찡관스님이 묵묵히 술사발을 내밀었다. 둥그런 얼굴에 아무런 표정이 없었고 눈길에는 우유빛의 부드러움같은것이 감돌고이있었다.


    <<사람은 무(無)에서 왔다가 무(無)에로 돌아갑니다. 남녀의 사랑이라고 해서 다를바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것이 그러하니까요. 인간은 물질만은 영원할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이루고있는 물질조차도 무에서 왔었고 다시 무에로 돌아갑니다. 사람이란 눈앞에 보이는것에 집착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이처럼 랭정한 도리를 말하는 저 스님의 눈길이 왜 저토록 부드러워지는걸가? 창호는 자신이 어린애처럼 발가벗기운다는 감이 들었다.
    <<어떻게 저가 사랑때문에 고민한다고 알았습니까?>>

    찡관스님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속세의 인간이 지을수 있는, 자신감에 찬 사람의 득의양양함이 내비쳐있었다.
    <<인간만이 사랑때문에 죽을수 있습니다. 짐승은 암컷을 위해 다투기는 하지만 죽기까지는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죽을 지경으로 내몰지 않고 지는 편도 죽을 정도로 싸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만큼 선하지도 않고 그만큼 지혜도 없습니다... 아마 시주께서는 어떻게 이처럼 속마음을 잘 집어내는가 놀라겠지만 그건 우리가 같은 세대이기때문입니다.>>
   <<같은 세대라니요?! 그럼 하향했던 세대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바엔카라산맥에 있는 장족마을에 하향을 했었습니다. 해발고가 평균 4천메터가 되였고 산소는 이곳의 30퍼센트밖에 안되였습니다. 화석협이라는 곳을 지나다가 차가 멈춰섰습니다. 저의 학교에서 홍위병대장으로 있던 녀자애가 차에서 내려 우리는 모주석의 호소를 받들고 지구를 수리하러 왔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를 데리러 왔던 지방사람이 흥분하거나 뛰지 말라고 천백번도 당부했는데 말입니다. 모주석의 어록을 들고 휘저으며 소리를 지르던 녀자애가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안아일으켰을 때 녀자애는 이미 눈알이 튀여나와 죽어있었습니다... 저희들이 갈 때에는 마흔다섯이였지만 고향인 도시로 돌아온 애들은 서른 하나였습니다. 고산병으로 페기종으로 산사태로 죽었습니다. 스무살이 안되는 애들도 있었지요. 어쩌면 지금도 그들은 죽을 때의 그 모습으로 동토에 묻혀있을겁니다. 동토에 깊이 묻으면  오래동안 시체가 썪지 않는다고 폭발약으로 언땅을 폭파해가면서 무덤을 만들었으니까요. 그러는 우리를 장족들은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구요. 그들에게는 사람이 죽으면 천장(天葬)을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실은 새들에게 시체를 먹이는거지요. 그런 관습이 오히려 더 자연적이고 자연의 섭리에 맞는것이 아닐가요?... 그런데 유물주의교육만 받아온 우리들은 오히려 다른 영원에 집착하고있었습니다. 바보처럼 어떤 영원함이 있다고 믿고있은겁니다...>>


    하나의 거대한 암흑이 창호를 감싸고있는것 같았다. 아니, 창호는 느끼고있었다. 카이란의 얼굴이 나타났다. 첫사랑이였던 카이란, 여자가 무언가를 가르쳐준 카이란, 중국말을 잘하지 못하던 창호에게 한글자 한글자 책을 읽어주며 중국어를 배워주던 카이란, 카이란은 시골의 중국 소녀였다. 그린듯한 진한 눈섭, 선이 선명한 동그런 얼굴, 오뚝 솟은 코, 누구나 한번 보면 잊을수 없는 커다란 눈, 그리고 무릎을 스칠듯 늘어진 굵직한 량태머리, 오랬동안 그녀를 잊고 산것 같았다. 아니, 마음의 너무나 깊은 곳에 심어 까마득히 멀어진것이였다.
    <<우리세대는 참으로 너무나 많은 고생을 했어요. 죽도록...>>
    찡관스님의 얼굴에서 조소같은 빛이 떠올라 창호는 말이 막혔다. 찡관스님이 미소라고 느껴지는 표정을 지었다.


