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신비한 땅

1994년 12월초 나는 룡정시 개산툰진 선구촌 미도툰(開山屯鎭船口村尾島屯)에 이르러 마을 서북산 옛성에 올랐다.

기재에 따르면 이 산성은 해발 201m이고 외성의 전체 길이는 200m, 성벽 높이는 8. 9m이고 너비가 4m라고 한다. 원형으로 된 내성의 전체 길이는 500, 성벽 높이는 9, 너비가 4m이고 남과 북에 성문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산성은 발해인들이 세운것인데 료를 지나 금나라시기까지 연용(沿用)되였다고 한다. 하지만 성은 이미 페허가 되여 세줄의 20여메터의 기초돌과 검고 붉고 노란 깨진 기와장과 자기쪼각들이 잡초속에 묻혀있었다.

나는 성 남쪽 망원대가 있었다는 곳을 어림짐작으로 찾아가 섰다.

발굽아래 구불구불 두줄로 뻗어간 높은 둑안으로 한낮의 따스한 기온에 밤새 얼었다 녹은 성에장들을 싣고 한줄기 두만강이 유유히 흘러간다. 두개의 국적으로 나뉜 하나의 동포가 둑 량안에 터를 잡고 산다. 성아래 중국쪽은 아늑한 초가의 시골이고 저쪽 대안은 비좁은 골짜기가 미여질듯 층집들이 촘촘한 도시여서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제날 이 망원대에 선 거란, 녀진 군사의 탐욕의 눈에 비친 조선측 종성의 모습은 어떠했을가?

망원 렌즈속에 어렴풋이 잡히는 종성시가지 뒤산 산성의 옛성벽은 나의 가슴에 전화를 몰아온다.

그제날 싸움에서 죽어간 두나라 군사들은 얼마일가?

정녕 두만강은 피에 젖어 비린내를 풍겼으리!

저 산성은 세 장수가 임금의 명을 받고 종성에 이르러 쌓았다는 전설을 품고있다. 하지만 강건너 대안의 산성을 틀고 앉은 녀진의 피해를 막아낼수 없었다. 마침 풍수가 이곳을 지나다가 당금 강물을 떠갈듯한 배형국의 종성의 지리를 보고 <<돛 없는 배가 어찌 물을 건너리!>>라고 한탄을 했단다. 장수는 깨닫는바가 있어 오늘의 종성읍 복판에 세길 높이로 돌기반을 세우고 그우에 한아름씩한 싸리기둥을 사방 둘러 루(樓)를 만들었다. 3층으로 된 루는 층마다 기와지붕이 하늘로 치켜올라 방금 날아갈듯한 기세의 멋진 돛이 되였다. 그때로부터 종성은 만경창파를 헤가르며 승승장구로 나아갔다. 그후 종성의 장수는 침노해온 외적을 쳐이기고 3층 루각에 올라 앉아 적장의 항복을 받았다. 그래서 이 <<돛>>을 수항루(受降樓)라 이름 지었는데 지금도 3층 란간에 <<수항루>>라는 현판이 커다라니 붙어있다고 한다.

리조가 강성의 언덕을 톺고 두만강 연안 녀진이 내홍으로 아귀싸움을 하던 시기 북방 6진은 두만강을 지켜선 여섯마리 호랑이였다. 속칭 <<만리장성>>이라는 무산의 차유령(車踰嶺), 회령의 오국산성, 종성의 산성과 수항루―진마다 높은 봉에 세워진 요새는 철옹성마냥 변방을 지켜섰다.

리조정부는 변방을 강화하려고 사변률(徙邊律)이라는 법률을 만들어 내지의 사람들을 강역으로 끌어다가 안치시켰다. 함경도 관찰사 약천 남구만(藥泉 南九万)이 삼봉평(三峰坪)에 무산부를 설치했을 때는 황페하고 인가가 없던 북방땅에 잠시나마 계견이 울고 곡식이 푸르렀으니 약천도 저 유명한 시조를 후세에 남긴줄로 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희들아 상긔 아니 일어느냐

재 넘어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오늘의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읍에서 얼마 안떨어진 서쪽켠에 오국산성(五國山城)이 있다. 두만강을 사이둔 강북 중국쪽 룡정시 대소과수농장(大蘇果樹農場)에서 마주 바라보면 오국산성 역시 강을 건너는 배형국이다.

