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연의 강들>(제1부)

류 연 산


분출된 암장의 덩어리
이글거리던 분노는 식었으나
쩡쩡 울리는 쇠소리속에
반항의 넋은 아직도 살아있는가?
 ― ―
오 겨레여, 우리 어데서 살든
끌날같은 백두의 얼로 살자!
우리 어데서 죽든
쇠소리 나는 백두산 돌이 되자!

 조룡남 작 <<백두산석>>에서


서장


아, 백두산

 

백두산은 장백산의 주봉을 일컬으는 말이다. 매년 횡축방향으로 3. 14cm씩 압축되여 3mm로 륭기해 1994년 현재 해발 2749. 6m인 백두산은 지질적으로 화산분출의 부석으로 이루어져 사시장철 백발이 성성하다.


앞뒤좌우로 줄기줄기 뻗어내린 산발들을 거느리고 서리찬 장검인양 하늘높이 우뚝 솟은 불굴의 모습, 일년에 아홉달은 백설속에 묻히고 한여름 짧은 철마저 풍우의 시달림에 모대겨도 결백한 옷차림에 흰 수염발을 날리고 섰는 웅자, 그것은 먼 옛날 단군께서 신들린 지팽이를 휘둘러 천군만마를 호령하던 자태일것이다. 이 땅이 생기고 저 하늘이 열리여서부터 세월이 늙어 단군께서도 백두옹(白頭翁)으로 굳었어도 성산의 기질은 백의민족의 백절불굴정신의 기둥으로 솟아있다.


백의민족의 상징인 백두산은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자랑하는 민족사의 발상지이며 조종의 산이다. 일찍 고구려의 부분노나 을두지는 백두산발을 타고 말을 달리며 보검을 휘둘렀고 고려의 윤관과 리조의 김종서 역시 백두산을 지치며 보국개척의 활로를 열었으며 남이장군도 백두산석에 일장검 썩썩 갈며 천하를 평정할 웅대한 꿈을 무르익혔다.
지나온 선조들의 발자취를 뒤돌아보면 빛나는 력사는 오늘 사는 우리들의 거울이 된다. 그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한점 부끄러움이 없는 자만이 단군의 자손임을 드디여 증명할수 있겠다.


어느날 나는 뜻밖으로 거울에 비낀 내 마음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병균의 비늘을 놀랍게 발견했다. 순간 리념의 갈등이 무디여가면서 새롭게 대두하는 민족사회의 약동하는 맥박으로 제대로 숨쉬지 못하고있는 자신의 외로운 존재를 느꼈다. 외세의 책동으로 지속되는 분렬로 하여 우리 민족 전체가 병마의 진통을 겪고있는 오늘 앓지 않는 자가 어디에 있으랴만 골수에 든 나의 병은 나의 마음을 해파리처럼 달달 오그라붙였다.
병든 마음, 고름이 질질 흐르는 나의 령혼의 병근은 무엇일가? 나는 누구이며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원래의 나의 참모습을 찾는것 자체가 병의 근원을 파고 확실한 치료대책을 가지는 길이다. 그래서 나는 먼지가 오른 두툼한 력사책을 뒤지며 갈피갈피에서 백두산을 찾기 시작했다.


멀리 하(厦)나라 때부터 주(周), 진(秦)에 이르기까지는 불함산(不咸山), 한조(漢朝)에는 단단대령(單單大嶺), 북조시기엔 개마대산(盖馬大山), 후위(后魏)에는 도태산(徒太山) 혹은 태백산(太白山)을 병존, 남북조(南北朝)는 둘중에서 도태산을 선택, 당조(唐朝)는 태백산을 골랐다. 금조(金朝)에 이르러서야 장백산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졌다. 이 모든것은 산맥을 이름이고 주봉인 백두산이 변했었다는 력사의 기재는 없었다. 태초부터 변하지 않은것은 다만 두가지 사실이였는데 하나는 주봉의 이름이 백두산이라는것과 불함산은 몽고어로 부얼간(不爾干)―신무(神巫)로서 신령이 거주하는 성산이라는 전설이였다.


