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숭선 탐방 소설 기록-소설가 유민





군함산을 뒤로하고 처녀봉 아래 잠시 서 있었다. 두만강 물줄기는 거칠고도 빠른 유속流速으로 물비린내를 지웠다. 깎아지르듯 솟아올라 원형을 이룬 처녀봉은 변방경계선의 한 지점을 향해 기립하고, 군함산이 처녀봉을 노려보듯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물가로 갔다. 지천으로 피어난 노란양지꽃 봉오리가 낯선 이를 경계하듯 바람 따라 물가 쪽으로 고개를 비틀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양지꽃봉오리에 입맞춤했다. 들큼한 꽃향기가 너무 매워 저절로 눈물이 났다. 저 멀리 허연 머리 날리며 팔 장을 낀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경계선의 저쪽 민둥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숭선.
초설회의 마지막 탐방코스였다. 아침 일찍 대형버스가 국제호텔을 떠나 숭선에 도착한 시간은 정오를 반시간이나 지난 시각이었다.

작품의 무대가 펼쳐진 숭선으로 간다는 설렘 때문인지 전날 만찬에서 마신 술기운과 피로가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곳에서 어쩌면 작품속의 경계선을 내 나름대로 확인해볼 수 있을 거라 여겨졌다. 나 또한 경계선을 찾아 떠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절박하고도 아득함이 있었으므로 숭선에서 참된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들뜬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화룡시를 벗어나 남평과 갈림길로 접어들자 숭선 52km라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이정표를 따라 진입한 길은 놀랍게도 작품속에 나오는『운층을 회절 시킨 11월의 햇살이 숭선으로 가는 비포장 황톳길에 광관으로 빚은 보자기가 되어 펴고 접기를 반복한다. -강준용/ 숭선에서.』지문地文과도 같았다.

도로는 융단을 깔아놓은 듯 푹신했다. 1천m가 넘는 소곡령을 넘어 가는 길은 신비의 세계였다. 완만한 곡선으로 휘어지며 흙길은 잘 닦여진 모습으로 나타났고, 도로 옆으로 여분의 흙을 준비해두는 치밀함으로 파여질 때마다 관리자들이 흙을 채워 다듬는지 한군데도 패인 곳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계절적 차이만 아니었다면 작품 속을 그대로 들어온 듯한 착각에 빠졌을 지도 모른다. 6월의 햇살이 먹구름 사이사이를 관통해 좌우로 쭉쭉 뻗은 자작나무 잎 사이로 스며들듯 쏟아져 내리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는 동안 군락의 자작나무는 전나무와 함께 소곡령 전체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름 모를 독립투사들과 나라를 잃은 설움에 박해迫害당하던 민중의 혼이 담긴 나무라고 했던가. 백의를 상징하는 자작나무.

『온몸에 회칠한 듯이 들어찬 산의 나무를 보고 방우달이 입을 열었다. ……서까레 굵기의 흰색 표피를 지닌 나무들은 동강난 흰 실을 뿌린 듯이 온 산에 꽂혀 있었다. 방우달이 만주자작나무가 아니라 봇나무라고 지칭해도 자작나무 우거진 눈 덮인 러시아 시골 숲길을 마차로 지나는 ‘닥터 지바고’의 영화 속 장면이 떠나지 않았다. 우수리 강가로 빼곡히 나 있는 화면속의 자작나무는 비척한 사회에 응고된 낭만을 풀어주는 촉진제였다. -강준용/ 숭선에서.』

흙먼지가 푸석푸석 일었다. 앞선 지프차는 빠른 속도로 사라졌고 흙먼지 사라질 즈음 판자를 세워 만든 집들 대신 붉은 벽돌집들이 군데군데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낭떠러지와도 같은 길을 지나면 평지가 나왔고 평지를 지나면 낭떠러지와도 같은 길이 나왔다. 버스는 말없이 달렸고 햇살은 먹구름 속을 뚫고 나오길 반복했다. 숲속의 평지로 흐르는 물은 제 마음대로 길을 만들고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제 마음대로 길을 만들고 있는 물길이라고 무심히 생각하는 동안 물길은 나름대로 규칙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인위적인 힘을 관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숲과 동화되어 그 속에서 나약한 땅을 주변부로 단단히 다지며 아주 천천히 길을 만들고 있었다. 물길은 산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 숭선으로 흐르고 또 흘러갔다. 잊혀버린 전나무전봇대가 마을을 향해 길게 두 줄로 도열된 산속의 마을들이 자작나무 숲 사이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비척한 사회에 응고된 낭만을 풀어주는 촉진제라던 작품 속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자연이 주는 친화적인 너그러운 풍경에 감화하는 수줍음 정도는 지녀야만 숭선으로의 길을 통과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군락을 이루던 자작나무 숲길을 벗어나자 두만강이 나타났다. 이제 다 왔슴다. 숭선의 냄새가 나는 듯한 느낌에 묻자 문학과 예술잡지사 주간인 김성호평론가가 말했다. 이제 다 왔다니 숭선을 바로 볼 수 있겠구나.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정면을 응시하며 순간 나타날 숭선을 고대했다.