언젠가 서울 량반이 <<배머리>>에 서서 갓을 벗어 내려뜨리니 깎아지른 절벽아래로 내리던 갓이 이튿날 다시 날아올랐다는 신비한 오지인 바위굽을 에돌아가면 옛날 초평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양지바른 언덕에 초가를 짓고 흘러간 노래치럼 <<낮이면 밭에 나가 길쌈을 매고 밤이면 사랑방에 새끼 꼬면서>> 농부들이 무릉도원을 살았단다. 오붓한 마을 강역에 터를 잡은 한 농부한테는 이팔청춘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밤이면 처녀의 단꿈에 웬 괴물이 기신기신 이불속으로 기여들었단다. 하도 괴상해서 명주실 한끝을 괴물의 발목에 매고 따라나가니 집뒤 두만강으로 물개 한마리가 들어가더라나. 가엽다, 처녀는 사내품에 안기는 감동도 모르고 임신을 하고 열달만에 분만을 했으니 태여난것은 개모양의 두만강 물개의 <<아들>>이였다. 아무리 미운 짐승일지라도 자기의 살점이라 차마 죽일수는 없어 처녀는 네발에 버선을 해신기고 밤도와 월강을 시켰다. 바로 물개의 정(精)과 처녀의 혈(血)의 결합으로 태여난 네발 가진 짐승이 누르하치라니 우리 민족이 녀진의 피해를 얼마나 받았으면 이같이 모욕적인 전설을 만들어냈겠는가.

누르하치는 료동총병관 리성량(李成粱 철령 리씨)의 막하에서 호위병으로 있었다. 어느날 리성량의 발을 씻기던 누르하치는 총병관의 발바닥에 빨간 짐 세개가 있는것을 보고 자기한테는 일곱개가 있다고 자랑을 했다. 그것을 본 리성량은 깜짝 놀랐다. 별 일곱개를 딛고있으니 장차 우환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죽여버리기로 했는데 누르하치는 용케 알고 푸른 말을 타고 도망을 했다. 말꼬리를 따른것은 황둥개 한마리였다. 사흘날 사흘 밤을 달려 한곳에 이르니 말은 지쳐 숨지고 누르하치도 기진맥진 쓰러졌다. 뒤쫓던 군사들이 산을 포위하고 사방에 불을 질렀다. 황둥개가 강물에 몸을 적셔서는 누르하치한테 불이 범접 못하도록 했다. 결국 사람은 살고 개는 죽었다. 우리 민족들속에 류전되고있는거나 만족들이 기억하고있는 전설이나 누르하치는 개와 인연이 된다. 그래서 만족들은 자기들 시조를 구해준 은혜를 못잊어 개를 살생하지 않고 개고기를 먹지 않고 개털모자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다른 민족 사람이 개털모자를 쓰고 찾아오면 아무리 귀한 손님일지라도 조상 위패를 모시는 안방으로는 들이지 않는다.

건주녀진(建州女眞)의 출신으로 심양에 도읍을 세우고 왕이 되여 국호를 후금(后金)으로 한 누르하치는 아들대에 청나라를 만들기에 이를 때 리조는 당파싸움으로 쇄락의 비탈길을 내렸다. 예전에 오국산성에서 화살을 날리면 한왕산성(룡정시 富裕鄕 소재지에서 동남 4km 지점에 있다) 녀진군사들이 사시나무 떨 듯했댔으나 이제는 리조 장수의 화살이 감히 미치지를 못해 자객을 보내기에 이르렀다.

파랗게 날을 세운 보검을 몸에 지닌 오국산성 자객은 두만강을 건너 밤도와 30리 상거의 한왕산(汗王山) 산성 돌로 쌓은 성벽에 몸을 붙였다. 5각형모양으로 된 성 남쪽과 북쪽에 2m 두께의 웅장한 문이 나있었다. 동서 길이 250m, 남북 길이 500m나 되는 성벽을 안고 돌고 돌던 자객은 요행 나무를 벽에 세워놓고 쥐도 새도 모르게 잠입했다. 네개의 못을 에돌아 우물가에 이른 자객은 토끼 심장마냥 뛰는 가슴을 진정하고 나서 사방 20m 되는 흙으로 지은 병사로 가만히 기여들었다. 장수가 네각을 벋고 코를 골며 자고있었다. 침상 가까이 다가가 보검을 빼여든 자객은 칼손은 들었으나 감히 내리지 못했다. 잠자는 녀진 장수의 기골에 자겁이 들었던것이다. 망설이고있을 때 장수가 몸을 뒤재쳐 누웠다. 간담이 서늘해진 자객은 무릎을 꿇고 떨리는 목소리로

<<장수님, 용서하십시오. 소인은 보검을 얻었기로 바치러 왔소이다. >>

라고 한마디 하고는 보검을 놓고 도망을 했단다.

