면 번지는 법이요, 결단성 없이 우유부단하면 번거로워지는 법이다. 아! 간사하고 흉악한 성질을 가진 자들이 어찌 창고를 뚫는 쥐뿐이랴?

아 참! 통탄할 일이로다.

임제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 많은 일화를 남기며 주유천하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39세를 일기로 짧은 생애를 마친다.

영모정 아래에 임제의 유명한 유언 ‘물곡사비’가 세워져 있다.

여기서 백호 임제가 나라의 주체성을 강조한 진보적인 사상가이였음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사방 여러 나라 중에 황제를 자칭하지 않는 나라가 없는데 유독 우리나라는 그러지 못하니, 이런 욕된 나라에서 태어나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느냐? 곡을 하지 마라.”

얼마나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인가. 이는 임제의 독립자주사상이 고도로 함축된 글이며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이 그의 인생 전체에 녹아있는 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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