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절 이주상황

1 . 개론

위만주국시기 통계자료는 계통적으로 분류되여 있어 비교적 완전한 수치들을 갖고 있다. 여기서 인용하는 자료는 위만주국국무원 총무청 통계처 또는 치안부 경무사의 통계를 기준으로 하였다. 1932년 재만 조선인 숫자는 보존되여 온 통계수치가 없는데 아마 이것은 위만주국이 갓 설립되여 각항 제도, 사업이 궤도에 오르지 못한 탓일 것이라 짐작 된다. 하지만 기타 서류에는 1932년 재만 조선인수가 적혀있으며 그 정확도에 대해서는 파악이 없으니 다만 참고로 적어보면 56만 4000명(《인구문제연구》 제1권 제3호) 또는 67만,2649명, 그중 남성이 36만 174명이고 여성이 31만 2475명이다. (《재만조선인 현세요람》)

위만주국시기 조선인의 만주이주는 점차적으로 《계획》단계에 접어들었으며 식민지 이주성질이 짙어갔다. 위만주국 건국 초기, 전반 국세가 불온정하여 위정부의 통제력은 약소했으며 이는 조선이주민의 만주진출에서 《무정부》된 상태로 표현되여 만주이주의 고봉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34년 재만 조선인수는 전해보다 11만 명이 늘어난 사실이 증명으로 된다. 하지만 이런 이주 추세는 인츰 인위적인 통제에 의해 끝남을 보았다. 1935년 12월, 만척주식회사가 설립됐고 이듬해 3월에는 만선주식회사가 설립되여 조선과 만주 두 지방에서 조선인의 만주이주를 계획하여 실시하게 되었으며 그 산물로 100만 호 조선인만주이주계획이 해빛을 보게 되었다. 그 결과로 1935년 이후 매년 만주조선인수는 약 8만정도의 규칙적인 장성을 보였는데 원계획에 대비해 차이 나는 부분은 통계오차가 주요한것이라는 주관 느낌이 있다. 1938년 재만 조선인수는 처음으로 100만을 넘었고 1940년에 전해보다 18만을 넘는 놀란 장성을 나타냈다. 이는 아마 1939년 1월에 창설된 개척총국과 다소 연계가 있다고 생각하며 또 만주를 전쟁후방으로 건설하려는 일제의 야심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폭행의 간접적 결과이다.

태평양전쟁에서의 일본의 참패로 인한 일제의 몰락과 1945년 8.15의 무조건투항으로 인해 1943년, 1944년, 1945년의 재만 조선인수는 공백으로 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직접적 악과일 것이다.


2. 지방별인구

1). 간도지방

간도는 만주에서 조선인이 가장 집결 된 곳이다. 1933년말 간도훈춘지방 조선인은 8만 3066호, 47만 2767명이었다.(같은 해 안도현 조선인은 3622호,1만 5205명) 1934년 위 간도성이 설치되었으며 관할 내에 연길, 화룡, 왕청, 훈춘, 안도 등 5개현을 두었다. 1934년말 위 간도성 조선인은 43만 8292명, 간도총인구의 73.09%를 점하며 위만주국 조선인수의 66.12%에 해당하다.1942년에는 62만 227명으로 늘어났으나 위만주국 조선인수의 40.39%에 해당하여 그 비례가 10년 전 보다 대폭 하강하였다. 이는 간도에서의 조선인의 포화상태를 의미하는 동시에 조선이주민의 움직임이 북만에 점차 모를 박은 것과 관련되는 것이다.