룡정시 삼합향 북흥촌(三合鄕北興村)의 안흥권(安興權 55세)씨의 말을 나는 전설로만 들을수 없었다. 자객이라는 비루한 수단을 쓰기까지에 이른 리조의 피페상과 잠자는 사람 하나 베지 못하는 리조의 허약을 가슴 아프게 느꼈다.

임진왜란의 전화를 겪고나서 수족이 갈갈이 찢기듯 했으면서도 당쟁에 열고를 터쳐간 리조는 썩을대로 썩어갔다. 당시 리조의 부패상을 조선 량강도 보천보에 있는 곤장덕전설은 전설 아닌 전설을 갖고있다.

― ―

리조 숙종왕 38년(1712년) 5월이였다.

<<에라, 길 비켜라! 감계사님 행차시다!>>

감영 사령들이 공연히 위풍을 뽑으며 고아대는 소리가 치벽한 산촌의 삼수거리를 공포속에 몰아넣었다. 갑산과 나란히 중죄인의 정배지로 소문난 여기 삼수는 인가가 생긴이래 처음으로 어마어마한 벼슬아치의 행차가 나타나 정배인들의 간담을 다시 한번 서늘하게 얼구었다.

국경 경계선을 감정하라는 숙종의 어명을 받고 서울을 떠나온 우윤 박권(右尹 朴權)과 함경감사 리선부가 4인교에 틀스럽게 앉았는데 양태가 넓은 통영갓이 해빛을 받아 호사스럽게 잔줄무늬를 일으켰다. 그리고 커다란 말등 호화로운 말안장에 앉은 혈색좋은 사나이는 강희황제의 칙사인 길림주재 우라총관 무커덩이였다. 두나라 대표의 뒤로는 통역관 김경문 등 실무일군과 시중군들이 따랐다.

삼수를 떠나 구가진을 지나서 허천강을 넘고 혜산진에 들렸다가 다시 오시천을 끼고 백두산으로 <<정계비>>를 세우러 떠난 길이였다.

보천보에 이른 일행은 밤을 잤다.

조선 권택무선생은 이날 일을 이렇게 적고있다.

― ―

<<행차 차비가 다 된줄로 아뢰오. >>

하는 소리를 듣고도 방바닥에서 엉치를 들지 않던 박권과 리선부는 무커덩이 떠날 차비를 해가지고 나섰을 때에야 기가 차는 소리를 내뱉었다.

이제부터는 산이 점점 더 가파로워져서 가마를 타고 갈수 없은즉 하늘소를 대령하라는것이였다.

구실아치들이 딱한 낯빛을 하고 한걸음 나서서 이 고장은 하늘소가 귀하옵고 마침 짐을 싣고오는 부담말이 있사오니 그것으로 대령하면 어떠하리까 하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하물며 짐을 싣고온 부담말따위를 대령하겠다니 이 어찌 무엄한 짓이 아닌고. >>

― ―

무커덩은 아무 말도 없이 무표정하게 뒤짐을 지고 두어걸음 왔다갔다 할뿐이였다. 다만 그의 눈동자에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것저것 타산해보는 은근한 기색이 엷은 안개처럼 피여나고있었다. 그는 한참만에 ―이제부터는 산길이 매우 가파롭다는데 말이나 하늘소 등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찌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그 소리에 박권은 옳다 됐다는 기색으로 입 삐뚤어진 소리를 지껄였다.

<<본관과 함경감사는 임무가 무거운데 비하여 늙어서 따르지 못하여 근심이였던중 합하의 후의를 고맙게 여기는 바입니다. 우리 둘은 비록 앞길을 가지 못해도 우리를 대신하여 군관과 역관을 보내고 여기서 기다릴것이오니 귀한 행차 편안히 다녀가시기를 바랍니다. >>

― ―

(김경문은) 저런 썩어빠진 늙다리 선비들이 나라 정사의 채를 잡고 거들먹거리고있으니 한심하고 통분스럽기 그지없는 노릇이였다.

― ―

이날부터 청나라측에서는 홍제의 칙사가 나서고 우리 쪽에서는 량반들이 사람대접도 하지 않는 군관이요 역관이요 하는 구실아치들이 마주서서 나라의 경계선을 감정해나가게 되였다.

― ―

기재를 보면 백두산 천지에서 10리쯤 되는 토문이 내려다 보이는 분수령에 땅을 파고 세웠다는 정계비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라총관 무커덩은 성지를 받들고 국경을 조사하면서 이곳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을 경계로 삼고 동쪽은 토문을 경계로 하고있는 까닭에 이 분수령우에 그것을 새긴 비석을 세운다. 강희 51년 5월 15일. 점식(첩식(帖式), 소이창(蘇爾昌), 통관 이가(二哥), 조선군관 리의복(李義復), 조대상(趙臺相), 차사관 허량(許樑), 박도상(朴道相), 통관 김응헌(金應憲), 김경문(金慶門).

