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안국민선생 인상기 <장정일 글>



  

있는 힘을 다해 선행을 베풀라, 무엇보다도 자유를 사랑하라, 왕좌를 준다고  하더라도 영원히 진리를 저버리지 말라.
                                                    ㅡ베토벤 

아담한 방안 풍경

    마가을의 하루(지난 13일), 나는 안국민선생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안선생의 집은 새로 지은 연길 하남 금산아빠트단지에 위치한90평방메터의 아담한 집이였다. 객실이자 작업실로 쓰이고있는 간소한 방, 그러나 서쪽벽면에는 베토벤의 초상화가 정중히 모셔져있었고 초상화 좌우에는 중국음악가 시락몽과 리환지가 각기 1990년과 1986년에  안국민선생에게 드린 주련이 걸려있었다.

맞은켠 벽에는 작자미상의 평화로운 풍경화ㅡ우리 민족 농민들의 밭갈이산수화가 마주하고있었다. 자주색 피아노스탠드에는 금방 작곡을 마치였다는 가요 《단풍잎》(조룡남 작사)오선보가 정연히 펼쳐져있었다.

해빛 잘드는 방안 풍경중에서 특별히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것은 묵상에 잠겨있는 베토벤초상화와 평화로운 기운이 감도는 그 춘경도였다. 

    중키에 다부진 몸매, 앙골라머리의 안국민선생의 얼굴은 언제보나 안온하고 자애로운 모습이다. 학자는 고독, 근면, 겸손, 인자함의 령혼을 지녀야 한다고 하는데 음악가 안국민의 얼굴이 바로 그런 표정을 담고있는것 같다. 그런 그가 《억세고 순결한 베토벤》(로맹•롤랑)의 초상화를 모시고있는 까닭은 무엇일가? 물어보지 않아도 그것은 필시 열렬한 예술사랑과 음악에 대한 무서운 집념으로 특징적인 안국민의 령혼, 그 주색조를 말해줄것이다.   

    하다면 소박하게 걸려있는 밭갈이산수화는? 그 담백한 산수화는 고향을 사랑하고 생활을 사랑하는 음악가 안국민의 또 하나의 내면의 모습, 그의 정신적인 뿌리, 정감적인 근원을 대변해주는것이 아닐가싶다. 부드러운 흙을 갈아엎고 씨뿌리고 가꾸어서 수확을 하는 자연친화적이고 평화로운 삶, 그가 나서자란 밀산현이나 계동현 농촌마을모습이 바로 꿈결같이 아름다운 이런 풍경이였을것이다. 아니 그것은 그가 음악의 꿈을 안고 공연과 창작의 한생을 보낸 연변 우리 민족의 원색적인 삶 그자체라고 보아도 무방할것이다. 

    베토벤초상화와 밭갈이산수화, 두 그림은 서로 대조되는것 같으면서도 내적으로   자연스럽게 어울려보이기도 하는 방안장식구도였다.

강물의 기본자세

1931년 7월 4일에 안국민은 흑룡강성 밀산현 영안향의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아버지는 장로였고 어머니는 집사였다. 그해 가족을 따라 같은 현의 흑태향 대성촌으로 이사했고 후에는 계동현 영광촌으로 옮겨가기도 하였지만 감수성이 풍부한 소년시절을 안국민은 자연과 더불어사는 순박한 농촌, 예수교마을이라는,  풍금소리를 들을수 있는 문화환경에서 자라났다.

일요일마다 풍금소리, 찬송가의 부드러운 선률을 들으며 마음이 설레이였고 이따금 5인조 동네취주악대가 마차를 타고다니며 연주를 할 때면 울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밖으로 뛰여나가 구경하였다. 《유격대행진곡》을 비롯한 취주악대의 연주소리가 못견디게 좋았다. 축구시합이 있는 8월 추석이면 보통 대성촌이 우승을 하군 하였는데 승전을 한 축구팀 앞에는 항상 취주악대가 있었다. 일년중 제일 둥근 달이 뜨는 밤, 취주악대를 앞세운 축구팀이 돌아올 때면 안국민은 악대의 선률속에서 트럼페트소리와 바스소리를 구분해들을줄 알았고 집에 돌아가서는 그 소리를 모방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음악이 있는 대성촌과 영광촌, 그것은 소년 안국민의 음악인생, 자기완성의 꿈을 잉태시킨 요람이였다.