1934-1942년 위 간도성 조선인 연 평균 성장률은 4.48%이다. 안도현의 조선인이 가장 빨리 불어났는데 총인구에 해당되는 비례가 1934년의 18.60%에서 1942년의 52.74%로 껑충 뛰여 올랐다. 매년 평균 약 2000명이 증가된 셈인데 이는 1934년 전 현 조선인의 64%에 달한다. 안도의 조선인이주가 지역상 관계로 간도 기타 현 보다 뒤늦게 진행된 탓에 후엔 조선이주민의 주요한 이주지가 되였던 것이다. 왕청현, 훈춘현의 조선인 비례는 안정한 상태였고 연길현은 약간의 상승은 있으나 대체로 원상태였다. 화룡현의 조선인비례는 1939년 전까지 큰 변화가 없었으나 1941년도에 그 비례가 폭락했다.
1934년을 100으로 하는 조선인구 발전 속도를 보면 위 간도성 조선인구발전속도는 1942년에 141.96이고 18만 3930명이 증가되었고 연평균 2만 3000명의 증가를 보았으며 연평균장성률은 4.48%였다. 인구발전속도가 빠른 편이다. 왕청현, 안도현의 연평균장성률이 10%이상이고 연길현과 훈춘현은 3%이상, 조선인비례가 가장 높은 화룡현은 1.6%이다. 전해에 대비한 장성률을 볼 때 위 간도성은 1938년에 인구성장률이 10.05%로서 가장 높고 1937년에 -1.27%의 감소를 내여 가장 낮았다.

2). 관동주 및 만철 부속지

1934년 관동주 조선인수는 2708명으로서 105만 명의 관도주총인구에 비하여 볼 때 0.3%이내를 차지하게 된다. 그 후 약간의 장성을 보아 1936년에는 4025명, 1939년에는 4826명, 1941년에는 6405명이었다.

만철부속지의 조선인수는 별다른 파동이 없이 정지 상태에 있었다. 1932-1934년 3년 사이는 2만 7000명 좌우를 보존했고 1935년 이후 비록 3만 명을 벗어졌으나 큰 장성은 보지 못하였다. 만철부속지의 조선인수는 만철 부속지 총인구의 6%좌우를 차지하는 수준이었다. 조선인은 만철부속지의 안동, 무순, 개원, 신경, 봉천 등 지역에 집결되었다.

3). 돈화지방

돈화지방은 돈화현과 액목현을 가리킨다. 1934년 돈화현 조선인수는 3432명으로서 당시 총인구 6만 7084명의 5.1%를 점한다. 위만주국 건국 초기에 비해서는 700명이 늘어났다. 1936년에 이르러 조선인수는 4567명으로서 전해보다 522명이 증가되었으며 장성률은 13%이다.

1934년 액목현 조선인수는 6076명으로서 총인구 11만 2557명의 5.4%에 해당하다. 1936년에는 1만 246명으로서 전해보다 1121명이 늘어나 성장률은 8%에 달했다. 1948년 액목현을 철소하고 돈화현에 귀속시켰다. 1958년 10월 돈화현을 연변 주에 귀속시키였고 1985년 2월에는 돈화시로 개칭했다.

3. 원적지별인구

재만 조선인의 대부분은 조선북부에 원적지를 두고 있다. 특히 함경북도인이 많은 비례를 차지한다. 1932년 12월 경우, 49만 7000여 명 재만 조선인 중 44만이 조선북부에 원적을 두고 있는데 이는 재만 조선인수의 88.3%를 점한다. 함경북도인은 약 30만 명으로서 재만 조선인총수의 60%를 점한다. 기타 지방에 원적지를 둔 재만 조선인의 비례는 모두 10%이하이다. 조선남부에 고향을 둔 재만 조선인은 5만 7000여 명으로서 총인구의 11.7%, 그중 경상북도인이 가장 많았다.

만주의 부동한 지역에 따라 남, 북부 조선인의 분포가 다르다. 남만지역에 있어서는 북선인이 90.8%, 남선인이 9.2% 전하나 북만지방에 있어서는 북선인이 48.1%, 남선인이 51.9%를 차지한다.

더 상세히 적어보면 조선이주민이 1934년 7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직접 북만지방에 들어선 경우 대부분이 북만 동부지역에 밀려들었으며 송화강 하류지역에 정착한 자는 극히 적었다.


제3절 인구변동

1.자연변동

재만 조선인의 출생률은 내려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1910-1931년 조선인 출생률이 35‰를 넘은 상황에 비해 이 시기 조선인 출생률은 30‰이하로 내려갔으며 이 추세를 계속 보존하고 있었다.

