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웅 평론>

석화의 최근 몇 년간의 시창작은 중국조선족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심각한 사고를 바탕으로 하여 민족적사실주의의 올바른 방향을 견지하면서 아주 건강하게 발전하고 있다. 특히 련작시 《연변》은 이점을 아주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 김호웅 교수갤디아스포라의 시학》에서 명확하게 지적하였으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해 이 점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언급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석화 시창작에서의 예술표현 면에서의 특점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말로나 글로 표현을 했기에 남들이 별로 언급하지 않았던 문제만을 골라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지금 우리 시단에는 표절, 모방의 기풍이 성행하고 있으며 적지 않은 시인들은 사실 무엇이 표절이나 모방이고 무엇이 바람직한 용전(用典)이고 무엇이 패러디인지 조차 잘 모른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여 석화 시에서의 용전(用典)의 묘미(妙味)를 상세하게 분석하는 것은 우리 시단의 현실의 시 창작에 대단히 유조하다고 생각한다.


전고(典故)는 문학작품에서 소재로 리용되기도 하고 또 료리에서의 조미료와 비슷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식객의 구미에 맞는 조미료를 부동한 재료에 따라 부동한 량을 넣어야 최적의 맛을 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용전(用典)-전고를 인용하는 것도 적재적소에 적당한 량을 인용해야만 “점철성금(点鐵成金)”의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


석화 시에서의 전고의 출처는 아주 광범위하다. 동서고금의 문학, 종교, 사상 경전에서 뿐만 아니라 조각이나 미술 같은 문학 밖의 기타 예술작품에서도 소재를 취하거나 전고를 인용하여 적재적소에 인용함으로써 시의 맛을 한결 돋구어주고 있다. 본문은 석화의 근작시집 《연변》만을 텍스트로 삼았음을 밝혀둔다.



1. 석화 시에서의 서양 전고 인용의 묘미

  

석화의 련작시 《연변 ‧ 20-사랑》은 최근 년 간 우리 시단에 나타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이고 그 예술적 표현기교도 아주 성숙된 경지에 오른 사랑시 중의 수작이라고 인정한다.


옆구리가 결린다

갈비대 한 가닥 빠져나간 자리

그 빈자리만큼 다시 채워지는

인연이라는 낱말-


미끈하게 잘 빠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단하게 옥 맺힌 것도 아닌

두루 그저 그렇게 생겨나서

길이로도 무게로도 모자라는 것이 많은

내 갈비뼈 한 가닥


오가는 세월에 닳아

윤기도 많이 사라지고

넘치던 오기도 한참을 잠재워

이제는 그저 서로 물끄러미 바라만 보아도

눈물이 핑- 도는

나의 갈비뼈 한 가닥


부부란 이름 하나로

나보다 먼저 자기가 아파하면서

살아온 그날과 날들

내 빈 옆구리만큼

허전해하며

오늘도 나의 그림자를 즈려밟고

저만치서 따라온다.


    - 《연변 ‧ 20-사랑》전문

    

이 시에서의 예술적 표현에서의 가장 큰 특점은 마땅히 용전의 묘미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시 창작에서의 적절한 용전(用典)은 마치도 금반지에 다이아몬드나 귀중한 보석을 박아 넣음으로써 전반 반지가 더욱 광채를 띠게 하고 값이 나가게 하는 데에 비유할 수 있다.

남자의 갈비대를 뽑아 여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기독교 《구약성서 ‧ 창세기》에서 나온다. 주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에덴동산을 만들어 그곳에 인류의 조상인 남자 아담을 만들어 살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이나 다 짝이 있게 만들었는데 유독 사람만은 짝이 없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 ……그래서 주 하나님이 그 남자를 깊이 잠들게 하였다. 그가 잠든 사이에 주 하나님이 그 남자의 갈빗대 하나를 뽑고, 그 자리는 살로 메우셨다. 주 하나님이 남자에게서 뽑아낸 갈비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여자를 남자에게로 데리고 오셨다. 그때에 남자가 말했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 어머니를 떠나 안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1)


기독교의 《성경》이 세상에서 발행량이 제일 많은 책이라고 하니 이 이야기는 이 세상 60억 사람들치고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석화 시인의  이 시에서 인용한 이 전고(典故)는 수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으므로 독자들에게 생소한 감을 주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중국 근대의 미학가인 왕국유(王國維)의 말을 빈다면 “불격지미(不隔之美)”를 갖고 있다.