자고로 우리 민족은 천지의 룡신이 백두산을 지키고있다고 믿어왔다. 그래서 흰 떡에 색이 들지 않은 하얀 반찬을 상에 차려놓고 백주를 부어올리고는 룡신께서 무궁토록 안정하게 살도록 해줄것을 기도했단다. 할아버지가 백두산 신령님께 기도하여 태여난 충익 리성계는 백두산 바위벼랑에 일장검 짚고 서서 천하를 호령했다. <<육당 최남선은 우리의 고대문명이 발칸반도에서 한반도에 거대한 띠처럼 련결돼있던 <불함문화>라고 밝혔다>>(장민석 저 <<코리아니즘선언>>) 20세기초 촌화도인들은 백두산 장군봉밑 천지기슭에 <<대태백 대택수 룡신비각>>을 세우고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기원하기도 했었다. <<한일합병>>이후 독립운동가 리동휘, 안창호 등은 압록강을 건너 장백현을 경유, 백두산지역 안도현에 이르러 독립운동을 폈고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6사 사장 김일성장군께서도 안도현 내두산근거지에서 철수, 백두산에 밀령을 잡고 국내로 무장투쟁의 불씨를 퍼뜨렸다.


선조들의 피줄을 타고 이 내 심령에까지 절어든 조종의 산―백두산을 우러르는 심정은 병든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겨레의 깨끗한 마음이 어린 천지의 맑은 물속에 심신을 잠그면 고름이 질질 흐르는 거무데데한 병균의 비늘이 당금 벗겨질것만 같았다.


1994년 8월 20일.
나는 황홀한 세계로 날아가는듯한 거뜬한 기분으로 백두산기행에 올랐다.
우리의 일행은 모두 여덟이였다. 한국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10―1 한신아빠트 3동/701에 거주하는 대한종합주식회사 대표 김건태(金建泰), 서울시창동구에 살고 현재 북경대학에 류학 와있는 친구 김인식(金仁植), 연변인민출판사 재회과장 송일선(宋一善), 신화서점의 두분과 나와 나의 아들 광엽(光葉), 그리고 기아봉고차를 모는 건설은행의 기사였다.
갑신년 여름 명천군수와 동행이 되여 백두산에 올라 당대에 이름 높은 달필로 <<백두산기행>>을 적어 주촌의 장중(莊仲)같은 분들이 글로나마 백두산구경을 할수 있도록 해준 박종(1735―1793년)의 간난신고 18일 왕복길을, 강희(康熙)16년 청황제 강희의 파견을 받고 5월에 북경을 떠나 6월에 만강(漫江)과 긴강(緊江)의 합수목으로 등산을 시작하여 6월 17일에 산정에 올랐다가 겨우 8월에야 북경으로 되돌아간 궁정 내무대신 각라목나(武木納)의 지긋지긋한 석달길을 오늘의 과학문명은 지척으로 당겨왔다. 박종이 살았던 어랑면에서 무산을 경과하여 백두산에 이르는 거리나 내가 살고있는 연길에서 백두산에 이르는 거리는 거의 같은 리수이나 하이야를 타고 하루면 도다녀올수 있다. 멀리 한국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비행기편으로 서울―북경―연길을 경유, 며칠이면 백두산관광을 마칠수 있다.


당나귀 타고도 허세를 부리던 옛날엔 백두산에 오른다는것은 죽음을 각오한 모험이였다. <<백두산에 올라 좁은 고장에서 옴츠리고있던 흉금을 시원하게 헤쳐>>보고싶어도 <<길은 멀고 험하며 승냥이, 호랑이 등 맹수들의 소굴이 많아 한미한 선비의 초라한 차림으로는 가자고 할데가 아니라>>(박종 <<백두산기행>>에서)서 엄두도 못내고 세상을 하직한 옛사람들에 대면 차를 타고 호사로 백두산에 오를수 있는 우리들은 복받은 시대에 사는 인간이라 하겠다.


봄, 가을, 비온 뒤끝의 금강산을 보지 않고는 금강산에 올랐다고 자랑을 말라는 말이 있듯이 백두산도 세길로 올라가야 한단다.
하나는 박종의 행각을 따라 무산―삼지연―백두산이다. 하지만 군사분계선이 생긴 이래로 자본주의세계에 몸을 담고 사는 한국인들에게는 통행금지이다.
그외의 두갈래는 중국땅인 압록강류역의 장백현과 두만강류역 안도현으로 오르는 길이다. 이 두 길도 80년대에 개방이 되여서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갈수 있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은 안도현으로 오르내리는 상태이니 백두산의 전모를 골고루 본 사람은 시대의 행운을 지닌 사람이라 하겠다.


