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월급

일본에서 시간은 곧 돈이다.

아침에 피로한 몸을 일으키며 눈곱을 뜯을 때 조금이라도 단 반시간만이라도 아니, 십분이라도 더 자고싶은 그 심정… 단잠을 자는 그때의 그 짧은 순간은  돈 주고도 살수 없는 꿀같은 달콤함의 극치이다.

나도 출근길에서 허비하는 시간이 아까워 그 시간에 잠이라도 좀 더 잘가싶어 생뚱같이 교통비(실제 교통비도 만엔 받았지만 차비도 안되였음) 타령을 주절주절해댔다.

설이하고 가까운 곳으로 집을 옮겼으면 하고 슬쩍 옆구리쳤더니 설이도 언녕부터 생각중이라며 인차 동의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내가 일하는 정체원부근의 부동산을 몇개 돌면서 끝내 둘이 살기엔 맞춤한, 작고 아담한 집으로 이사하게 되였다. 역에서도 아주 가까웠다.

원 집은 농촌이여서 조용했지만 새집은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자주 지나다니는 구급차의 사이렌소리에 꿀같은 아침잠 박살날 때도 가끔 있었지만 추운 아파트보다는 새집이  많이 따스해 좋았고 그것보다도 한국식품집이 바로 문앞이여서 고추장이랑 신라면이랑 사기가 쉬웠고 내가 좋아하는 청량고추찜도 자주 먹을수 있다는게 좋았다.

그것보다도 더 좋은건 퇴근하면 설이가 갖춰준, 수저까지 받쳐놓은 따스한 밥상에 함께 마주앉는다는것이였다. 또 하나 진짜 기쁜건 일하는 곳과 가까워서 설이도 종종 나 보러 오니 설이얼굴 자주 볼수 있다는게 제일로 좋았다.

내가 일한지도 어느덧 40일이 되여 나의 첫달 월급(한달 일한 후 열흘씩 미뤄줬음) 탈 날이 되였다, 때마침 2005년 성탄절이 바로 내 월급 타는 날이였다. 성탄절, 그날은 중국에선 별로지만 일본에선 큰 명절인거 같았다. 첫달 월급을 계산해보니 19만8000엔이였다. 한시간에 3000엔짜리 맛사지 하면 나의 월급은 절반이다. 비록 얼마 안되지만 일본땅에서 내 땀으로 번 첫 월급이라 값지게 쓰고싶었다.

어떻게 할까? 이궁리 저궁리 생각끝에 가까운 백화점으로 설이 손목쥐고 갔다. 욕심난거 고르라고 하니 설이는 자꾸 도리머리질만 하였다. 여직껏 나한테 많은 사랑과 정성을 몰부어온 설이한테 뭔가 해주고싶어 자꾸 맘에 드는거 골라쥐라고 간청을 해서야 설이는 4만 6000엔하는 커플 백금가락지를 달랑 쥐였다. 나는 백화점에서 나의 이름 한글자를 설이 가락지에, 설이이름의 설자를 나의 가락지에, 년월일까지 꼭 새겨달라 하며 샀다. 가락지도 어쩌면 우릴 위해 만들어 놓은듯 딱 맞았다. 설이도 기뻐서 방글방글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받기만 했던 설이한테서 작은 성의로 큰 점수 딴거 같아 내 가슴도 뿌듯했다.

2006년 설이 되였다. 내가 일하는 가게도 마침 이틀동안 휴식이란다. 나와 설이는 집근처 이도요까도에 가서 이런저런 설 음식을 장만하여 일본땅에서 가까이 보내던 사람들을 불렀다. 설이 친구 한명 ,언니 한명 그리고 날 형이라 따르는 연길남자까지 다섯이서 2006년도 새해 설을 우리 집에서 쇠게 되였다.