청나라 사신과 나란히 박혔어야 할 감계사 박권과 함경감사 리선부의 이름은 국사우에 놓여진 일신 안일로 해서 쪼아박히지 못했다.

했으나 박권한테 곤장을 댈대신 숙종은 <<백두산지도에 붙이노라>>하는 시를 지어 <<산에 오른 기개 어떠했더뇨, 그 누가 구름발이 멀다 했던고. >>라고 박권의 <<공로>>를 치하까지 했다니 기가 찬 일이 아닐수 없다 하겠다.

보천보를 감싸고 우뚝 치솟은 산언덕에서 박권이 가마군이 한발 빗디뎠다고 곤장이나 치고있다가 되돌아갔다고 해서 곤장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육체적인 박해를 받는것은 어느 시대나 백성이지만 력사는 흔히 혼암한 임금과 안일한 신하들에게 무자비한 곤장을 댄다.

강희년간(康熙年間)에 청조는 만주땅을 <<룡흥지지>>로 간주하고 흥경이북, 이통주이남, 두만강이북의 광활한 지역을 봉금하고 만족이외의 다른 민족은 땅을 개간하고 삼림을 채벌하고 광물을 캐는것을 엄금했으며 또 마음대로 인삼을 캐거나 동주(東珠)를 채집하거나 사냥을 하는것을 엄금했다.

봉금을 실시한후 봉금지내에는 인삼산(人參山), 위렵산(圍獵山), 포주하(捕珠河)가 설정되였으며 청조 조정 내무부 혹은 여러 왕부(王府)의 장정들이 인삼을 캐고 동주를 채집하고 사냥을 하여 조정 혹은 왕부에 바쳤다.

장병들은 초목이 무성한 벌판과 높고 험악한 산판을 넘나들면서 인삼을 캐고 잣, 버섯, 동주 등을 채집하였으며 또 꿩, 노루, 사슴, 메돼지, 범, 곰, 돈피 등 짐승을 사냥하여 관부에 바쳤다.

두만강 연안 연변지대에도 인삼산, 위렵산, 포주하가 있었다. 위렵산으로는 후훈(呼훈―지금의 부르하통하와 가야하 분수령인 할바령의 한개 지맥)이고 인삼산은 우얼훙아푸다리(五兒烘阿普達里―지금의 훈춘시 춘화향 부근), 호남곡(湖南谷), 호남령(湖南嶺) 등이며 포주하로는 가하리하(지금의 가야하), 부르하투하(지금의 부르하통하), 해란하 등이다. 지금의 룡정시 조양천(朝陽川)은 당시 진주영(珍珠營)이라 불렸는데 동주를 채집하는 주요한 곳이였다.

청조정부가 동북의 특산물을 독점하기 위해 엄격히 봉금을 실시했는바 강희, 함풍년간에 100차의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사람을 파견하여 순회감시했다. 도광년간에는 해마다 통순(統巡)했고 대신을 파견하여 순시도 했다. 일단 사사로이 땅을 개간하고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을 발견하기만 하면 즉시로 붙잡아 죽이거나 몰아내였으며 집을 허물어버리고 밭에 심은 농작물을 짓밟아버렸다.

일본의 중이며 학자인 영충(永總)이 먼 옛날 발해에 이르렀을 때 연변경내에는 <<곳곳마다 마을이 있>>었고 마을마다 삼베를 짜고 벌마다 벼파도 넘실대고 비탈의 콩밭엔 콩꼬투리가 주렁지여 집집의 식탁에는 구수한 된장국이 올랐다. 현주(顯州―오늘의 서고성을 중심으로 한 화룡현일대)의 천, 로성(盧城―오늘의 룡정시일대로 추정됨)의 벼, 위성(位城―오늘의 서고성 서남의 장정)의 철, 책성의 된장 등 발해국경내의 명산물과 토산품은 국내외 상인들과 사신들에 의해 교류되였다. 하지만 료와 금의 수백년 세월을 지쳐오면서 황페해갔고 청조에 이르러 봉금이 실시되면서 번영의 력사자취는 사라지고 망망한 수림속에 짐승만이 우글댔다. 두만강 이북지역과 녕고탑일대에 만족이 거주했는데 그나마도 1654년 500여세대, 그후 3백여세대가 불었을뿐이였다. 1714년 녕고탑 장군의 관할하에 세워진 훈춘협령의 관할구역은 훈춘을 중심으로 황도(荒島―지금의 로씨야 연해주), 두만강이북, 가야하어구, 수분하좌안과 할바령에 이르기까지의 넓은 판도였지만 훈춘기병의 수는 겨우 190명이였다니 성새는 황페하고 가도가도 민가라곤 없었다. 큰 강줄기 여울에서는 어쩌다 동주 채집자들의 밥짓는 연기가 피여오르고 수림속 귀틀집은 봄과 여름 썰렁하니 비였다가 가을이면 채집자, 겨울이면 사냥군들로 과객을 바꾸었다.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와 그 후손들인 청나라 황제와 재자가인들은 하루 세끼 산해진미 진수성찬 하였지만 노루고기를 제일 즐겼단다. 불에 구워 소금을 쳐서 꼬챙이를 들고 뜯어먹었는지 아니면 솥에 삶아 뜨거운 국물을 훌훌 불면서 군 떨어지게 마셨는지 오늘 우리가 하듯 생고기가 입안에서 슬슬 녹게 식초를 쳐서 회갓으로 먹었는지는 구태여 꼬집을 리유는 없을것이다. 어쨌든 산짐승중 노루고기가 일미가 아닌가!