재만 조선인의 출생률은 지역에 따라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이는 도시와 농촌의 비례가 중요한 요소인 것 같다. 대비하여 보면 조선내지의 출생률은 계속하여 높은 수준을 확보하고 있었고 이는 1911-1931년의 재만 조선인의 출생수준과 비슷하다.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따르면 조선내지의 출생률은 1938년에 36.1‰, 1939년에 36.9‰, 1940년에 32.0%, 1941년에는 33.3%이다. 만주조선인의 출생률은 1938년에 29.0‰(통계처 숫자), 1939년 27.6‰, 1940년에 25.9‰로서 지난 시기에 비해 대체로 10개 천분점이 내려갔다. 관동주 조선인출생률은 만주조선인의 약 절반 수준이다. 1939년에 13.0‰, 1940년에 14.0‰, 1941년에 17.3‰, 1942년에 18.5‰이다.

재만 조선인의 출생수를 보면 1938년에 2만 7054명(그중 남자 1만 4813명, 여자 1만 2241명)이다.

재만 조선인의 사망률은 큰 변화가 없다. 약간의 차이는 통계오차라고 생각한다. 조선총독부의 수치에 의하면 1938-1941년 조선내지의 사망률은 각각 17.5‰, 18.7‰, 18.0‰, 16.8‰이고 위만주국 통계처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재만 조선인의 사망률은 1938-1940년에 각 18.4‰, 19.2‰, 15.9‰로서 조선내지와 비슷하다. 관동주의 조선인 사망률은 낮은 편이다. 1939-1942년에 각각 10.3‰, 9.3‰, 11.4‰,8.1‰이다. 재만 조선인의 사망절대수치를 보면 1938년에 1만 7156명 (남자 9091명, 여자 8065명)이다.

종합하여 인구 자연 성장률을 보면 조선내지의 자연 성장률은 1938-1940년에 순차로 10.6‰, 8.4‰, 10.0‰이며 관동주 내 조선인 자연 성장률은 1939-1942년도 순차로 2.7‰, 4.7‰, 5.9 ‰, 10.4‰(?)이다. 전쟁원인으로 하여 다소의 오차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특히 편벽한 농촌에 있어서는 조사의 어려움이 커질 것으로 느낀다.

아래에 간도 현별 조선인의 자연변동을 적어본다.(표1-05-9) 간도조선인의 출생률은 당지 만주인보다 낮다. 1940년 간도조선인의 출생률은 12‰,사망률은 9‰, 이듬해인 1941년의 출생률은 15‰, 사망률은 10‰이다. 이는 만주인 보다 출생률은 약 5개 천분점, 사망률은 약 7개 천분점이 낮은 편이다. 간도에 있어서 조선인출생률은 통계숫자보다 높을 것이고 당시 한명의 부녀가5-6명의 자식을 둔 것을 감안해 볼 때 이 점은 이해가 갈 것이다. 각 현의 상황에서 보다싶이 조선인의 남성사망률이 여성보다 높다.


2. 기계변동

재만 조선인의 기계변동은 만주에로의 이주 및 조선귀환과 만주내의 이동 두 가지 형태로 표현된다.

1). 이주 및 귀환

조선인이 만주에 수시로 이주하는 동시에 상당한 수량의 재만 조선인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하여 조선에로 되돌아갔다. 1938년 당시 5만 3984명(남자 2만 9501명, 여자 2만 4483명)이 만주이주를 행함과 동시에 1만 8441명(남자 1만 285명, 여자 8156명)이 고국 에 돌아감을 선택하였다. 이주로 하여 증가된 조선인수는 3만 5543명으로서 이는 자연장성수의 4배의 수준에 달하여 당시 재만 조선인총수의 3.4%이다.

