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으로부터 1991년 11월 머나먼 타국 땅 북만주 중국 심양에서 한국(모국)으로 할아버지 고향 집안뿌리로 찾고자 인천항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두 눈으로 모국의 비약적인 경제발전에 감탄하여 그 당시 심정은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머나먼 옛날 우리가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살아계실 때 다시 한번 모국의 땅을 밟아 가족형제들을 찾았으면 하는 소원이 간절하였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어린 시절에 강원도 홍천에서 사셨답니다. 그 당시 우리들은 주의 깊이 마음에 새겨 두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집안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참으로 한스럽고 안타깝습니다.

우리들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하여 돈을 많이 벌어 중국으로 돌아가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 보자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생활은 무정하고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가지고 있던 두 살림은 모두 파탄이 나고 부모님은 병고하셨고 중국에 있는 자식들은 모두 길바닥에 나 앉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한순간에 가정 기반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정신적 충격으로 아내(맹금자)는 하반신 마비가 되어 몇 년 동안 병원신세를 지게 되어 병마와 시달리게 되었으며 그 당시 눈물겨운 사연을 말로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좋은 모국의 형제 여러분의 도움과 의학기술의 발전의 덕분으로 다시 회복하여 어려운 역경 속에서 만나 우리는 재결합을 하여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리고 2004년 2월 12일에 딸(류서영, 현재 5세)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딸을 교육하는데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현재 유치원을 보내고자 하니 받아주는 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몇 군데 방문하여 상담을 받아 본 결과 외국인이라서 또 보험사에 가입이 되어 있질 않고 또 의료보험혜택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받아 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중국으로 돌아가자니 아이의 호적문제를 인정하지 않고 부모님의 연고지가 불확실함으로 외국인등록증도 다시 연장이 안 되고 이러한 처지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벼랑 끝에 서 있는 저희들의 사정을 모국의 법무부에서 우리 처지에 관용을 베풀어 한국 땅에서 영주 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류헌수 맹금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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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991년 12월 27일 한중 수교 전에 입국한 방연순입니다.

조상님의 고국에 입국한 저는 인천 한 교회에 도움으로 3일 동안 따뜻한 보살핌을 받게 되었습니다. 꿈과 희망으로 부풀어 밤잠도 이루지 못하고 뜬 눈으로 며칠 밤을 지새웠습니다. 하지만 불과 며칠이 되지 않아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오갈 데 없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식당에 겨우 취직하였는데 고돈 일과 바라보는 시선이 차갑기만 하였습니다.

파를 다듬으면서 너의 고향에는 파가 있느냐? 마늘을 보면 마늘이 있느냐, 하면서 인간 대우를 안 하기 때문에 일을 못하고 손을 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한 달에 직장 다섯 번을 옮겨 다녔으며 돈도 못 받고 눈물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 후 1993년 5월 4일 불법체류자라는 신분 때문에 단속에 걸려 철창 속에 하루를 갇혀 있었고 150만원을 벌금하고 배료를 끊고야 풀려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열심히 돈만 벌면 되겠지 했는데 매년 정부의 단속 때문에 직장을 버리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단속이 풀릴 때까지 집에 숨어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가 단속을 피하려 하였으나 그것마저도 마음 뿐이었습니다.

공사 현장의 함박 집에서 새벽 4시부터 저녁 10시까지 하루에 다섯 끼니를 하다 보니 오래 서 있는 탓에 발에 혹이 생겨 수술을 받아야만 하였으며 입원치료를 받아야만 했으나 의료보험이 없어서 경제적인 이유로 통원치료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1, 2, 3년 세월이 흐르다보니 서울 생활에도 많이 적응이 됐으며 말도 많이 바뀌어 사장님의 보호로 경북 울진이 고향이며 성도 이름도 다 바꾸어 신분을 속여가면서, 숨을 조여가면서 할 말도 못하고 십 몇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이런 삶을 사람이 살아가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얼마 전 17년 전 초등학교 3학년이던 딸이 커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주변에서는 딸 결혼식장이 어디냐, 날짜는 언제냐, 고 물었지만 사실대로 말도 못하고 지방에서 하기 때문에 친인척들만 모인다고 하고는 5일 동안 집에서 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가슴이 아픈 사연은 6년 전 어머님이 갑자기 돌아가셔도 자식이지만 부모님의 임종을 지켜보지도 못했습니다. 이 불효자식은 눈물만 흘리고 큰 목소리로 어머님이라 부를 수도 없었습니다. (주변의 시선 때문에..) 이 얼마나 기가 막히고 가슴 아픈 사연입니까?

17년 동안 자식 한번 보지 못하고 남편은 남편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우리는 이미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17년 동안 자식 뒷바라지 가족 살림 책임지다 보니 돈도 없고 남은 것은 골병 뿐인데 갈 곳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이런 우리를 강제추방이라니요.

한국정부는 우리에게 여러 번 기회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갈 곳이 없었으며, 또 조상의 땅에서 살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에 우리는 한국에 남기 위해 소송도하였습니다. 한편 또 한국정부에 우리를 위해 좋은 정책을 펼쳐 주겠지, 하는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지금까지 기다렸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법무부 장관님 대한민국국민들 모든 것을 잃은 우리에게 아버지, 어머님 같이 넓은 아량으로 우리를 꼭 껴 않아 주십시오. 우리에게 영주권을 주십시오.. 합법체류하게 해 주십시오.. 아픈 우리에게 약이 되어 주십사라! 고 소리 높이 외치고 싶습니다.

2008년5월30일

방연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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