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민선생 인상기- 장정일>

 미완의 꿈
안국민이 지휘, 연주, 편곡, 작곡을 하면서 음악축적을 하고있을 때 단부에서는 1956년 유망한 젊은이들을 음악학원이나 외국전문가의 강습소에 보내였다. 안국민은 새로 선 중앙악단이 모셔온 독일지휘가 그스린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일년여  지휘과정을 밟았다. 중앙악단의 장녕화(張寧和), 상해의 황이균(黃貽鈞)등 전국 10명(반년후엔 50명) 지휘가 참가한 이 강습반에서 안국민은 그스린의 총애를 받으며 직업적인 지휘가로 성장한다. 지휘요령터득에서 허세록이나 정진옥은 간접적인 스승이였다. 정진옥은 음악사유가 비상하고 감정이 풍부해 그의 음악지휘는 선풍을 일을키는 매력이 있었다. 독일지휘가 그스린은 그의 직접적인 은사였다. 공이 떨어졌다가 튕겨올라오는것처럼 탄성있게 손을 놀려야 한다는 기본동작에서부터 작품분석, 실기연습에 이르기까지 그는 음악의 넓은 바다에서 마음껏 자맥질할수가 있었다.  

그스린에게서 베토벤 5번ㅡ운명교향곡을 배우면서 안국민은 암흑과 광명에 대한 철학적사색에 깊이 심취해보았으며 베토벤 6번ㅡ 전원교향곡을 배우면서 그는 온천하, 우주를 한품에 안는 심정으로 상상력을 펼치며 경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대자연과 대화를 해보기도 하였다. 그때의 그 감격을 그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있다.

이렇게 안국민은 바하, 모쟐트, 하이든, 베토벤, 슈벨트, 슈만, 브람스, 림쓰끼ㅡ꼬르싸꼬브, 차이꼽쓰끼, 드보르쟉크 등 많은 음악대가들의 작품을 배웠으며 중앙악단자료실을 통해 총보와 레코드를 빌려내 듣기도 하면서 화성, 곡식 등을 망라해 세계음악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였다. 이 기간 그는 그스린이 중앙악단 연습과 공연을 지도하는 전과정을 세밀히 견학하기도 하였다.

많은 학생들중에서도 그스린은 유독 안국민만을 자주 피아노앞에 나와 지휘연습표현을 하게 하였다. 그스린을 떠나보내는 환송연에서 안국민은 은사에게 《일년남짓한 동안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라고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자 그스린은 《내가 중국에 와 처음 본 공연이 당신네 공연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강습소 첫 10명 제자를 초대한 연회에서 그스린은 안국민에게 특별히 모쟐트교향곡총보를 선물하였다. 그 소중한 선물과 그 시기의 학습필기가 문화대혁명때 잃어진것을 안국민은 미봉할수 없는 손실로 생각하고있다.

1957년 6월 학업을 마치고 귀환한 26살 안국민은 악대대장으로 임명되였으며 이때로부터 그의 직업지휘가의 인생이 시작되였다.

기억력이 비상한 안국민은 지금도 반세기전 정진옥의 의미심장한 말을 잊지 못한다.

시간ㅡ허세록이 떠나고 정진옥이 왔던 1952년 10월 2일
장소ㅡ연길 서양반점
참가자ㅡ악대 20명미만

정진옥환영연이였는데 그 자리에서 정진옥은 대번에 좌중의 마음을 휘여잡는 일장 연설을 하였다ㅡ

《연길이 지금은 흙먼지길이고 고층건물도 얼마 없지만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지 모릅니다. 우리의 노래들이 연변은 말할것도 없고 중국에로, 세계에로 나아갈수 있습니다. 그럴 날이 올겁니다 》

마음이 설레이게 하는 꿈이 실린 고무적인 말이였다. 아니나 다를가, 정진옥의 말은 적중하였다. 몇해 안지나 연변가무단의 공연, 특히 교성곡《장백의 노렁는 물론 허다한 작품들이 연변에서 성황리에 공연되고 북경에서 인기몰이를 하였으며 세계에로 나갔다. 지금 연변, 그리고 중국조선민족 작곡가, 성악가, 연주가들중에서는 세계적인 수상자들이 줄을 잇고있다.