지역별 상황은 1934년 7월-1935년 6월의 자료를 예로 들자. 이주역사의 관계로 1934년에 이르러 간도지방은 이미 이주포화상태였기에 이 시기 새로운 이주자는 남만과 북만지대에 휩쓸렸다. 더욱이 북만이 새로운 이주 중점지로 변하였다. 조선에서 북만에 새로 이주한 호수는 4578호, 인구는 1만 7591명이다. 동시기 남만지대 이주 조선인은 3402호, 1만 5649명이고 간도지방에는 1676호, 6852명이었다. 합하여 보면 9656호, 4만 12명이 만주에 새로 이주하였다. 같은 시기 조선에로 돌아간 재만 조선인은 남만지역에 가장 많았다. 948호, 4247명 남만조선인이 귀환의 길을 선택하였으며 간도에도 1000명을 넘는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북만지역은 새로운 이주 열점지였기에 귀환하는 자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 시기 6명의 만주이주자가 있으면 약 1명의 귀환자가 생기였다. 이런 추세는 금후 몇 년간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2). 이동

재만 조선인의 이동은 생활의 불안정성을 말한다. 특히 새로 타 지방에 이주한 자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1934년 7월-1935년 6월 간도지방의 천입 수는 천출보다 적다. 남만지역은 천입수의 절반가량의 천출수를 보았으며 북만지역은 천출수가 천입수의 5분의 1 정도였다. 할빈, 길림지방에 많은 천입 자가 집중되었으며 신경에 천출 자가 비교적 많았다. 이는 농민출신의 조선이주민이 도시의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운 측면이 작용한 것이라고 느낀다.

이 시기 간도지방에는 연길현에 이주자가 집중되었고 간도에 천출자가 가장 많았다.

제4절 시가지인구

만주 9.18사변 후 재만 조선인의 시가지인구는 급속히 늘어났다. 조선인의 주요 집거구인 연길은 인구가 4배 늘어났고 봉천, 길림, 할빈, 안동 등 시가지의 조선인수도 정도 부동한 장성을 보이었다.

아래에 1938년 인구가 10만을 넘는 도시 (봉천, 할빈, 신경, 안동, 무순, 영구, 안산, 길림, 금주, 목단강)의 조선인구의 변화를 살피겠다. 인구의 절대수를 보면 조선인수는 1933년의 3만 7000에서 1938년의 8만 2000명으로 급증했다. 그중 1936년, 1938년은 전해보다 1만 5000명을 벗어나는 장성을 보이고 있다. 장성률을 보면 조선인은 일본인 보다 낮으나 만족인 보다는 높으며 총인구의 장성률 보다도 높다. 1936년 만주 대도시 조선인 장성률은 234‰를 기록하여 최고치를 이루었다.

대도시의 조선인이 총인구에 점하는 비례는 늘어나는 추세였다. 1933년은 6.3% 였으나 1938년에 이르렀어는 7.7%를 확보하였다. 상반대로 일본인의 상황은 줄어드는 추세였다.

간도는 조선인이 가장 큰 집거구로서 주요 시가지의 최신자료는 1943년 6월말의 것이다 (표 1-05-13). 주요 시가지의 조선인수는 모두1 만 명을 넘으며 간도시와 용정가의 조선인수는 4만 명에 가깝다. 위 간도성의 시가지 조선인수는 17만 7000명으로서 시가지 총인구의 63.3%, 위 간도성 조선인의 27.9%이다.


제5절 인구자연구조

1. 연령구조

재만 조선인의 연령별인구자료가 이 시기 처음으로 있게 됐다. 표1-05-15는 1935년말 자료인데 이에 의하면 만주조선인 중 0-14세 인구가 27만2198명, 소년아동부담계수는 59.83이고 50세 이상 인구는 16094명, 노인인구부담계수는 3.57이다. 남성인구를 보면 총 부담계수는 57.08이고 소년아동부담계수는 53.88, 노년인구 부담계수는 3.2이다.

보다싶히 재만 조선인남성의 연령부담계수, 소년아동인구부담계수, 노년인구 부담계수 등은 모두 재만 조선인여성 보다 낮다. 조선인 인구를 위만주국총인구에 비하여 볼 때 연령부담계수는 31.30의 백분점이 낮고 소년아동부담계수는 23.66의 백분점이 낮고 노년인구부담계수는 7.64의 백분점이 낮다.

