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호근선생을 추모하여

[김학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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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2007년 7월 2일, 월요일이었다. 어느날 보다 좀 일찍이 일어난 나는 창밖에 보슬비가 찹찹히 내리고 있는 아파트지역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 5시 반경, 집의 전화벨소리에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먼저 울음소리부터 들려왔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김호근 선생 댁입니다. 금방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연변병원에서 빈소로 옮겨가는 중입니다.>>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순간 모든 사유가 공백에 되어갔다.
<<무슨 말씀입니까? 몇일전 부르하통하 강변에서 산책하는 김선생을 만나본 적이 있는데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정신이 번쩍 든 나는 본능적으로 물음을 연발하였다. 사모님은 그저 통곡만 하면서 수화기를 놓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서진청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소식을 알려 주었다. 그도 너무나 돌연스러워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또 손문혁씨에게 전화를 걸어 김호근선생의 변고를아는가고 물었다. 금시초문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손문혁씨에게 속히 부고를 내여 작가협회와 문단의 여러분들께 김호근선생의 별세를 알려 주라고 부탁하였다. 6시경, 내가 서진청씨와 함께 김호근선생의 집에 들어서니 작가협회의 우요동 부주석과 복미란주임, 손문혁씨 그리고 육속 도착한 윤옥주, 임만설 등 제씨들이 한창 비통에 졸도한 사모님을 모시고있었다. 김호근 선생이 아침 4시 15분쯤 날씨가 추워지니 잘 닫겨지지 않는 창문을 닫으려고 창문턱까지 올라가 손질하다가 창밖으로 추락되였다는 것, 5층 높이니 결과는 뻔했다.이러한 사연은 김호근선생의 처남을 통해 비로소 알게되었다.

김호근 선생은 1948년 1월 출생이니 손꼽아 헤여보아도 이제야 만 59세, 너무나 아까운 나이였다. 늘 건강하고 늘 락관적이고 늘 유머적이였던 호근선생, 젊었던 한때에 축구운동원으로도 뛰였었다는 자랑을 너무나 많이 하여오던 그였는데 어쩌면 이런 변고가 생길수 있었을까?! 너무나 엄연한 사실이지만 나는 어쨌든 이런 돌발적인 의외의 사고를 현실로 접수하기가 어려웠다. 59세 밖에 않되는 인생, 그렇게도 착하고 고정하고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멋진 미남이 아니였던가! 이런 것을보고 청천벽력이라하는가? 이런것을 보고 인생무상 (人生无常)이라 하는가? 너무도 기막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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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 김호근 선생, 왼쪽 김학천 주석
처음 호근선생을 만났던 때가 아마 내가 연변대학 중문학부의 문학창작반에서 공부하던 1983년의 여름쯤이 아닌가 생각된다. 연변작가협회기관과 기관지 <<천지>>잡지사가 그때는 작가협회와 함께 연길시 하남다리에서 그렇게 멀지 않는 하남우전국근처의 주 인민대표대회상무위원회기관청사 1층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나는 동창들과 함께 과외시간에 작가협회에 놀러 갔다가 우연하게 키꼴이 훤칠하고머리를 길게 늘인 분이 복도에서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동행하던 동창이 <<저분이 바로 김호근 편집이요>>하고 귀뜀을 해주었었다.

그후 오래동안 나는 김호근선생을 본적이 없었고 줄곧 한문으로 글을 쓰다보니 그와 직접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눈적은 더욱 없었다.

본격적으로 김호근선생을 대면하고 알게된 것은 1996년 4월, 내가 연변작가협회에 와서 일을 맡아보게 되면서 부터였다. 그때 그는 연변작가협회기관지인 <<천지>>잡지사의 부주필직을 맡고 리상각주필과 함께 화목하고 효률이 높은 잡지사로 <<천지>>를 꾸려가고 있었다. 1996년 9월 리상각선생이 연령관계로 하여 <<천지>>주필직에서 은퇴하게 되자,1997년 4월부터 원래 작가협회에서 전직부주석겸 비서장으로일을 보던 장지민선생이 <<천지>>잡지사에 전근되여 주필직을 맡고 원래 <<천지>>잡지사 부주필직을 맡았던 김호근선생이 작가협회에 전근되여 전직 비서장(부현급)직을 맡아보게 되였다. 이어 1998년 9월에 개최됐던 연변작가협회 제7차 회원대표대회에서 김호근선생은 전직 부주석으로 당선되였으며 비서장직을 겸하여 일을 보게 되였다. 그리하여 나는 김호근선생과 날마다 머리를 맞대고 작가협회의 일들을함께 해나가면서 선후 장장 9년이란 시간을 보내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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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말경, 나는 사업의 수요로 주당위의 결정에 의하여 옹근 10년을 하루와 같이 하여 오던 연변작가협회를 떠나 연변사회과학계련합회로 전근되어서야 김호근선생과 '동사자'관계를 한단락 끝냈다.