정진옥과 마찬가지로 안국민에게도 꿈이 있었다. 교향음악에 대한 꿈이였다. 그는 《교향악은 예술의 고봉을 걷는다》는 명언을 특별히 좋아했다. 그는 교향악단, 가극단, 무극단이 구전한 북경이 부러웠고 연변에도 이런 음악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자신의 체험으로 보아도 교향음악은 자신에게 지대한 감흥과 흥분을 주었었는데 연변청중도 이런 감흥에 젖어보아야 한다고 생각을 굳히였다. 연변에서의 교향악연주일상화ㅡ이것이 바로 열혈청년 안국민의 꿈이요 그의 삶의 중요과제였다. 그는 교향음악을 연주할 교향악단을 꿈꾸었으며 가극단, 무극단도 꿈꾸면서 일생동안 몸소 30여차례의 완벽한 교향악연주회를 조직지휘할 구상을 무르익히며  프로그람까지 짜보았다.

영광촌에서 온 음악청년, 그스린의 제자 안국민이 젊음을 불태우며 마침내 성취시킨 교향음악연주회의 음악이 지난 세기 50년대중반부터 연변의 대지에 울려퍼지기 시작하였다. 이는 우리 선조들이 괴나리보짐을 등에 업고 남부녀대로 중국에 이주해온지 근 100년만의 일이다. 이는 우리 음악이 건국초기부터 벌써 남다른 고차원의 전통을 잉태하는 뜻깊은 연주회들이였다. 이는 실제상 농경사회에서 현대사회를 지향했던 우리 민족의 내적인 열망을 대변한 연주회들이였다.

이런 견지에서 안국민이 지휘한 연변 교향악연주년대기를 들춰보는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수 있다. 그 속에는 우리 민족의 너무나도 많은 정신사와 음악사적인 숨바꼭질과 씨름과 힘겨운 줄다리기가 어리여있기때문이다.

ㅡ베토벤서거129주년기념일전야인 1956년 3월 25일 저녁, 연길 문화구락부에서 열린 베토벤서거기념음악회는 연변사상 첫 교향음악작품연주회이다. 베토벤 제7교향곡 제2악장이 연주되였고 기타 음악프로도 공연되였다. 20여명 단촐한 악대로나마 성취시킨 25살미만의 음악청년의 어벌 큰 거사였다. 

ㅡ 1956년 북경에서의 대화 한토막. 안국민, 백문순이 각기 외국전문가를 사사할 때 웽그리아 군대소속 교향악단 북경방문공연에 초대된 자치주 간부 최채(당교학습중)가 《음악이 참 좋구만》하고 느낌을 토로하자 안국민과 백문순은 기다렸다는듯이 《연변에서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하고 동을 달았다. 최채는 《물론 해야지. 전적으로 동무들에게 달렸지.》라고 찬동하였다.  

ㅡ1957년 12월 27일 채 준공되지 않은 연변의학원강당 림시무대에서 교향음악연주회가 개최되였다. 26살 안국민이 30명좌우의 악대를 지휘하였다. 베토벤 《운명》교향곡 제1악장, 멘델스존 e소조 바이올린협주곡 제1악장(독주 김재청), 정진옥의 교향시 《향토》, 글린까의 가극 《이완 쑤사닌》중의 아리야 《안또니다의 로맨스》와 가요 《모스크바교외의 밤》(독창 방초선)이 연주되였다. 좌담에서 나온 말ㅡ”무슨 내용인지는 잘 몰라도 참 듣기 좋습니다.”

허지만 이른바 1957년의 반우파투쟁에서 김성민이 우파로 몰리고 1959년의 반우경투쟁에서 정진옥이 단장직에서 떨어지며 비판투쟁을 받게 되면서 안국민은 정진옥이 중용하는 추종자로 지목받아 곁불에 얻어맞는다. 《숙소에 모주석사진을 안걸고 베토벤, 울리야노바사진만 걸어놓으니 이것이 외국숭배가 아니고 무엇인가. 베토벤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자산계급이야.》 새로 부임된 단장의 베토벤비판발언내용이였다. 열정은 타격을 입었고 음악꿈은 잠시 접어둘수밖에  없었다.

ㅡ1961년후부터 조정을 통해 정진옥이 다시 올라오고 우파모자를 벗은 김성민도 가무단에 돌아오면서

1962년 4월 자치주예술콩쿠르 공연에서 또 한번 안국민의 지휘하에 베토벤 《운명》교향곡 제4악장, 진강, 하점호의 바이올린협주곡 《량산백과 축영대》(독주 박재범), 최삼명의 관현악곡 《장백봉화》 등 교향음악작품이 연주되였다. 자치주간부 김문보와 김명한도 연주를 들었는데 김문보는 《이런 음악을 매일 들었으면 좋겠구만》하고 치하하였다.

