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화의 역사이야기>

2) 이주민

① 북간도지방

청나라초기 훈춘을 제외한 두만강 북쪽 지역에는 인가가 매우 적었다. 1714년에 훈춘 협령이 설치되었을 뿐 기타 기구는 전혀 없었다. 가히리하(현 가야하), 부르하 통하와 해란강은 진주를 캐는 ‘포주하’로 되었고 우루훈산(훈춘 흑정자일대), 아부다리(훈춘 동구일대)와 호남경(즉 후란산, 훈춘 화룡구)은 인삼을 캐는 ‘인삼장’으로 되었다. 1848년 청나라는 금지구의 금령을 엄격히 하기 위해 해마다 변경을 순찰 하였으며 월경자의 가옥이나 밭은 모조리 훼멸 당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과의 무역은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조선 회령에서 한 해에 한 번씩, 경원에서는 두 해에 한 번씩 거행되었다. 만주인은 짐승가죽, 천, 개 등으로 조선의 소, 말, 종이, 철, 입쌀을 바꾸었다. 만주인이 조선에 건너갈 뿐 조선인은 만주로 건너오지 못하는 무역형식으로 진행되다가 광서연초에 중지되었다. 1858년 중-러‘애훈조약’과 1860년 중-러‘베이징조약’의 체결로 인하여 훈춘은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으며 중요한 도시(城镇)로 부상하였다. 청나라와 러시아의 월경죄에 대한 양국의 단속이 느슨해졌을 때 월경자들은 강 이북 근처에서의 경작에 그치지 않고 골짜기를 따라 더 깊숙이 들어와서 ‘춘경추귀’식으로 농사를 하였다. 청나라가 월경자를 묵인하자 조선에서도 월경죄에 대한 추궁을 삼가 하였다.

1860년부터 조선 북부지방에는 해마다 재해가 들었다. 1860년 8월 북부지역은 수재로 인하여 부녕(富宁) 등 10개 읍이 모두 재해를 입어 민가 1225호가 물에 잠기고 많은 사람이 사망했다. 1861년, 1863년, 1866년에 수재가 일어났고 1869년, 1870년에는 또 심한 한재가 들었다. 1866년 12월, 조선 경원부 아산진의 70여 명 조선기민이 훈춘에 난입했고, 이듬해 3월에는 훈춘과 소련의 접경지대에 천여 명이 집을 짓고 살았다. 1869년(기사년)의 재해는 사상 찾아보기 힘든 최고의 자연재해였다. 당시의 정형은 아내나 딸을 양식 한 두 되와 바꿔 먹은 일이 흔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부녀와 한족 동거자가 적지 않게 되었다. 1869년 10월, 경원부 아오지 군민 1만여 호가 월경하였다. 『이조실록』 고종실록 1권 만주로 밀려드는 이민의 참상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상황 이었다. 『길림통지』 

유연산의 『만주아리랑』에서는 훈춘시 경신진 옥천동에서 사는 김광익(1995년 당시 75세)의 이주원인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김광익 옹은 경신진 권하 태생이고 조부는 함경북도 경원군 유덕면에서 살다가 이주해 왔다고 한다.

기사년(1870)재해를 당하고 따나왔다니 벌써 130년이 되지우. 옹근 10년동안 가물과 장마가 번갈아 덮쳤다고 하데유. 기사년 해동머리부터 가물이 시작했는데 여름이 다 가도록 비 한 방울 오지 않았다니 전대미문의 왕가물이라 하겠수다. 풍년에도 굶어 죽었다는 세월에 어찌 살아갈 수 있었겠수? 산열매와 풀뿌리로 주린 장차를 달랬는데 나중에 나무껍질마저 거덜이 났지유. 영양부족으로 사람들은 얼굴이 누렇게 되었고 몸은 퉁퉁 붓고 굶어 죽지 않으면 풀독에 죽었다우다. 그래서 조부님께서 일가식솔을 거느리고 월강을 했어유. 월강죄 목을 친다고 해도 앉아 죽으나 서서 죽으나 매한가지라는 배짱이었지유. 조상 산소도 사람이 살아야 제사를 받들 게 아니냐는 배짱이었다고 생각되우다.” 유연산, 『만주아리랑』。돌베개, pp26

대량의 월강이주가 기정사실이 된 정황에서 조선 회령부사 홍남주(洪南周)는 개간을 허락한다는 고시를 내렸다. 이리하여 순식간에 백여 정보의 황무지가 농토로 개간되었다. 이듬해 봄 인근 군에서도 수많은 농민이 월강개간에 착수하니 길이 500리, 너비 40-50리의 두만강 북안지방이 새로 개간되었다. 이 시기에는 세금을 받아가는 자도 없었고 세금을 내는 자도 없었다. 행정조직은 자연히 자치조직으로 형성되었다.