인생의 경력에서 옹근 9년을 함께 한 직장에서 일을 보았고 서진청선생을 포함하여3명으로 구성된 당조성원으로, 지도부가 단결이 잘 되고 조화가 잘 이루어지고 상호간 훌륭히 배합하여 사업을 하여 왔다는 점이 어떻게 보아도 쉽지 않은 인연이였다. 문단이나 연변작가협회의 경우, 더욱 그렇지 않는가 싶다. 내가 알기에는 연변작가협회의 50년 력사에서 나와 서진청, 김호근 3명으로 구성되였던 당조가 유일하게 단결이 잘되였고 모순이 없었던 지도부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시절이 자랑스럽고 그래서 그 시절이 더욱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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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근선생은 무슨 일이나 손 댈라치면 한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열심히 하고 진지하게 하고 완벽하게 하고 끝까지 해나가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나는 호근선생과 함께 사업하면서 늘 그가 가지고 다니는 큼직한 손 가방을 보게된다. 가방에는 항상 목책, 펜, 카메라 지어 일반인들이 상상할수 없는 기물들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사업에서 필요한 사항이나 일들을 매번 열심히 목책에 기록하고 표기고 력사의소중한 사건들을 수집하고 정리한다. 그러므로 복잡다단한 일들을 하나하나 조리있게 해 나갈수 있고 모든 일들의 진척을 수시로 점검하며 실제적으로 추진시켜나갔다.

나는 언젠가 한번 감탄조로 <<선생은 타고난 비서장감이고 천생 <참모장> 스타일입니다>>. 수 많은 문학상평심의 조직, 수 많은 문학행사의 주최, 수 많은 문학사업방안의 기획과 실시 등 면에서 김호근선생의 노심초사하는 모습은 우리 문단에서 특이한 영상으로 여러 문인들의 머리속에 생동히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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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근선생은 선배들을 존중하고 후배들을 사랑하며 모든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하여 주는 포용성(包容性)이 짙은 인성미(人性美)가 있는 분이다.
나는 나의 큰형님이문화혁명 직전의 고중 3학년생으로서, 내게 준 영향은 여러모로 많았고 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여 왔다는 점에서 그 동년배들과 동창생들을 줄곧 마음속으로 우러러 보고 진심으로 존중하여 왔다. 문화대혁명으로하여 대학을 다니지 못했지만 나는 항상 그들의 수평과 수준과 수양은 대학생들 보다 높으면 높았지절대 못지 않다고 여겼다.

김호근선생과 함께 작가협회에서 일하면서 김호근선생의 언행에서 나의 이런 생각은 드팀없이 입증되었다. 특별히 나와 같이 성격이 불같은 사람과 함께 손잡고 일을 한다는 것이 사실 여간만은 힘든 일이 아니였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격상의 차이를 윤활하게 조절하고 나의 급한 성격과, 지어 나의 잘못까지 너그럽게 받아주고 참아 주는 수양과 아량은 때때로 나에게 감격과 감동과 감사의 마음을 걷잡을수 없게 하였었다. 그래서 그는 나의 앞에서 동사자이자 더욱이는 형님같이 믿을만한 존재였다. 그래서일까? 한번은 김학철선생님 댁에서 김학철 선생님은 나를 보고 작가협회의 일들을 두루 말씀하시다가 특별히 김호근선생에대하여 이렇게 언급하시였다. <<호근이는 말이야, 성격상에서나 위치상에서나 함께손잡고 일하는게 좋은 점이 많아요. 그가 바로 누구도 하기 어려운 완충작용을 할수있다는 말이지>>. 오늘에 와서 김학철선생님이 하신 이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면 더욱 의미심장한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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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근선생은 유머적이고 낙관적인 한편, 우울하고 소침한 복합적 성격의 모순통일체이다. 김호근선생의 유머와 락관적인 풍격은 그의 연설에서나 많은 문학행사의 사회(主持) 에서나 혹은 평소의 담소에서 모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의 이런 유머와 낙관적인 정서는 늘 주위의 사람들을 감염시키며 즐겁고 경쾌한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그러기에 그가 있는 곳은 늘 웃음꽃이 피어나곤 하였다. 반면 김호근선생은 또 혼자 있기를 즐기고 그 때에는 자주 우울하게 심지어 슬프게 외로움과 침묵을 지켰었다. 나는 가끔 호근선생의 눈빛속 깊은 곳에 조용히 깔려 있는 담담한 우수를 읽어 볼수 있었다.

