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현실진단과 미래가치 평가] <곽승지 저>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중에서

1. 21세기 국제정치의 새로운 트렌드

0. 현실주의에서 자유주의로

20세기는, 인간의 천성이 악하기 때문에 국가 간의 관계는 무정부상태가 되고 이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갈등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는, 국제질서에 대한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의 생각을 검증하는 시간이었다. 20세기 역사가 전쟁의 시대로 명명될 만큼 크고 작은 전쟁으로 점철된 것이 이를 입증한다. 지난 세기 갖가지 형태의 갈등이 역사를 얼룩지게 한 현실을 직시하면 국제사회를 무정부상태로 인식하며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20세기는 또한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에 의해 시작된, 국민국가를 기반으로 국가 간에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국경을 설정하여 정치적 단절을 추구해온 국제관계가 인류를 얼마나 불행하게 하였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 시간이었다.

현실주의적 시각에서 국제정치의 행위자는 국가이다. 국제정치의 유일한 행위자로서 국가는 필연적으로 다른 행위자를 경쟁적 관계 혹은 적대적 관계로 이해하게 됨으로써 국가안보를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아 왔다. 따라서 각 국가는 안보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체 무력을 강화하거나 자국의 안전을 지켜줄 국가들과의 연대를 꾀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냉전체제하에서 세계를 자유민주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으로 양분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21세기 탈냉전적 상황은 인간을 보다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대화와 협력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 낼 수 있기에 국가 간에도 대화를 통한 타협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 것이다. 존 로크 (John Locke)의 인간에 대한 긍정적 사고를 그 전통으로 하는 자유주의적 시각이 다시금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세계화에 따른 보편적 가치의 확산 및 교통과 통신의 발달 등으로 국제사회가 유무상통하게 되고 이로 인해 국제사회에 다양한 행위의 주체가 등장하게 됨에 따라 국제질서의 행위자는 더 이상 국가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게 됐다. 국제기구와 비정부기구(NGOs), 다국적기업, 심지어 테러단체 까지를 포함하는 다양한 국제정치의 행위 주체가 등장하게 됐다.

국제정치 이론으로 새롭게 자리잡아가고 있는 구성주의적 시각도 21세기의 변화된 상황을 이해하는데 적합하다. 기존의 이론이 합리적 선택이론에 기초한 상호작용과 힘의 배분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구성주의는 주권국가와 국제체제의 역사적․사회적 성격을 밝혀내고 국가의 행위를 규칙, 규범, 설득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회적 관계에서 파악한다. 접근방식에서 기존의 이론과 다르다. 한반도통일과 함께 동북아시아공동체 형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데 있어서 구성주의적 시각은 유용할 것이다.

최근 연성권력(soft power)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경향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조지프 나이, 2004) 미국 하버드대의 조지프 나이(Joseph S. Nye) 교수는 한국이 가지고 있는 사회문화적 잠재력에 주목하며 대표적인 연성권력 국가의 하나로 지칭한다. 즉, 21세기의 역사적 트렌드에 비추어 볼 때 한국사회가 지니고 있는 사회문화적 잠재력이 새롭게 평가받을 만 하다는 것이다.

국제정치에서 행위의 주체가 다양해지면서 국가의 목표도 달라졌다. 특히 주된 국가목표로서 안보에 대한 관심은 크게 변했다. 20세기의 안보개념은 다른 국가로부터의 침략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21세기에는 외부로부터의 침략 못지않게 체제내부로부터 초래되는 위협에 초점을 맞추어 안보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체제를 불안정하게 하는 요인을 단순히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국한했던 것에서 벗어나 환경문제나 마약, 빈곤, 인권 등 삶의 질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로 그 영역이 확대된 것이다. 안보 개념의 이 같은 변화는 필연적으로 안보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에서도 변화를 초래한다. 무력을 통한 보장보다 지역국가 간 협력을 통해 안보를 담보하는 등 이른바 포괄적 협력안보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국가 간 연대를 강화하여 상호의존관계를 높여가고 나아가서 역내 안보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안보위협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서냉전의 최전선을 형성했던 동북아시아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일고 있다. 규범적으로 여전히 전쟁상태에 있는 남북한은 두 차례에 걸쳐 정상회담을 개최하며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냉전시대에 적대관계에 있던 중국 및 러시아와 수교함으로써 중요한 외교파트너로 자리매김했다. 북한은 제국주의 제1, 2의 원흉이라고 주장해온 미국 및 일본과 관계개선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그동안 동북아시아 안보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북한핵문제도 해결국면을 맞고 있어 북한과 이 두 나라 간의 관계가 정상화될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동북아시아에서 이와 같은 새로운 질서가 정립되면 현실주의적 시각이 가장 적합하였던 이 지역을 관찰하는데 있어서도 새로운 시각, 즉 자유주의나 구성주의 시각이 보다 적실성을 얻게 될 것이다.