음악의 귀가 열린 안국민은 음악을 다루기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악기들을 익히기 시작한다.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기보다는 무사자통(無師自通), 즉 스스로 익히는 경우였다. 1941년 그가 열살 때 영광촌에 풍금이 들어왔다. 문을 잠그어놓아 창문을 열고들어가 건반을 누르며 아는 노래를 연습해보았다. C조, F조, G조로 바꿔가며 한두해 익히느라니 류행가나 일본노래, 조선노래를 제법 연주할수 있었다. 하도 신통하게 연주하니 교회풍금수로 있던 형님 안국주는 자기가 하던 일을 12살밖에 안되는 동생 안국민에게 맡기였다. 고기가 물을 만난격이 된 안국민은 크리스마스공연때면 동네애들을 연습시켜 찬송가를 2성부로 불렀다. 1946년 계림향공연대가 부상자위문 계서공연을 할 때 풍금반주를 하면서부터 안국민은 동네는 물론 전 계림향에 소문이 자자하게 되였다.

1947년 계서중학을 다닐 때 개암따기부업을 하러 성자하촌에 갔다가 그 촌에 있는 아코데온을 익히였다. 중학공부를 하면서 그는 노래반주, 무용반주를 능란하게 하였으며 음악선생역할을 놀기도 하였다. 바리톤을 익힌 그는 취주악대를 무어 연주를 지도하기도 하였다. 바이올린을 아는 사촌형을 통해 그는 바이올린연주도 배워냈다.

학과목성적도 우수하고 풍금, 아코데온, 바리톤, 바이올린 연주도 출중한 다재다능한 안국민이였건만 그에게 시련의 고비가 닥쳐왔다. 밀산련합중학을 다닐 때 토지개혁운동이 일어나면서 중농인 안국민의 가정이 부농으로 몰린다. 가정이 청산을 맞은 안국민은 어린 나이에 퇴학처분이라는 고배를 마신다. 이는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안국민의 첫 미스터리이다. 1948년 4월 계림에 아동문공대가 선다기에 찾아갔으나 그것 역시 성분때문에 거절을 당해 돌아와 농사를 지을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좌절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해 여름, 학생을 퇴학시켰던 잘못이 시정되면서 복학이 이뤄진것이다. 뿐만아니라 계림문공대가 서면서 안국민은 단원으로 초빙되였다. 학교측에서는 워낙 안국민을 졸업시킨뒤 음악교원으로 남겨둘  타산이였으나 그의 학과목성적이 모두 100점이고 음악재능이 출중하니 아예 문공단에 보내주기로 결정을 내렸던것이다.

이렇게 열달전에는 학교에서 추방을 당하고 열달후에는 우대를 받으며 계림문공단원으로 추천되였다. 계림문공단에서 안국민은 음악 부지도자로서 가요 작곡도 하고 소합주곡도 쓰면서 아코데온을 멘 악대리더로 활약하였다. 난생 처음 쓴 가요 《농촌의 가을》은 한번의 순회공연으로 계림향사람들이 다 부를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계림문공대는 그의 예술생애에서의 중요한 정거장이였다.

토지개혁이 끝나고 조선전쟁이 일어나자 사명을 다한 계림문공대가 1950년 11월 해산되고 안국민은 그해 12월 1일 연길로 출발해 연변가무단을 찾았다. 전쟁을 대비해 연변가무단은 연길 흥안촌에 자리잡고있었다. 김성민이 가져온 140베이스짜리 이태리제아코데온으로 안국민이 허세록선생과 김규선앞에서 음악감을 살리며 연주하였더니 허세록선생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인사를 책임진 김규선도 여태 기다렸다는듯이 《모처럼 나오셨다니까 우리 손잡고 잘해봅시다》하며 친절을 베풀었다.

그러나 흐뭇함도 잠간, 또 한번의 타격이 그를 기다리고있었다. 단장이 보잔다고 하기에 오후에 가보았다. 걸상에 비스듬히 앉은 단장이 성분이 뭔가를 물으니  부농(실은 두달후에 중농으로 시정됨)이라고 대답을 했다. 그게 또 문제시되였던지 인사간부는 《각 중학교에서 다 모집했으니 받을자리가 없다》는 단장의 말을 전하였다. 서글펐다. 암담한 오후였다. 음악에 대한 정열을 안고 흑룡강 한끝에서 불원천리 찾아왔건만 음악외적인 원인때문에 락방이 되고만것이다. 속은 쓰라렸지만 안국민은 사정 한마디 하지 않았다. 저녁에 허세록선생이 집에서 식사초대를 하여 돼지고기를 넣은 장국에  맛있게 먹은 한끼밥, 그것이 일말의 위안일뿐이였다. 

소득이 전무한것은 아니였다. 그는 흥안촌에서 가무단배우들의 연습을 보았다. 박우 곡, 박우 지휘로 된 조선인민군에 관한 프로 《한집안식구같소》였는데 이틑날 쓰딸린극장에서 있은 공연에서 그는 합창, 중창, 관현악프로도 감명깊게 감상하였다. 그리고 동해려관 7호실에 들었던 그는 금방 조선에서 들어온 6호실의 조득현, 최문 두분 예술가와 뜻깊은 상봉을 하였다.

