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칼럼>

‘한국에서 단일민족을 너무 강조하는 것은 국제적인 기준으로 볼 때 인종 차별적 행위에 해당할 수 있으므로 정부가 다른 인종 국가 출신에 대한 차별을 근절하기 위해 앞장서야 한다고 유엔이 권고했다.’ 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이것도 한 신문 뿐 아니라 각 신문마다 사회면 또는 논설이나 사설 등으로 온통 지면을 장식했다.

  현대에 와서 국제사회는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구조로 변해 있다. 이 같은 현실을 무시하고 ‘우리 입맛 당기는 대로 살 테니 너희가 우리 하는 일에 감놓아라 대추 놓아라 하고 참견하지 말라.’ 고 항변할 처지도 못 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현재 한국의 인종의 구성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를 다 같이 깊이 생각해 봐야한다. 또한 우리 사회의 인종 구성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를 따지기 전에 먼저 짚어봐야 할 건 우리 정부 차원에서의 이민정책이다. 우리 국민이 이민을 가서 살게 되면 우리 국민의 신세가 타민족이 된다. 이처럼 이민 가서 살고 있는 우리 국민에게 차별대우하지 말기를 요구하면서 외국에서 우리 나라에 와 살고 있는 타민족을 차별 대우 한다는 건 어떠한 변명으로도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시킬 수 없다.

 

  대한민국의 총인구는 4천9백만을 넘어섰고 이중 타민족이 우리 국적을 취득한 숫자가 대략 6십3만여 명이니까 비율로 따져 봐도 1.3퍼센트 정도 되는 숫자이다. 현재 농촌 결혼 신고 건수의 약 12퍼센트가 외국인과 결혼을 했다는 통계로 보아 앞으로도 타 인종의 수는 점차 늘어가는 추세임에 틀림없다.

 

  대한민국의 민족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문화 속에 평생 살아온 백인이나 흑인 또는 타 국가의 황색인종 모두가 우리 민족에 포함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한번 우리 민족이 아니라고 결론지어지면 영원히 그것으로 끝장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二分法的思考), 즉 흑백논리의 습성을 꼬집어 유엔이 나서서 ‘한국은 인종차별을 없애라’는 권고까지 하게 된 것 같다.

 

  흑백논리 사상의 근원은 유교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삼강오륜(三綱五倫) 즉 장유유서(長幼有序)라든가 부부유별(夫婦有別)과 같이 몸에 밴 절대적인 계층간의 질서를 중시 여기던 유교사상에 원인이 있을 것 같다. 또 이것으로 인한 토론문화 부재로 하여 이해의 폭이 좁고 폐쇄적인 사고가 주원인이 될 수도 있다.

 

  일본 국립유전자협회에서 표본 조사한 한국인 DNA 분석결과를 보면 한국인 고유의 DNA형은 40퍼센트에 불과하고, 중국형이 22퍼센트, 오끼나와인형이 17퍼센트 등에 이른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위와 같은 연구결과를 분석해보면 순수 우리민족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숫자가 과반수를 넘지 못한다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베트남 전쟁 통에 태어난󰡐라이따이한󰡑이 많듯이, 외세의 침입을 수없이 반복해 받아온 역사적 기록으로 따져보아도 이쯤에서 단일민족 운운하는 단어는 아예 입에 올리지도 말아야 할 것 같다.

 

  민족주의를 부르짖는 자만이 애국자라는 잘못된 인식이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상황 속에서 세계화니 더불어 함께를 외치는 자는 알게 모르게 반민족주의자로 낙인찍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애국자인척 자주를 앞세워 외세를 자주 들먹이는 것도 따지고 보면 배타적인 민족정서를 자극하여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는 얄팍한 행위임에 틀림없다. 외세라든가 민족끼리 또는 민족공조 운운하는 케케 하고 고리타분한 언어들은 하루빨리 국민들 의식 속에서 떨쳐내야 한다. 이제는 국민 모두가 각성하여 자손만대를 위해 과감히 세계화 속으로 우리 만족도 들어서야 할 때이다. 우리 끼리를 외쳐대면서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겠다는 야무진 꿈이야말로 현실과 거리가 먼 꿈일 수밖에 없다.

  

  내가 4년째 연변에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조선족 고등학생 6명과 한족 고등학생 6명을 선정하여 장학금을 주고 있다.