재만 조선인의 성별(省別)연령인구에 대해서는 자료로만 남겨두고 분석은 일일이 하지 않겠다. 다만 조선인의 최대집거구인 위 간도성의 상황에 대해서는 문자로 남긴다.

1941년 10월 위간도성 조선인인구는 61만1728명이었다. 그중 0-15세 인구는 17만3544명, 16-49세 인구는 35만517명, 50세 이상 인구는 8만7567명으로서 총인구에 점하는 비례는 각각 28.37%, 57.30%, 14.33%이다. 소년아동비례가 상대적으로 낮다. 인구재생산 유형은 성장형과 정지형 사이에 있다. 65세 이상 인구는 1.8만 명, 노년인구계수는 2.94%, 노소비례는 10.37%, 연령중위수는 20.58세로서 기본상 젊은형에 속하나 소년아동계수가 낮다.

15-49세 조선여성인구는 144474명으로서 총인구의 23.62%를 점하며 총인구의 상응치보다 좀 높다. 소년아동부담계수는 41.3%, 노년인구부담계수는 4.28%, 총 부담계수는 45.58%로서 매우 낮은 수준을 확보하였다.

현별 조선인인구구조를 보면 15세 이하 소년아동비례가 훈춘이 43.5%로서 가장 높고 왕청 32.28%로서 가장 낮으며 61세 이상노년인구가 점하는 비례는 화룡이 6.24%로서 최대치를 이루고 훈춘이 1.98%로서 최소치를 이룬다. 16-50세 부녀가 점하는 비례는 22% 좌우이며 화룡(24.34%), 훈춘(21.66%)이 극치를 이룬다.

2. 성비례

1933년 재만 조선인의 성비례는 113.5로서 비교적 높다. 그 후 별다른 큰 파동 없이 점차 상승해 1942년에는 118.1이었다.

각 성마다 성비례 차이가 크다. 간도성은 1935년에 108.3을 기록한 것으로 평균치보다 낮다. 조선인이 비교적 많이 집결된 안동과 봉천의 조선 인구성비례는 각각 127, 119이다.

위 간도성 각 현의 조선인구 성비례는 큰 차이가 없다. 이는 전체인구의 성비례 상황과는 다른 점이다. 연길현과 화룡현 조선인구성비례는 모두 110상하에서 움직인다.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성비례는 자연장성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지만 주되게는 기계변동의 영향이 크다. 왕청현과 안도현의 조선인구 성비례가 파동이 심한데 이는 왕청, 안도지역은 조선개간민이 뒤늦게 진출한 지역으로서 용정, 화룡에 비하여 기계변동이 심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연령별 성비례를 보면 저령 연령조의 성비례가 보다 합리하다. 1941년 재만 조선인 1-5세 성비례는 108.4, 6-10세 성비례는 113, 11-15세 성비례는 122이었다.

위 간도성의 조선인구 성비례를 보면 29세 이하 인구 성비례는 대부분이 총인구평균수치 보다 낮다. 각 현의 성비례는 이민의 영향으로 그 높고 낮음이 결정된다. 같은 연령조의 성비례는 부동한 현에서 부동하게 표현된다. 지리위치, 환경, 생산조건 등이 각이하기에 부동한 변화를 나타나는 것이다. 연길현의 10세 이하, 16-50세 연령조의 성비례는 총인구 성비례 보다 낮은 바 총인구성비예의 실조는 50세 이상 인구로 인해 조성되었다. 특히 1-5세 인구의 성비례는 자연인소의 작용을 그대로 반영하였으며 기계변동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가지조선인성비례는 조선인이 1만 명을 넘는 위 간도성의 용정이, 도문가, 훈춘가를 분석하겠다. 도문가의 1936년 말 조선인수는 1만 7478명, 성비례는 106.74였다. 0세의 성비례가 100을 넘으나 그 후 1-4세까지 100아래로 내려갔다. 남자의 사망률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후 60-69세에 와서 성비례가 재차 100아래로 하강하였다. 용정가는 조선인이 1만 7448명, 총인구의 75.97%를 점한다. 20세 이전의 성비례는 정상적인 평형을 이루었으며 그 후 연령단계부터 점차 상승을 긋다가 60세부터 남자보다 많아졌으며 만년에 와서 남성사망률이 여성보다 높아졌다.