분망히 돌아칠 때는 고향 생각할 시간조차 별로 없었지만 설이라 중국에 있는 혈육들과 친구들이 그리웠다. 모두다 집과 친척집에다 여기저기 전화해댄다. 전화하는 얼굴은 웃지만 눈가엔 이슬이 맺혔다. 두고온 그리움을 술잔에 담아 진로 세병을 다섯이서 굽을 냈더니 술 못하는 난 그자리로 꿈나라행을 하였다.

단 골 손 님

나한텐 아베라는 일본로인 한분이 단골손님으로 자주 왔다. 나이가 70넘는 분인데 나이보다 건강해보이고 아들이 중국 절강 어디서 무슨 사업을 한단다. 그 로인은 일주일에 한번씩 꼭꼭 오는데 올 때마다 마사지 끝나고 손님이 없을 땐 나하고 잠간씩 얘기를 나누고 간다. 난 안되는 일어로 꺽꺽거리며 그 로인과 손짓 발질로 의사소통을 해간다. 그덕에 나의 일본말이 조금 느는것 같았다.

그 로인이 처음 오던 날은 눈이 내렸다.  나무에도 지붕에도 두툼히 눈이 쌓여갔다. 나는 내가 버는 돈도 언제면 저 눈처럼 두툼해질가 하고 혼자 마사지가게에 앉아 돈낟가리를 쌓고있었다. 그날은 내가 일본땅 밟은지  103일이 되는 날이였다. 밖에서 내리는 함박눈을 바라보면서 마음은 고향을 기웃거리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똑똑 들렸다. 반사적으로 일어나서 《이랏쌰이마세》하면서 보니 구부정한 일본령감 한분이 들어오신다. 어디가 아픈가고 물어보니 허리가 불편하시다나. 그래서 마사지 침대에 거꾸로 엎디게 하고 허리안마를 시작했다.

마사지 배운지 몇달 안되였을 때라 손가락이 자꾸 아파서 팔굽으로 허리를 누르고 문지르고 하는데 문뜩 어디선가 푸욱~하는 소리가 나지막히 들려왔다. 무슨 소릴가? 먼데서는 나는 소리가 아닌데 분명히 가까운 곳에서 났는데 다시한번 열심히 젖먹던 힘까지는 아니고 아침에 돼지고기 먹은 힘으로 내리누르는데 또 들려오는 푸웅소리...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아니 글쎄, 이 일본령감의 골짜기에서 울려나오는 가죽피리소리 아닌가 . 령감이 연신 《스미마셍》라고 한다. 요전에는 발에 때가 다닥다닥하고 발버짐이 있는지 껍질까지 군데군데 벗겨진 분이 오셔서 시큼털털한 냄새로 내 코를 자극하더니 이번엔 웬 일본령감의 이산화탄소냄새를 맡아야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났다. 젠장, 속으로 투털거리는데 천만다행으로 가스냄새가 별로 더 나지 않았다.

마늘 먹은 사람과 몇메터 거리에 있어도 마늘냄새를 묘하게 맡아내는 내 코가 오늘은 웬 일일가? 아, 그제야 내가 요새 감기에 걸려 코가 막혀서 냄새를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감기 걸리기 잘 했구나. 요럴 땐 참 다행이요 요행이였다. 그래도 허리마사지를 잘하면 손님이 가스를 내보낸다던 나의 안마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나도 몇달 마사지합네 했더니 이젠 손에 올랐는가 .무슨 싸개 몇년이면 바자굽을 넘는다더니. 제멋에 좋아서 큭큭 웃음이 나왔다.