두만강을 따라 장마를 대비한 도로관리가 한창이었다. 중장비가 널브러져 있는 공사장 주변으로 노동자들이 세월을 쪼개듯 아주 천천히 망치로 돌을 쪼개고 있었다. 드넓은 평야가 나타났고 길은 험했다. 파헤친 도로 옆으로 강제한 간이도로마저 험했다. 버스는 자주 덜컹거렸고 굼벵이처럼 기어갔다. 아직도 멀었습니까? 다시 물었다. 이제 다 왔슴다. 누군가 대답했다. 공사현장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 다왔다는 대답에 기대를 갖고 버스 정면으로 나타날 숭선을 기다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긴장으로 부풀려져 있던 미간이 찡그려졌다. 눈꺼풀이 자꾸 감겼다. 저 고개만 넘으면 숭선입니다. 누군가 말했다. 감기던 눈꺼풀에 힘이 들어가고 실망감으로 눈을 감았다. 다왔다는 말을 들은 지가 1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도 아득히 보이는 저 고개를 넘어야 숭선이라니. 중국 땅덩어리가 넓긴 넓은가 보았다. 조급함을 버려야 했다. 느림의 미학이고 지혜라는 뉴월드 정보회사 사장인 최룡국시인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강과 절벽사이를 관통하며 더 이상 갈 수 없는 경계선의 숭선을 머릿속에 그려 넣었다.
군함산 꼬리고개를 넘고 벼랑을 가로질러 숭선이 보이는 순간 초설회는 탄성을 질렀다. 그의 작품무대 숭선이 눈앞에 펼쳐졌다. 군함산과 처녀봉 사이로 숭선마을이 수줍은 듯 나타났고 두만강 푸른 물줄기가 시야에 들어찼다. 나는 엉덩이에 가시가 박힌 듯 벌떡 일어났다.


경계선으로 스며든 그의 침묵에 바람이 울었다. 허연 머리 휘날리며 경계선이 지워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햇살을 받아 물비늘 반짝이며 부서졌다. 두만강 가운데 물속에 잠기지 못한 바위 위로 물총새 한 마리 날아와 앉았다. 이내 어느 곳에선가 또 한 마리의 새가 날아와 앉았다. 두 마리의 새는 서로의 경계선을 확인하듯 떨어져 있었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이내 맑은 하늘을 가렸다. 재를 뿌린 듯 검은 하늘에서 한 두 방울씩 빗방울을 뿌려댔다. 두 마리의 새는 각자 북쪽과 남쪽으로 흩어졌다. 두만강을 따라 방천防川으로 향하지 못하고 그물에 걸린 산천어와 모래무지와 버들치는 가마솥에서 모락모락 김을 피워냈다. 비를 피해 양지꽃봉오리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물가에 피라미 몇 마리 바위에 낀 이끼를 쪼아대고 있었다. 나는 쪼그려 앉아 세수를 했다. 물의 입자 속에 한恨이 스며있는지 물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강 건너 소달구지 삐거덕거리며 아주 느린 걸음을 걷고 트럭 한 대가 흙먼지 일으키며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아직도 그는 두만강을 바라보며 침묵 중이었다. 바람이 불었고 어디선가 날아온 민들레 꽃씨들이 두만강 위로 눈발처럼 흩날렸다. 민족의 한을 품고 말없이 흐르는 변경의 풍경. 중국에 사는 사람들은 저 강을 도문강이라 불렀다.

방문한 한중작가들을 위해 숭선촌 촌장을 비롯한 유지들이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임병애 선생과 함께 고성리변경검사참古城里辺境檢査站으로 향했다. 두만강제1교圖們江第一橋는 이십여미터에 불과했지만 그 짧은 길이만큼이나 철옹성처럼 견고해보였다. 건너편으로 북한초소가 쓸쓸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두물머리로 가려다가 포기하고 강가를 걸으며 고추와 호박을 심은 텃밭을 유심히 살폈다. 길게 이어진 흙길을 따라 자전거를 탄 북한농부가 휘파람을 불며 아주 느리게 지나갔다. 옆에서 민들레 홀씨 날리던 임병애 선생이 손을 흔들었다. 이내 저쪽에서 빈 허공을 메우려는 듯 이쪽보다도 더 큰 손짓을 했다. 넘어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강 건너 낯선 우리에게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다. 그 손짓이 상대를 배려한 인사치례와도 같은 과장이 아닌 반가움을 가득 담은 손짓이라는 걸 느끼는 순간, 나는 갑자기 농부의 손을 콱 움켜잡고 싶어졌다. 어느 순간 손을 흔들던 임병애 선생의 팔과 농부의 팔이 쑥쑥 자라 올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뜨거운 악수를 하는 듯 느껴졌다. 갑자기 그의 소설작품 어느 한 구절이 떠올랐다.

