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연산의 장편인물전기>

가난한 사람은 가난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었다. 소 갈데 말 갈데 가리지 않고 일했지만 개미 채 바퀴 돌리듯 한자리 뜀이었다.

만선척식회사에서 소작을 맡은 땅이라야 가뭄에도 수해를 본다는 수렁논이었다. 그래서 가을에 탈곡을 마치면 회사에서 여름에 대부해준 좁쌀(小米) 빚을 물고 나면 벼 짚가리만 덩실하니 남았다. 이번에는 빚 때문에 야밤삼경에 솔가도주를 했다. 만선척식회사에서는 빚을 진 소작농에 한하여 절대 이주를 불가했던 것이다.

그들은 구태현 경양촌 신개령(九臺縣慶陽村新開嶺)에 이사 짐을 풀고 중국인 지주 주희의(朱希義)의 논을 소작 맡았다. 그러나 수원이 없어서 천수(天水)만 고대하다보니 결국 볏모도 못하고 폐농(廢農)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더는 남의 농토에 목숨을 걸고 덧없는 세월에 소망을 붙들어 맨 턱없는 생활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산 사람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선 식구들 저마다 생존의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큰형은 장사를 떠나고 둘째형은 신경에 가서 제과공장에 취직하였다가 뒤미처 구태현공서 연무고(九臺縣公署煙務股)에 취직했다. 재호씨도 신립툰(新立屯)에 있는 만선척식회사의 구태농장(九臺農場)에 가서 김매는 삯품을 팔기도 하고 음마하(飮馬河) 강둑 공사에서 측량을 하는 일을 하고 백화상점에서 점원도 하면서 전전긍긍하다가 19살 되던 해에 경찰모집에 응시했다. 시험에 합격되고 3개 월 간의 훈련을 거쳐 드디어 구태경찰서(九臺警察署)에 배치되었다.

박재호씨는 만주국의 경찰이 된 것이다. 만주국이 일제의 식민지 국가이고 경찰의 임무가 만주국의 통치질서를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는 친일파 행렬에 끼인 것이다. 그것도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원으로 시험을 쳐서 말이다.

박재호씨는 <<자서>>에서 <<훈련기(訓鍊機) 단련이 바빴으나 밥통이니 극복하고 난 나머지 취직한 것이다.>>라고 변명을 하고 있다. 얼마나 호구지책(糊口之策)이 어려웠으면 구직(求職)에만 천방지축(天方地軸) 헤맸으랴.

그는 꼭 1년 반을 경찰을 살았다. 세 개의 언어에 능통한 덕분에 월급승진(越級昇進)하여 경위로 되었다. 그가 맡은 일은 구태시내의 조선인 상대였다. 그러나 일제 괴뢰 경찰복을 입었어도 마음속엔 정의가 살아서 주어진 권리의 한도 내에서 바른 시비를 들었다. 농장주임의 친구가 주정을 부리다가 자위단(自衛團)에 걸린 것을 중개해 나서기도 했고 사법대서(司法代書) 최영화(崔泳華)가 대서비(代書費)를 더 받은 것을 돌리게도 했다. 그리고 구름다리 공지를 지나다가 노동자를 때리는 일본인 감독을 팬 것이 화근이 되어 일본인 경무주임(警務主任)한테 취조를 당하고 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그는 실천을 통하여 식민지 천하에서 정의란 있을 수 없고 피압박 민족한테 자존심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드디어 깨달았다. 다시 말하면 통치 국가의 이익이 곧 정의이고 피압박 민족은 생존을 위해서는 통치 민족 앞에 무조건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이같이 시비가 전도된 사회는 절대로 양심을 가진 사람의 입지(立地)를 할애하지 않는다는 것도 통감했다. 그는 결국 경찰을 사직하였다. 일제의 통치를 뒤엎고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쟁취하지는 못할망정 더 이상 비뚤어진 사회의 비뚤어진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자신의 존재가 보탬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939년 그는 일본으로 고학의 길에 올랐다. 1년 반 경찰 퇴직금은 고스란히 여행비용에 충당되었다. 교도(京都)에 발을 드린 순간은 이국타향살이의 서러움과 고생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그는 조선인이 경영하는 세탁소에 몸을 기탁하고 낮이면 배달 일을 하고 밤이면 YMC에 가서 영어공부를 했다. 그런데 첫날부터 주인은 재호씨의 식사 량이 많다고 푸념이었다.