두만강 안에는 사(社), 압록강 안에는 면(面)이 조직되었다. 회녕 대안지방에 9개 사, 즉 백운사, 백학사, 백옥사, 대양사, 대월사, 대천사, 무관사, 무덕사, 무공사가 있고, 종성 대안지방에 12개 사 즉 월랑사, 제하사, 제청사, 광덕사, 광종사, 광**사, 광풍사, 광화사, 개문사, 개운사, 개태사, 개화사가 있었다. 그 중 개운사에 420호, 개태사에 576호, 개화사에 342호가 있었다. 사에는 향약이 있었고 향(사)장과 서기가 있었으며 그 하급에 갑(甲)이 있고 갑장이 있어 각 촌(村), 툰(屯)을 관할하였다. 또한 이 시기 짜리러시아는 우수리강 이동지역을 강점하고 해삼위를 기지로 동북과 조선에 침략의 야심을 펼쳤다.

1861년 중러‘흥개호계약’(兴凯湖界约)의 체결이 간도에 대한 침략의 구실로 되었다. 이 계약에 따라 흥개호의 대부분과 수분하 하류의 평원을 러시아에 떼어주었으며 ‘베이징조약’을 어기어 도문강 상류 46화리 지점에 ‘토(土)’자로 경계비를 세웠는바 이에 의해 도문강 입구는 완전히 짜리러시아에 강점당하였다. 1862년, 짜리러시아는 장령자에까지 간섭하여 삼림을 난발하고 가옥을 건축하였으며 1875-1882년에 선후하여 훈춘 하남안, 석두령 일대와 흑정자(현 훈춘 경신향)에 침입했었다.

간도에 대한 청나라의 주요한 정책은 러시아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였다. 1880년 간도에 정변군(靖边军) 7000여 명을 건립하여 연길, 훈춘, 홍기하, 흑정자 등 지역에 주둔시켰으며 다른 면에서는 봉금령의 해제가 비준되어 길림 남부지역이 개방되었고 이민 실변의 구체적 조치가 실행되었다. 1881년 지부(知府) 이금용(李金镛)이 훈춘 초간사업을 맡고 황무지를 답사하면서 가야하 일대를 지났고 처음으로 조선이주민을 발견하였다. 이들에 대해 “조선 함경도 자사(刺史)는 토지 소유증을 발급하고 등록부에 기입하여” 송교인,『간도문제』 관리하였다. 길림장군 밍안과 변무독판 우따아찡이 이 정황을 조정에 보고하여 비준을 얻은 후, 1882년 두만강북안일대의 조선개간민들을 중국호적으로 등록하여 돈화와 훈춘 두 곳에서 각기 관할하게 하였다. 훈춘, 오도구, 흑정자, 남강에 초간분국을 세우는 동시에 조선개간민을 안부하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간황사(垦荒社)를 설립하였다. 훈춘에  춘화(和), 춘화(华), 춘명, 춘융, 춘양, 춘방 등 6개 사를 두고 동오도구에 춘인, 춘의, 춘례, 춘신, 춘지 등 5개 사를 두었으며, 흑정자에 돈인, 상의, 회사, 흥렴, 숭증, 수성 등 6개 사를 두었다.