<<장백산하천지략>>의 기재에 따르면 당조 때 류인괴, 청조 때의 산동 오련산의 스님, 강희 13년, 17년, 23년, 51년, 광서 11년, 34년에 청나라 조정의 파견을 받고 오목눌, 목극, 진영 등이 장백산에 갔으나 세세한 답사는 하지 못했다. 백두산답사를 처음 한 사람은 청조의 수재 류건봉(劉建封 1865―1952년)이다. 1908년 4월 류건봉은 동북3성총독 서세창의 위탁을 받고 료녕, 길림 두성의 분계선을 탐측, 송화강과 두만강자원탐사차로 수하를 거느리고 탐험의 길에 올랐다고 한다. 그들은 동서 300km, 남북 180km 되는 장백산구역을 탐험하면서 장백산맥의 최고봉―백두산에 올랐으며 하천원지도 답사했다. 4개월남짓한 동안 백두산 골짜기, 물줄기, 봉우리들을 답사하고 백두산의 전경과 두만강, 압록강, 송화강 발원지를 밝혀내고 16개의 봉우리에 이름을 달았다. 돌아와서 류건봉은 <<장백산산천지략>>, 시집 <<장백산기영>>, 42장의 사진을 가진 <<장백산령적전영>>이라는 책을 펴냈다.


1995년 8월 안도현에서는 명월진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명동도로입구옆에 류건봉의 석상을 세웠다. 백두산을 처음으로 탐험한 사람이라서보다도 1909년 안도현이 설치되면서 첫 현지사였고 손중산선생을 따라 혁명했고 또 동북이 일제한테 함락된후에도 대의를 지켜 깨끗이 살아온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나는 그번 걸음까지 다섯번 모두가 안도현으로 통한 외곬의 관광코스에 매달렸다. 국가 제도상, 교통의 편리 등 원인으로 백두산관광은 연변길이 가장 편리한 코스로 되였기때문이다. 번마다 명월진을 지날 때면 나는 잠간 차를 내려서 류건봉의 동상앞에 섰다. 여러가지 상념이 떠올라 가슴은 착잡해졌다.


백두산은 <<93 중국 산천경개 관광 5대 회합지>>의 하나로 부상되면서 세계적 관광명소로 급작스럽게 떠올랐다. 게다가 두만강지구개발이 열점으로 올라 연변관광업은 자연관광, 문화관광 및 경제관광이라는 종합적 관광업의 륜곽을 형성, 연변내에 30여개 려행사가 일어섰다. 재작년(1993년) 연길 비행장 확장공사로 인해 비행기운행이 정지된 부진속에서도 국외 관광객만 해도 2만 6328명, 그 전해 2만 3600명에 비해 10. 4% 증가되였다. 그중 절대대부분이 한국인이다. 그것은 백두산이 우리 민족의 조종의 산이라는 점이 득점을 딴 결과라 하겠다.
한민족 일원인 나로서 앞서번 네번은 관광기분에 들뜬 덩덩한 몸이였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였다. 나 나름대로 뜻을 지니고 움직이기는 그번이 처음이라 백두산이 초행길이나 다름이 없었다. 말하자면 시대의 불행아이고 인생 40을 지척에 두고서야 비로소 헴이 든 셈이였다.


아침 8시에 떠나 시속 백키로로 달려 점심녘에 안도현 이도백하(二道白河)진에 이른 우리는 송풍라월―미인송숲속에서 도시락을 풀었다. 옛날 극악한 부락장의 작간으로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한 송풍과 라월의 죽은 혼백이 움터서 자라났다는 미인송에 기대여 지친 몸을 쉬이려니 비장하고 애틋한 정감이 마음을 울려준다.