훈춘가는 훈춘현의 주요한 시가지로서 당시 인구는 1만 5668명, 성비례는 132.92이었다. 조선인성비례는 109.82로서 총인구보다 낮다. 연령별 성비례는 0세와 1세의 차이가 너무나 현저하며 고령단계의 성비례도 100을 훨씬 넘는 특징을 보유하였다.


제6절 조선인직업

1. 개론

위만주국이 설립된 후 일본이 만주에 대한 통치는 체계화에 진입하여 각종 통계자료 에 대한 조사가 본격화 되여 조선인에 대한 관한 자료가 어느 정도 풍부해졌다. 부동한 기관에서 수차의 인구통계를 진행하였으며 비록 자료들 사이에 편차가 있으나 이는 우리가 당시 만주조선인사회를 요해하는 중요한 경로이다. 위만주국초기 인구조사는 극히 어려운 환경에서 진행되여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통계에서 빠졌으며 이로하여 당시 조선인상황을 파악하는데 일정한 어려움을 늘이었다. 1934년 6월 당시 재만 조선인 직업조사에 등록된 조선인은 43만으로서 당시 77만 7000이라는 재만 조선인의 56%밖에 안 되었다. 이런 상황은 만주통치가 제도화됨에 따라 신속히 극복되여 1936년에는 99% 이상의 재만 조선인이 직업별통계에 올랐다.

만주지역으로 볼 때 농업은 여전히 재만 조선인의 가장 중요한 직업이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비례는 내려가는 추세이다. 이와 반대로 일본의 만주통치가 깊이 뿌리 내림에 따라 이와 관련되는 업종의 재직조선인이 늘어났다. 1934년 농업에 종사하는 재만 조선인은 33만 7000명, 1936년에는 31만 3000으로 줄었고 2년 사이의 총인구의 장성을 고려할 때 줄어드는 폭은 현저한 것이다. 은행직원, 관공리는 1934년 3500여 명에서 1936년 8000여 명으로, 학교교원, 의사는 1900여 명에서 3300여 명으로 부쩍 늘어났다. 일본측 고용인도 3만 4000여 명 정도를 보존하였다. 조선인의 생활이 어느 때 보다도 다소 안정되여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시기 재만 조선인직업에 관한 자료는 부동한 기관에서 부동한 년대에 얻은 것들이 많다. 따라서 사료들 사이에 차이점도 있고 오차도 심하여 어느 것을 기준해야 한다고 단언하기 어려운 형편에서 일본외무성에서 발간한 《재만 조선인개황》에 실린 1934년 6월 재민조선인 직업 분포표와 재만조선인 연합회에서 발행한 《재만조선인 현세요람》에 기재되어 있다.

2. 지방별직업인구

농업에 종사하는 약 10만 호 재만 조선인 중(1934년도) 간도지방에 5만 5600호로서 가장 많고 동변도 지방에 2만 3000호, 북만지방에 1만 3000호, 이밖에 길림, 돈화, 신경을 중심으로 8만 5000호가 있으며 흥안성 이하 각 지방에 500호가 있다.

상업에 종사하는 조선인이 4000호를 벗어지는데 안동, 봉천, 할빈, 연길, 도문 등 시가지역에 집중되었으며 큰 자본을 경영하는 자는 극히 적고 대부분이 소매상에 불과했다. 각 시가지 및 부근에는 정미업자가 뒤따랐으며 여관업과 음식업, 곡물상, 잡화상 등은 어느 지역에서나 번영되는 기본업종이었다.

기타 목축업, 어업에 종사하는 조선인은 극히 적어 해라얼, 간도, 안동, 금주, 할빈지방에 수 십 호로 계산될 뿐이다.

