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삼의 중국문화풍경

원간색 근간관远看色,近看款-멀리서는 색상을 보고 가까이에서는 스타이를 보라- 치이포 (旗袍-치이포, 중국 여성들이 입는 긴 원피스 형태의 전통 의복)에 대한 찬사의 말이다.
홍콩의 명배우 장만옥이 주연한 영화《화양년화》花样年华는 중국에서 치이포의 품을 일으겼다. 극중 장만옥이 선보인 26가지 치이포는 새해 봄바람과 함께 중국의 호화한 거리와 예식장을 단장하였으며 고전과 현대의 멋은 여성들이 추구하는 또 하나의 모범이 되었다.
《사해(辞海)》에 따르면 치이포는 청나라 만주족 여성들의 복장으로서 아래는 열지 않았고 팔소매는 8촌에서 1자이며 옷 변두리에는 수놓았다. 신해혁명(1912년)후 한족여성들도 치이포를 보편적으로 입었다고 한다. ‘치이포’란 ‘기녀의 포’란 글자 뜻이라는 해석도 있다.
청나라 광서, 현통 연간 상해 시체여성들의 사진을 보면 치이포에 서양식 코드를 입은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지난 세기 30년대에는 해파의 경전으로 발전되었다.
중국 현대 대소설가 모오뚠(茅盾-모순)의 명작 《자야(子夜)》에는 치이포에 관한 묘사가 있다. 봉건보수통인 고 할아버지는 시골에서 상해로 왔다. 승용차에 앉아 외탄을 지나는데 창밖으로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황색 인력거에 앉은 아가씨가 보였다. 색상이 진한 치이포를 입었는데 바림에 치이포가 들리면서 아가씨의 눈같이 하얀 허벅다리가 보이는 것이었다. 고 할아버지는 놀란 나머지 두 눈을 꼭 감고 “만악萬惡엔 음란이 첫째라‘고 입속으로 외우는 것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할아버지는 병석에 들어 누었는데 끝내 서천으로 가고 말았다. 치이포의 살상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지난 20년대 말, 쑹칭링宋慶齡(송경령)은 꽃무늬 치이포를 입고 열병대에 올랐으며 상해의 광고에 치이포를 입은 여성들의 풍채가 나타났다. 명문아가씨. 마님들은 분분히 모방에 나섰고 치이포의 차림은 사교장에 들어섰다. 서방에 극히 민감한 상해는 서양복장의 몸에 붙는 재단법을 옮겨와서 넓은 치이포의 양식에 변화를 주었으며 이로서 치이포에는 여성의 곡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3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치이포에 줄무늬를 달았으며 아래 부분을 열기 시작하였고 한때는 거의 둔부까지 펼치었다. 어딘가 유혹의 성분이 다분한 것이다.
하지만 상해의 명문 여성은 필경 신분이 있고 단정함이 요구되었다. 치이포는 다시금 무릅까지 열게 되었으며 길이는 땅을 거의 쓸 정도였다. 훗날 전시가 어지러워지면서 치이포 길이는 다시금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넓은 옷소매는 가늘고 섬세하게 변하면서 몸에 붇게 되였다. 여성의 성숙된 몸매와 우아하면서도 노련한 풍도를 다시금 치이포에 담게 되었다.
하지만 상해의 명문 여성은 필경 신분이 있고 단정함이 요구되었다. 치이포는 다시금 무릎마디까지 열게 되었으며 길이는 땅을 거의 쓸 정도였다. 훗날 전시가 어지러워지면서 치이포 길이는 다시금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넓은 옷소매는 가늘고 섬세하게 변하면서 몸에 붇게 되였다. 여성의 성숙된 몸매와 우아하면서도 노련한 풍도를 다시금 치이포에 담게 되었다.
치이포는 중국의 국복(國服)으로 여성들은 간주하고 있었다. 항일시기 송경령은 미국작가 스노 부인 버리에게 치이포를 선물로 드렸으며 버리 여사는 이 치이포를 입고 미국에서 항일강연을 하면서 모금활동을 벌리었다. 임종 시 버리 여사는 이 치이포를 주인에게 되돌려달라는 유언을 하였으며 1998년 이 의미심장한 치이포는 60년 표류하던 중 마침내 ‘송경령옛집(宋庆龄故居)’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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