    <<죽도록, 그랬을수도 있지요.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살생을 하여 그 고기들을 먹으며서도 그 생명들의 아픔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농촌에 하향했던 세대들이 죽을 고생을 했다고 탄식하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었어요. 농사일 조금 하고는 그것이 죽을 고생이라니요? 그런 고생을 우리 선조들은 수천년 아니면 그보다 먼 옛날에도 했거든요. 그러나 죽을 고생이라는 말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네들이 세상이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것이 아니라는걸 잘 알고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의 세대가 과거 받았던 체험을 마음에 흔적으로 남겨 그냥 가지고 산다면 무상한 인생은 무상으로 끝나게 될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을겁니다. 얻음은 총명이 필요할지 모르겠지만 버림은 지혜입니다...>>


    창호는 울것만 같은 마음이 되여가고있었다. 어쩌면 불륜이라고 불러야 될지도 모르는 사랑이 끝나버린 이 시각에, 다시 뼈아픈 첫사랑을 기억해야 하는 현시점이, 자기를 실험하기 위하여 안배된 운명같아 서러웠다. 사랑에 지치다니? 이 나이에 사랑에 목메이다니?! 어쩌면 스님의 말이 너무나 맞는 말인지 모른다. 우리 세대에게는 너무나도 아픈 과거의 흔적이 도사리고있는것이다. 그 흔적이 과연 우리에게는 지울수 없는것이였을가?
    창호는 이 세대가 겪어야 하는 운명의 모든것을 다 겪었다. 중학교문을 들어서면서 <<문화혁명>>이 터졌고 <<네가지 낡은것을 타파>>한다고 고래고래 구호를 외치면서 책이란 책은 다 불속에 집어넣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자본주의적인 생활방식이라고 화분이라는 화분은 모두 박살을 내였다. 무릇 낡은것이라고 생각되고 그런 판단이 서면 짓부시고 태우고 박살을 내였다. 불상을 들부시고 편액을 불사르고 황제의 어필이 새겨진 비석을 까고, 수천년 지켜온 선조들의 문화재가 소년소녀들의 여린 손끝에서 력사의 흔적을 감추었다. 그리고는 서로가 패가 되여 몸싸움이 돌싸움으로 되고 나가서는 총격전으로 서로에게 죽임을 강요하며 총질을 하고 수류탄을 던졌다. 귀청을 째는 수류탄의 폭발음, 공기를 가르는 총알의 부르짖음, 신앙과 같은 호소(號召)의 부름에 흥분한 소년소녀들에게 이런 살륙의 소리는 오늘날 열성팬들의 광기와 같은것이였다. 창호의 반에는 금자라고 부르는 이쁘장한 계집애가 있었다. 하얀 얼굴에 오동통한 얼굴, 날씬한 몸매때문에 언제나 커보이는 군복을 입고다니던 녀자애, 한여름이던 어느날 녀자애는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가슴을 헤치자 피가 솟는 총상이 보였다. 그러나 창호의 가슴을 딱 멈추게 하는것이 있었다. 솟는 피에 물들어가는 무르익은 하얀 젖가슴이였다. 핑크빛의 유두가 눈부셨다. 금자는 모여든 동학들에게 미소를 짓고있었다. 고통의 빛은 없었다. 금자는 모주석만세라고 중얼거렸다. 소리를 지르고싶었는지 입은 크게 벌렸지만 그것은 중얼거림으로만 들릴뿐이였다. 그러고는 분수처럼 피를 토하고 숨을 거두었다. 피에 젖은 녀자의 유방, 이는 창호의 소년을 완성시키는 참혹하고 잔인한 계기였다.


    <<문화혁명>>이 살륙의 절정기를 끝내자 창호는 그 시대의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농촌으로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으러 농촌으로 가야 했었고 그곳에서 카이란이라는 농촌처녀와 사랑에 빠지고, 그리고 <<우파>>라는 아버지의 그늘때문에 실련의 고배를 맛보고... 소설이 아니면서도 소설적이고 그 시대 사람이라면 무심하게 지나쳐버릴수 있는, 그런 평범하고 무의미한 인생을 오늘까지 가꿔온것이였다.
    어줍지 않게 본 황주의 주독이 속으로부터 시작해 머리를 치기 시작했다. 찡관스님이 창호의 사발에 술을 부었다.


