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의 무대 코히마르 - 申吉雨 기행문

  • 삶은 고독하고 힘든 것이다.
  • 자신의 삶은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 강인한 의지와 정신력은 삶의 원동력이다.
  • 인생은 결과보다 살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이것은 『노인과 바다』를 읽었을 때 받은 느낌이다. 이 인식은 사춘기에 막연해 하던 나에게 매우 큰 의미로 다가왔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을 읽으면서 헤밍웨이는 내 가슴에 크게 자리를 잡았다. 삶을 어떻게 살아가며, 인생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 주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중남미 문학기행은 나에게 매우 큰 기대를 갖게 하였다. 무엇보다도 헤밍웨이를 만나게 되는 일이 가슴을 들뜨게 하였다. 헤밍웨이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던 쿠바, 아직 우리나라와 수교가 되지 않은 국가, 카스트로가 40여년을 장기 집권하고 있는 나라라는 것도 흥미를 갖게 하였다.

헤밍웨이(Hemingway, Ernest Miller, 1899~1961)는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를 1952년에 발표하였다. 84일 동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늙은 어부가 거대한 물고기를 주야 3일간 피나는 사투를 겪으면서 잡아내는 불굴의 정신과 성실한 삶의 모습을 그려내고, 끝내는 상어들에게 뜯겨 뱃전에 매달아놓은 대어가 뼈만 앙상하게 남은 채 돌아오는 데에서 인생을 깨닫게 하는 작품이다. 헤밍웨이는 이 작품으로 1953년에 퓰리처상을 받고, 1954년에는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하였다.

▲ ‘노인과 바다’의 실제 무대인 코히마르 마을의 포구

2008년 1월 22일, 『노인과 바다』의 실제 무대였던 쿠바의 어촌을 찾아갔다. 마음이 들떠서인지 카리브 해안에서 자정이 넘도록 술을 마셨는데도 아침 6시에 잠이 깼다. 버스는 언덕길을 가다가 작은 시골길로 내려선다. 포장도 안 되어 울퉁불퉁한 길을 조심스럽게 간다. 주변에는 주로 단층의 허름한 집들이 제각기의 모습으로 앉아 있다. 마치 우리의 옛 시골마을 같다.

9시에 코히마르(Cojimar)에 닿았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15㎞ 정도 떨어진 바닷가의 작은 어촌이다. 『노인과 바다』의 작품무대, 차에 내리니 카리브해 푸른 바다가 눈앞에 널따랗게 펼쳐져 온다. 오른쪽에 포구가 있고 집들이 보인다. 앞쪽 바다에는 밤마다 어선들을 이끌어 주는 자그마한 등대 하나가 편편한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눈앞 11시 방향 가까운 바닷가에 스페인 식민지 시절의 작은 성채 하나가 낡아가고 있다.

해안 둔덕에는 작은 공원이 하나 있다. 주변에 돌기둥들이 원통 모양의 테두리 벽을 받치고 있는 4~5m 정도의 흰색 건축물이 보인다. 이오니아식 기둥 안으로 들어서니 중앙에 헤밍웨이의 흉상이 서 있다. 중키 높이의 돌 좌대 위에서 짙은 눈썹에 콧수염과 구레나룻, 턱수염을 하고서 빙긋이 웃으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다. 흔히 보아온 사진 그대로의 특유의 모습이어선지 마치 시골 노인처럼 정겹게 느껴졌다. 이 마을 어부들이 폐선의 프로펠러를 모아 녹여서 우정과 존경의 뜻을 담아 만든 것이다.

▲ 코히마르 마을 주민들이 세운 헤밍웨이 공원

헤밍웨이는 이곳의 삶을 명작 『노인과 바다』로 남기고, 이곳 주민들은 헤밍웨이 동상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기에 세웠다. 언제 어디에 가든지 정겹고 감사해하는 마음을 보는 것은 참으로 흐뭇한 일이다.

우리가 교대로 사진을 찍는 동안, 나이 지긋한 한 노인 남자가 바로 앞 바닷가 난간에 걸터앉아서 기타를 치고 있었다. 즐거워하는 우리들의 모습에 자신도 흥이 나서 연주해 주는 것 같았다. 몇몇은 그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푼전 몇 장을 주니 답례하듯 <관타나모의 여인>을 연주해 준다. 아는 곡이라며 몇몇이 덩달아 흥얼거린다. 나도 말없이 호주머니에서 한국의 호박엿 사탕을 꺼내서 건네주었다.

소설 『노인과 바다』는 실제 모델이 있었다. 헤밍웨이의 오랜 낚시 친구였던 그레고리오 푸엔테스이다. 작가가 밝힌 바는 없지만, 많은 이들이 『노인과 바다』는 푸엔테스로부터 영감을 받아 쓴 것으로 말하고 있다.

푸엔테스는 1897년 카나리아 군도의 란사로테에서 출생했다. 선원인 아버지와 쿠바로 여행하는 도중에 부친이 죽어서, 6살의 고아가 된 그는 카나리아 군도의 쿠바 이주민들이 돌봐주어 코히마르에서 살았다.

그는 1928년에 헤밍웨이를 처음 만나서 30여년 동안 낚싯배를 저어주고 요리도 해 주었다. 1930년대에는 월 250달러에 보트관리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헤밍웨이는 글을 모르는 그에게 자신의 소설을 큰소리로 읽어주곤 했다.

헤밍웨이는 1960년에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코히마르의 푸엔테스의 집에서 머물었다. 그는 푸엔테스에게 자기의 저택과 엘 필라를 증여하였다. 푸엔테스는 이 재산을 쿠바 정부에 헌납하여 헤밍웨이 박물관이 되게 하였다. 그는 2002년 1월 13일 104세의 나이로 죽었다.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가 30년 친구로 산 푸엔테스를 주인공으로 삼아, 함께 살았던 코히마르 어촌을 무대로 쓴 작품이다. 그것이 노벨문학상까지 받는 명작이 되었다. 저택은 30년 친구인 푸엔테스에게 물려주고, 그는 그것을 헤밍웨이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코히마르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을 바닷가에 헤밍웨이의 흉상을 세워 그를 기렸다.

▲ 헤밍웨이 흉상을 찾은 필자

헤밍웨이가 코히마르에 살지 않았더라면, 푸엔테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노인과 바다』 같은 명작이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헤밍웨이가 코히마르를 무대로 명작을 쓰지 않았다면, 푸엔테스에게 유산을 넘겨주지 않았다면 헤밍웨이 동상도 기념박물관도 서지 않았을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사람은 가도 작품은 남고, 작품은 또 그 무대와 주인공을 기억하게 한다. 코히마르 마을은 헤밍웨이와 주민들의 아름다운 삶이 빛나고, 온정이 서로 오고가는 곳으로 오래 남을 것이다. ☺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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