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민 선생 인상기- 장정일>



입단 2년만에 지휘로

1951년경 연변가무단의 관현악대는 30여명이였다.. 안국민은 비올라를 다루는 악사로 출발했지만 조득현선생이 지도하는 무용연습에 아코데온반주도 무던히 하였다. 동해려관에서의 상봉에서 안국민이 아코데온연주자라는걸 알았던 조득현선생은 무용연습을 지도할 때면 곧잘 안국민을 불러 아코데온반주를 시키군 하였다. 그가 무용동작을 생각해내고 배우들에게 배워주기까지 안국민은 똑같은 곡을 열번이면 열번, 백번이면 백번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열심히 반주하였다. 조득현선생이 지도한 쏘련무용 《행복한 젊은이들》연습에서 그랬고 그가 창작한 40분짜리 무극《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연습에서도 그랬다. 참을성이 있는 안국민이지만 그러나 그런 그마저도 《정말 새나게 했다》며 그 지긋지긋하던 반주의 나날을 회억한다.
따분하기 짝이 없는 무용반주, 그러나 하도 열심히 하다보니 기량도 높아져 독창과 중창 반주는 몰론 독주도 하게 되여 악대에서도 재질을 인정받았다. 악기도 비올라, 아코데온에 가야금까지 막히는게 없었다.

그러나 이런 지루한 반주는 첫째 김인숙가수와의 운명적인 만남과 사랑의 계기로 되여주었으니 그 고됨은 보상이 차례진 셈이다. 둘째로 더욱 중요한것은 이런 반주와 연주 실천이 바로 지휘가로서의 필수과목이였음을 안국민은 그때 미처 몰랐다. 사실 조득현선생이, 따분한 무용연습반주가 안국민으로 하여금 본격적인 지휘수업을 경험하게 하였던것이다.

이는 결코 지어낸 말이 아니다. 카라얀의 제자로서 일년에 100여차례의 오케스트라지휘를 하며 세계를 누비고있는 중국인지휘가 탕목해(湯沐海)의 말이 그 근거로 될수 있다. 올해10월말의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른바 정규교육이라는것이  출중한 지휘가를 양성해낼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지휘학부의 학생은 먼저 성악학부에 보내 성악과 민가부터 배우게 해야 한다. 가극원에 피아노연주원으로 보내여 가수를 위해 가극전곡의 반주를 하게 할수도 있다. 실내악단에 보내 연주를 하게 할수도 있다. 방법은 많다. 많은 성공한 지휘가들은 바로 이렇게 출발했다. 》(문회보, 2006년 11월13일 제4면)

탕목해의 견해에 의하면 직업적인 지휘가에게 있어 중요한것은 화려한 몸짓이나 현란한 형체동작이 아니라 음악적내포이다.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청중을 사로잡아야 하며 음악으로 청중을 감화시킬줄 알아야 하기에 유럽의 지휘들은 어려서부터 가극원에 보내져 가수연습시의 피아노반주를 담당한다. 이렇게 가극전곡을 연주하고 다른 가극들도 연주하다보면 음악적으로 일정한 높이에 올라서게 된다. 자기가 악대를 연습시킬 때가 되면 그는 비로소 자기의 음악적감오를 지휘봉으로 표현할수가 있게 되는것이다. 카라얀은 이 과정을 적게 쳐서 15년(유럽문화배경이 없는 동양인은 거기에 10년을 더 보태야)으로 잡았다는것이 탕목해의 전언이다.

안국민은 12살부터 교회의 합창반주를 시작으로 악사의 경험을 쌓았으며 연변가무단에 들어와서도 40분짜리 무극반주를 비롯해 악대연주원의 경험이 풍부한데다 그에게는 또한 초인적인 기억력이 있었다. 반세기전의 일이라도 그는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연길에 입성을 했고 어느 려관 몇호실에 들어 누구누구를 만나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를 컴퓨터에 입력된것처럼 소상히 기억한다. 수십년전에 다루던 아코데온이 이태리제인지 독일제인지 또 그것들이 몇베스짜리인지를 정확히 기억할 정도이니 들은 음악을 기보하는것쯤은 식은죽먹기였다. 그의 기억력,  청음, 기보능력의 천재성은 계림향에 있을 때 이미 정평이 나있었다.

허지만 이 모든 재질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것은 그가 항상 음악을 살리기에 최선을 다했다는 점이다. 음악도들, 그리고 모든 예술인들은 안국민의 이런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ㅡ

《악대에서도 사업의 수요에 따랐고 한개 선률을 그어도 최선을 다해 그었다. 기교도 기교지만 음악이 있게 그었다.》

안국민의 음악의 비밀, 성공의 열쇠에 해당하는 말이다. 우리 주변에는 목소리가 좋은 가수는 많다. 그러나 음악적감동을 주는 가수는 흔치 않다. 세상에는 박자를 잘치는 지휘는 많다. 그러나 정명훈의 말처럼 음악을 깊이《파내는》지휘는 많지 않다. 악사든 가수든 지휘든  할것없이 음악을 만들어내고 음악을 파내고 음악을 살려내야 하는것이다. 공허한 소리만 내는 음악가는 별 의미가 없다. 탕목해의 말과 같이 《출중한 연주가, 음악가는 령혼으로 연주하고 령혼으로 지휘해야 하지 음악외적인 명리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실용주의적이거나 근시안적인 조급정서가 예술의 날개를 누르면 그는 무거워서 자유롭게 날지를 못한다.》(문회보, 동상)

이것이 비결이다. 이 비결을 터득했던 안국민이였기에 그에게는 마침내 지휘의 길이 연린다. 가무단 성악지도 왕향은 안선생은 지휘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드디여1953년 12월 서장참관단 환영공연시 김태희단장은 장춘영화촬영소에 출장을 간 정진옥을 대신해 안국민에게 지휘를 위임하기에 이른다. 원만하게 지휘를 담당해 연길에 귀환한 정진옥도 자신은 창작을 해야 한다며 일반적인 공연지휘는 안국민에게 맡기게 되였다. 연길입성 2년만에 초고속으로 지휘로 발탁된 경과사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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