    <<시주께서는 아마 저를 독실한 불자(佛子)로 아실지 모르겠지만 실은 저는 불심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사람이 아닙니다. 오랬동안 유물주의교육을 받았던고로 불심의 깊은 뜻에 접근하는 힘이 빠졌습니다. 부처님의 깊은 뜻을 리해하지 못한다면 사찰에 몸을 두고있어도 허수아비인셈이지요. 바로 저가 그렇다고 할가요?...>>
    창호는 머리를 들었다. 찡관스님의 눈에서 반짝이던 빛이 사위여가고있었다. 창호는 스님이 말하던 우리 세대의 흔적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스님의 마음에도 우리 세대의 아픔은 흔적으로 남아있다는 말인가?
    창호는 술사발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죽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희와 카이란의 얼굴이 싸우듯이 겹쳐지며 어른거렸다. 두 얼굴이 자리를 내더니 다른 하나의 형상으로 굳어져왔다. 빨간 선혈에 물드는 하얀 유방과 핑크빛의 유두가 보였다. 갑자기 구역이 올라왔다. 돌덩이같은것이 배속의 깊은 곳에서 응어리를 지더니 무작정 목구멍을 올리밀었다.
    <<아- 안돼!...>>


    창호는 배속에 모든것을 뱉어내기 직전에 이 한마디를 내뱉았다.
    이튿날 창호는 소스라치듯 잠에서 깨였다. 창가는 휘우듬히 밝았는데 집안에는 아직 어둠이 물러가지 않고있었다. 찡관스님은 나갔는지 방은 비여있었다. 밖에서 욱욱 기합을 주는 소리와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간히 찡관스님이 허루이와 무어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창호는 무언가 잘못되였다는 생각을 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옷은 입은채로였다. 어떻게 잠에 들었던지 기억에 없었다. 도수가 낮은 술이라고 우습게 알고 마신것이 탈이였다. 머리가 흐리터분했지만 배갈을 마신듯 아프지는 않았다.
    창호는 밖으로 나왔다. 찡관스님과 허루이가 아름드리 측백나무밑에서 무술훈련을 하고있었다. 뭘 잘못했는지 찡관스님이 화를 내고있었다.


    <<동작을 너무 크게 하지 말랬지 않아? 멋지다고 해서 실전에 필요한건 아니야. 팔을 그렇게 내밀었다가 대방의 공격을 어떻게 방어하려고 그래? 영화나 텔레비에 나오는 장면에 현혹하다가는 몇합 싸우지 못하고 피투성이가 되고말거야... 기억해 둬. 무림의 고수들은 표현을 위해서 무예를 련마하는게 아니야...>>
     창호가 나온것을 보고 찡관스님이 머리를 돌렸다. 둥근런 고동색 얼굴에 땀이 돋아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바다의 습기를 머금은 아침공기가 가슴이 저리도록 신선했다. 하늘은 어느새 허옇게 바래워졌고 절아래의 계곡에는 엷은 안개가 서리여있었다. 절 마당에는 아름드리 측백나무가 몇구루 더 있었다. 나무의 오리오리 파헤쳐진 주름마다가 세월의 흐름을 이야기하고있었고 하늘로 머리를 치켜든 모습은 천년사찰의 력사를 증언하고있는듯싶었다.
    <<알고보니 스님께서는 무림의 용사이군요?>>
    찡관스님은 얼굴에 흐르는 땀을 씻고 창호에게로 다가왔다.
    <<건신을 위해 팔다리를 움직여보는거지요.>>


    허루이가 아첨할 기회가 생겼다고 여겼는지 참견해왔다.
    <<저의 스프는 소림사에서만 삼년이나 무술을 배웠어요. 무당산에서는 검술을...>>
    찡관스님이 흥이 나서 입방아를 찧고있는 허루이를 흘겼다.
    <<입 까불지 마! 이젠 그만하고 어서 가서 아침 준비나 해!>>
    허루이는 주눅이 들어서 입을 다물고 자기의 방으로 걸어갔다. 찡관스님은 창호에게 얼굴을 돌렸다.