호근선생이 작가협회로 금방 전근된후 한 번은 오후 2시부터 시작된 작가협회당조회의가 장장 7시간이나 지난 저녁 9시에야 겨우 끝낼 수 있었다. 원인은 한 가지 상당히 엄숙한 원칙문제에 관해 그때 당시의 5명으로 구성된 당조성원들간 부동한 의견이 나왔고 이어 격렬한 쟁론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의 회의에서호근선생은 시종 일언반구도 없었다. 쟁논이 이맘쯤 되니 호근선생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의하여 다수의견이 귀결되기 때문에 최후의 결정에 결정적인 역할이 있어 자뭇 중요하였다. 사후 나는 그와의 이야기를 통하여 단도직입적으로 마음치례에만 치중하는 <<노호인주의>>에 대하여 비평하고 의견교환을 하였다. 그는 매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문화대혁명때 부친이 군증들의 투쟁을 받고 심지어 혹독한 비방과 박해에 의하여 비참하게 사망된 사연을 내 놓으면서 쟁론이나 상호 비난이나 같은 장면에 싫증과 염오와 공포감을 느끼게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비로서 그가 문화혁명시기 어린 마음이 심한 상처를 받은 사실을 알게 되였다. 그후부터 쟁논이 심한 장소에서 나는 그에게 태도표시같은 것을 굳이 강요하지 않았다. 복잡한 사회에 몸담고 힘든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호근선생같은 경우를 더욱 많이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터득하게 되였다. 물론, 호근선생은 호근선생 나름대로 그 자신이 특유한 경력과, 즐거움과 고통이 있었으리라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인간으로서, 더욱이는 지성인으로서 사람마다 각자의 남 모르는 정서와 감정이 자기의 언행을 지배할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가능하고 현실적인 것이 아닌가? 그러니 한 사람의 언행에 대해 많이는 이해해 주고, 간단하게혹은 너무 경솔하게 부정적 평가를 내리는 것은 삼가해야 되지 않을까.

김호근 선생의 경우, 항상 조직을 하늘처럼 믿고 직장을 집처럼 사랑하고 직업을 일상 필수로 애착해 왔었다. 내가 알기에는 동창이자 지기인 전종윤 촬영가와 전학석 교수가 선후 별세함으로 하여 호근선생에게 준 정신적 충격은 너무나 컸던것 같았다. 효자로 유명한 호근선생은 모친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시자 늘 슬퍼하였고 자주 우울해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호근선생의 섬세하고 민감하고 쉽게 우울해지는 정서에 각별히 신경을 쓰게 되었다. 그가 사업 일선에서 조기 은퇴한 후에도, 심지어 내가 주사회과학계련합회로 전근된 후에도 가끔 씩 서진청선생과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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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여름, 한국울산삼창기업 이두철회장님의 위촉을 받고 김호근선생을 통하여나는 김호근선생과 주수리국의 정년은퇴한 오공정사와 함께 화룡시숭선진시만촌에 '백두산창작기지' 자리선정과 건설에 분주히 보냈다. 이두철 회장님의 뜻에 따라 이 프로젝트는 나와 김호근, 남영전, 박성군, 박일 등 몇 명으로 건설운영팀을 무어 중요한 일들은 함께 상론하여 진행하기로 되여 있었지만, 사실상 모든 일에는 주요하게 김호근선생이 나와 토론한 후 전적으로 맡아 보는 상황으로 되였고 매 중요한 대목은 김호근선생이 직접 투자자인 이두철회장님과 소통해 일을 진척시켰다.그후 몇 달이 지난 2005년 11월, 주당위의 결정에 의하여 전주 35명 연령표준에 도달하는 현급간부와 함께 김호근선생과 서진청선생도 조기 은퇴하게 되였고 이로부터 김호근선생은 더욱더 혼신의 정력을 백두산창작기지 건설에 쏟아부었다.

