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만수 서울디지털대 초빙교수·문예창작학부

중국 베이징 택시의 절반은 ‘베이징 현대’의 쏘나타와 엘란트라다. 중국 진출 2년 만에 투자비를 회수할 만큼 초고속 성장을 한 현대의 비결은 무엇일까. 서강대 이욱연 교수는 <중국이 내게 말을 걸다>(창비 펴냄)에서 두 가지를 꼽는다. 다른 자동차 회사들은 모두 특정 도시 이름을 회사 앞에 썼다. 상하이 폴크스바겐, 광저우 혼다, 이런 식이다. 그런데 베이징에만 합작회사가 없었다. 현대는 우선, 이 블루오션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다른 자동차 회사는 자국에서 유행하던 구식 모델을 가져왔지만, 현대는 한국의 최신 모델을 선보였다. 중국인의 몐쯔(面子·체면)를 살려준 ‘체면 마케팅’의 대성공이었다. 반면에 KFC는 무료로 치킨 도시락을 나눠줬다. 중국인을 거지 취급한다는 멍에만 떠안았다. 몐쯔를 목숨처럼 여기는 중국인의 문화를 못 읽은 탓이었다.

현대판 ‘아큐’들에 대한 두 가지 감정


△ 중국에 관한 저서를 최근 펴낸 저자들은 중국인의 정서와 행동을 이해하는 ‘깊은’ 시각이 필요하다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자전거를 타고 전통 가옥이 밀집한 거리를 지나는 사람 뒤로 발전소가 높이 들어서 있다. (사진/ REUTERS/ JASON LEE)

이 책은 이렇게 ‘하드웨어 차이나-정칟경제’뿐만 아니라 그것의 심층에 잠복한 ‘소프트웨어 차이나-문화’를 읽어야 중국이 보인다는 관점을 갖고 있다. 특히 영화의 배경지를 여행하는 형식으로 당대의 중국을 농밀하게 보여준다. 영화 <북경 자전거>를 보자. 촌놈 구웨이는 17살, 퀵서비스 일꾼이다. 산악자전거릍 타고 베이징을 누빈다. 하지만 자전거는 회사 영업용일 뿐이다. 언젠가는 개인 자전거를 갖는 게 꿈이다. 한데, 도둑맞고 만다. 우연히 동갑내기 고등학생인 지안이 장물인 그 자전거를 산다. 덕분에 지안은 여친을 꼬이고 친구들 앞에서 묘기를 부리며 인기를 끈다. 두 소년에게 자전거는 그 의미가 다르다. 구웨이에게는 생존의 수단, 지안에게는 오락과 정신적 만족의 대상이다. 구웨이는 절대적 빈곤을 해결해야 하는 온포(溫飽)의 단계이고 지안은 그 단계를 지나 정신적·오락적인 것을 추구하는 소강(小康) 상태여서 그렇다. 후진타오는 베이징과 상하이 같은 소강사회가 중국 전역에 실현되고, 고루 잘사는 조화사회를 추구한다. 하지만 양극화는 더 크게 벌어지고 있다. 구웨이의 자전거가 지안의 여친을 가로챈 베이징 도시놈들에게 부서져버렸듯 말이다.

아큐는 죽었지만 후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번성하고 있다! 루쉰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영화 <아큐정전>의 엔딩 자막이다. 1930년대 중반, 에드거 스노가 루쉰에게 ‘여전히 아큐가 많냐’고 물었다. 루쉰은 ‘그들은 현재 국가를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국가를 장악한 국민당 신군벌이 ‘아큐’라는 말이었다. 루쉰은 아큐의 정신승리법을 통해 자기 기만과 망각, 비겁 등 퇴영적 속성에 전 중국인의 영혼을 비판했다. 하지만 4대기서 등 ‘고전문화’를 통해 중국을 보여주는 영산대 황희경 교수의 <중국, 이유 있는 뻥의 나라?>(삼성출판사 펴냄)는 루쉰이 아큐를 냉혹하게 비판만 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독자가 아큐의 죽음을 통쾌하게 생각하도록 하기는커녕 비애를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아큐의 마지막 말인 “사람 살려!”는 아큐가 정신승리법에서 깨어난 증표라는 것이다.