    <<시주께서는 마다하지 않는다면 며칠 여기 더 계셔도 되겠습니다. 저는 오늘 소림사로 떠나게 되여있습니다. 오랬동안 주지스님도 만나뵈지 못해 인사도 드릴려구요. 그리구 오대산하고 화산에도 돌아올 예정입니다. 아마 두어달은 걸려야 할것 같은데 허루이가 있으니까 시주께서는 근심말고 계셔도 됩니다.>>
    창호는 우연한 인연에 이처럼 환대를 하는 찡관스님이 고마웠다. 그러나 고맙게 대한다고 해서 여기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다.
    <<아니 하루밤 신세도 너무나 많습니다. 스님이 떠나신다니까 저도 함께 떠날렵니다.>>
   <<그러시겠습니까? 그래도 좋구요...>>
   찡관스님의 어조에는 꼭 만류하려는 뜻이 없었다.
   아침을 먹고나서 찡관스님은 어서 떠나자고 창호를 재촉했다. 그러나 먼 길을 떠난다는 스님에게는 아무런 짐도 없었다. 창호의 눈치를 알아채고 찡관스님이 말했다.
   <<옷자락에 스미는 바람이 저의 짐이고 바람이 자는곳이 저의 집인셈이지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 있지요? 저는 이미 공수(空手)가 되였으니 이제 공수거(空手去)만이 남은거지요.>>
   그러면서 찡관스님은 소리없이 웃었다.
   <<자, 이제 떠나볼가요?>>


   허루이의 눈배웅을 받으며 찡관스님과 창호는 공산사를 나섰다. 어제 저녁 오를 때에는 밤이여서 알수 없었지만 돌층계로 된 소로길은 그렇게 늘차고 가파로운것이 아니였다. 길가의 숲속에서 매미들이 울고있었고 나무에서 떨어지는 아침이슬에 돌층계가 비에 젖은듯 번들거렸다. 길가의 관목숲속에 파묻긴 집들의 폐허와 포석을 한 마당들이 보였다.
   <<공산사는 원래 이 근처에서 가장 큰 사찰의 하나였습니다. 건물도 수십채였고 주재승(駐在僧)들만 해도 수백명이 되였지요. 항일전쟁이 폭발하자 일본군은 이 지방을 먼저 공격했습니다. 화북평원으로 들어오는 해상의 관문이 이곳이니까요... 일본군이 들이닥치자 우능이라는 주지스님이 승병(僧兵)을 일으켰지요. 그러나 총과 대포에 비행기로 무장한 일본군하고 기껏해서 화승총이나 창과 칼로 무장한 승병이 대적이 되겠습니까? 그래도 하루낮 하루밤을 싸우다가 전체가 몰살을 해서야 일본군은 공산사를 점령할수 있었지요. 수백명 정예군을 잃은 일본군 지휘관이 공산사를 불사르라고 명령을 내렸지요. 그때 공산사의 건물은 모두 불태워지고 지금 제가 있는 암자만 유일하게 남았습니다... 저 앞으로 가면 전사한 승병을 위해 세운 비석이 있습니다...>>


    찡관스님의 말대로 즈금 걸어가자 길가에 자그마한 검은 대리석비석이 나타났다. 창호는 그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비석의 글자들을 읽어나갔다.

        민국 ++++년에 왜적이 침노해 들어오매 공산사의 승병들이 왜적을 물리쳐 싸웠도다... 427명 승병들이 마지막 한 사람까지 투항한 자 없었으니 충혼의 넋이 하늘을 울렸도다... 그네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이 비석을 세웠으니 후세는 길이 그네들을 본받을 지어다...

    4백여 승병의 충혼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다는 비석은 그 엄청난 이야기에 비해 너무나도 초라하고 볼품 없었다. 찡관스님이 창호의 옆에 다가섰다.
    <<이 비석은 광복이 된 후 국민당지방관원의 명으로 세워진것이라고 합니다. 원래대로라면 비석의 뒤면에 승병들의 이름이 새겨져야 했지만 그때 조사가 되면 새겨넣기로 했답니다. 그러나 국민당이 물러가자 누구도 묻는 사람이 없어 지금의 이모양으로 남게 된것입니다... 하긴 이름을 남기려고 그 승병들이 목숨을 내걸고 싸운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그들을 잊고있는 우리 후세는 또 무엇이구요? 아무리 아픈 일도 아무리 위대한 일도 잊혀지는것은 다만 시간의 문제일 따름입니다. 돌아가신 그 스님들이야 무에서 다시 무에로 돌아갔으니 다행일지도 모르지요...>>