조룡남시인이 말했듯이 흰 거품을 일으키며 흐르는 백하수에서 방금 미역들을 하고 나온듯한 미인송들은 날씬한 허리를 곧게 펴고 하늘을 찌르고 섰는데 우듬지에 모록이 난 가지는 처녀의 다듬어 올린 단발머리인양 매혹적이다. 그리고 밑둥에서 머리까지 가지 하나 없이 미끈해서 팔없는 비너스가 장백에 뿌리박고 우리 민족의 사랑과 미의 녀신으로 변신하지 않았는가 하는 아름다운 환상에 잠긴다.
소란하고 고달픈 도시를 떠나 태고연한 숲속에 몸을 잠그니 마치도 금시 내가 송풍이 되여 아름다운 라월과 사랑을 속삭이는 기분이여서 미인송옆에 발을 묻고 천년이고 만년이고 사랑의 세월을 조용히 즐기고싶은 욕망이 용암처럼 끓어오른다.
각자 집에서 해온 반찬과 밥은 집에서 늘 먹던 음식이지만 산에서 먹는 맛은 별미였다. 술병을 터쳐 잔을 돌리기 앞서 김건태사장은 첫잔을 산신령께 올리며 <<고시레>>를 불렀다.
<<신령께서 보우하사 저희들 관광길에 따뜻한 해빛과 맑은 공기가 동반토록 해주십시오. >>
친구 김인식씨가 인절미를 집다 말고 물었다.
<<형님이요, 옛날 박종이 뭐라했는지 아세요?>>
<<뭐라 했게?>>
<<유명한 <백두산기행>에 이렇게 씌여있거든요. <산에 과연 신령이 있다면 좋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산을 잘 보게 할것이다. 좋지 않은 사람에게야 신령이 어찌 제사나 한번 드린다고 함부로 명산의 참모습을 보여줄수 있으랴. > 했으니께 우리는 제사를 생략하고 식사를 해도 괜찮다 이겁니다. >>
<<너 말대로라면 숱한 돈을 퍼주고 백두산구경을 와서 비만 맞다가 간 사람들이 다가 나쁜 사람이겠구나? 나도 그 책쯤은 읽었는데 종성군수 조공도 친히 축문을 지어 고사하였기에 구경을 잘했다고 했니라. >>
모두들 웃었다.


그리고 유쾌한 기분으로 음복들을 했다.
저만치 아래 이도백하마을이 나무사이를 비집고 나의 시야로 줄달음쳐왔다. 송풍과 라월의 대같이 곧은 사랑의 전설이 깃든 이도백하는 1868년 함경북도 무산군의 리재민들이 두만강을 건너와서 자리잡고 개척한 마을이란다. 그보다 앞서 천여년전 발해국의 사람들은 여기에서 북으로 10리 상거한 곳에 보마성(報馬城)을 쌓고 국토를 지켰다.


어느해엔가 적장 갈망이 추문이라는 자의 내응을 받아 룡맹장군을 죽이고 류수하성(流水河城)을 점령했다. 룡맹을 이기고 사기가 충천한 갈망은 군사를 휘몰아 보마성을 철통같이 포위하고 사신을 보냈다. 투항을 권유하는 사신의 목을 친 설웅장군은 사품치는 백하를 끼고 결사전을 벌렸다. 하지만 수적으로 렬세이고 사면초가에 든 보마성은 위태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적군의 화살에 장군이 탄 말이 쓰러졌다. 때를 놓칠세라 적장은 검을 휘두르며 설웅장군을 생포하려고 달려들었다. 바로 위기일발의 그 시각, 하늘못(天池)속의 룡신께서 룡마 한필을 보내주었다. 룡마의 효용소리에 구름이 갈라지고 적군의 칼손들이 굳어졌다. 검은 털 한오리 없는 백색의 룡마를 탄 구척장신 설웅장군은 무인지경에 든듯이 적군속을 좌충우돌했다. 보검이 번뜩이는 곳에 적군의 머리가 나뒹굴고 룡마의 발길이 닿는 곳에 비명소리 높았다. 발해군의 폭풍같은 기세와 용맹에 질겁한 적군은 대패했고 적장 갈망의 수급은 사품치는 백하에 잠기고말았다. 그후 보마성(報馬城)은 보마성(寶馬城)으로 이름이 전해졌단다.


그제날 성벽은 수풀속에 묵묵히 잠겨있고 성을 지켜 싸우던 발해인들의 숨결은 전설속에 파묻혀있다.
하지만 여기 아우성 높던 혈전장―백하류역 울창한 숲속에는 미끈미끈한 미인송(美人松)들이 닭무리속에 든 학처럼 쭈욱쭈욱 허리를 펴고 거연히 솟아있다. 2, 3십m 높이로 우뚝 선 아릿다운 몸매의 종황색 미인송은 활짝 펼쳐든 우산모양으로 황금색가지를 머리에 떠이고 백두의 정기를 뿜으며 방긋 웃는다. 전설의 기분을 떨치고 력사의 물결속에 마음이 젖으니 미인송―라월의 모습은 금빛 투구를 쓰고 조련장에 나선 설웅장군 휘하의 일당백의 군사들로 변한듯 장엄하다.