 

  이런 행사를 시도하게 된 동기도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연변을 드나들면서 너무나 조선족만 편애해 오히려 조선족이 한족의 따돌림을 받는 것 같아서였다. 다시 말하면 조선족을 사랑하기에 한족에게 장학금을 준 것이다. 만약 조선족이 연변에 살지 않았다면 내가 그 곳까지 가서 한족에게 장학금을 줄 리도 없다.

 

  연변에서 조선족이 행복하게 사느냐 아니면 불행하게 살 수 밖에 없느냐는 전적으로 한족의 손에 달려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2007년 제4회 <소정 장학금> 수여식에서 나는 아래와 같은 인사말을 하게 되었다.

  ‘……제가 조선족 학생과 한족 학생에게 한자리에서 장학금을 주는 깊은 뜻은 여러분들이 중국에서 살아가면서 앞으로는 조선족 한족 편 가르지 말고 서로 화합하여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아직도 틀에 박힌 구시대적 민족주의에 집착한 많은 나라들이 불행한 일을 겪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점차 민족주의는 사라져가고 너, 나를 차별화하지 않고 서로가 어우러져 살아가는 국제화 시대로 변모해 가고 있습니다. 저의 일가친척도 많은 분들이 미국이나 캐나다 아니면 호주로 이민 가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 살든지 간에 장소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행복한 삶이냐 아니면 불행한 삶이냐가 문제입니다.

 

  오늘 드리는 이 장학금은 제가 나이가 들어 국가에서 나오는 연금을 일년간 모았다가 드리는 것입니다. ……’

  이 인사말을 듣고 누군가가 나에게 민족을 팔아먹는 파렴치한 행위라 헐뜯는다 하여도 내가 추진하는 행사가 올바른 것이라는 생각엔 추호의 변함도 없다. 내가 중국에 가서 사업할 일도 없고 더구나 출세할 일도 없다. 오로지 조선족을 위한 행위일 뿐이다.

  행사를 치르고 귀국하기 전에 들었던 이야기인데, 본인의 연금이 아니라 불순한 조직의 자금을 지원받아 치르는 행사라는 모함이 있었다는 말을 한국의 지방교육청과 같은 ‘연변자치주교육학원’의 한족부원장으로부터 전해 듣고 몹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격려는 못해 줄망정 이렇게 험악하게 모함하는 곳에 가서 계속해 장학금 사업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과연 누가 이런 근거도 없는 모함을 했을까? 한족일까? 아니면 조선족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차피 팔은 안으로 굽게 되어 있다. 내 민족 민족하고 소리 높여 부르지 않는다고 누군들 제 민족을 모르는 채 저버리겠는가. ‘빈 수레가 소리가 크다.’ 라는 속담이 있듯이 곰곰이 따져 생각해 볼 문제다.

 

  이 같은 민족차별의 근원은 어디에서부터 나오게 되었을까? 그 원인을 몇 가지로 요약해 설명을 할 수는 없겠지만 배달민족의 우월적 관념과 배타적 민족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배타적 민족주의는 언제 어디서부터 몸에 배어들게 되었을까?

  그건 아마도 우리 민족 신화와 지정학적 영향으로 인한 외침을 많이 받아왔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종교화 되다시피 한 유교사상도 여기에 한 몫을 한 게 틀림없을 게다.

  고도의 물질문명이 지배하는 현대에 살고 있는 이 때에 말 뿐인 애국애족이라는 허상의 탈을 이제는 훌훌 벗어버리고 더불어 사는 지혜를 갖춰야 할 때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데 독불장군은 존재할 수 없다. 개개인 뿐 아니라 국가도 민족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에서 민족주의를 소리 내어 외치는 자만이 애국자가 되는 현실에서 더불어 함께하기를 외치는 자는 반민족주의자인 매국노로 낙인 찍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해외여행을 해 보면 우리 민족의 별난 성격을 알게 된다. 그건 다름 아닌 우리보다 좀 잘 살고 있는 선진국에 놀러간 관광객은 한순간 유치원 학생이 된 듯 얌전하기 그지없다. 그러던 관광객이 우리보다 좀 못살고 뒤떨어진 나라에 가게 되면 언제 그랬냐싶게 시끄럽고 어디서 그런 신명이 돋아나는지 헛갈리게 된다.

 

  이 같은 주관 없는 행위는 나쁜 말로 꼬집어서 기회주의자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엄격하게 따지고 보면 지나친 민족적인 행위는 오히려 반민족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연변에서 몸소 보고 듣게 되는 기회가 있었다.