   담담하게 말하는 찡관스님을 바라보며 창호는 갑자기 느껴오는 가슴의 통증을 느꼈다. 울어서 만리장성을 무너지게 했다는 맹강녀의 죽음과 여기 어느곳에인가 묻혀있을 4백여 승병들의 죽음중 어느것이 더 장렬했을가? 창호는 피와 불길과 페허속에 쓰러져있는 승병들의 모습이 눈앞에서 얼른거리고있는것 같았다. 그네들은 왜 잊어지는 존재로서만 가능한것일가? 그렇다면 우리의 존재와 우리들의 죽음은 누가 기억해줄것이며 누가 우리에게 생존의 장렬함에 머리를 끄덕여줄것인가?...
    창호는 심각해지는 자신을 억제할수 없었다. 가슴이 꽉 막혀왔다. 경희가 하던 마지막 말이 귀가에서 울렸다.
    <<리유는 없어요. 다만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예요!...>>
    창호는 찡관스님을 따라 침묵한 채로 한동안을 걸었다. 바다가 보였다. 그리고 어제 자기가 앉아 죽음이니 사랑이니 존재의 리유니 하는 생각을 수없이 하던 혼귀석이라는 바위도 보였다.


    창호는 바위우에 서서 동으로 동으로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득히 먼 바다의 한끝에 외롭게 떠있는 배의 마스트가 보였다. 초석을 두드려대는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창호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려행용트렁크를 열었다. 그러고는 그 안에서 수십통이 되는 편지뭉치를 꺼냈다. 열련때 경희한테서 온 편지들이였다. 지식인 녀성답게 사랑이란 무엇이니 인간적인 삶이 어떠니 하는 평들을 해가며 쓴, 사랑에 열뜬 경희가 창호에게 보낸 편지들이였다. 어떤 편지에는 창호와의 섹스를 회억하는 내용과 자기의 감각을 토로한것도 있었다. 은밀하고 비밀적이고 적라라했다. 창호는 이 편지가 그토록 귀중했었고 기념으로 둘만한 것이라고 믿고있었다. 이 편지는 언제나 창호를 따라 다녔고 머나먼 소년시절 정열의 끄트머리를 오늘까지 이어주는 창백한 끈이기도 했었다.