2005년 여름부터 2007년 여름까지 옹근 2년 동안 김호근선생이 시만촌이라는 두메산골에서 먹고 자고 일하면서 헌신적으로 하여온 일들은 헤아릴 수 없었고 겪은 신고도 이루다 말할수 없다. 이 기간 나는 서진청선생과 함께 생활용품같은 것을 가지고 가끔씩 시만촌으로 가서 호근선생을 위문해 주기도 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조기 은퇴 후 나는 호근선생이 너무나 외롭게 두메산골에서 하루하루를보내는 것을 보고 몇 번인가 사모님과도 함께 동반해 생활하면서 일을 보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마냥 홀로 외롭게 단천체서예와 있기만을 고집하여왔다. 지금에야 알수 있게 되었지만, 그동안 호근선생은 벽이 채 마르지 않은 새집에서 추운 겨울을 지내다나니 풍습, 청광안, 말초신경염 등 생각지 않던 병을 얻게 되어 손발이 저리고 눈이 아프고 머리가 혼미해지고 심지어 간, 인후 등 기관도 이상한 증세를 나타내여 막부득히 한 동안은 연변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않 되는 형편이였었다고 한다. 호근선생이 입원치료를 했던 사실은 내가 썩 후에야 서진청선생을 통하여 알게 되였다. 바로 호근선생이 별세하기 한 주일전,내가부르하통하강변을지나다가 우연히 산책하러 나온 호근선생을 만나 반갑게 식사 요청을 하니 병이 좀낫게 되면 전화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병환에 체중이 근 10kg나 내려 너무 허약해 보이는 몸이였다. <<그럼 부디 전화를 주셔야합니다. 꼭 전화를 기다리겠습니다.>> 라고 거듭 다짐을 받고 우리는 헤어졌었다. 그런데 그번의 약속이 종내는 지켜지지 않았고 그번의 만남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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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여름의 어느날 밤 10시 경, 호근선생의 급한 전화를 받고 나는 택시에 몸을 싣고 곧 바로 연신교로 내 달렸다. 호근선생은 아직 안정이 되지 않은 정서로 자전거를 연신교우에 세워 놓고 초조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방 택시 한대가 호근선생이 타고 다니는 자전거의 뒤 바퀴를 한치가량 사이두고 <<쌩>>하고 지나가더라는 것이었다. 반초, 혹은 10분의 1초, 한 찰나 한 순간에 가능하게 닥쳐 올 수있는 재난을 요행 피면했다고 감탄을 거듭하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생명을 소중히 간주하고 생활을 절실히 사랑하는 호근선생을 다시 한번 바라보게 되었다.

2003년 여름의 어느날 오후, 퇴근을 하고 집으로 들어온지 얼마 않되여 작가협회기관의 수발실 노인으로부터 호근선생이 크게 다쳤으니 급히 직장으로 와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부랴부랴 작가협회의 수발실에 도착하였다. 퇴근길에 부르하통하 강변을 산책하다가 강둑에서 뒹굴러 내려 다리뼈가 골절(骨折) 되였는데 다행히택시기사의 도움으로 작가협회 수발실까지 왔다는 호근선생의 설명이다. 나는 곧 바로 호근선생을 차에 싣고 연변병원으로 달려가 입원치료를 받게 하였다. 검사를 마치고 나서야 무려 세곳이나 골절됐다는 것을 알게 되여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썩 후에 나는 호근선생에게 <<택시를 탔을 때 곧 바로 병원으로 가서 일면 치료를 받으며 일면 나에게 전화로 알릴 것이지 왜 먼저 직장을 찾아왔는가, 그러면 치료시간이 지체되여 더 위험하지 않는가?>>고 물었더니 그저 <<글쎄>> 하고 시무룩이 웃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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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18일, 작가협회 당조성원인 나와 호근선생과 서진청선생 세 사람은 화룡시 숭선진당위 김철서기와 시만촌에 창작기지를 건립할 사항들을 상론하여 결정한 후 숭선진 당위의 초대에 의하여 홍기하에서 천렵놀이를 하게 되였다. 숭선진 기관간부들이 그물로 물고기를 잡아 올리면 준비해 놓은 솥에 강물을 퍼넣고 약념을 맞추어 끓인다. 확실히 별미였다. 물고기탕에 배갈 몇잔을 굽내니 나는 벌써 얼굴이 홍당무우처럼 붉어졌다. 김철서기는 금방 훈춘에서 사 들여온 고무배 두척에 바람을 불구어 넣고 김진장, 무장부의 류부장, 홍기하촌의 반(潘)촌장 등 4명이 배 한척에 각기 2명씩 않기로 하고 숭선진의 관광산업으로 기획하고 있는 홍기하표류(漂流)를 위하여 처녀항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나의 고집스런 청구에 못이겨 김진장이 하는 수 없이 양보하여 물러 앉고 나와 반촌장이 배 한척을 타기로 하고 김철서기와 류부장이 다른 한척의 배를 타기로 결정되였다. 호근선생도 류부장을 대신하여 김철서기와 한배에 표류하려는 청구를 헤염을 모른다는 단 한가지 이유로 내가 극력 말려 그만두었다.