봉천지방 절반을 넘는 조선인은 수전을 위주로 하는 농업에 종사한다. 봉천, 무순, 본계호, 요양, 안산, 개원, 청령 등 시가지역에 소규모의 상업경영자가 있고 요리점, 정미업에 종사하는 조선인이 100여 호로 호황을 보였으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늘어나는 추세였다. 특히 주목될 점은 일본고용인으로 일하는 조선인이 1500여 호로서 농업 외 가장 큰 업종으로 되었다.

신민부지방 약 90%의 조선인은 농업에 종사하며 동아권업주식에서 새기꼬기를 부업으로 하고 있었다. 신민, 대호산, 장무, 대안 등 도회지 거주민 중 16호 정도가 노임계층에 속하고 기타는 물품판매 및 기타 상업에 종사한다. 30호 물품판매업자도 일본관헌에게는 금지물 밀매업자로 지목되여 전업 또는 전이가 불가피했다.

통화지방 5200여 호 중 4200여 호가 농업에 종사한다. 겨울의 부업은 양계에 불과했다. 시가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여관업, 음식업, 정미업, 요리업, 고기판매업, 장화상 등에 종사하며 본 지방은 남만의 곡창이기에 정미업, 쌀장사 중계업이 활발히 진행되였으나 큰 발전은 보지 못하였다.

해룡지방 약 90%의 조선인이 농업에 종사하며 상공업자는 6%를 좀 벗어나며 정밀업을 제외하고는 수백 원 정도의 소자본으로 운영하는 상황이다. 타지방에 비해 은행, 관공리, 교원, 의사의 비중이 크다.

도록지방 서풍현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수전을 위주로 하는 소작농이며 시가지역에는 극소수의 조선인이 여관, 음식점을 경영하였고 농업 외 기타 산업은 거의 공백이었다.

영구지방 1300여 호 조선인 중 80%이상이 농업에 종사했고 도회지 거주자는 관공리, 회사직원, 공상업자이다. 도회지 거주 조선인은 거의가 중국인과 잡거하는 조선인을 상대로 일용잡화, 입쌀, 고무제품, 마른 고기류의 판매에 그치였다. 정미소가 영구에 2개소가 있었다.

안동지방 조선과 인접된 지역으로서 내왕이 빈번하였으며 농업에 종사하는 조선인은 9500여 호로서 70%를 좀 벗으나 그 비율이 기타 지역보다 낮다. 안동철도연선 및 압록강 하류지방에서는 겨울에 까래 깔고 새끼 꼬는 부업을 하였다. 공업으로는 고무신공장이 육도구에 두개소, 칠도구에 한 개 소가 있었다. 은행직원(82호), 관공리(98호), 교원(89호), 의사(61호)의 비례가 높았다.

금주지방 약 30호의 조선인이 수전에 종사하고 있으며 요리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상당히 부유한 재력을 소유하였으며 잡화상, 어업, 상점원 등에 종사하는 이가 있었다.

길림지방 2800호 조선인 중 약 90%가 농업에 종사한다. 상업은 잡화상, 요리점, 여관업, 음식점을 위주로 하며 요리점은 상당히 활기를 띠고 있었다.

돈화지방 상공업은 잡화, 곡물, 천, 쌀, 목탄 등을 위주로 하였으며 후에 있어서는 주요 특산물이 장춘을 경유하여 대련방면에 수출되었으며 1933년 10월 경도선이 개통 이래 조선과 밀접한 상업내왕을 가졌다. 조선측으로부터 철물, 천, 잡화, 기타 상품이 들어왔으며 상점출장소도 설치되여 조선인상업계는 상당히 활발한 활기를 띠었다.

신경지방 관내 조선인은 2661호, 시가지거주민은 1224호이다. 이들 중 일본측 및 위 만주국측의 관리 및 은행직원으로 일하는 조선인이 늘어나고 있었으며 거이민 대부분은 소자본의 상공업자, 점원, 직원이었다.

신경에 있어서 정미업은 조선인의 독점업종이였으나 그후 에는 일본 대자본의 충격을 많이 받았으며 사평가에 있어서는 대 한국물산수출상으로 한때는 만주에서 꼽는 직위에 있었으나 평제(平齊) 선 오지의 개발로 하여 이왕의 성황을 잃게 되었다.