『첨단문명과 교활한 문화로 물든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부터 온 나란 관조자가 그 어떤 술수로든 넘지 못할 경계선을 보고 있었다. 경계선 저쪽에는 나를 홀리는 붉은 여우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바라는 희망들이 내 곁이 아닌 다른 곳에 존재한다고 여겼다. 늘 경계선을 넘으려고 한 것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내가 본 그리고 내가 겪은 현재에서는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은 왠지 모른다. 풍부한 물질과 첨단 문명 속에 존재하는 나를 발견키 위해 나는 붉은 여우가 거주하는 경계선을 넘었다. 그러나 나는 이 사회가 내세우는 그 문명으로 인해 근거지를 찾지 못하고 헤맨다. -강준용/ 숭선에서.』

평론가가 아닌 순수소설가로써, 그의 철학적 사유로 치밀하다 못해 금강석처럼 빛나는 지혜로 단단해진 작품을 순간적 오감으로 감수感受한 내 자신의 정신적 사색과 동일시한다는 건 자못 심각할 수조차 있었지만 오류의 의문을 품을 여지조차 없이 순간적으로 그는 이곳 숭선에서 넘지 못할 경계선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를 떠올렸다. 육십여 년의 세월, 비밀의 안개 속으로 점점 침잠해가는 경계선의 한쪽, 그곳을 바라보며 철로 된 삭막한 도시를 떠나 경계선의 시계반경視界半徑을 넘나드는 천부적 소질을 마음껏 뽐낸 『숭선에서』라는 작품의 무대를 다시 찾은 감회를 묵언黙言의 관조로 음미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나는 멀리서 그의 모습을 찾았다.

강준용선생님 작품은 문장 하나하나를 꼭꼭 씹어 먹듯이 읽어야 해. 게으르면 철학이 담긴 그 문장의 깊이를 놓치고 작품을 단순해석하게 되는 거야.

농부의 자전거가 사라진 강 건너 흙길을 아쉬운 듯 바라보던 임병애 선생이 불쑥 내뱉은 말이었다. 어느새 그녀는 홀대를 꺾어 강을 향해 민들레 홀씨를 날리고 있었다.

이 홀씨가 저 민둥산에 닿았으면 좋겠다.

나는 취재노트에 끼적이던 펜을 멈추고 바람에 날리는 홀씨를 바라보았다. 회백색 허공을 향해 날아오르던 하얀 홀씨는 강을 건너지 못하고 떨어져 내렸다. 더 이상 민들레 홀씨를 찾지 못한 그녀는 동의나물 꽃 한 송이를 꺾어 저 홀로 걸어갔다. 팔 장을 낀 채 경계선을 관조하던 그는 중국 조선족 소년보사 사장으로 있는 김학천 연변작가협회 전 주석과 문학과 예술잡지사 주간으로 있는 김성호평론가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소양素養을 지닌 장수 같은 김학천 시인과 가을 못에 담긴 달처럼 고요한 김성호평론가는 늘 그의 든든한 벗이었다. 그네들과 함께하는 그의 눈빛이 구슬처럼 빛나고 있었다. 강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그의 허연 머리칼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한중작가 숭선문학 야유회 플래카드가 펼쳐지고 초설회 해외문학탐방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연길에서 가져온 술과 숭선촌에서 장만한 음식으로 안주를 삼으며 숭선에서의 작품 무대는 진지했고 흥겨움에 도취되었다. 방천防川으로 떠나지 못한 산천어는 보약이 되어 작가들의 새로운 창작의 힘을 원천케 했고 모래무지와 버들치는 초막집 어린 시절 잃어버린 추억을 달큼한 솔연기 속에 담아왔다. 김영환PD는 주변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느라 분주히 셔터를 눌렀고 술에 약한 초설회 김혜숙회장은 감태준시인과 깊은 문학적 사색에 빠졌다.

나는 구본설 서울시 과장과 함께 된장을 푼 모래무지 매운탕에 38도나 되는 연변소주를 마셨다. 소주는 뜨거웠고 짜릿했다. 타는 위장 속으로 모래무지의 살들이 국물과 함께 풀렸다. 연변소설가학회 정세봉회장이 건배제의를 했다. 늘 그렇듯 집단의식의 고유한 그들의 문화는 술자리에서조차 자유주의를 허용치 않았다. 특유의 느린 베이스 음성으로 정세봉회장은 자주 건배를 외쳤고 호기가 발동된 나는 초설회를 대표하여 넙죽넙죽 술잔을 비웠다.햇살이 비치는가 싶더니 이내 가는 빗방울을 뿌렸다. 그리고 다시 맑아지며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비 오는 날, 비가 오지 않은 경계선을 보고 싶어 했다. 나는 내 몸을 경계선에 맞추고 반을 비를 맞고, 반은 햇볕에 쬐이는 상상을 했다. -강준용/ 숭선에서.』

숭선에서 가무를 즐기며 우리는 경계선으로의 여행을 상상이 아닌 온몸으로 체현體現하며 사실에 근거한 작가의 탁월한 은유와 상상력과 무대취재의 치밀함에 전율했다. 순수문학에 투신投身한지 삼십여 년. 그의 예술을 향한 프로페셔널리즘professionalism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약간의 취기가 느껴졌다. 연변TV방송국 드라마부 김영건 감독과 KBS 김영환PD가 숭선 풍경을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신발을 신자마자 어디선가 들려오는 셔터소리에 잠시 멋쩍은 포즈를 취했다.
나는 야유회가 한창 무르익는 현장을 벗어나 강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숭선촌 아낙네가 장작불에 모래무지를 굽고 있었다. 모래무지는 벌건 불길 속에서 부릅뜬 눈을 허공에 박고 있었다.