이번엔 목을 할 차례였다. 손가락에 돼지고기국 먹은 힘으로 냅다 모가지를 문질렀다. 한창 열성스레 하고있는데 아차, 이번엔 내기 실수를 하였다. 감기에 걸려서 코안에서 가스냄새를 막아주던 고맙던 코물이 뚤렁 령감님의 목우에 떨어질줄이야. 아참! 이걸 어쩌나 이 령감이 손가락으로 만져보면 인츰 알텐데. 두근닷근 속에서 쿵쿵쿵 소리가 났고 안절부절 못하였다.  그런중에 범에게 물려도 정신만 차리라던 우리 아버지 말씀이 생각났다. 날쌔게 티슈로 코물을 닦아냈다. 미끌미글한 내 코물을, (이 령감 먼저 닦아야지 이 령감이 먼저 닦아내는 날이면 끝장이 아닌가.) 그렇게 쭉- 60분 지나서 마사지는 끝났다.

그런데 재미있는건 내가 기본료금 받고 서툰 일본말로 <오쯔가레사마데시다(힘드셨지요)>하고 떠드벅거리는데 벅거리는데 령감님은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오늘같은 추운날에도 땀까지 뚝뚝 떨구면서...이 돈은 수고비로 받으십시요》 라고 하시면서 고맙게도 1000엔짜리를 한장 더 주는것이였다.

공포의 글쪽지

나의 단골중에 고지마라는 50대 일본인도 있었다. 허리띠부터 돈가방 들가방까지 전부 루비이똥, 옷도 바바리. 그는 무슨 회사 사장이라고 하는데 돈이 아주 많은것 같았다. 내가 중국에 사는 조선족인줄을 알고 마사지 끝나면 《좋아요》 하면서 내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한국크라브에서 배운 말이란다.

그렇게 내가 일한지도 두달남짓이 되던 어느날 ,내가 출근하러 가게로 들어가다가 문뜩 문옆에 뭔가 깨알처럼 적힌 종이를 발견했다. 일어글자는 범벅인 내가 아무리 뜯어봐도 알수 없어 사장한테 보였더니 사장님의 눈은 데꾼해졌고 얼굴이 세멘트바닥처럼 굳어졌다.

일어 잘 하는 연길애가 그 쪽지 보고 내용을 나에게 알려주는것이였다. 내용인즉 자기는 일본사람인데  이 가게에서 야밤에 에스테하는거 자기가 아니깐 그런짓 하지 말라고 이제 더하면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등등 무시무시한 내용이였다. 그 글을 보고 불법체류자인 연길애와 나는 머리칼이 우시시 일어서는듯하였다.

내가 일하는 정체원은 우리가 퇴근한 다음 12시부터 아침까지 사천 한족들한테 세를 줬다. 그 한족녀자들이 12시후부터 그곳에서 에스테를 한다는것이였다. 지금도 난 에스테가 뭘 하는 곳인지 확실히는 모른다. 그냥 지저분한 곳이라는것만 알뿐, 난 이전부터 세를 준다는건 알고있었지만 그것이 경찰이 들이칠 정도로 불법적인줄은 몰랐었다.

저녁에 설이하고 쪽지사연을 말하니 설이는 그럼 그 가게가 오래 못간다는것였다. 그날부터 일하러가기 정말 싫어졌다. 일하러 가면 마치 시한폭탄을 곁에 놓고고있는것 같았다. 나와 연길애는 혹시 경찰이라도 들이닥치면 잡히지 않으려고 뒤의 창문에 가서 도망치는 시늉도 해보고 마사지침대밑에 날렵하게 들어가 숨는 연습도 해보았다.

나는 가게에 들어가기전에 늘 먼저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도끼눈을 하고 살폈고 때론 지나가는 사람도 경찰로 착각했다. 혹시 가게밑에서 서성거리는 사람이 보여도 머리칼이 쭈볏이 일어섰다. 나는 더 이상 그 가게에 가슴이 두근닷근해 있을수 없었다.

나와 같은 심정인 연길남자애도 사장하고 그만두겠다고 말하자 사장은 그를 당장 다른 정체원에 보냈다. 나도 그냥 속수무책이 되여 언제 끊어져 내려앉을지 모르는 썩어가는 대들보밑에서 그냥 살 수가 없었다.

길림신문/ 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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