0. 단절의 시대에서 소통의 시대로

20세기 전반기에만 두 차례 세계전쟁을 치르며 전쟁의 역사를 만들었던 인류는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인 20세기 후반기에도 세계전쟁을 이어갔다. 미국과 소련을 종주국으로 하여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세계를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으로 양분해 대립한 이른바 냉전체제가 전개된 것이다. 결국 인류는 20세기 내내 국가 간에는 물론 적과 동지로 편을 갈라 상대에 대해 문을 걸어 닫음으로써 극단적인 단절의 시대를 만들어 왔다.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한 단절의 역사는 중세이후 자신의 영토를 구획하여 이를 국경으로 중시하면서 구체화됐다.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국제정치를 무정부상태 하에서 갈등의 관계로 인식하며 그 기원을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찾는 것도 그러한 인식에서 비롯됐다. 그 단절의 역사가 20세기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 것이다.

21세기를 맞으면서 단절의 역사를 극복하고 소통의 역사를 만들어 내기 위한 노력들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직접적으로는 1990년대의 탈냉전적 상황이 가져온 결과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던 소통에 대한 그리움이 현재화된 것이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이미 세계적 차원에서 자본주의시장경제원리를 토대로 대체적으로 원만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 2002년 중국의 가입으로 명실상부한 세계경제의 사령탑으로 자리잡은 세계무역기구(WTO)가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자본과 인력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글로벌 경제시대에 국가 간 소통을 가로막는 국경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

소통의 시대를 만들어내려는 인류의 노력은 다시 자연상태로 돌아가려는 인간 욕구의 발로이다. 그것은 신화화된 국사를 토대로 역사와 영토에 대한 자국 중심의 해석으로 갈등을 조장하고 국가 간 단절을 정당화해온 데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동북아시아에서 소통의 시대가 열리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영토 및 역사 해석을 둘러싼 역내국가 간 갈등도 줄어들 것이다.

이러한 소통의 시대를 열어나가는 데는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한 인터넷세상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 어느 곳에나 막힘없이 소통할 수 있는 기술적 진보가 사람의 닫힌 마음을 활짝 열어젖혀 새로운 미래로 나가도록 떠밀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화물결은 탈냉전시대의 마지막 남은 고도인 북한에서도 넘실대고 있다. 다소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북한에도 인터넷이 중요한 정보전달 수단으로 자리잡게 되고 나아가서 변화의 흐름을 타게 되면 동북아시아에서도 명실상부한 소통의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다.