『우리 인간들에게 각자 다른 지문이 있는 것처럼 나는 그 누구도 매만지거나 흉내 낼 수 없는 소유물을 가졌다. 그 느낌의 표현을 하기 위해 나대로 많은 고민과 연구를 했다. 날카로운 칼날이 번개처럼 목을 절단하고 지나갔는데도 분리되지 않았다고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두 눈을 뜨고 세상을 보는 닭의 머리처럼 나의 느낌에도 수많은 착각들로 이뤄졌다. 머리가 곧 떨어지고 그제야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고 눈꺼풀을 내리는 닭의 눈을 보는 것처럼 섬뜩한 스릴에 도착되…….-강준용/ 숭선에서.』

저 모래무지를 먹으며 섬뜩한 스릴보다도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단순폭력이 한 미물의 삶을 통째로 벗겨 내버리는, 내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그 즐거움에 도취된 죄의식 같은 살 떨림으로 모래무지의 눈동자를 피해 모래무지가 허허롭게 바라보는 허공을 쳐다보았다. 모래무지가 바라본 허공은 어떤 색色-물질세계-로 다가왔을까. 가슴이 쓰라렸고 저절로 광명진언光明眞言이 읊어졌다. 내생來生에는 보다 좋은 몸을 받고 태어나길 빌었다. 내가 죽어 저 모래무지로 태어난다면 오늘의 저 모습이리라.

경계선을 마주하고 앉아 나는 방천防川으로 향하지 못한 산천어와 모래무지와 버들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내생에 태어날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다. 꿈에도 그리던 방천으로 치달아 살과 뼈가 터지는 환골탈태換骨奪胎의 죽음과도 같은 고역을 거쳐 저 망망대해를 마음껏 항해하는 새로운 종자로 태어나길 원했던 미물들이었을까. 우리가 저들을 잔인하게 먹었으니 저들이 인간으로 태어나 미물이 된 우리를 지금처럼 형벌하는 모습이지는 않을까. 살아서 펄떡거린다면 두만강 푸른 물에 저들을 놓아주고 싶었다. 내게 최첨단이 분출하는 과학으로 무장된 지혜와 힘이 있다면 천리 물길 방천으로 마음껏 헤엄쳐가도록, 그 어떤 철의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꺾이지 않는 강한 지느러미와 꼬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두만강 경계선의 슬픈 역사를 독립투사들의 맑은 영혼을 눈 속에 심어주고 싶었다. 갈라진 남과 북의 아픔을 슬픈 음조로 노래할 수 있는, 처연한 그 노래를 듣는 모든 이들이 사상과 이념을 넘어 하나의 염원으로 겨레의 소원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천상의 아가미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담배 한 개비를 태우며 강가에 앉아 발을 담갔다. 피라미들이 낯선 발을 쪼아댔고 나는 미물들이 역사를 거슬러 밀영密營 산야에 뿌리내린 자작나무의 혼처럼 또 다른 세계의 물 속에서 투쟁하는 저들을 보았다. 어쩌면 저 미물들은 불여우가 재주넘는 산야에 살기 싫어 물속에 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두만강 푸른물 거슬러 올라 원지源池에서부터 시작하여 다시 회유回流하며 동해바다를 향해 숨 가쁜 여정으로 민족의 한을 곳곳에 흩뿌리려 했는지도 모른다.

연길 국제호텔에 도착한 첫날, 초설회원들은 새벽부터 움직였던 피로를 풀 시간도 없이 김학천시인이 주최한 점심을 대접받자마자 명동촌으로 향했었다. 조선을 밝게 하자는 의미로 지어진 명동촌은 백양나무 숲속에 고즈넉이 앉아 있었다. 백양나무 꽃가루 바람에 날려 눈발처럼 가슴을 저미는 투사들의 고향. 그곳에서 우리는 항일시인 송몽규와 윤동주, 나운규감독과 늦봄 문익환목사를 만났다. 교복을 입은 낡은 사진 속에 결연한 자세로 서 있던 고인들. 나는 한 평생 나라와 민족을 위해 불태운 그 분들의 삶을 돌아보며 저들과 함께 많은 무명투사들의 항일투쟁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우리가 숭선을 찾을 수 있는 자유가 있었음을 감사했다. 가슴이 저려왔고 미어졌고 죄스러워졌다.