그래서 사시장철 노루를 잡아 바치도록 엄명을 내렸다는 전설이 지금도 만족들속에 살아있다. 그들의 식탁에는 끼마다 생생한 노루고기 반찬이 올라야 했으니 백두산의 노루가 종자가 마를 지경이였단다.

룡정에서 동남쪽으로 오랑캐령을 넘어 하승지, 상승지를 지나 조선 회령 맞은쪽 달라자 오봉산밑에 노루골이 있다. 어느날 녀진족 임금은 식성이 자기를 닮아 노루고기가 아니면 밥 한술 못먹는 황후의 생일상에 손수 잡은 노루고기를 놓으려고 사냥을 떠났다. 그런데 며칠동안 산판을 헤맸어도 노루는커녕 노루꼬리도 눈에 띄지 않았다. 산을 넘고 령을 지나 수일이 걸렸는지 알수 없으나 어느날 싸리꽃 향기 물큰 코를 찌르는 한 골짜기에 이르니 두귀를 쫑긋 세운 노루모양의 바위가 길을 막았다. 바위밑으로 맑은 샘물이 퐁퐁 솟고있었다.

김경택선생은 이 전설을 아래와 같이 적어보였다.

―지칠대로 지친 임금 일행은 갈한 목을 추기려고 거울같이 맑은 물에 입을 댔다. 그런데 문뜩 샘가의 바위가 우쭐우쭐 일어서더니 백발이 성성한 로인으로 변하였다. 백발로인은 싸리로 결은 화살통에서 싸리대 화살 하나를 뽑아 주며 정중히 말했다.

<<이 노루바위를 지나 올라가다가 싸리나무가 흔들리는 곳에 가서 활을 쏘면 노루가 잡힐것이오이다. >>

그리고는 미처 안부도 묻기전에 백발로인은 사라지고 다시 바위가 눈앞에 앉아있었다.

― ―

갑자기 한곳에서 싸리나무가 흔들렸다. 임금은 백발로인이 준 싸리대 화살을 시위에 먹여날렸다. 과연 노루 한마리를 잡았다.

― ―

그때로부터 사람들은 그 골짜기를 노루골이라고 불렀다 한다.

지금처럼 기차도, 자동차도 없이 달구지가 유일한 운수였던 때에 수천리 길을 생생한 그대로 운반한다는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였다. 그래서 산채로 잡아 몰아갈수밖에 없었을것이니 무송현 로영구마을 뒤산의 노루골 이름은 울타리를 치고 노루를 가두었다는 사실에 연원을 두고있다고 전설은 이야기한다.

이제 와서 우리는 그 전설의 진실여부를 따질 필요가 없다. 호피, 수달피, 진주 등으로 황궁과 몸을 장식하고 산짐승고기로 배를 불리고 산삼, 령지, 웅담, 사향으로 생명을 연장해왔던 황제와 귀족들의 부귀영화를 위해 바쳐야 했던 당시 채집자들과 사냥군들의 극성과 고초만 헤아리면 다다. <<춘향전>>에서 리도령이 읊었듯이 자고로 고관대작들의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옥반가효는 만인고라>> 하겠다.

그래도 물산이 풍부한 천리림해에서 일생을 보낸 만족들의 채집자와 사냥군들은 강 하나 사이두고 척박한 땅에서 사는 조선의 백성들에 대면 호화롭다고 해야 할것이다.