며칠동안 연속 비가 내렸었지만 홍기하수면은 그래도 평온하기가 거울처럼 매끄러웠고 조용하였다. 원래는 대략 30분 쯤이면 끝낼줄 알았던 표류가 왠지 시간이 퍼그나 걸려도 종점에 도착하지 않았다. 홍기하의 량안은 절벽과 괴암,수림으로 이어져 길과 인적이라곤 전혀 찾아 볼수 없는 원시 형태 그대로였다. 양안의 경치에 홀짝 매료된 나는 <<연변에도 이처럼 아름답고 원시적인 경관이 있었구나>> 하는 감탄을 연속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수면이 좁아지더니 물결이 급해지고 수면우에 우뚝솟은 거대한 바위들이 울바자처럼 물을 가로막아 강물이 2메터가량 되는 낙차(落差)를 이루어 배가 그만 번져지고 말았다. 반촌장은 한사코 나를 보고 배전을 손에 꼭 붇잡으라고 했으나 어쩐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급살같은 물결에 나는 물속으로 쑥 들어 갔다가 또 불쑥 수면으로 솟아 오르기를 거듭하면서 물결에 따라 어느듯 200여메터를 떠 내려가고 있었다. 물속으로 내려가도 밑 바닥이 발에 닿지 않는 깊이에 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평생 처음 절실하게 느껴보았다. 가령 물에 익사(溺死)하지 않는데도 이렇게 급한 물결속에서 떠내려 가다나면 혹시 바위나 암초에 부딛쳐 까무러치면 끝장이였다. 다행히 나는 어릴때 그래도 개발헤염같은 것이라도 괜찮게 하는 편이여서 불쑥 솟아오르는 순간을 리용하여 50미터 가량 되는 하류의 거대한 바위돌을 목표로하고 파도를 가르며 접근, 겨우 개구리처럼 네발걸음으로 돌우에 기여올라 가서 넙적 엎드린채 가쁜 숨을 몰아쉬였다. 얼마 안되여 우리 뒤에서 표류하던 김철서기와 류부장도 나와 반촌장처럼 고무배와 함께 급한 물속으로 쑥 들어 갔다가 또 불쑥 수면으로 솟아오기를 반복하면서 급한 물결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이런 정경을 두 눈으로 펀히 보면서도 도무지 구조할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때 당시의 상황을 놓고 보면 구조라기보다 오히려 나의 형편도 굉장히 위급해 나 외에는 누구도 돌볼 수 없는 그런 막무가내하고 어쩔 수 없는경황이었다. 한참 지나니 체력이 조금 회복되고 정신도 조금 돌아선 것 같았다. 두리번 두리번 사위를 살펴 보니 반촌장은 내가 오른 바위에서 약 50메터 가량 되는 하류의 기슭에 요행 접근되여 헐떡거리고 있고 김철서기와 류부장도 200미터도 훨씬 더되는 하류에 떠내려가서 나무걸기에 걸려 역시 헐떡거리고 있었다. 반촌장은 그래도 고무배를 그냥 손에 잡고 있어 우리는 다시 배를 타고 조심스럽게 홍기하와 두만강이 합류지 두물머리로 내려왔고 김철서기와 류부장은 아예 표류를 포기하고 험준한 산을 넘어 천신만고 겪으며 간신히 홍기하의 두만강입구로 돌아왔다.
상상밖에 이번 13km 가량 되는 거리의 표류는 3시간도 훨씬 넘어 걸렸다. <<내가 이번 표류에 참기했더라면 영낙없이 죽었을겁니다,>> 라며 두만강, 홍기하의 두물머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호근선생은 알몸에 혼신이 상처투성이고 선혈이 랑자한 나를 붙잡고 혀를 차며 우리가 겪었던 아슬아슬한 모험담을 듣고 혀를 내둘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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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근선생의 <<단천체>> 서예는 그가 장기간 전통적인 서예예술을 탐구하고 개발한 자랑할만한 성과이였다. 호근선생이 한국과 북한, 그리고 중국 국내에서 여러차례 서예전을 개최하였고, 중국의 산동성 위방이라는 고장에는 <<김호근서예원>>까지 갖추어져 있다. 그로하여 그는 중국 내 저명한 서예가로 거듭났었다.
호근선생은 특이한 단천체로 나에게 한글로 크게 <<망원>>(望遠) 이라는 글을 써 주었는데 무독유우(无獨有偶)라는 낱말과 같이 나의 대학 시절의 스승이신 저명한 서예가 왕문빈(王文彬)선생님이 내게 주신 휘호 <<등고망원>>(登高望遠)과 같은 의미를 내포한 서예작품이 되어 나는 지금도 소중히 소장하고 있다. 호근선생은 나도 서예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외출했을 때마다 나에게 벼루와 붓 같은 것들을 선물로 사주었다. 한 번은 호근선생이 나에게 옥돌로 특이하게 <<일촌재>>(一寸齋)라고새겨진 도장 한매를 주면서 꼭 서예를 사랑하고 견지하라고 고무하여 주었다. 일촌재, 한촌어치만한 조그만한 서재란 뜻이다. 문인들의 자겸(自謙)정신이 슴베인 어구다. 중국에는 옛적부터 소위 <<촌유소장, 측유소단>> (寸有所長,尺有所短) 이라는 성구가 있는데 호근선생은 바로 그 철리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나에게 어떤 기탁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그후부터 나는 나의 서재를 <<일촌재>>로 명명하고 서예나 문장이나 락관(落款)에는 꼭 <<일촌재>> 도장을 찍거나 표기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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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민족문학원의 여러 차례 문학강습반 교학 조직, 여러가지 문학상의 평심조직, <<20세기 중국조선족문학작품선>>과 <<중국조선족문학작품정수>>의 편집출판, 숭선진 시만촌의 백두산 창작기지 건설, 작가협회의 일상 공작, 작가협회의 모든 일들에 호근선생의 사심 없는 노고가 깃들어 있다.