『나에게 강은 내 삶의 마지막 경계선이 되어 나를 다그쳤다. 이곳 여울의 한계에 권태를 느껴 천리 물길을 거슬러 두만강이 끝나는 훈춘 방천에서 생을 끝낼지 모른다. 비록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 그 당당한 삶이 알려지지 않아도 그 고기의 투쟁은 자연히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우리는 그런 미물들이 소리 없이 살다 가는 세상을 반석삼아 그것들로부터 추출한 자양분으로 문명을 이루고 산다. -강준용/ 숭선에서.』

숭선에서의 작품 한 토막을 끊어내 나는 마음가는대로 내가 현재 사유하는 윤동주생가와 병치竝置시켰다. 그리고 미물이 아닌 무명無名으로 단어를 함부로 조작했다. 생가의 뒤편 잘린 나무토막에서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수백여 명의 사람들이 목을 달고 총탄을 가슴에 안고 비참히 사라졌다고 했다. 만주의 엄동설한 허리까지 차오른 폭설을 뚫고 사랑도 명예도 가족도 모두 버리고 오로지 조국광복을 위해 초개草芥처럼 목숨을 바쳤던 무명투사들의 가족들이 바로 그들은 아니었는지, 밑동만 남은 나무를 바라보며 선각자들이 그 이름 없음에 진심으로, 진심으로 경외敬畏했다. 그 이름 없음의 자양분들이 지금의 우리를 존재케 하고 있는 것이라 여겨졌다.

생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자본이 침투되지 못한 문학예술가의 생가는 너무 초라했고 폐허처럼 변하고 있었다. 무너진 담장과 정리되지 않은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며 오히려 고향집처럼 포근한 정겨움을 느꼈던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붉은 여우가 재주를 넘지 못한 경계선이 공空을 느꼈던 것일까. 넓은 들판을 마주하고 백양나무 숲에 둘러싸인 생가는 전생에 한번쯤 와 보았던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눌러앉아 현대문학사에 길이 남을 소설 한 편 쓰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서명란에 이름을 써넣으며 나는 오늘의 윤동주를 만든 송몽규라는 문사를 떠올렸다. 백양나무속으로 침잠沈潛해버린 송몽규의 『밤』이라는 잊혀진 시가 문득 생각났다.


고요히 沈澱된 어둠
만지울 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밤 헤아리는 이맘은
험한 山길을 걷고 ―

―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ㄹ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송몽규(1917-1945)원작시 『밤』


열일곱의 송몽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술가락』이 당선되자 윤동주는 강렬한 자극을 받았다고 했다. 고종사촌이며 동지였던 송몽규에게 질 수 없다는 문학적 자존심 때문에 문학을 향한 그의 세계관은 더욱 증폭되었다. 서시가 탄생했고 별 헤는 밤이 탄생했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문학세계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양분이었다. 문학은 그렇게 서로를 자극하며 스러지지 않는 명작을 남기는 것이다. 송몽규가 없는 윤동주를 생각할 수 없듯이, 윤동주 없는 송몽규 또한 없었다. 순수 문학인으로만 바라보았을 때 윤동주의 빛에 가려진 송몽규를 바라보며 한 시대의 문학가로 살아가며 불후의 명작을 남기지 못한다는 건 너무 쓰라린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흰머리 날리며 걸어가는 저기 저 전설의 소설가 강준용을 뛰어넘는 문학인이 되어야 했다. 그의 수제자이면서 내 문학선배인 임병애 소설가를 뛰어넘는 작가가 되어야 했다. 작용을 가하면 변용되듯 의식의 흐름은 숭선에서의 작품무대인 숭선 문학탐방에 맞추어진 것이 아닌 내 자신 문학의 미래를 어떻게 개척해나가야 할 것인가에 고착됐다.

『작가는 작품으로만 말할 뿐이다.』라는 불후의 명언으로 순수문학의 전설로 상징되는 강준용. 그는 정신적 방황으로 좌절을 거듭할 때 문학의 올바른 길을 알려준 나의 사표師表였다. 스승과 제자로 표현되지만 참된 사제師弟관계가 전무하다시피한 문학세계에서 그는 사師와 제弟의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해 나가는 문인이었다. 그런 문사文師를 뛰어넘는 작가가 되는 길이야말로 올바른 가르침에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이 심연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변용이 고착에서 벗어난 때문일까. 잠시 방일放逸했던 지난날들이 스쳐지나간다. 주어진 조건을 비롯한 주변부로부터 오는 압박에 의한 심적부담은 치열한 문학인으로의 삶을 버겁게 했다. 그러나 현재 최소한 비장의 결의가 다져지는 건 송몽규의 영향으로 윤동주라는 시인이 탄생됐다는 그의 가르침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기 때문이다. 나는 주변부로부터 너무도 많은 문학적 영향을 받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인지하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리는 단순무식의 컨셉으로 무장된 사람이었다.

명동촌을 떠나 대성중학교 옛터를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 나는 연변소설가학회에서 마련한 나경호텔 만찬장에 들어설 때까지 끊임없이 서시를 마음속으로 읊조리며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간 고인들의 문학정신을 가슴에 담고 있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발이 시렸다. 물속에서 발을 들어 올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서시를 읊는 자신을 발견했다. 낯섦에서 친숙함을 발견했는지 사정없이 발을 쪼아대던 피라미들이 흩어졌다가 이내 모여들었다. 야유회자리가 왁자지껄했다. 양말을 신으며 돌아보았다. 여장旅裝을 풀었던 국제호텔에서, 아침식사를 마친 초설회가 강준용소설가 작품무대인 이곳 숭선으로 향할 때 함께 동행했던 연변출판국 손용호문학처장과 산악회원들이었다. 절벽으로 무장된 군함산으로 등산을 간다고 했었는데 벌써 정상을 밟고 내려온 것인지 의아했다. 느림이 미학이고 지혜라고 말하던 뉴월드 정보회사 사장인 최룡국시인의 늘보 같은 특유의 운전솜씨를 떠올리며 그보다도 빠른 파워와 추진력으로 앞장서는 손용호문학처장이라면 아마도 정상은 밟고 내려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변에서 소설가학회 회원인 김견소설가와 임병애선생이 물가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테이블에 자리를 함께한 나는 손용호선생 일행들과 개별적으로 맥주를 건배하며 넙죽넙죽 마셨다. 두만강 찬 기운이 스며든 맥주는 알싸했고 맵싸했다. 경계선이 무너진 곳에서의 맥주 맛은 어떨까를 생각하며 다시 독한 소주잔의 건배가 들어오자 눈물을 머금고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아주 날렵한(?) 몸짓으로 테이블을 빠져나왔다.