 

  1996년 여름, 그러니까 한중 수교를 맺은 지 얼마 되지 않던 해였다. 백두산에 들렀을 때, 그곳에 태극기를 꽂아놓고 민족의 영산 우리 땅을 찾아야 한다고 외쳐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혹은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거침없이 외쳐대기도 한다. 어디 그 해 뿐이었으랴. 1996년부터 7번이나 백두산에 올라가 봤으나 그때마다 희한한 일들이 벌어지기는 매한가지였다. 1998년 여름에 백두산 관광을 마치고 화룡시를 지나 용정으로 오는 국도변 우측 들녘 너머를 가리키며 저곳이 옛 발해 첫 도읍지라는 안내자의 말을 듣고 입구에서 차를 세워 안내문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거기에 서 있던 낯선 할머니가 한국 사람은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손사래를 친다. 그래도 일행은 그 말을 무시하고 사진기를 꺼내들자 공안당국에 고발을 하겠다고 협박을 한다. 일행은 어쩔 수 없이 사진 촬영을 못하고 그 곳을 떠나고 말았다.

  당시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여기 뿐 아니라 동북 3성의 유적지 푯말마다 감시원을 배치시켜 일절 한국인의 사진촬영을 못하도록 당국에서 지시가 내려왔다고 알려준다.

  그 같은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경박호를 거쳐 하얼빈으로 가는 길목의 발해 유적지의 푯말을 경호원들이 일일이 지키고 있는 모습도 보게 되었다.

 

  한번은 고구려 도읍지였던 집안에 들를 기회가 있었다. 집안의 여러 유적지를 둘러보기 위해 그 곳에서 여행사를 운영하고 계신 분을 만나 안내를 부탁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관광 안내원이 말하기를 󰡐선생님들은 유적지를 관광하며 괜스레 당국을 긴장시킬 말을 안했으면 좋겠습니다.󰡑며 우리에게 꼭 지켜야 할 관광지침을 말해 준다.

 

  그 말이 하도 이상해 관광 안내원에게 그런 말을 하게 된 자초지종을 물어보게 되었다.

  “여기 집안은 다른 곳과 달리 정부 당국에서 아주 예민한 눈으로 감시를 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한국에서 많은 수의 여행객이나 의심스러운 관광객이 들리는 날이면 몹시 긴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간혹 고국에서 고구려 역사를 탐방하겠다고 학자들이 단체로 학생들을 데리고 여기에 와서 내가 듣기에도 아주 섬뜩한 말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답니다. 여기는 우리 조상들의 땅이기 때문에 다시 찾아야 한다는 말도 서슴없이 해대고 있으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이 땅의 내력이 당신네 말처럼 일리가 있으니 이 땅과 여기에 있는 것 모조리 다 가져가세요.󰡑하고 내줄 리도 없고, 그렇다고 전쟁을 해 뺏을 수도 없는데 되지도 않을 말들을 마구 쏟아냅니다. 관광 안내를 하며 그 분들께 󰡐그런 되지도 않을 말은 하지 마세요.󰡑라고 화도 낼 수 있는 처지도 못된답니다. 비위를 잘 맞춰야 가이드 비용을 두둑이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기야 내가 이 직업을 그만둘 생각이라면 눈치코치 볼 필요도 없이 싫은 소리로 꾸짖어 주고 싶은 심정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자기네들이야 하고 싶은 말 다 내뱉고 떠나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대를 이어가며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옛말에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 라는 속담이 있듯이 어디 그런 말이 당국에 안 들어가겠습니까? 이런 정보도 못 듣고 정치를 한다면 오히려 그런 정치를 하는 사람이 바보이겠지요. 이런 일을 겪고 난 뒤의 우리는 뭐가 되겠습니까?”

  가이드는 얼굴을 붉히며 열변을 토한다. 열변을 토한다고 그렇게 속 시원한 결말이 날 문제도 아니다.

 

  그 뒤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 역사왜곡 문제가 불거져 나오게 되었고 연변자치주의 사회과학원이 폐쇄되기도 했으며 백두산 일대가 조선족 자치주에서 떨어져 나가 백산시 소속으로 행정 개편도 되었다. 그리고 중국정부 당국에서는 조선족 지도층을 대상으로 삼관교육이란 특수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삼관교육이란 민족관, 조국관, 국가관 등에 대한 조선족에게만 실시했던 특수 정신교육이었다.

 

  왜 이 같은 교육을 시키게 되었는가도 깊이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때를 맞춰 백두산 아래 한국 기업가들이 투자해 지었던 숙박업소도 된서리를 맞고 쫓겨나게 되었으니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런 모든 문제가 책임 없이 툭툭 내뱉던 목소리와 무관하지 않다고 그 누가 소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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