내가 한글에 그리 능숙하지 못하다는 점을 감안하여 심지어 나의 서투른 한글문장도 거진 번번이 혼자 심열하고 교정하여야 시름 놓는 호근선생, 그이가 인생과 사업에 바친 노력과 끈질긴 추구, 그리고 중국조선족문학사업에 이뤄낸 업적은 역사가 말없이 증명하고 있다. 호근선생의 근면하고 소박한 품질과 평화로운 심태, 선량하고 착실한 심성과 평온한 문화적 심기는 요즘 점점 척박해지는 문화풍토와 점점 고갈되는 인문정신과 점점 야박해지는 인적관계와 점점 부화(浮華)한 분위기에 반해 얼마나 소중한것인가 하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두말할것 없이 호근선생은 자신의 참된 인생으로 우리 문단과 문인들에게 문화인의 인간성이 고스란이 슴베인 형상을 남김없이 보여 주고 있다.

호근선생의 59년이라는 인생은, 특이하고 유표한 단천체서예마냥 줄줄이 유창하고 미끈하게 써 내려가다가 그렇게 돌연스럽게 종지부를 찍었다. 호근선생의 59년이라는 인생의 드라마는 이렇게 크라이막스도 별로 없이 막을 내렸다.

1980년대에 암이라는 오진을 받고 정신적으로 한번 죽고 다시 살아난 호근선생, 별세하기 직전에도 단천체로 백지에 <<중병에 너무 고통// 눈/ 인후/ 간/ 손 팔/ 다리 발// 신심 용기 의지 분투 승리!>> 라는 신심이 가득한 글구들을 남긴 호근선생, 나는 호근선생의 의미심장한 미소와 그의 퀴즈같은 미서터리들을 머리에 떠올리며 합장(合掌)하고 다시금 그의 명복을 빈다.

2007년 7월 2일--16일
신원아파트 일촌재에서

김학천: 시인, 전 연변작가협회주석, 현 연변사회과학계련합회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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