바로 이러하기에 석화시인은 이 전고를 억지로 가져다가 인위적으로 박아 넣은 것 같은 감을 주지 않게 아주 암시적으로 처리하였다. 하기에 이 시를 다 읽고 나서야 사람들은 이 시가 사실은 《구약성서 ‧ 창세기》의 인간창조의 이야기를 빌어다가 부부의 사랑을 암시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전고를 인용해도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아무런 작위의 흔적이 없이 처리한 기교가 대단히 돋보인다.


그리하여 이 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암시로 일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에서의 서정적자아는 자기의 안해를 넌지시 갈비대에 비유해서 묘사하고 있다. “미끈하게 잘 빠진 것도 아니고 / 그렇다고 단단하게 옥 맺힌 것도 아닌 / 두루 그저 그렇게 생겨나서 / 길이로도 무게로도 모자라는 것이 많은 / 내 갈비뼈 한 가닥”이라고 넌지시 묘사하고 하고 있다. 이런 표현은  정지용의 그 유명한 《향수》중의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 사철 발 벗은 안해가 / 따가운 해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이라는 구절을 련상시키기는 하지만, 정지용의 시보다는 더욱 암묵적으로 묘사되였다. 그리고 “오늘도 나의 그림자를 즈려밟고 / 저만치에서 따라온다”에서는 김소월의 《진달렁중의 “가시는 걸음걸음 /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라는 구절이 련상되기는 하지만 김소월의 《진달렁에 못지않은 진한 감동을 준다. 이 시는 《성경》의 소재를 빌려다가 조금 손질하여 훌륭한 서정시를 만들어낸 “점철성금(点鐵成金)”의 전형적인 한 사례이다.


《성경》의 소재를 이용하여 시를 꾸민 다른 한 가지 사례로 석화의 《사과를 먹자》를 들 수 있다.


사과를 먹자

껍질을 살살 벗겨버리고

속살만 사각사각 씹어 먹자

새하얗게 드러나는 속살

단물이 배여 나는 속살


사과를 먹자

향긋한 속살

싱싱한 속살

단물이 배여나

더욱 목마른 속살

새하얗게 드러나

한결 부드러운 속살


사과를 먹자

해 아래서

달 아래서

하나의 동산을

다 넘겨줘 버리고

한 알의 사과를 바꾸어먹자


사과를 먹자

후회는 없다

망설임도 없다.

이렇게 속살이 이쁘고 탐스러운데

이렇게 속살이 향그럽고 싱싱한데

이렇게 너와 나

아름다운 줄 알았는데


사과를 먹자


  - 《사과를 먹자》전문


이 시 중의 “하나의 동산을 / 다 넘겨줘 버리고 / 한 알의 사과를 바꾸어먹자”라는 련을 통하여 우리는 기독교의 《구약성서 ‧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훔쳐 먹고 에덴동산에서 축출 당한다는 이야기를 련상하게 된다. 아담과 이브는 금단을 열매를 훔쳐 먹고 지혜를 얻었다. 그래서 금단의 열매는 “지혜의 열매”라고도 한다. 그러나 석화는 금단의 열매인 사과에 지혜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욕을 성애의 즐거움을 부여했다. 훔친 사과가 더 맛이 있다는 “밀애(密愛)의 례찬”이라고 할 수 있다. 성애의 레벨에서 훔치는 사랑이 가장 앞자리를 차지한다고 사람들은 자고로 말하여 오고 있다. 물론 석화는 이 시에서 공개적으로 바람을 피우는 것을 례찬했다면 그 맛이 전무했겠지만 제목으로부터 전반 시의 구성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하게 완곡적인 표현을 했기에 아주 감칠 맛있게 다가온다.