0. 문명의 공존을 향하여

21세기 국제질서는 20세기와 확연히 다르다. 20세기가 전쟁의 역사였다면 21세기는 평화와 화해의 역사가 될 것이다. 혹자는 박애의 역사를 말한다. 그러나 21세기가 이와 같이 긍정적 의미로 자리매김 할 것인지에 대해 확언할 수는 없다. 이 같은 정의 속에는 새로운 시대에 즈음한 인간의 희망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21세기 국제질서는 이념을 뛰어 넘어 다양성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에서 개개인은 물론 개별 국가의 입장이 존중될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국가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데도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실제로 핵심 종주국을 두고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던 양극체제에 의한 냉전적 질서는 여러 국가들로 힘이 분산되는 이른바 다극체제로 발전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여전히 유일초강대국으로서 세계질서의 관리자임을 자처하고 있지만 그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또한 국가를 구분짓는 경계를 훨씬 느슨하게 만들 것이며 이에 따라 국가의 역할 또한 약화될 것이다. 혹자는 18세기 경찰국가와 같이 국가는 국민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역할만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국제질서의 유일한 행위주체로서 국가의 역할은 축소되고 그 빈자리는 다양한 새로운 행위주체들이 맡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세기 국제질서의 핵심적 갈등요인이었던 이념문제 또한 21세기의 새로운 질서에서는 경제적 요인과 함께 민족과 종교 그리고 문화로 대체됐다. 일본계 미국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그의 역저 <역사의 종말>에서 20세기를 지배했던 이념적 대립의 역사가 종말을 고할 것임을 예견하며 대신 민족과 종교가 새로운 갈등 요인으로 작용할 것임을 설파한 바 있다.(프랜시스 후쿠야마, 1992) <문명의 충돌>을 집필한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억눌려 역사 흐름의 표면에 나타나지 않았던 문명 간의 갈등이 탈냉전시대 세계질서의 기본축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새뮤얼 헌팅톤, 1998) 헌팅톤의 주장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문화적 차이가 이 시대의 중요한 갈등요인이 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민족과 종교는 후쿠야마의 예견대로 탈냉전 이후 국가 간 분쟁의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갈등요인들에 대한 지적이 반드시 미래사회를 부정적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그러한 지적은 이를 뛰어 넘으려는 다양한 노력들을 추동함으로써 오히려 희망적인 미래를 만드는데 기여하고 있다. 세계적인 석학 조너선 색스 (Jonathan Sacks)는 문명 간 충돌로 위기를 맞은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해법은 다른 문화와 종교가 어떤 방법으로 인종이나 피부색, 신앙 등이 다른 사람들, 즉 타자를 위해 공간을 내줄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말한다.(조너선 색스, 2002) 자신과 심각한 충돌을 빚을 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마음을 열어야 하며 때로 그들의 고통과 모욕감과 원한을 귀담아 들을 줄 알아야 하고, 또 그들이 생각하는 우리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똘레랑스를 통해 너와 네가 다름을 인정함으로써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의 정치학자 하랄트 뮬러 (Harald Muller)는 아예 문명의 충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은 인류역사를 ‘우리’와 ‘그들’과 같은 이분법적으로 억지로 끼워 맞춘 조야한 퍼즐에 불과하며 패권주의의 야욕에 사로잡힌 미국정부의 논리를 대변하고 있다고 말한다.(하랄트 뮬러, 2000) 뮬러는 오히려 21세기의 새로운 문명, 즉 세계적 차원의 커뮤니케이션, 원거리 이동통신을 매개로 한 세계화의 추세 등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세계화는 한 문명이 다른 문명과 단절된 채 대립정책을 펼 수 없도록 경제의 상호의존성을 심화시킴으로써 문명충돌이 아니라 문명 간 대화와 공존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21세기 세계정치의 화두는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문명의 공존, 폐쇄가 아니라 개방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문명의 공존을 위해서라도 개방을 통한 소통의 시대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0. 문화적 다양성을 위하여

21세기 문화는 레고문화로 불린다. 오늘날의 문화적 경향이, 어린이들이 장난감 레고를 짜 맞추듯이 개개인이 스스로 필요한 문화를 선택하여 수용함으로써 문화적 정통성을 유지하기 보다는 여러 가지 문화를 조합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려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유목문화로도 불린다. 유목인들이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풀과 물을 찾아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는 자유분방함이 오늘날의 시대적 트렌드와 부합하기 때문에 붙여졌다.

레고문화와 유목문화의 특성은 일견 무질서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고 다양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소통의 시대에 적합하다. 집단적 문화보다 개개인의 창의성이나 독창성을 중시하는 경향과도 일맥상통하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적 트렌드는 인종과 종교 그리고 관습의 차이를 인정할 뿐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똘레랑스를 실천하게 한다. 좋음과 나쁨, 옳음과 그름의 문제가 정형화되지 않고 주관적 입장에 따라 그 기준이 다르게 나타난다. 따라서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 때로는 그 다른 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본질적으로 차이를 없애게 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이러한 문화적 경향은 세계화를 촉진시킬 뿐 아니라 동북아시아공동체 건설에도 순기능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문화적 소통은 궁극적으로 정치‧경제 분야에서의 소통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한류 붐이 일고 있는 것도 레고문화의 확산과 무관치 않다.

21세기를 평화와 화해의 시대, 나아가서 박애의 시대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여 한다. 이는 20세기가 남긴 역사의 앙금을 말끔히 씻어내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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