    창호는 천천히 편지를 찢었다. 바다바람이 손에서 찢어진 편지쪼각들을 물어갔다. 불안한 나비들처럼 편지쪼각들이 흩날리다가 바다의 물결우에 떨어졌다. 파도가 그 편지쪼각들을 물고 바위에 덥쳤다. 하얀 물보라가 일었다.
    마지막 한쪼각의 편지가 손에서 떠나갔을 때 창호는 찡관스님에게 돌아섰다. 그러면서 참담하게 웃음을 지었다.
    <<스님, 이제 저의 손은 비였습니다.>>
    찡관스님은 미소를 지었다.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쉬운 일이야 아니겠지요. 그게 우리 세대라면 더욱 힘들겁니다.>>
    그러면서 자조하듯 너털웃음을 웃었다.
    <<자, 갑시다!>>
    그들은 포장이 안된 길가에서 시외뻐스를 기다렸다. 반시간쯤을 기다렸다고 생각되자 고물장에 던져도 아깝지 않을만큼 낡아빠진 뻐스가 천식증환자처럼 요란하게 가스를 내뿜으며 달려왔다. 차는 이쑤시개를 세워놓은듯 초만원이였다. 아래턱에 커다란 기미가 난 중년의 녀차장이 손님들의 등을 마구 떠밀었다.
    <<두 사람만 오르면 됩니다. 좀 자리를 내주세요! 사람이 량심이 좀 있어야지 제만 탓다고 남 사정 몰라주면 되겠어요?!...>>
    손님들이 투덜거렸다.
    <<돈만 돈이고 사람은 죽으라는거야?!...>>
    그러건 말건 그 녀차장의 신세로 찡관스님과 창호는 뻐스에 오를수 있었다. 차안은 시루처럼 무더웠고 이렇게 초만원이 된 뻐스가 여기까지 굴러올수 있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땀냄새, 담배냄새, 발냄새, 방귀냄새가 지독한 디젤유냄새속에 섞여 구역이 났다. 그래도 제시간에 이런 뻐스라도 잡을수 있은것이 행운인줄 알라고 찡관스님이 배포유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차창밖으로 한적한 해안선이 보였다. 시간가량을 달렸을가, 뻐스는 해안선을 등뒤에 두고 끝없는 화북평원의 어딘가를 달리고있었다. 이렇게 다시 한시간가량을 달리자 튀여오르듯 도시의 륜곽이 눈앞에 나타났다.
    도시의 역전광장에 도착하자 뻐스는 초만원이던 내장물을 토해냈다.
    <<시주께서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저는 점심 서주로 가는 차를 타야 합니다.>>
    창호는 다만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만 있었을뿐 확정한 목표가 있은것은 아니였다.
    <<글쎄요. 전 렬차를 타야 할지 아님 비행기를 타야 할지 결정을 못했습니다. 이번 스님 너무 감사합니다. 부처님과의 인연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창호는 진실로 찡관스님을 감사하고 있었고 어쩌면 부처와의 인연을 맺어주기 위하여 상상할수 없는 과거의 현실이 있었다고 믿고있었다.
    <<나미아무타불!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인연이 끝나지 않았다면 다시 만날수 있을겁니다. 그럼 잘 가십시오!>>
    찡관스님은 합장을 하고 머리를 숙여 창호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옮기라도 하듯 창호는 저도모르게 합장을 하고 머리를 숙였다.
    <<스님, 스님에게 어떻게 감사의 말 올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안녕히 다녀가십시오!>>
    다시 합장을 하고 머리를 숙여 인사를 나누고 그들은 헤여졌다. 찡관스님의 모습이 려객들의 인파속으로 잦아들어가자 창호는 택시 하나를 잡았다.
    <<상해로로 갑시다.>>
    이 도시는 창호에게는 익숙한 도시가 아니였다. 상해로는 그가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정확히 부를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창호는 상해로로 가자고 한 자신이 놀라웠다. 그곳으로는 왜?
    상해로에는 경희가 있는 오피스텔이 자리잡고있는 거리였다. 바다가에서 경희의 편지를 찢으면서 창호는 이로서 경희와의 모든 인연은 끝났다고 결심을 내렸다. 그러나 이제 그녀의 편지를 찢어버린지 세시간이 지나지 않아 다시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려하는 자신이 믿을수가 없었다. 창호는 택시기사와 다른 곳으로 가자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목구멍이 말을 듣지 않았다. 택시가 그리 복잡하지 않은 거리를 힘있게 달리고있었다. 사랑이 뭔데? 이 나이에?... 창호는 자기에게 묻고있었다.
    <<상해로입니다. 어디에 세울가요?>>


    창호는 지긋이 감았던 눈을 떳다. 무역쎈터의 건대한 건물이 보였다. 그 맞은켠에 경희가 일하고있는 오피스텔이 있었다.
    <<무역쎈터앞에 세워주세요.>>
    택시는 무역쎈터앞에 멈춰섰다. 내리려고 가방을 쥐는 순간 창호의 귀가로 마지막으로 하던 경희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리유는 없어요!...>>


    창호는 가방손잡이를 놓고 택시의 창문을 내렸다. 8층으로 된 오피스텔의 건물이 눈앞에 가득 안겨왔다. 5층의 왼쪽으로 다섯번째 창문, 그속에 경희가 있을것이였다. 사랑했다고 믿고있었고 그 사랑을 위해서는 목숨도 던질 마음이 있었다고 믿고있었던 창호, 닷새전까지만 해도 창호는 이 모든것에 추호의 의심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 그에게는 끝없는 미궁의 련속일뿐이였다. 경희와의 만남이 리유가 없었듯이 헤여짐도 리유가 없는것일가? 분명 경희는 이렇게 말했고 미련도 없이 돌아섰었다. 그 녀자는 지금 저 오피스텔의 어느 사무실에서 무언가를 하고있다. 그러나 창호는 그녀를 찾아갈 모든 근거가 없어졌다. 자기도 모르는 어정쩡한 사이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당당하던 리유는 비누거품이 꺼지듯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것이였다. 왜? 무엇때문에?...


    창호는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돌렸다. 차창을 올리면서 택시기사에게 굳어진 한마디를 했다.
    <<운도공항으로 갑시다!>>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