비틀거렸고 눈앞이 흐려졌다. 멀리 강가에서 그가 얼굴을 씻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순간 그의 얼굴에 하나의 분역지구가 그어져 있었다. 비에 젖은 선과 햇빛이 내리는 사이의 경계선. 두만강을 반으로 잘라놓은 듯 처녀봉과 군함산이 마술조각처럼 벌어졌고 눈을 한번 깜빡이는 사이에 처녀봉과 군함산이 경계를 지우며 하나로 합쳐지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서 풀려나온 산천어와 모래무지들이 떼를 지어 방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취기로 풀린 눈두덩을 황급히 비볐다. 눈앞에 보이는 건 아득한 회색빛 허공뿐 두만강은 거친 물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양지꽃주변으로 나비 한 마리 힘겹게 꽃술에 긴 대롱 같은 입을 접속하고 있었다. 그는 허연 머리 바람에 날리며 둑방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물가로 가 세수를 했다. 찬 기운이 얼굴에 닿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빗방울은 떨어지다가 개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담배 한 개비를 물었다. 강물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는 순간 물의 흐름 따라 산천어 한 마리 꿈틀거렸다. 강의 경계선을 허물며 좌우로 미끄러지듯 헤엄치던 산천어가 쏜살같이 하류로 내려가고 있었다. 순간 방천이 떠올랐다.


윤동주생가를 방문한 다음 날 19인승 봉고차에 올라탄 초설회는 연변작가협회 창작연락부 우광훈소설가와 김성호평론가의 안내를 받으며 방천으로 내달렸다. 날씨는 맑았고 햇살은 뜨거웠다. 훈춘을 거쳐 방천으로 향하는 국도에서 바라본 좌측의 끝없는 평야와 함께 우측으로 북한 땅이 손에 잡힐 듯 눈앞에 다가왔다. 그 사이로 두만강은 소리 없이 흘렀고 숲이 되어 우거진 백양나무가 바람에 춤추듯 하늘거리고 있었다. 간간이 소달구지 삐거덕거리며 지나가고 사람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풍경에 도취되어 그의 작품무대인 숭선으로부터 출발하는 분역지구를 또다시 잊고 말았다.

동문과 연길을 잇는 7백km의 부르하布哈통하 공사가 한창이었다. 붉은 깃발아래 징과 망치로 돌을 쪼개는 노동자들과 길게 늘어진 노동자들의 군막 같은 숙소가 군데군데 나타났다. 좌측으로 사막이 형성되는가 싶더니 연화호가 나타났고 T자형 콘크리트말뚝이 길게 늘어지며 철조망을 치고 있었다. 철조망과 두만강 사이로 난 콘크리트포장길, 중국땅덩어리는 동네 골목길처럼 좁혀지고 있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철조망 건너편은 러시아의 땅 블라디보스토크라고 했다. 그 옛날 청나라관리 한 사람이 경계선을 찍은 비석을 들고 가다가 게을러서 놓아버린 탓으로 동해로 향하지 못한 한을 두고두고 후손들이 받고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방천초소에 올라 멀리 비무장지대를 바라보았다. 러시아와 북한을 잇는 철책다리가 두만강을 질러 단단하게 뿌리박고 있었다. 그 사이로 골목길 같은 중국 땅이 자리하고 있었다. 두만강이 끝나는 방천하구, 3국 경계선이 그어진 비무장지대는 고즈넉했고 희멀건 안개가 동해바다를 시야에서 가리고 있었다. 강한 바람 불어 백양나무 꽃가루 비무장지대로 날렸다. 새 한 마리 3국의 경계선을 비웃듯 허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나에게 강은 내 삶의 마지막 경계선이 되어 나를 다그쳤다. 이곳 여울의 한계에 권태를 느껴 천리 물길을 거슬러 두만강이 끝나는 훈춘 방천에서 생을 끝낼지 모른다. -강준용/ 숭선에서』

숭선에서 흘러온 두만강이 방천하구를 지나 동해로 스며드는 곳, 숭선을 떠난 물줄기 따라 천리 길을 헤엄쳐 내려온 산천어와 모래무지들은 더 이상 동해로 나아가지 못하고 3국의 경계선상에서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바로 저 경계선에서 붉은 여우가 재주넘는 널뛰기를 하고 있었다.
눈앞이 흐려졌다. 경계선을 찾아 떠난 그 어느 곳에도 경계선이 없었다. 거미줄처럼 얽히어진 경계선이 경계선을 지우며 평화지대를 갈구하는 염원이 현실부정으로 유턴하자 명확한 세 줄기 경계선이 그어졌다. 그 경계선은 『강 하나로 거대한 경계선을 두른 두만강…… -강준용/ 숭선에서.』의 슬픈 역사의 비환을 그리고 있었다.