작가 리기영선생은 <<두만강>>에서 당시 무산의 사포수들의 고초를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 ―

무산부사는 사포수들에게 호피, 수달피, 웅담, 록용 등을 1년에 얼마씩 바치라는 일정한 책임량을 지정해주었다.

그것은 해마다 불문률로 시행되였다. 만일 그대로 아니 바치면 그는 어떤 사정이 있었든지간에 관가로 잡혀가서 혹독한 형벌을 당하였다.

그럴 때에 사포수의 제찰(制札)을 빼앗기는것은 물론이요 매를 맞고도 속전을 바쳐야만 그들은 석방될수 있었다.

사포수에 대한 부사의 가렴주구는 다음과 같은 전설적 사실을 빚어내였다. 무산 고을에 세사람의 사포수들이 살았는데 그들도 부사에게 해마다 일정한 수렵물을 세공으로 바쳐왔다. 그런데 다른것은 수량을 채울수 있었으나 록용만은 도리가 없었다.

사슴은 워낙 희귀한데다가 잡기도 제일 힘드는 짐승이다. 게다가 해마다 잡으니 사슴은 더욱 희귀할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부사는 이런것은 아랑곳 하지 않았고 어떻든지 책임진것을 잡아오라고 족쳤다.

포수 세사람은 그해에 사슴을 못잡았다. 그들은 생각다 못하여 두만강을 건너가서 중국 포수한테서 록용을 구해다가 다른 공물과 함께 부사에게 바쳤다.

이렇게 그들은 발등에 떨어진 화를 면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록용을 꾸어온 채무로 인하여 다시금 쪼들리였다. 그것은 록용을 구해올 때 저쪽 포수는 돈보다도 녀자를 요구했기때문이다.

그들은 집에 돌아오는 길로 녀자를 광구하였으나 보내줄만한 대상자가 없었다. 과연 어떤 녀자가 생판 모르는 타국사람한테로 팔려 가려 했겠는가. 시일이 지날수록 채권자는 녀자를 빨리 보내라고 독촉이 성화같았다. 그들은 사정이 절박하게 되였다.

― ―

그런데 록용을 뀌여준 채권자는 드디여 세 포수를 걸어서 관가에 정소를 하였다.

그럴줄을 미리 각오하였던 그들은 화액을 면치 못할줄 알고 최후의 결심을 택하였다. 그것은 자기 집과 부락에다 불을 지르고 다같이 타죽으려 하였던것인데 관가와 내통한 마을사람이 밀고를 한때문에 그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세사람은 방화미수죄와 민심소란죄로 관가에 체포되였다. 그길로 두만강변 사형장으로 달구지를 태워서 압송하였다. ―

봉금령은 2백여년 세월 무권리한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가면서 <<룡흥지지(흥경이동, 이통주이남, 두만강이북)>>를 인가가 희소한 신비한 원시지대로 만들었다. 인간욕심의 론리를 따르면 사회발전을 한자리에 묶어놓는 미련이라 하겠으나 자연 자체로 보면 다행스러운것이리라. 동북지방을 옥토뿐만 아니라 또한 희유금속의 산지로 살아있게 했다. 그리고 도처의 밀림속에는 산삼, 령지, 불로초 등이 많이 있고 모든 짐승이 떼를 지어 다니여서 유명한 수렵지대로 만들어졌다.

1994년 11월 5일 나는 숭선에서 로과(蘆菓)로 가는 뻐스에 몸을 얹었다. 주머니계산이 푼푼치 못한 선비의 답사길이라 뻐스의 신세를 져야만 했다.

숭선진 소재지 고성리에서 90km 상거한 화룡으로 가는 뻐스는 하루에 두번, 시에서 아침에 떠난 뻐스는 오후 한시에 발차하여 귀로에 오르고 오후에 도착하는 뻐스는 하루밤을 자고 아침 일찍 떠난다. 그래서 심산벽촌 숭선사람들은 아침에 시로 떠나 오전장을 보고 부랴부랴 점심을 먹고 되돌아온다.

나는 그날 오후 차를 탔다. 뻐스는 고성리촌을 지켜선 군함산(군함형국으로 되였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발치를 에돌아갔다. 군함산을 경계로 손바닥만한 고성리촌과 강건너 조선의 삼장리가 자리한 올기강아래 4백헥타르 땅을 상천벌이라 하고 남석촌을 지나 로과에 이르기전까지의 두만강벌을 하천벌이라고 한다. 원래는 이 벌을 통째로 큰골이라 했다가 대동으로 유식한 이름으로 되였다가 언제부터인가는 하늘아래 첫동네라는 뜻으로 천벌이라 했다. 다시 세분화하여 웃쪽은 상천벌, 아래쪽은 하천벌이라 했던것이다.