이 시와 아주 비슷하게 완곡적인 표현을 통해 에로틱한 사랑의 환희를 표현한 시로는 《그 모습 다 벗고 포도들은 포도주가 된다》이다.


벗으라 한다

벗어야 한다

벗어라 

벗자


마지막 한 장의 그 …

마저도


속살과 속살끼리만 만나

만지고 부비고 삼키고 무너지자


맑은 그 빛깔

달콤한 그 맛

감미로운 그 향기


네가 나 되고

나는 너로 된다


그 모습

다 벗고

비로소

포도들은 포도주가

된다


   - 《그 모습 다 벗고 포도들은 포도주가 된다》전문


이 시에서는 비록 고대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명확하게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전반 시에는 디오니소스적인 도취와 광기가 흘러넘친다. 술은 본능과 정욕을 자극시킨다. 술의 신의 디오니소스의 추종자들 중에는 미친 여자를 뜻하는 아니나데스와 남성본능의 상징인 사티로스라는 무리가 있다. 니체는 사티로스를 가리켜 문명의 옷을 벗어던지고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낸 인간의 원래의 모습이요, 자연생식력의 상징이라고 설파한바 있다. 술은 이성의 가면 뒤에 숨어 있는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게 한다. 이 시는 인간의 본능적인 성애에 대한 례찬이면서도 교묘한 완곡적인 표현을 통해 이를 암시하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석화의 《연변 ‧ 25-젊음에게》는 그리스 신화중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시이다.


추락하는 것의 날개여!


곧게 편 날개는

비상을 위하여 준비된 것

돌멩이처럼 땅바닥에 떨어지려고

공중에서 퍼덕인 것이 아니였다


추락하는 것의 날개여!


저 높은 곳에 태양이

빛과 열의 덩어리가 불타고 있다.

다가가지 말아, 가까이 말아

애절한 부르짖음이 허망하다

추락하는 것의 날개여!


환희롭고

찬란한 

젊음 그 웃음

이카로스의 얼굴 누가 보았는가


추락하는 것의 날개여!


     - 《연변 ‧ 25-젊음에게》전문


시인은 이카로스에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라고 주석을 달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를 잘 모르는 독자들의 경우에는 이 “이카로스”라는 전고(典故)는 낯선 것이 아닐 수 없다. 서양문학을 몇 십 년 강의해온 나마저도  이번에 석화의 시집을 읽으면서 다시 그리스신화와 사전에서 “이카로스”라는 조목을 찾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이 전고의 뜻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명장(名匠) 다이달로스와 크레타왕 미노스의 녀종 나우크라테 사이에서 태여난 아들. 다이달로스는 아리아드네에게 미궁 라비린토스에서 영웅 테세우스를 구출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로 인해 테세우스가 괴물 미노타로우스를 퇴치한 것을 안 미노스왕은 노하여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 부자(父子)를 미궁 라비린토스에 유폐하였다. 그러나 다이달로스는 밀랍으로 새의 날개를 본떠 만들어 그것을 자신과 아들의 어깨에 붙이고 날아 미궁에서의 탈출에 성공하지만, 아들 이카로스는 하늘 높이 날다 태양열에 밀랍이 녹아 바다에 떨어져 죽는다. 그 바다는 후에 이카리아해가 되었다고 한다.”2)


석화는 그리스신화의 소재를 리용하여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젊은 시절의 무모함과 맹동을 시적으로 표현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전고의 인용의 측면에서  앞에서 소개한 《연변 ‧ 20-사랑》과 비교한다면 그 묘미가 덜하다. 그것은 이카로스의 이야기를 단순히 리용하여 시화하였기 때문이며 너무나 생소한 소재이기에 적잖은 독자들에게는 너무 낯설고 생소한 격리감을 준다. 왕국유(王國維)의 말을 빈다면 “불격지미(不隔之美)”를 갖추었다고 할 수 없다. 물론 괴테도 《파우스트》에서 고대 그리스 신화중의 이카로스라는 이 인물을 모방하여 에브포리온이라는 인물을 창조했는데 역시 부모의 권고를 듣지않고 너무나 높이 날아올랐다가 추락하여 죽는다. 만일 서양문화에 익숙한 독자라면 석화의 이 시의 주제를 리해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격(隔)”이냐 “불격(不隔)”이냐는 독자들이 부동함에 따라서 부동한 판단이 내려지게 되는 것이다. 


