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병화>

 "사랑해,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해요...이대로 영원토록 한백년 살고파요. 나를 두고 가지를 마오…" 은은한 노래소리가 고요한 방안공기를 헤치고 내가슴속으로 파고든다. 허전함과 외로움이 반죽되여 내눈굽을 적신다.

안해 영애는 갔다. 저 세상으로…세상 끝까지 함께 가자고 해놓고서는 저혼자 매정하게 가버렸다. 그의 숨결과 내음새가 배여있는 텅빈집을 훑으며 난 그녀와 함께 했던 그날들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1968년에 내가 위생소에 출근할때 연변팔도라는 곳에서 해림현 구가향 조선소학교에 교원으로 온 그가 귀가 아파서 병보이러 왔다가 서로 알게 되였다. 사흘 치료하고 결산할때 녀교원은 나보고 머리가 길다면서 깎겠으면 학교로 찾아오라고 하였다. 그때 마을에서 머리깎던 늙은이가 사망하여 머리깎기가 여간 말째지 않았다. 하여 난 부끄러운대로 찾아가 깎았는데 그것이 인연으로 되여 그때부터 난 32년이나 영애에게서 머리깎는 행운을 지녔다. 그 이듬해에 현소수민족운동대회를 신안진에서 하게 되였는데 구가향과신안향의 녀자배구시합이 있었다. "구가 4호선수가 대단한데…" 혀를 차는 사람들의 찬양속에서 4호선수를 바라보는 순간 난 놀랐다. 아니, 영애가 아닌가! 소학교 다닐때부터 배구훈련을 받은 그의 수준은 상당하여 전국 청소년운동대회에 참가하였던 력사가 있었다고한다.

70년 2월 25일 일곱식솔에 맏이인 나에게 영애선생은 시집을 왔었다. 가게구멍같은 창문, 삐딱한 널판자문, 너무도 습하여 뒤벽은 늘 곰팡이가 끼여있고 겨울이면 불이 안들어 연기를 밥먹듯한 우리는 3년을 살아오면서 딸애를 보았는데 안해는 극빈한 생활을 하면서도 얼굴 한번 붉히지 않았다. 벽에 흙칠을 해도 나는 안해의 데모도질을 하였고 땔나무가 떨어져 호박줄거리를 때서 밥을 짓고나면 안해의 손은 가시에 찔리여 피투성이였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 안해는 내가 글쓸때마다 제일 독자였다. 안해가 수정의견을 내놓으면  나는 다시 수정하여서는 안해에게 준다. 그러면 안해는 원고지에 정성스레 옮겨쓴다. 20여년 내가 쓴 글들은 모두 이렇게 나의 안해 영애의 손을 거쳐 투고되였다.

그도 나보다 못지 않게 글을 섰다. 그는 수차 '아성컵' '룡성컵' '박사컵'  등 교원수필상을 수상하였다. 하지만 언제나 자기의 글쓰기를 뒤로 미루고 남편인 나를 위하여 검열하고 원고지에 옮기고 투고하였다. 2001년 윤림호선생이 나더러 동화집을 출판하라고 했다. 가정형편을 보아서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고있는데 안해가 더 적극적으로 나설줄이야.  "내가 30년간 당신의 머리를 깎은 돈과 담배를 피우지 않고 절약한 돈을 합치면 출판값이 되잖아요" 그다음 날부터 원고정리에 달라붙어 한달도 안되여 출판사에 교부될줄이야. 나의 동화집 '파랑새와 나무눈'이 책으로되여 나오는 날 안해는  "우리 남편이 제일이야. 나 시집을 헛오지 않았어" 하며 어린애처럼 기뻐서 퐁퐁 뛸줄이야. 그렇게 건강하던 안해가 시름시름 앓더니 현병원 지구병원 성병원을 다녀왔지만 조금도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2003년 북경천단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병원측에서 기차표를 끊어주겠으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아들애친구의 소개로 중의와 결합하여 목숨을 부지한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후에 오른쪽눈이 실명되고 왼쪽눈 시력이 0.2밖에 안되여 텔레비도 볼수가 없었다. 내가 말동무하면서 같이 있자고 하면 "이만큼 살려줘도 만족이예요. 어서 아래 방에가 드라마를 보세요." 하며 내등을 밀었다…나에게 부담만 주고 짐만 된다면서 자기로 죽으려고도 시도한 안해, 조용한 저녁이면 자기가 죽은후 아들을 잘 돕고 다른 녀자를 만나 새가정을 꾸리라고 말하던 안해 '사랑해 사랑해 '노래로 내마음 달래여 주던 안해는 2007년 7월 21일 아침에 조용히 떠나갔다.

 한 백년 함께 살자던 안해가 어쩌면 이렇게 무정하게 날 두고 떠나갈수가 있을가. 하늘을 불러도 땅을 쳐도 소용없었다. 난 용기를 내여 안해를 재로 날려보낸후 한국에가 몇달 일한돈으로 안해 주영애의 작품을 모아 그의 작품집 "해묵은 백양나무"를 출판하는것으로 내마음속 그리움과 슬픔을 달래고 구천 그 어디에 살아있는 그의 령혼을 위안하려 한다.

설병화/흑룡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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