초설회원들이 탐방 깃발을 접고 있었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그러나 조만간 반드시 찾아오겠노라는 약속을 하며 두만강 푸른 물에 다시 한 번 세수를 했다. 양지꽃봉오리와 민들레와 이름 모를 들꽃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둑방을 넘어가자 그가 김학천 시인과 제재소製材所로 향하고 있었다. 황급히 뒤를 따랐다. 변경검사참을 지나 폐허가 되어버린 제재소입구에 선 그가 잠시 안을 들여다보더니 숭선 두물머리에 섰다. 그의 흰머리가 강바람에 날렸다. 아주 가까이 북한의 삼장마을이 보였다. 마을은 여느 시골집처럼 고요했고 정겨웠다. 함경북도에서 흘러내리는 강물과 양강도의 강물이 합수되어 비로소 온전한 두만강이 되는 곳, 미치도록 몸살 앓는 저녁이면 환자처럼 강과 강은 서로의 외로움과 한스러움을 가슴에 담고 그 신열을 이기려 하나로 합수된다고 했다. 백두산 천지의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습지를 만들며 솟아오르는 물웅덩이가 두만강 발원지였다. 그 발원지에서 내려오는 물과 삼장에서 흘러드는 물이 합수해 두물머리를 만들고 천천히 거대하게 두만강이 되어 민족의 아픈 역사를 안고 흘러가고 있었다. 그가 강둑 위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나는 그를 쫓아 강둑 위에 섰다.
두물머리 주변으로 미루나무 한 그루 외롭게 서 있었다. 그 나무에 앉아 있던 동무 잃은까마귀 한 마리 인기척에 놀라 날아올랐다.

『……추억 속으로 잠입해버린 새였다. 내가 철없는 시간 속에서 지순한 시각으로 바라다본 그 세상, 그것은 이미 세월의 이끼 속에 덮여 아득히 지하층으로 침식되고, 나는 새로운 것으로 변절되는 세상을 보는데 익숙해져 버렸다. 내가 상실해 버린 그 세상, 까마귀를 쉽게 볼 수 있었던 그 시절일수도 있다. ……오염된 지역과 청정지역의 경계선을 넘은 것이 분명한……까마귀들에게 두만강가의 포플러에 앉아 눈구름과 그것들을 실어 나르는 바람을 천연스럽게 바라보는 눈을 가지게 해주는 것과, 접은 깃털을 자유롭게 펴고 정처 없이 흘러가는 두만강을 마음대로 건너도 되는 환경을 조성하는……그들의 고유색인 검록색 깃 색깔을 사그라지게 하는 오염된 공간이 마련될 때는 불확실한 저쪽으로 미련 없이 날아갈 것이다. 그곳이 어쩜……. -강준용/ 숭선에서.』

그는 이곳 두물머리에 앉아 『숭선에서』작품을 구상하고 썼다고 했다. 초겨울, 삭막한 강바람 불어 날리는 쓸쓸한 강둑에 앉아 분역지구인 경계선을 관조했다고 했다. 작품은 2년여의 피나는 퇴고를 거쳐 철학적 사유로 침잠沈潛된 명작으로 탄생됐다. 하나의 단어와 한 줄의 문장과 절묘한 소설적 구조는 시대를 관통하며 뼈아픈 역사와 붉은 여우가 재주넘는 현시대를 객관적이고도 주체적으로 분석하지 못하는 이들의 눈에는 하얀 종이와 까만 글자만 보일 것이다. 숨은 보물찾기와도 같은 『숭선에서』의 작품은 현대문학을 일구는 작가들에게 평론가들에게 무소유無所有의 자세로 게임을 즐기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그 게임에서 우위를 점하고 느긋한 자세로 출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초설회 김혜숙회장과 김학천시인과 구본설선생이 그와 함께 카메라를 향한다. 다시 임병애소설가와 김영환피디와 그가 카메라를 향한다. 나 또한 그 틈에 끼어든다. 감태준시인은 보이지 않는다. 노년으로 오는 3박4일의 여정이 힘에 부친 것인지도 모른다. 쨍쨍 내리치던 유월의 해가 다시 먹구름에 가렸다. 날씨는 더웠고 등줄기에 땀이 맺혔다. 이제 숭선을 떠나야 할 시간이다. 떠나기가 아쉬운지 그는 두물머리에서 자꾸만 머뭇거리고 있었다.