숭선에서 로과까지는 근근히 30리 길이라 얼마후 뻐스는 로과로 들어가는 길목에 나를 뿌려던지고 부릉부릉 떠나갔다.

꼬리를 치는 룡의 형국인 룡산을 병풍으로 두르고 좁고 긴 두만강 북안 언덕에 자리잡은 로과의 이름은 한문 표기의 뜻과는 조금도 련계가 없다. 초기 이주민들이 이곳 지대의 특징에 따라 원래 늪골(沼澤地)이라고 이름을 지었단다. 그때만해도 로과촌은 지금처럼 룡산을 등진 앞더기가 아니라 석두천을 옆에 끼고 룡산골 늪가에 자리했던데서 기원된 이름이란다. 후에 인구과잉으로 헐벗고 굶주리던 산동지방의 한족들이 봉금령을 무시하고 류리걸식하며 여기에 와서 터를 닦고 살았는데 그중의 한 수재가 고향에 편지를 쓰면서 조선말 발음을 따서 표기한것이 그만 한문 이름으로 고정되였다고 한다.

연변의 지명을 따져보면 절대 대부분 조선족 이주민들이 지은것이다. 언덕 평(坪), 골 동(洞)자 붙은 이름은 우리 민족의 특유한 이름인데 심혜숙선생이 708개 지명을 조사분석한데 따르면 평자 달린 이름이 64개, 동자 달린 지명이 183개, 직접 골자를 단 이름은 26개로서 3분의 1를 점한다. 중평, 십리평, 룡수평―약수동, 부암동, 덕대동―지어 한족의 이름으로 고정된 지명의 원명 역시 조선족 지명의 변형이였다. 백금(白金)의 원명은 함박골인데 후에 백금이 난다고 이름이 바뀌였고 깊은 늪은 심포(深浦)로, 저 유명한 선바위는 립암(立岩)―등 일일히 례를 들자면 책 한권은 묶어야 할것이다. 발해이후로 인가가 날로 적어져 옛 이름들이 사라지고 봉금령 후로는 무인지경이였다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하겠다.

진정부에 들러서 당위 부서기 백금철씨한테서 현황조사를 마친 나는 내가 행장을 풀어놓은 량식려관에서 푸짐한 저녁대접을 받았다. 한근 술을 굽냈다. 알딸딸 취해오면서 졸음이 몰려왔다. 백부서기를 배웅하고 나는 잠에 곯아떨어졌다. 며칠간의 긴장한 취재에 몰린 피로가 이튿날 날이 훤히 밝을 때까지 늘어지게 통잠을 자고나니 말끔히 가셨다.

나는 거뜬한 기분으로 죽림(竹林)행에 올랐다. 진 공청단서기가 파견을 받고 향도가 되여주었다.

하늘은 맑고 해빛은 밝았으나 아침기온은 무척 쌀쌀했다. 길목 정류소에서 숭선―화룡행 뻐스를 기다리려니 사지가 오싹오싹 떨렸다. 진작 도착시간은 지났으나 뻐스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마침 로과에서 죽림으로 가는 손잡이뜨락또르가 있어서 몸을 실었다. 아무런 바람막이도 없는 차가 달리는 속도에 뒤로 밀려오는 세찬 바람이 사정없이 볼을 때렸다.

죽림촌에 이르러 김동수(金東洙 67세 조선 함경북도 길주군 태생)로인네 집에 들어서자 메주콩을 삶는 뜨거운 김에 얼었던 몸이 녹으면서 훈훈한 기운이 전신을 어루만져주었다.

<<왜서 죽림이라고 했는지 아세요? 날농사 때 강을 건너온 분이 여기에 와서 밭을 일구고 조이를 심었다는군요. 워낙 비옥한 땅이라 씨를 뿌리고 기음을 매주자 조이이삭이 황둥개꼬리만치 굵고 길었답니다. 어느날 그분이 밭속에 앉아 뒤를 보면서 흐뭇한 심정으로 조이대를 바라보노라니 마치도 참대밭에 앉아있는것 같더라나요. 그래서 이곳 이름을 죽림이라고 지었다는겁니다. ―

하긴 지금도 농사를 지어 먹긴 더없이 좋은 고장이지만 그때는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이밥 먹고 도막나무로 구들을 덥히고―우리 집은 할아버지시절에 이주를 해왔는데 호환이 가장 두려웠다 하데요. 누구넨가는 무더운 여름날에 문을 열어놓고 낮잠을 잤는데 범이 와서 창문턱에 걸쳐놓은 팔을 끊어 물고 갔다는겁니다. 겨울이면 꿩이 솥안에 날아들었지요. ―