할빈지방 약 1만 5000호 조선인 중 1만 1000호가 농업에 종사하는데 수전을 위주로 하고 있었다. 철도연선의 도시거주자들은 의사, 정미업, 여관, 요리업 등에 종사하는 자가 많으며 북만철도, 위만주국 각 기관에서 임직한 자도 상당한 수량에 달했다.

수분하지방 조선인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여관, 요리점 경영에 근근히 3호가 있었다.

치치할지방 2500여 호 조선인 중 2000호가 농호이며 약 8%의 도시거주민은 정미업, 잡화상, 여관, 음식요리 등 10여종 업종에 종사하고 있으며 쌀장사 이외는 별로 진전이 없었다.

정가툰지방 80%소작농외 관공리, 교원, 의사, 상업, 여인숙, 요리점, 정미업자가 많았다.

적봉지방 35호의 조선인에 비해 5호란 높은 비예의 요리점경영 조선인이 있었다. 21호가 농사에 종사했다.

승덕지방 104호 조선인 전부가 비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22호가 요리점을 경영하고 19호가 은행직원으로 있었다. 이밖에 의사, 여관, 약방, 사진업, 술집여자 등에 종사하는 조선인이 있으며 철도공사, 토목공사에서 일하는 조선인이 많았다.

해라얼 조선인직업 중 목축업노동자가 첫자리를 점하며 농업이 버금으로 간다. 관공리외 기타는 자금이 없는 노동자가 대부분이다.

만주리지방 재류조선인 중 관리, 농업, 술집 녀, 일본측고용인이 주요한 직업을 이루며 관리 외 기타 조선인은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다. 총 호수 33호 조선인 중 13호가 농사짓고 상공업종사자는 없는 상황이다.

간도지방 조선인집거구로서 철도연선의 시가지역에 일부 상공업자가 있는 외 80%이상의 조선인은 다른 지방과 다름없이 농업에 종사했다. 상공업도 조선인의 손에서 뚜렷한 발전을 보지 못했다. 공업은 산림을 배경으로 제재업을 비롯해 그릇(器具)제조가 있었고 주요 농산물을 원료로 하는 소주제조, 기름가공은 모두 중국인이 경영했다.

대기업은 강재후(姜載厚)등에 의하여 설립된 동남농사주식회사(1934년 4월 7일 설립)가 있었다.

용정촌에는 수출입무역에 종사하는 조선인은 드문 상황이였고 철도연선의 작은 시가지역에서는 정기로 장날을 보았다.

투도구는 용정촌의 경우와 다름이 없으며 총호수의 85% 조선인이 농업에 종사한다. 공업으로서 조선술, 양말, 농구 등 소규모의 제조업이 있었다.

연길에는 상공업에 종사하는 조선인이 극히 적으며 일부 곡물상, 천, 목재상을 제외하고는 조선인 상대의 소매상에 불과했다. 금융업으로는 국자가무역주식회사가 있으며 개인경영으로는 정미공장, 자전거수리공장이 있었다.

배초구의 주요상업으로는 일용잡화, 피복, 잡곡, 마른 고기매매상이 있으며 공업은 대장간업, 농구, 가구의 제조가 있을 뿐이다.

도문시가지역에는 여관업, 요리업, 음식점이 제일 많고 공업은 제재공장, 목공장 등이 있다.

훈춘지방은 훈춘, 하달문, 마적달, 토문자 등 작은 시가지역에 일부 상공업자, 공관리, 교원, 음식점경영자와 노동자를 제외하고는 농업에 종사하는 조선인이 80%이다. 공업은 그릇(器具), 농구, 우마차의 제조 및 수리에 불과했다. (이상에서 인용한 숫자는 1934년 6월을 기준함.)

만주 9.18사변이전과 다름없이 시가지조선인의 직업은 여전히 여관, 요리점, 음식점과 농산물과 관련된 가공업이 기본업종으로 보존, 계승되여 있으며 점차적으로 공업에로의 전환과 관공리에로의 취직이 증가되고 일본측고용인도 점차 늘어나는 경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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