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수난의 연대

 

1 감격의 시대

1948년 4월 공산당 군대가 길림을 점령하고 뒤미처 장춘도 해방하였다. 그리고 그 해 11월 심양이 함락되면서 전 반 동북은 공산당의 천하로 변하였다. 이에 앞서 1947년 가을 공산당이 집권한 구태일대에서는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원 교민회 회장 장용림은 청산투쟁을 맞고 퇴임을 하고 그 빈 자리를 박재호가 메우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공산당이 일으킨 계급투쟁의 폭풍우는 모든 민족운동을 휩쓸어버렸다. 구태현 민족해방동맹 이석대(李石大)주임이 나서서 노력을 했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그 해(1948년) 8월 12일은 박재호한테 생전생후를 통하여 가장 큰 일이 생긴 날이었다. 아내 신순생(申順生)씨가 아들을 낳은 것이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리는 순간 그는 자식에 대한 부모님의 은공과 애정이란 어떠한 것인지를 직접 체험으로 확인했다. 부모가 돼 보지 않고는 부모의 마음을 모른다는 말의 참뜻을 그는 28세의 연령에 이르러서야 체험한 것이었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길진(吉鎭)이라고 지었다. 진은 돌림자라서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길자를 선택한 것은 길림성에서 났다는 의미도 있다. 그것은 세 살에 고향을 떠나온 몸이 이국타향에서 생명의 연장인 아들을 보았다는 말이 되며 모든 풍파는 자신의 대에 그치고 아들 대에 이르러서는 길하라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의 뜻 또한 배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식한테 발전된 사회, 평화와 자유의 행복한 사회를 마련해주기 위하여 생명을 바칠 각오로 싸웠다. 그는 사회가 수요하면 칼 산에 오르고 불바다에 뛰어들 그러한 각오가 되어 있었다.

바로 그러한 때 구태 교민회 농사부장 우종현씨가 길림성 농업청 수리국에 임직(任職)을 하고 오라지 않아 음마하 조선인 농장을 재건하는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우선 길림시 강북에서 조선인 농호 50여 호와 피난을 떠났던 원 음마하 주민 10여 호를 집단 이주를 시켰다. 그리고 조선민족 학교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원래 있었던 남산학교는 광복직 후 중국인들이 뜯어갔으므로 터도 찾기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구태현 조선인사회는 이른바 약동하는 감격의 시대를 맞은 셈이었다. 박재호는 민족사회의 부름을 민족의 민생문제와 후대양성을 위하여 <<어리고 귀여운 길진이와 몸이 성치 않은 처를 의식주가 없는 채 두고>>(일기중에서) 음마하로 갔다. 그는 학교를 꾸렸고 이철우(李哲雨)씨를 교장으로 앉혔다. 그리고 자신은 중국인들과 손을 잡고 중조소비합작사(中朝消費合作社)를 창설하였다. 합작사의 주임으로 황재중(黃載仲)씨를 천거하였다.

후대양성을 목적으로 한 학교가 가동이 되고 민족의 생계보장을 목적으로 한 합작사도 가동이 되자 그는 참군(參軍)을 선택했다. 그것은 1949년 4월의 일이었다. 그의 소속은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독립퇀 경위련 11반(第四野戰軍獨立團警衛連十一班 독립연대 경위중대 11분대)에 편입되어 반장(班長; 분대장) 겸 군인회(軍人會) 회장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그의 군인생활은 불과 반년에 그쳤다. 결핵을 앓게 되어 퇴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니 그를 기다리는 것은 가슴 찢는 비보였다. 아내가 결핵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병사한 것이었다. 겨우 세 살 나는 길진이는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아들을 안자 길진이는 와! 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너무나 오랫동안 아버지와 떨어져 있었으므로 낯설기만 했던 것이다.

얼마 동안 일을 놓고 집에서 보양을 하고 난 박재호가 건강이 회복되자 학교에서 교도주임자리를 비워놓고 모시러 왔다.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사절했다. 그는 그 보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 현의 조선인들을 하나로 규합하는 단체를 만드는 사업에 착수하였다. 이른바 교민회와 똑 같은 성격의 민족단체였다. 그러나 교민회는 국민당의 지지하에 세워진 조직이라고 하면 이번의 민족단체는 공산당의 지지를 받아서 하려는 것이었다. 박재호한테는 국민당의 삼민주의든 공산당의 마르크스주의든 별로 의미가 없었다. 그는 색깔이 무엇인지 가리지 않고 오직 민족한테 유리한 것이면 모두 받아드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순수한 민족주의자였던 것이다.

그의 노력으로 1949년에 전 현 조선인 대표대회가 소집되었다. 그런데 회의는 중도에서 막을 내렸다. 자초에는 정부에서도 허가를 했었는데 정작 회의가 진행되자 중지 명령이 떨어진 것이었다.

후에 박재호가 쓴 자서전을 보면 그 과정을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민족조직이 필요하였다. 이를 제의하니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현 당국에서도 지지해 나섰다. 그리하여 전 현 각지의 대표들이 참가한 구태현 조선인 대표대회를 소집하였다. 그런데 성 민정청에서 온 사람이 의의(疑意)를 달았다. 따라서 이(회의)를 중단하였다.

목적지를 향해 달리던 열차가 중도에서 멎어 섰다. 통행금지였다. 할 수 없이 중도에서 하차한 박재호는 단호히 구태를 떠날 생각을 가졌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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