지금은 산짐승도 귀하고있다해도 감히 잡을수 없지만 70년대까지만도 대단했지요. 노루회는 너무 먹어서 맛을 잃을 지경이였고 곰을 잡아도 웅담을 파는 법이 없었답니다. 가을이면 백두산쪽으로 들어가면 산삼을 몇뿌리씩 캐여왔지요. 지금도 버섯철이면 죽림촌 마흔세호 집집마다 송이버섯을 뜯어 수천원씩 손에 쥐거든요. ―>>

봉금령이 해체되여서 오늘까지 백여년동안 인간의 무절제한 개발과 침략자의 무지한 략탈의 수난을 겪었어도 여기 연변땅은 자원이 풍부한 복지로 남아있게 했다.

안도현 삼도구 대금장(大金場)의 지명유래 전설은 연변의 풍부한 자연자원을 잘 설명해주는 실례라 하겠다.

리진성선생은 전설 <<대금장>>에서 이렇게 썼다.

― 그들 부부는 주인이 정해준 곳에서 한길 또 한길 금전굴을 팠다. ―김씨는 들었던 수저를 놓고 굴밖으로 나왔다. 바로 이때 버럭무지에서 사발만큼한 큰 돌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 유난히 누런 돌이라 주어들고 보던 부인이 소리쳤다.

<<여보, 이게 금이 안야요. >>

안해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 김씨는 안해가 넘겨준 돌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진짜 금덩이였다.

―이곳에 금이 많이 난다고 해서 대금장이라 불렀다고 한다.

유라시대대륙의 온대로부터 북극까지의 각종 주요한 식물피복류형의 축도로 여직 살아있는 연변 장백산 식물구계에는 야생식물이 176과 1, 592종이 있다. 식물구계 성분도 구전한바 7천만년전 제3기식물로부터 구라파와 씨비리 식물종, 조선, 일본의 식물은 물론 제4기 대빙하기간에 빙하의 이동으로 하여 북극으로부터 밀려온 극지식물, 지어 남방아열대 식물의 특색을 띈 식물도 발견되였다. 이런 식물계속에서 600여종 야생동물들이 살아가고있다. 백두산줄기가 서남주향으로 1, 000km나 뻗어간 산맥의 무성한 삼림은 홍송, 동북범은 물론 동북의 3대 보배인 인삼, 자주빛 담비, 록용의 고향으로 손색이 없다. 그리고 연변에서 지금까지 100여종의 광물종류를 찾아냈는데 그중 금, 동, 연, 아연, 몰리브덴, 니켈, 월프람, 우란, 바나듐, 은 등 금속광이 50여종인데 황금 매장량은 57. 5톤이고 니켈과 몰리브덴 매장량은 7, 900, 3, 500톤이다. 비금속광이 40여종 있는데 세멘트석회암, 대리석, 부석, 도자기점토, 내산석, 규화석, 슬라크 등은 매장량이 크고 질이 좋다. 그리고 석탄, 유모혈암, 니탄, 석유 등 에네르기 자원이 풍부한바 훈춘탄광의 매장량만 해도 7, 8억톤이고 연길분지 석유매장량은 1억톤이라는 지질탐측결과가 1986년에 떨어졌다. 조양천지구의 <<연삼1호정>>은 지심 1, 600m 되는 곳에서 질좋은 석유를 발견했고 룡정시 덕신지구에서는 지심 517m 되는 곳에서 상당한 매장량의 가스층을 발견했다. 유정과 가스정은 생산전 평가단계에 들어갔다.

여기는 신비한 땅, <<룡흥지지>>이다. 그래서 룡의 전설도 많고 룡자 붙은 지명도 푸술하다. 하지만 룡이 승천했다는 룡정(龍井)의 룡드레우물터나 화룡시 덕화진 룡연의 늪자리나 지금은 터자리만 전설을 고집하고있다. 과학문명이 신비한 딱지를 벗겨버린 이 땅은 다시금 백두산자연보호구로 <<봉금>>이 시작되여 1980년 1월 드디여 유엔의 세계생물권 보호구망에 들었고 <<세계 인류의 생물권 연구기지>>로 금을 그었다. 그제날 <<봉금령>>이 인간의 재난을 낳은 장본인이였다면 오늘의 <<봉금>>은 더욱 많은 생물자원을 개발, 배육하며 산지자원을 과학적으로 보호하고 합리하게 개발하며 더욱 훌륭하게 자연생태계통을 영구히 보존하여 인류의 행복을 창조하는 계기가 될것이다.

다음에 계속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