석화 시에서의 용전(用典)은 종교경전이나 문학경전에만 한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생각하는 사람》은 제목으로부터 프랑스 조각가 로댕(1840-1817)의 유명한 조각 《생각하는 사람》(1880년)에서 따온 것이며 시상 자체도 로댕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을 패러디한 것이다. 시창작에서의 패러디수법은 문학텍스트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준 전형적인 사례이다. 로댕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나이가 펑퍼짐한 돌우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머리를 수굿하고 생각하는 모습을 조각한 것인데, 사람이 좌변기에 앉아 용변을 보고 있는 자세와 아주 흡사하다. 감각이 예민한 석화시인은 량자 사이의 비슷한 외적형상에서 시적인 계기를 포착했던 것이다.


석화는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시문학의 사상의 빈곤과 현실도피의 경향을 희화(戱畵)적으로 묘사하여 풍자하고 꼬집은 작품이다.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

매일 아침 화장실에 들어가

쭈크리고 앉으면

틀림없는 로댕의 그 자세다

어제 하루 들이켰던 온갖 잡동사니와

온밤 꿈자리 어수선하게 만들었던 끄나풀

끙끙 아래로 힘을 줄 때마다

눈앞에 불이 번쩍 번쩍 켜지고

한줄기 도통한 기가 숫구멍으로 뻗친다

《생각하는 사람》

 매일 아침마다 그 자세를 하고나면

시원하다

후련하다

오늘 또 그 비여낸 것만큼

무엇이 가득 차겠지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생각하는 사람》전문


이 시는 최근 년간에 나타난 우리 시문학의 사상의 빈곤과 현실도피의 경향을 희화(戱畵)적으로 묘사하여 풍자하고 꼬집은 작품이라고 분석을 해도 대과(大過)는 없는 것이다. 시인들은 사상가이고 어려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어려움을 호소하고 울러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시단의 적잖은 시인들은 사실은 밥이나 먹고 똥이나 싸면서 아무런 깊은 사상과 시대와 현실에 대한 관심과 사명감 없이 무위도식하는 한 무리의 밥통, 한 무리의 똥 만드는 조분기(造糞器)들임을 자조적으로 꼬집은 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로댕도 모르고 로댕의 유명한 조각 《생각하는 사람》은 더욱 모르는 무식한 독자에게 있어서 이러한 용전(用典)은 마치도 스핑크스 수수께끼처럼 어렵고 난해한 것이겠지만 조금만 예술상식이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어려운 전고(典故)가 아니며 오히려 무한한 희열감을 안겨준다.


그리고 석화시인은 자기의 시적창조와 남의 시구의 인용을 분명히 구분한다. 이를테면 이 시의 마지막 결론 부분인 《인생은 살아가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는 윤동주 시인의 《쉽게 씌어진 시》중의 시구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므로 인용부호를 사용했다. 이렇게 한글자도 안 고치고 원문대로 인용하는 것이 오히려 남의 시를 스리슬쩍 개작하여 자기의 시구로 둔갑을 시키는 것보다 훨씬 당당하고 더욱 설득력을 갖게 해준다. 뿐만 아니라 치열한 문학정신으로 살다가 간 윤동주 같은 저항시인의 시구로써 문자유희에만 침몰해 있는 우리 시단의 일부 “순수시”, “탐미주의 시”들에 일침을 가하려는 의도도 다분하다고 볼 수 있다.

  


  2.  석화 시에서의 조선 민족 고전과 용전의 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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