<<일은 서푼어치 하면서 소 깔 먹듯 하니 걱정이다. 너 같은 일군 하나만 더 있으면 우리 집이 거덜나겠구나.>>

재호씨한테 배고픈 설음은 제일로 컸다. 20살 한창 나이라 금방 술을 놓고 돌아앉으면 배가 고팠다. 그러나 주인의 눈총이 무서워서 한끼라도 배불리 먹을 수가 없었다. 허구한 날 일은 소처럼 하고 밥은 소금 녹이듯 하려니 그 고통을 참고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노동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밤중에라도 배달을 다녀와야 하므로 늘 발 편 잠을 자지 못했고 또한 잠이 부족했다. 그리고 차고 습한 방구들이라 한지 잠을 자듯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좁쌀에 뒤웅박 판다는 속담이 무색할 정도로 인색한 주인이라 장작을 아끼노라 일군이 자는 방에는 거의 불을 때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는 끝내 동경 행에 올랐다. 동경에 가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일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넉넉한 학비를 벌어서 시름 놓고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이왕이면 동경에 가서 부딪쳐보리라는 용기 하나를 안고 떠난 걸음이었다.

동경에 이른 그는 곧장 박소진(朴昭鎭)씨를 찾아갔다. 그는 같은 종씨이고 구태에 있을 때부터 서로 면목을 알고 지냈던 사이었다. 그는 구태를 떠나기 앞서 그 형 박홍진(朴洪鎭)씨를 통해 동생 소진이의 동경 주소를 알아두었던 것이다.

박소진의 선친 고향은 경상북도 경주군이고 그의 고향은 만주 길림성 서란현 대북차였다. 음력(1919년 12월 20일)으로 하면 재호씨 보다는 한 살 위였지만 양력(1920년 2월 9일)으로는 동갑나이였다. 소진이는 간도성 왕청현 하마탕에서 일본군 주방원으로 2년여 산 경력을 갖고 있었다.

박재호와 박소진의 만남은 19살에 이루어졌다. 일본군 수비대의 일을 접고 하마탕 돌아와서 농사일에 열중하던 중 길림성 영길현 우라가(吉林省永吉縣烏拉街)에서 유희장(遊戱場)을 경영하는 자형 권오상(權五相)의 부름을 받고 온 후의 일이었다.

그 번 동경에서의 상봉은 두 번째의 만남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랜 지기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고 스스럼없었다.

<<잘 왔네. 따로 방을 얻을 생각을랑 접고 함께 있기로 합세.>>

박소진은 워낙 소탈하고 호남아다운 성격이라 만나자마자 친구를 잡아둘 생각부터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소진은 혼자서 방 한 칸을 세 맡아 살고 있었다. 원래는 친구 최성순(崔性純)씨 하고 함께 들었었는데 박재호가 도착하기 얼마 전에 동경에 살고 있는 자신의 둘째 형님한테로 자리를 옮겼던 것이다.

박재호로서는 소진의 만류가 얼마나 다행하고 감사한 일인지 몰랐다. 당장 돈도 없고 갈 곳도 없는 처지로서 체면을 챙기다가는 한지에 나가 거지가 될 판이었다.

며칠 후 재호씨는 박소진의 소개로 최성순(崔性純)씨를 사귀었다. 그 역시 1920년 생으로 동갑이었다. 고향은 경상북도 충주군, 8살 나던 해에 길림성 서란현 횡도하자(舒蘭縣橫道河子)로 이주해와서 한족 지주의 소를 먹이는 목동을 살다가 11살 때에야 겨우 학교로 갈 수 있었다. 최성순은 자기가 일하던 신전구대우 독매신문판매소(神田區大隅讀賣新聞販賣所)를 알선했다.

신문배달은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공부하기에는 적합하였다. 그 대신 월급이 적었다. 고작 16원, 그것으로는 여러 가지 용비(用費)를 해결하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주인은 독자를 확장하라고 강요했고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돈이 되는 쪽으로 생각을 돌려서 독매신문본사의 발송부에서 야간노동을 선택했다. 월급은 42원, 경비를 해결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노동시간은 밤 12시부터 아침 8시까지였다.

