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삼의 중국문화풍경

미국영화 ‘魂断蓝桥’의 낭만이 늘 머리에 남아있다. 또 2차 세계대전 승전 소식을 접한 뉴욕(?)의 거리에서 한 해병이 낯모를 처녀와의 낭만의 키스를 남기는 경전으로 꼽히는 사진이 늘 그립다. 낭만은 생각의 차이이지 능력의 차이는 아닌 가 본다.
중국남성은 낭만을 모르기로 정편이 나있다. 그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유교의 ‘남존여비’에 우월감이 부푼 남자들이 ‘비천한’ 여인한테 낭만을 베풀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다. 최근 몇 십 년에 이러한 의식은 많이 퇴색되어 간다하지만 낭만을 즐기기 전에 중국남자의 어깨에 떨어진 것은 재부의 창조와 누적이라는 압력과 스트레스였다. 남보다 더 잘 살지는 못하더라도 비슷한 수준을 유지해야 했다. 집을 마련하고 현금을 저축하고 사업을 펼치고 자녀의 뒷바라지를 해야 하고, 이 모든 것이 낭만을 뒤로 제치게 하였다. 사회에서는 존중을 받아야 했고 그렇기 위해서는 스트레스를 홀로 삼키며 이 눈치 저 눈치를 가늠해야 했고 집안에서는 아내의 눈치를 보느라 구석까지 살펴야겠다. 언제 아내에게, 친구 여성들에게 낭만을 생각하겠는가?
또 중국 옛날에는 ‘발호정, 지호예“ 发乎情,止乎礼라 하였다. 정에서 우러러나나 예에서 멈춘다는 뜻이다. 또 표면의 낭만보다 마음속의 진실이 더 났다고 전통파는 우기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한 중국여인이 쓴 글을 그대로 옮긴다면,

많은 남성들의 머리에는 권력과 이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돈이 있으면 모든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낭만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여자가 함께 어려움을 이겨나가기를 바라면서 고생 끝에 낙이 올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돈 있는 남자는 미녀들이 찾아와 몸을 바치니 낭만이 필요 없을 것이고 생각하면 남자들은 가련하기 짝이 없다.

나쁜 남자여야 여인들이 와 사랑한다고 말한다. 나쁜 남자가 낭만하지 않다는 말을 거의 못 들어보았다. 나도 나쁜 남자가 나를 사랑하기를 바라기도 한다. 비록 사랑한다고 말한 것이 거짓이고 이튿날이면 변심한다고 하더라도, 한마디 빈말이라 해도 이러한 나쁜 남자가 내 생명에 나타나 한 가닥 낭만의 사랑을 남겼으면 한다.

여자마다 생각이 다르지만 여자는 선천적으로 낭만을 즐기는 종속이라는 것은 거의 부인할 수 없는 생활법칙일 것이다. 또 중국의 남성은 낭만의 세포가 거의 없다는 것도 공인하는 사실이다. 중국남성은 왜 배낭을 어깨에 메고 세계 일주를 할 생각을 하지 않는가? 이들은 왜 사랑한다는 말에 그리도 인색한가?

중국남성의 가슴에는 여성의 낭만을 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비불능 내불위야 非不能,乃不为也-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낭만을 모르는 것이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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