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영 소설가>

해 저문 거리에 귀먹은 짐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 저 바람 부는 거리로 스쳐간 시간들은 1년에 불과한 듯싶지만, 5년 혹은 10년 세월이 게워낸 울적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내 누추한 삶의 중력에는 지난 몇 년 동안 덧칠된 회한의 무게가 또다시 커다랗게 자리잡았다. 나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누구와 함께 살아온 것일까. 일흔 살이 지척인 지금, 일생 동안 어깨동무하며 흉허물없이 지낼 수 있는 진정한 길벗은 정녕 있었던 것일까. 생존을 위해 더 이상 발버둥치지 않고 간혹은 휴식의 시간을 가져도 좋은 것일까. 그런 진부한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지만, 신통한 해답은 역시 찾아낼 수 없다. 애석하게도 지나간 시간들 모두가 겸연쩍었고, 주눅 들고, 얼빠지고, 구차스러움의 연속이었다는 생각이 전부다.

뿐만 아니라, 제 발로 걸어갔든 남의 손에 등 떠밀려 갔든 참여정부가 출발하는 시점에서 옷깃을 스쳤다 할 정도의 보잘것없는 역할을 감당했었던 나로선 감회가 남다른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낸다. 그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가만히 두어도 자라나는 실연의 후유증처럼, 불안한 가운데서도 은근히 우리나라가 잘되기를 기다려 왔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이 자꾸만 연장되면서, 급기야는 그것이 헛되기를 바라는 역설적인 기다림조차도 있었다. 산골 마을에 오래 갇혀 살다 보면 지리적 감각이 퇴화되어 버리듯, 모든 일에 이념이나 민족을 앞세우는 세상을 10년 가까이 살다 보니, 나 또한 덩달아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신세가 되었다.

지난 것은 모두 잘못되었다는 왜곡된 의식에서 출발한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언행과 행보를 당연한 일상사로 보아 넘기게 되었고, 뒤틀린 심성에서 배설되는 가시 돋친 막말에도 어느덧 익숙해졌다. 절제를 모르는 언사로 말미암아 숱한 진정성들이 제 가슴에 비수를 들이대듯 그 자리에서 상처 나고 훼손당하는 것을 목격하면서도 키 큰 사람의 어깨 뒤에 몸을 감추고 쑥덕거려 왔었다. 관념과 현실의 괴리에서 비롯된 지나친 이상주의와 이념에 치중함으로써 야기될 병리현상을 예측할 수 없었거나 얕잡아 본 오만이 화근이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도 불찰이었다.

사람은 본래 네 발 가진 동물이었지만,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것은 두 개뿐이다. 그것을 두고 두 앞발이 퇴화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두 발이 진화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한쪽 날개로만 날아가는 새는 없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어느 豈訶?옳다는 독선과 고집만으로도 휘어지고 꼬여 있는 세상사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오만이 오늘과 같이 통합의 길이 아득하게 멀어진 사회현상을 낳았을 법하다. 누구라도 유추해 낼 수 있을 만큼 밋밋하게 얼버무려선 안되겠다는 압박감 때문에 수사의 치레만 있고 명분도 없는 개혁의 시간표를 내놓고 밀어붙인 그 장렬함이 감동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빈축을 사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나간 것 모두가 비뚤어지고 뒤틀린 것은 아니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는 말이 있듯이, 내일에 도달해 보면, 오늘 만들어진 것들이 효용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살아갈 동안 그리고 한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여러 갈래로 분화된 정치 사회적 현상들과 부딪치게 된다. 새롭고 다채로운 사회분위기가 형성되면 지금 내가 가진 삶의 모습만 고집하기 힘들다.

내가 가진 삶의 모습만 고집하다 보면 새로운 사회가 내뿜는 열정이나 낯섦에 구차스러운 존재가 되고, 겁먹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반드시 찾아올 새로운 날들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잃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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