남강(현 연길)에는 지인, 상의, 숭례, 용지, 수신, 명신 등 6개 사를 두었다. 한편 조선 정부에서는 조선이주민을 조선에 되돌려 보낼 것을 청나라에 요구했고 청나라는 1년 내에 조선이주민을 모두 데려가라고 하였다. 1883년에는 경략사 어윤중(鱼允中)을 두만강 이북에 파견하여 이주민 귀환을 재촉하였다. 하지만 일부분은 땅에 정이 들어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1890년 흑정자 관할하의 6개 사에 조선개간민 853호가 있었으며 일구어 놓은 밭은 2541쌍이었다. 1893년 훈춘 동오도구 관할하의 5개 사에 조선개간민 501호, 개간면적은 2417쌍이며 훈춘과 남강 관할내의 10개 사에 조선개간민 529호, 개간면적은 4407쌍이었다. 『东三省政略』 边务 四(동삼성정략 변무 사)

청나라가 1883년에 화룡욕(현 용정시 지신향)에 통상국을 세울 때까지만 해도 그 목적은 세금을 더 받아들이는 것보다 조선개간민을 속박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이 일대에 청나라의 관리가 없었기에 통상국(분국)은 백성을 다스리는 책임까지 겸하고 있었다. 하지만 1894년에 이르러서는 간도에 편갑승과(编甲升科) 제도를 건립함으로서 최초의 행정통치수단을 마련하였다. 청나라는 무간총국(抚垦总局) 아래에 4대 보(堡)를 건립하고, 보 아래에 39개 분사(分社)를 두었다. 즉 흑정자에 진원보(镇远堡)를 세우고 8개 사를 두어 조선 경흥부와 마주하였고, 광제욕에 녕원보(宁远堡)를 세우고 13개 사를 두어 조선의 종성부와 마주하였으며, 장목더기(현 화룡 남평)에 안원보(安远堡)를 세우고 7개 사를 두어 조선의 무산부와 마주하였다. 또 계사처(현 용정 삼합진)에 수원보(绥远堡)를 세우고 12개 사를 두어 조선의 회녕부와 마주하였다. 한편 그 아래에는 124갑(甲)과 415패(牌)를 설치하여 조선개간민을 그 안에 편입시켰다. 당시 조선개간민의 호수는 4308호, 인구는 2만 899명이었으며 개간지는 1만 5400여쌍이었다.

『东三省政略』 边务 四(동삼성정략 변무 사) 4대 보는 간도 조선개간민 최초의 부락분포이다. 조선인 개간민은 처음엔 주로 화룡욕 관할내에 있었다. 후에는 점산호의 황무지를 일구어 소작을 지어 조선개간민들의 정착지는 한족 개간민구역(후 연길청 관할구역)으로 나아갔다. 일부 한족들이 부분적으로 황무지를 조선개간민에게 팔았다. 그리하여 조선개간민은 토지소유권을 얻게 되었고, 해란강과 부르하통하, 가야하를 넘어 그 이북과 이서 지방에도 수많은 촌락을 건립하였다. 1897년 북간도 조선이주민은 8700호, 3만 7000명에 달했다. 『朝鲜人移民关系资料』 产业部 昭和 十二年 十二月(조선인이민관계자료, 산업부, 소화 십이년 십이월)

 


조선이민이 개간한 오랑캐령 서북쪽에 위치한 화룡욕의 논과 밭
북간도 지방의 최초 개간자의 이름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남영촌(南营村)은 리귀인(李贵仁),용정촌은 장인석(张仁硕), 박윤언(朴允彦),산불동(山佛洞)은 리귀손(李贵孙), 토성동(土城洞)은 박**(朴**), 왕세영(王世英), 학동(鹤洞)은 오창렬(吴昌烈), 강억석(姜亿石), 곽영지(郭永知), 금치오(金致五), 약수동은 금군약(金君若), 리춘틈(李春闯), 유형촌(柳亨村)은 최우산(崔禹山), 허내성(虚乃城)은 문성옥(文成玉), 장성방(张成芳), 이도구(二道沟)는 정기우(郑基禹), 삼도구(三道沟)는 최단천(崔端川), 정기선(廷基先), 금환갑(金还甲),갑홍렬(甲弘烈), 사향촌(四乡村)은 최문석(崔文石)이었다. 『间岛事情』, 东拓发行(간도사정, 동척발행)

1900년, 의화단운동이 폭발하자 러시아는 동청(东清)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 하에 해삼위부터 수천 명의 군대를 만주 내륙에 급파하여 7월에 훈춘을 함락하고 이어 국자가(연길) 부근의 애단성(艾丹城)을 점령하였다. 한편 간도의 청나라 관리와 군경들은 길림으로 도망하였고 조선은 간도 이주민의 보호를 위해 1902년 이범윤(李范允)을 간도관리사로 임명하게 되었다. 청나라는 이러한 국세에 비추어 1902년에 연길청을 세웠으며 이듬해에는 4개 영의 병력을 간도 경내에 주둔시켜 이 지방의 통치를 강화하였다. 이에 간도는 중, 러, 조 3국이 공동 관리하는 행정구역이 되었다.