ㅡ같은 해 8월 30일, 주인민대표대회를 위한 음악회에서 안국민의 지휘하에 정진옥의 조곡 《홍기하강반에 붉은기 휘날린다》의 제1곡, 차이꼽쓰끼의 D대조 바이올린협주곡 제1악장(독주 허혜동)등을 연주하였다.

그러나 1963년 4월경부터 이른바 계급투쟁바람이 불면서 사회주의교양운동으로 번져졌으며 문예계, 특히 음악계는 이른바 《민족화》바람에 양악기를 창고에 처넣었거나 양악기를 민족악기모양으로 개작하기도 했다. 모택동의 문예관련 두 지시가 나오면서 문예계는 꽁꽁 얼어붙기시작하다가 급기야 문화대혁명이라는 광풍이 휘몰아친다. 안국민은 《문예 검은선》의 골간, 서양인의 《노복》으로 몰리며 악대지휘자리를 박탈당하게 된다.

ㅡ한시기 지나 업무가 재개되면서 안국민은 다시 지휘봉을 잡고 유일하게 공연허가가 난 《본보기극》들인 교향악 《사가풍》, 피아노협주곡 《황하》, 발레무극 《백모녀》의 지휘를 담당한다. 문화의 사막에서 절망하지 않은 예술인들이 보여준 모지름이였다.

1973년경 영국의 런던교향악단, 오스트리아의 윈교향악단, 미국의  필라델피아교향악단이 중국방문공연을 하게 되자 안국민은 또다시 교향악꿈이 꿈틀거리며 되살아났다. 견학을 신청했으나 군대간부 송홍산은 《당신은 영국에 그처럼 흥미를 가지는구만》하며 한마디로 거절했다. 가보지는 못했어도 뭔가 좀 풀리는가 했는데 뒤이어 이른바 무표제음악에 대한 비판이 서슬푸르게 진행되자 안국민은 중국에서 교향악이란 될수 없는 일이니 아예 깨끗이 단념할 생각이 들 정도로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ㅡ드디여 해동의 날이 왔다. 1979년 12월 대경위문공연에서 연변가무단은 안국민의 지휘밑에 대경가무단과 합동공연을 가지고 베토벤 《운명》교향곡 제1악장과 4악장을 연주하였다.

ㅡ1980년 2월13일 밤 연변사상 처음으로 되는 최대규모의 완벽한 교향악연주회가 연변전업국구락부에서 열렸다. 안국민의 지휘밑에  연변가무단악대와 연변방송예술단악대의 합동공연으로 관현악곡 《북경의 희소식 변강에 전해졌네》, 최삼명, 김재청의 C대조 바이올린협주곡, 그리고 베토벤의 5번 《운명》교향곡 제1, 제2, 제3, 제4악장 전곡이 격조높이 연주되였다. 시연시 배극선생이 와보고 《그거 들으니까 내 머리가 시원해진다》며 기뻐하였다. 주당위 조남기서기가 공연에 왕림해 격려의 말씀을 남기였으며 감동에 젖은 연변문학예술계인사들도 음악회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하였다. 

ㅡ1982년 자치주창설 30주년기념 관현악음악회. 안국민 지휘. 차이꼽쓰끼의  《잠자는 미녀》원무곡, 슈페이의 《경기병서곡》, 최삼명의 관현악곡 영화 《이른봄》삽곡, 최창규의 관현악조곡, 안국민의 《라질리》, 안국민, 박세성의 《나가자 나가자》가 연주되였다. 가무공연도 있었기에 관현악연습은 일주일에 수요일오후마다를 떼내 하였는데 《노래하자 조국》의 작곡자 왕신이 때마침 와보고 높은 평가를 주었다. 그 무렵 안국민은 길에서 선전부 책임자를 만났다. 책임자가 《요즘 뭘하오?》하고 묻길래 《가극, 가무를 따로하는》 개혁구상을 한다고 하자 그 책임자는 《당신네는 가무가 위주야, 관현악때문에 가무가 어떻게 됐소?》라고 질책했다. 안국민은 《어떻게 되긴요? 수요 오후에만 했는데요.》하며 변호했다.

ㅡ리정문이 선전부장으로 부임한뒤의 좌담회에서 안국민을 비롯한 여러 분이 《가무단이 맨 가무만 하면 안된다,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단체인만큼 음악무용의 최고차원 교향악, 가극, 무용도 해야 한다》고 력설했다. 그 뒤 확실히 1986년부터 시작해 1989년 가극 《아리랑》을 성공시키였으며 1990년에는 무극 《춘향전》이 아세아경기대회에서 공연되였다. 하경지가 주주에서 연변가무단의 공연을 보고 《가극, 무극같은걸 해야 한다고 1986년 연변에 갔을 때 얘기한적 있는데 당신들은 〈춘향전〉과 〈아리랑〉을 내놓았구만》하며 기뻐하였다.