계림향에 돌아가 소학교교원을 하던중 동북행정위원회 민정과에서 근무하는 박승일, 김명의 편지와 소개신을 갖고 안국민은 연길재입성을 성취하고자 1951년 1월 31일 다시 한번 연길로 왔다. 연변가무단은 쓰딸린극장에서 《애국자》라는 프로를 연습하고있었는데 전번의 그 단장은 여전히 《왜 이제야 왔소? 우리는 동무가 안오는줄 알고 다른 사람을 다 받았다니》라는 말뿐이였는데 전기는 허세록선생을 만나서 나타났다. 허선생은 《손풍금자리가 없다면 비올라를 하오, 비올라와 바이올린은 사촌이요.》라고 말해주었다. 그말이 떨어지자바람으로 옆에 있던 박우선생이 아무말도 없이 안국민의 짐을 와락 앗아메고 성큼성큼 앞서 걸으며 흥안으로 향하였다. 짐을 빼앗긴 그는 어정쩡하게 박우를 따라갔다. 이렇게 19살 안국민은 다분히 극적으로 악대생활에 발을 들여놓았고 연변가무단에서 본격적인 음악생애를 시작하게 된다.

예술인에게 한사코 성분의 자대를 적용하는 간부의 시각, 음악은 음악으로 이심전심 통하는 예술인의 시각, 력사의 뒤안길에서 량자는 이렇듯 사뭇 달랐다.

한 사람의 아이큐는 20살좌우에 결정된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안국민은 이 나이에 이미 타고난 음악가로 파란많은 이 세상을 살아가도록 운명지어져있었다. 그에게 있어 그 다음의 일들은 곁가지가 무성히 뻗어나가고 색채가 빈공간을 적당히 메우며 아롱져가는 일만 남은거나 마찬가지였다. 설사 그 도상에 무시로 폭양이 기승부리고 사나운 비바람이 불어친다 하더라도 그 행정을 막을수는 없었다.

안국민의 음악로정은 묵묵히 흐르는 강물을 련상케 한다. 간혹 바위에 부딪쳐 용을 쓰며 격랑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큰 강물은 소리가 없다. 묵묵히 변함없이 동으로 흐르는 그 유연성, 그 부드러움이 말하자면 강물의 기본자세이다. 산이 막아나서면 그 굽이를 에돌아간다. 평탄한 곳에서는 정지돼있는것 같기도 하다. 그 어떤 지형에도 불평이 없다. 성분때문에 수차 고배를 마셨어도 안국민은 불평이 없었고 매달려 사정얘기를 할줄을 몰랐다. 떼질쓸줄은 더구나 몰랐다. 뭐라고 사정해야 하는지 도대체 사정하는 말자체를 모르는 사람이다.

《여기서 안된다면 또 돌아가서 기다려보지. 또 무슨 기회가 나지겠는지.》

바로 이거다. 이것이 바로 안국민의 기본자세이다. 내심하게 기다리는것, 그것은 포기가 아니다. 투항이 아니다. 불평하기보다는 자신의 노력으로 내실을 다져 객관의 인정을 받는것, 웬간해서는 성낼줄 모르는것, 좋은것이던 굳은것이던 묵묵히 주어진 조건을 활용하는것, 이 모든것이 다 강물의 기본자세를 닮은것이 아닌가.

그렇다. 프루스트의 말처럼 《목청에 의뢰해 노래하지 않는 사람이 있듯이 힘에 기대여 살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더 큰 흥미를 자아낸다. 이런 사람들은 그들의 부족한 재료를 지혜와 정감으로 대신한다.》 강직도 강한것이지만 부드러움도 일종 강함이다. 그것은 자기와 자기의 힘에 대한 확신이다. 쑈쓰따꼬위치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하였다. 이어지는 억울한 비판들에 그는 곱삭곱삭 검사를 잘하는것으로 정치적인 타격을 이겨냈으며 급기야 세계적인 작곡가로 되였다.

안국민은 음악에 대한 집념과 기다림의 지혜로 직업예술인으로의 자기완성의 입문이 가능했다. 그도 선택이 있기는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음악이다. 음악이기만 하면 그는 타고르의 말처럼 《내가 고르느니 차라리 남이 나를 고르게 하였다.》 그 언제나 안국민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 평온한 표정, 그 리면에는 항상 탄복할만한 참을성, 그리고 음악에로의 자기완성을 위한 굳은 의지의 강물이 굽이치고있었다. 그 강물은 입문에 그치지 않고 저 멀리 음악의 드넓은 바다를 향해 용용히 흘러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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