『강 건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비허구성으로 드러난 외경에서 경계선에 대한 해답이 있을까. 까마귀는 강 저쪽에 대한 정보를 알 것이 분명하다. -강준용/ 숭선에서.』

강 저쪽너머 그곳에도 붉은 여우가 살고 있는지 경계선을 넘나드는 까마귀를 통해 알고 싶어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인지 궁금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때 삼장마을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아랫도리를 벗어던진 아이들은 강물 속으로 뛰어들더니 경계선을 마구 휘저으며 까르륵 웃고 있었다. 퐁당퐁당 물장구치는 소리가 이쪽 강둑까지 들려왔다. 그의 굳게 다문 입술에 엷은 미소가 나타났다. 순간 먹구름 짙은 하늘에서 한줄기 빛이 내려왔다. 빛은 반경을 넓히며 모래무지의 은비늘처럼 두물머리 위로 부서졌다. 아이들이 깔깔대며 분역지구의 변경을 마음껏 부수고 있었다. 경계선을 찾아 떠났던 그의 마음속에 경계선이 부서지고 있었다. 경계선이 그어진 숭선은 그러나 그 경계선이 있지도 없지도 않은 공空의 상태였다.

『비가 오는 경계선으로 가고 싶었다. 나를 반쯤 적신 다음에야 내가 가야 할 곳이 어딘지를 알 것 같았다. -강준용/ 숭선에서.』

그는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어 경계선에서 떠나기 싫었던 것이다. 순수하고 해맑은 아이들의 세계, 여물지 않은 고추를 내놓고 변경의 경계선을 마음껏 부수며 물장구치는 아이들에게는 경계선이 없었다. 그는 바로 그 경계선을 찾아 떠나며 분역지구를 부수어 버릴 세계를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십방위十方位 그 어디에도 경계선은 존재했다. 그가 찾던 방천에서, 숭선에서, 두물머리에서 그는 그 경계선이 동심으로 허물어짐을 느꼈다. 분역지구로 구체화되기 이전의 온전한 세계. 저 아이들이 자라 경계선을 구분 짓지 않아도 되는 세계.

그의 어린아이와도 같은 눈망울에서 툭,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나는 그의 맑은 영혼이 고스란히 담긴 눈물을 보았다. 새벽이슬처럼 맑고 고운 눈물, 그는 어린아이였다. 강한 바람이 불어 그의 허연 머리칼을 쓸어 날리고 있었다. 그는 이제 떠나도 된다는 듯이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아이들아! 잘 있어라! 바이바이! 안녕! 안녕! 안녕!

그가 강둑에서 오래도록 머뭇거렸던 건 저 아이들을 보려했던 것이었다. 결국은 아이들과 함께 해맑은 웃음으로 물장구치다가 집으로 돌아가려 했음을 느낀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돌아서며 힘차게 흔들던 그가 30여년 펜pen 자국 깊게 파인 손을 떨어뜨리는 순간 물비늘 반짝이며 두물머리에서 별을 만들고 있었다. 그의 비쩍 마른 몸뚱이 위로 낡은 586노트북이 무겁게 매달려 있었다. 30여년의 전설이 아마도 저 낡고 무거운 노트북 속에 있으리. 비가 내리고 다시 개이는 경계와 경계의 순간들, 그 속에 전설의 소설가가 있었다. 전설 속에 동심童心이 있었다. 낡은 노트북을 땅에 놓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 자신이 전설의 동심童心과도 같은 작품이 먼지에 묻혀 사라짐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죽는 날까지 전설과 동심을 땅에 내려놓지 않을 것이다.

『……그때 쯤 나는 경계선 저쪽에 대한 사정을 거짓말로 들려줄 줄 아는 지혜도 가지리라. -강준용/ 숭선에서.』


그는 늙은 노인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버들치가 되기도 하고 모래무지가 되기도 했다. 산천어가 되어 두물머리 햇살 반짝이는 곳에서 물장구치기도 했다. 가끔은 아주 천천히 헤엄을 치며 두만강 원지로 갔다가 다시 방천하구로 내려가며 먼 옛날의 분역지구의 단단한 경계선의 아픔과 민족의 한이 서려있는 자작나무와 두만강 두물머리에 대하여 노래를 불러주었다. 입술 파르르 떠는 아이들을 무릎에 앉히고 겨우내 묻어두었던 옥수수와 고구마와 감자를 구워 먹이며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전설의 맑은 별을 따라 두만강이 흐르고 두만강 따라 동심童心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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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첨>

숭선에서 초설회 해외문학탐방에 큰 도움을 주신 분들게 감사드립니다.

-, 중국 조선족 소년보사 사장, 전 연변문인협회 주석 김학천 시인.
-. 문학과 예술사 주간 김성호 평론가.
-. 문학과 예술잡지사 우광훈 소설가.
-. 연변 출판국 손용호 문학처처장.
-. 연변TV방송국 김영건 드라마부 감독.
-. 연변 소설가학회 정세봉 회장.
-. 연변 작가협회 진설홍 부주석.
-. 연길 변호사 김무 변호사.
-. 연변문학 소설편집(전)홍천룡 소설가.
-. 뉴월드 정보회사 최룡국 사장, 시인.
-. 연변소설가학회 회원 김견, 이성옥, 박희옥 소설가, 시인.
-. 최강 르뽀작가님.
-. 숭선촌 촌장 및 마을사람들.
-. 기타 성함을 잊어버린 죄송스런 모든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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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있는 작품이므로 작가의 동의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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