천자국색(天姿國色)을 자랑하는 미인송은 화산재로 이루어진 토양에 뿌리박고 자라면서 그 어떤 병충해도 범접을 못하는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빠른 속도로 자라고있다. 이것은 오직 백두산의 토질과 백두산의 기후에서만 가능한 대자연의 기적중의 기적이라 하겠다.
백두산의 토질, 백두산의 기후는 백두산의 맥박으로 이루어졌다. 백두산의 맥박은 용암의 분출이다.


대략 1억4천만년전의 연산운동(燕山運動)과 2, 3백만년전의 히말라야(喜馬拉雅)운동을 경과하면서 장백산지구의 4만평방km가 장광재령현무암(張廣才嶺玄武岩)을 형성했다. 그후 군함산(軍艦山)현무암을 이어 2백만년전에 <<백두산조(白頭山組)>> 엄성추면암(嚴性粗面岩), 광평(廣坪)현무암, 빙장조추면질화산각력암(氷場組粗面質火山角礫岩)과 부암(浮岩)이라는 길고 긴 시간의 흐름속에 백두산은 강렬한 풍식(風蝕)작용과 한동(寒凍)풍화작용을 받으면서 화산구의 암석들이 부서지고 쪼개지여 원래의 화산구가 더욱 넓어져 오늘의 백두산 천지의 전신이 이루어졌고 그후 점차 물이 고여 아름다운 천지가 생겨났단다. 대략 61만―28만년전 사이에 화산 용암이 분출되면서 추형이 형성되였다고 고찰자료는 말한다. 8만 7000년―1만 2000년전 사이에 백두산 화산이 재차 폭발하면서 백두산 높이가 더해졌고 분지가 형성되였다. 백두산에서 제일 높은 백두봉은 해발 2749. 2m, 2500m이상의 고봉이 도합 16개로 천지를 둘러쌌다. 백두산의 거친 숨결은 여전히 잠재상태인데 990년전의 백두옹의 가벼운 재채기나 다름없는 화산폭발은 세계급이였다고 한다.


끊임없는 지각운동속에서의 백두산의 맥박에 대하여 <<장백산강강지략(長白山江岡志略)>>은 <<5백년에 한번씩 산은 요동하는데 그것을 듣고 본 자가 있다(每至五百年山卽搖動一次, 聞而見者有之)>>는 전설을 적고있다. <<선조실록(宣朝實錄)>>의 기재에 따르면 1597년 8월 26일에 첫번째 화산이 일어났다.
<<포소리와 같은 굉음에 머리를 들어보니 연기가 하늘을 덮고 무수한 돌이 연기와 함께 산우를 날아 어디로 가는지 알수 없다. >>(동상서)
두번째는 1668년 4월인데 무수한 화산재가 우박 쏟아지듯 했다. (동상서)
세번째는 1702년 4월 14일이였다. <<점심녘에 천지가 갑자기 캄캄해지면서 때에 따라 황적(黃赤)색을 띄였다. 비린내가 집안을 메웠고 불속에 든듯해 사람들은 뜨거움을 참을수 없었다. 4경에 이르러서야 사라졌다. 그제야 바라보니 온통 화산재인데 마치도 조개껍질을 태워놓은것 같았다. >>(동상서) 우박이 쏟아지듯한 재비는 70―140km밖의 조선의 부녕, 경성에 까지 한자두께로 깔렸다고 한다.


오늘 안도현 명월진에 세워진 동상의 주인공 류건봉(劉建封)은 현지사로 부임되여 안도에 온후인 1903년 여섯 사냥군을 거느리고 사슴을 쫓아 백두산에 들어갔다가 괴물이 우는 소리같은 화산폭발의 굉음에 놀라 발목을 잡혔다고 한다. 백두산은 20여시간 재채기를 하는 정도에 멈췄으니 다행으로 살아서 목격담을 <<장백산강지략(長白山崗志略)>>에 남길수가 있었다.


3백여년전에 화산재로 뒤덮였던 산은 이제는 또다시 바다와 같은 푸른 숲이 기복을 이루었다. 하지만 백두산의 숨결이 정지된적은 없었다. 지금도 백운봉아래 암석짬에서 매 2, 3분에 한번씩 기체가 분출하고 구조적 지진도 빈번해 1981년부터 10년사이 계절성 관측에만 따라도 도합 105차, 가장 높은 지진급은 2, 5급이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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