그리고 낮 시간에는 삼기영어학교 연교학관(三崎英語學校硏敎學館)과 준하대고등예비학교(駿河臺高等豫備學校) 등을 다니면서 중둥학교 고급반에 편입할 공부를 하였다. 밤이면 일하고 낮이면 공부하고 --- 하루 이틀도 아니고 꼬박 1년을 하고 나니 신경쇠약증에 걸렸다. 병원에 갔더니 밤잠을 자지 못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문배달을 버리고 낮에 하는 길닦이 막 노동판에 나갔다. 하루 품삯이 3원일 때도 있고 3원 5십전인 때도 있어서 수입은 짭짤했다. 그러나 육체를 혹사하는 노동이라서 도저히 밤에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때 길림성 영길현과 길림 등지에서 십여 명이 동경에 고학을 와 있었는데 그들의 생활처지가 비슷비슷했지만 박재호와 생각을 같이 한 사람은 그래도 박소진과 최성순이었다.

최성순이가 만년에 쓴 자서전에서 당시의 그들의 내심을 표현한 부분을 보기로 하자.

이때 가장 가까운 동무라면 상술한 세 사람 박소진, 황재식, 박재호였다. 우리들은 모두 배일사상(排日思想)이 있었고 또 조선독립사업에 공헌하려 하였지만 그런 계통을 찾지 못하였다. 다만 사상 상으로 일치하였고 하루 빨리 일본이 패망하기만 고대하였다.

그들 셋은 일본이 조만간에 망한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최성순씨는 후일 <<그것은 당시 쌀이 통제되며, 휘발유가 통제되며, 학도병을 뽑으며, 지어 4백도 안경을 쓴 사나이까지 병정으로 몰아내는 것을 보고 짐작한 것이었다.>>고 썼다. 박재호씨도1942년 2월 2일에 일기에 <<동양대화근(東洋大禍根)인 마귀(魔鬼)는 날로 하늘의 도(道)며 지성(至誠)의 힘으로 망(亡)하고 있는 이때 우리들 동아(東亞)에 있어서 그 유일한 화근(禍根)의 적(敵)을 멸망(滅亡)시키고 저 하던 바 진심으로 기쁨을 마지않는다.>>라고 일제의 패망을 확신했다. 동시에 반일구국사상을 의(義)로써 표현하면서 <<이불의생유취천재(以不義生遺臭千載 불의로 살면 천추에 더러움을 남기고), 숙약이의사유방백세(孰若以義死流芳百世 누가 만약 의로써 죽으면 아름다운 이름이 백세에 남는다)>>고 썼다.

그들은 이같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갈망하였지만 어떻게 자주독립을 할 것인가 하는 구체문제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만 모든 조선 인민을 일본제국주의의 발 밑에서 끌어낼 수 있는 영웅인물을 찾으려 했고 그런 인물에 의거하여 조선을 구하려는데 불과했다.

동시에 김동인의 <<젊은 그들>>, 이광수의 <<흙>>, 이은상의 <<무상(무常)>> 등을 돌려보면서 애상적인 감상에 젖기도 했다. 이은상이 사랑하는 동생 정상(正相)을 여위고 쓴 <<무상>>과 같은 인생에 대한 허무한 탄식은 앞날이 보장되어 있지 않고 매일매일 고된 노동과 학습에 시달리는 그들한테 아주 쉽게 감동을 주기도 했던 것이다.

1942년 박재호와 박소진는 만몽전문학교(滿蒙專門學校)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사립이며 영업을 목적으로 하고 경영하는 단기 전문학교였다. 주요한 과목은 한어(漢語)과 몽골어였고 졸업생들은 쉽게 취직이 되었다. 다재다능하고 공부에도 열심히 하여 무난히 동경고등예비학교를 거쳐 중학교를 졸업한 박재호는 원래 지망하였던 조도대학 정경과(早稻大學政經科)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학교는 성적이 좋으면 일년이면 졸업할 수 있었으므로 조기 귀가에 적합했던 것이다. 그리고 구두시험으로 합격을 결정하였으므로 입학도 쉬웠다.

<메인의 왼쪽 수필-메뉴에서 1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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