후스(胡適)는 일상어인 ‘차부둬’(差不多·대충)를 의인화해서 <차부둬 선생전>을 썼다. 중국인의 분명하지 않은 태도를 상징하는 이 ‘대충’ 선생은 어려서부터 흰 설탕과 흑설탕, 십(十)자와 천(千)자를 잘 구분하지 않았다. 중병에 걸려 의사를 불렀다. 수의사였다. 수의사나 의사나 그게 그거지 하며, 대충 치료를 받다가 죽었다. 죽는 것도 ‘하이커이’(還可以·그런대로 괜찮아)였다. 루쉰과 대조적으로 후스는 아주 냉정하게 대충 선생을 죽는 순간에도 깨닫지 못하게 했다. 황 교수는 민공이나 도박에 미친 지방관리들 모두에게서 ‘현대판 아큐’의 얼굴을 본다. 그리고 루쉰처럼 동정해야 할까, 후스처럼 냉정하게 대해야 할까 하고 묻는다. <아감정전>(阿甘正傳)의 포레스트 검프가 미국의 아큐로 보였다면서, 머리를 쓰지 않고 운명과 신의 은혜에 만사를 맡긴 채 착하게 살면 형통한다는 ‘검프적’(아큐적) 세계관은 과연 옳을까라는 황 교수의 질문이 자신의 대답일 것이다. 중국인의 구경꾼 심리가 중국 민주화를 더디게 한다고 한, 다시 말해 아큐의 근성을 버리지 못하면 중국에서 촛불시위 같은 게 일어나는 것은 요원하다고 한 이욱연 교수와 같은 입장이다.

“3리마다 성(城)이요, 5리마다 곽(郭)이다.” 1780년, 청나라에 간 연암이 던진 물음이다. 유광종 기자의 <연암 박지원에게 중국을 답하다>(크레듀 펴냄)는 그 오래된 물음에 답하는, 견문록이다. 만리장성, 시골 마을인 송가장(宋家莊), 붉은 담의 자금성, 중남해, 관공서 등등 모두 높은 담으로 막혀 있다. 유 기자는 여기서 중국인의 폐쇄성을 엿본다. 이 교수가 중국의 훠궈(샤브샤브)와 한국의 찌개는 똑같은 한솥밥 문화지만, 한국인들은 재료를 한꺼번에 넣어 끓여먹는 반면 중국인들은 자기 취향에 따라 재료를 넣어 먹기 때문에 중국인의 개인 성향이 더 강하다는 분석을 한 맥락과 같다. 요즘 중국인들도 담을 좋아한다. 호화 아파트는 높은 담장과 풍부한 바오안(保安·경비)이 필수다. 사무실에도 까치발을 해야만 겨우 옆을 넘어 볼 수 있는 파티션(가리개)이 즐비하다. 업무 처리도 필수보고 사항만 상사에게 알린다. 심지어 한자와 바둑, 마작도 네모의 담이 쳐져 있다.

특히 베이징의 후퉁(胡同·골목)에 들어서면 한눈에 꽉 차오는 전통주택 사합원(四合院)은 공간을 사각형으로 둘러싸서, 외부로부터 내부를 보호하는 구조다. 유 기자는 여기서도 유목민족의 침입을 막고자 한 한족의 방어적 성격이 드러나는데, 내 안에 모든 것을 완비하고 있으면 내가 세계의 모든 것이라는 의미의 ‘천하-중화주의’ 관념도 그것의 정치적 연장이라고 한다. 사회심리학적으론, 담의 문화가 ‘몐쯔 집착’을 낳고 담과 담 사이를 연결하는 것은 다름 아닌 관시(關係·관계)다.

삼장법사 더하기 손오공

하지만 중국은 네모와 동그라미가 겹쳐 있다. 집 밖에서는 유교지만 집 안에서는 도교라는 린위탕의 말처럼, 네모는 질서를 중시하는 유가이고 동그라미는 변통과 원활함을 만들어내는 도가다. 가령 <서유기>에서 삼장법사는 서역에서 불경을 가져와야 한다는 사명과 명분을 중시한다. 손오공은 스승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요괴와 격전을 벌여야 한다. 삼장법사는 천리(天理)나 도(道)에 해당하는데, 실전을 통해 스승의 몐쯔를 살려줘야 하는 손오공은 ‘실질적인’ 술(術)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손오공이 없는 삼장법사는 요괴들의 ‘맛난 고깃덩어리’(唐僧肉)에 불과하다. 또 삼장법사가 없는 손오공은 천궁에 올라가 소동이나 벌이는 천방지축 원숭이일 뿐이다. 삼장법사는 네모고, 손오공은 동그라미다. 둘이 함께 있어야 명분과 실리, 도와 술이 함께 산다. 중국인의 진짜 얼굴이다. ‘물 위를 떠다니는 오리’(鴨子劃水)다. 오리는 삼장법사처럼 호수를 고요히 떠다니며 몐쯔를 세우지만, 물 밑의 물갈퀴는 손오공처럼 ‘실리의 꼼수’를 요란스레 놀린다. 마오쩌둥이 삼장법사라면 덩사오핑은 손오공인 셈이다. ‘마오 더하기 덩사오핑’이야말로 중국의 아이콘인 것이다.

사실 중국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개인적인 호불호식의 판단보다는 문화의 전통에서 우러나온 중국인의 정서와 행동을 이해하는 ‘깊은’ 시각이 중요하다는 게 저자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앞으로 택시만이 아니라 라오바이싱(老百姓·보통 사람)들의 마이카도 대한민국의 차가 될 수 있는 길은 하드웨어뿐만이 아니라 ‘소프트웨어 문화 내시경’으로 거대한 용의 몸 안을 살펴야 열릴 것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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