일생동안 30여차례의 교향악지휘를 해보기를 기대했던 안국민의 꿈, 그러나 그 최저한도의 꿈은 아쉽게도 그의 은퇴와 더불어 미완의 꿈으로 남게 되였다. 하지만 그 꿈이 세파의 험난한 시련ㅡ그 무수한 숨바꼭질과 힘겨운 씨름과 운명적인 줄다리기를 거치는 동안 교향음악연주는 용케도 점진적상승의 그라프를 그어왔던것 또한 사실이다. 완벽한 교향악연주는 아닐지라도 안국민이 간간이 지휘한 교향악, 교향시, 서곡, 협주곡, 명상곡, 기상곡, 조곡, 관현악곡은 무려 50여곡이 된다. 지난 세기 50년대,  60년대 정치적소용돌이의 와중에 간간이 한두곡씩 지휘한것들이고 70년대말로부터 80년대의 상대적으로 나아진 환경에서 연주한것들이다.

안국민의 지휘하에 연변가무단관현악대는 전국적으로 알아주는 명망있는 악대로 부상하였다. 연변가무단관현악대같은 세련된 지구급악대는 전국에서 찾아볼수 없다.

이 와중에 안국민은 자기특유의 지휘스타일을 창출하였다. 지휘와 악사간에 서로 존중하고 평등해야 한다는것이 그의 지론이다. 안국민도 이전에는 지휘의 절대적권위를 믿었었지만 경험을 총화하면서 그는 지휘와 악사의 협력이 잘되게 하자면 지휘가는 악사의 정서를 잘 파악하고 유쾌한 기분으로 정서넘치게 연주하도록 면려해주면서 화애로우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이는 탕목해가 소개한 세계지휘계의 변화와 일맥상통하는것이다. 탕목해의 소개에 의하면 2차대전후 서방사회에서는 지휘가 폭군으로 군림하던 시대가 지나가고 지휘와 악사는 현대적인 인간관계, 즉 다원적이고 교차적인 호상협력의 관계로 바뀌였던것이다.(문회보, 동상)

안국민은 그스린을 사사하기전부터 고전파, 랑만파, 인상파, 현대파의 교향음악과 각국의 국민악파의 음악을 체계적으로 공부하며 각이한 류파, 각이한 나라의 음악특점에 대해서도 탐구하였다. 그는 또한 영화, 텔레비죤과 현장견학을 통하여 토스카니니의 엄격함과 과단함, 이와노브와 아노쏘브의 열정과 분방함, 오자와 세이지의 산뜻함과 재치, 카라얀의 뛰여난 통솔력과 완벽함, 그리고 메이타, 마젤, 무티 등 지휘가들의 각이한 풍격도 넓고 깊게 파고들면서 자기특유의 화애로우면서도 엄격하며 친화력을 가진 지휘스타일을 형성하였다.

연변의 교향음악력사가 말해주다싶이 안국민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변지식인사회의 영재이며 조선민족의 고차원의 음악ㅡ교향음악의 발전을 선도한 음악계의 기수이다. 이는 유능한 예술가만의 영광이다. 물질주의가 만연되고 경박과 가벼움이 판을 친다 해도 슬플것이 없다. 바로 이런 처지때문에 이 사회에는 지성인, 엘리트가 필요하다. 바로 이런 여의치 못한 여건때문에 영재는 일거리가 넘쳐나며 실업을 모른다. 문필가 리태준의 말과 같이 《그 고독은 그 작가의 운명이요 또 사명이다. 고독하되, 불리하되, 자연이 준 자기만을 완성해나가는것은 정치가나 실업가는 가져보지 못하는 예술가만의 영광인것이다.》(리태준《무서록》, 제66페지)

인간본위를 창도하는 오늘 안국민이 추구하는 교향음악의 꿈은 더욱 지대한 의미를 가진다고 볼수 있다.. 그의 그 꿈이 인간을 억압하고 인간의 자유와 개성을 억압하는 락후한 문화방향을 거부하고있기때문이며 그의 미완의 꿈이 지식인의 정신수련, 인간의 자유롭고 전면적인 발전,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력의 계발을 위한 선진적인 문화방향, 그리고 조화사회구축의 방향과 전적으로 일치하고있기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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