1903년에는 3국 공동 관리의 국면이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청나라의 세력이 강해짐에 따라 이범윤이 간도에서 물러났고 러일전쟁 끝에 러시아가 밀려나 간도는 일본의 통치권에 들어갔다. 이 시기 많은 조선개간민이 조선북부에서 간도로 난입했다. 1904년, 간도 조선개간민은 5만여 명, 1906년에는 8만 2900여 명, 1909년에는 3만 4133호, 18만 4837명으로 폭증하였다. 『延边地区历史』 档案 史料选编 之一(연변지구력사 당안 사료선편 지일)  조선개간민 거주지는 1894년 후에는 두만강 북쪽 기슭에 국한되었던 것이 1910년경에는 연길청 서부 장백산 동쪽의 외육도구 등 지대로부터 동으로는 훈춘하유역, 북으로는 동불사, 하마탕, 수분전자 등의 지역에 이르기까지 연길청 4000평방리의 지역에 전부 퍼졌다. 조선개간민이 두만강 이북에 이주한 시간은 압록강 서쪽지역 보다 매우 늦으나 북간도 개간민에 대한 특수한 추진정책과 특별 개간구의 설치로 인하여 매우 빠른 속도로 또 하나의 새로운 조선개간민 집거구 중심을 형성하였다. 『만주사정』27. 1908년 말 간도조선인 분포 참조. 한편 이 시기에 반일투사들도 간도에 찾아들었다. 1907년, 이상설이 헤이그 밀사로 간도에서 출발하였으며 안중근(安重根) 의사도 이때 간도에 왔었다.
   
* 간도 조선개간민의 주요한 정착지, 개간지역
가. 훈춘 : 훈춘은 금나라 때부터 문헌에 나타나고 있다. 여진어의 ‘근변(近边)’, ‘변추(边陬)’의 뜻으로 음역한 것이다. 또 흑룡강성 만족어연구소 목엽준(穆晔骏)교수는 “훈춘은 만족어로 ‘꼬리’란 뜻이다. 하류의 개념을 표시 할 때는 강차(江岔), 하차자(河岔子)라 번역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일찍이 1840년대 훈춘 경내에 조선개간민이 나타났다. 지금 경신향에 있는 곽모모의 할아버지는 1850년에 온 식솔을 이끌고 조선 명천에서 도문강을 건너와 권하에 정착하였으며 1865년 그의 부친은 16살 되는 해에 흑정자에 가서 공부하였다. 고영일,『중국조선인 역사연구 참고자료집』,pp118 조선에 기사년 흉재가 들면서 많은 조선이주민이 생기었고 도문강 연안의 경신, 삼가자, 양수 등의 지역이 조선인 정착의 최초 지역이었으며 경신, 회룡봉, 삼가자, 사타자, 양수하동 등 지역에 조선인 마을이 형성되었다.

1884년 통계에 따르면 흑정자 일대에 조선개간민 110여 호가 있었고 동시기 훈춘, 유수하, 금장구, 타자구, 서북구 등 지역에도 400여 호 조선인이 있었다. 1886년에는 조선개간민 2350호, 1만 2490명이었다. 『훈춘 조선인의 천입과 역사작용』 1902년, 러시아가 훈춘을 강점했을 때 조선과 러시아에서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훈춘으로 난입했다. 하달문, 삼가자, 마천자 등 지방의 조선인은 이 시기에 많이 들어왔다. 1907년 3월의 자료에 따르면 당시 훈춘경내의 조선개간민 중 10분의 2는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난입하였던 것이다. 1910년 선후에는 많은 조선인 애국지사와 개간민들이 훈춘에 난입하였다. 훈춘하 유역의 태평구,왕팔발자,토문자,사도구,연통랍자,반사구(太平沟,王八脖子,土门子,四道沟,烟筒拉子,盘四沟)및 밀강상류의 하와자,중강자,대황구(下洼子,中岗子,大荒沟) 등 마을은 모두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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