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현실진단과 미래가치 평가] 곽승지 저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 났었습니다.

.....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 중에서

1. 동북아시아시대의 중심으로서 연변

0. 연변지역에 대한 이해

. 연변의 유래와 지역적 범위

연변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이다. 대체로 두 가지 설이 제기되고 있다. 하나는 중국과 조선 러시아 3국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변방지대에 접해 있다는 지리적 측면을 반영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이 지역의 중심지인 연길에 있던 핵심 공공기관인 연길변무공서의 명칭을 줄여 연변으로 부르던 데서 연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연변이라는 명칭보다 조선인들 사이에서 널리 불리던 간도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했다. 만주사변 직후인 1934년 12월에는 이곳에 간도성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1945년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이어졌다.

일본이 항복하자 중국공산당은 이 지역을 간도라고 부르는 것이 일제의 유산이라며 거부하고 다시 연변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중국공산당 중앙위 동북국과 길림성 공작위가 중국공산당 연변지방위원회(연변지위)를 구성하고 간도성을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로 개칭한 것이다. 이후 중국공산당은 각종 공식문서에서 간도 대신 연변이라는 명칭을 보편적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연변지위의 결정에 앞서 중국공산당은 동만주 지역을 연변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왔었다. 따라서 연변지위가 간도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폐지하기에 앞선 1945년 초부터 연변이라는 명칭이 두루 사용되었다. 1945년 당시 중국공산당 동북위원회는 항일전쟁에서의 승리를 예견하고 동북지역에 공산당조직을 재건하여 당사업을 추진할 계획으로 조선인 당원으로 구성된 연변지구 공작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10월에는 중국공산당 연변위원회(연변위)를 공식적으로 설립했다.

한편, 간도를 연변으로 고쳐 부른 연원을 따져 볼 때 간도는 북간도를 지칭한다. 따라서 연변의 지역적 범주도 북간도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연변이란 명칭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약칭해 부르는 것으로서 그 범주도 자치주에 국한하고 있다. 하지만 애초에는 북간도로 불리던 넓은 지역을 통칭하는 포괄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동만주지역을 연변으로 지칭했다.

. 자연지리적 환경

연변은 길림성 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두만강을 경계로 북한과 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러시아의 연해주와, 동북쪽으로는 흑룡강성과 이웃하고 있다. 북한과의 접경지역은 백두산에서 두만강 하류까지의 약 522키로미터에 이르며 러시아와의 접경지역은 약 246키로미터에 이른다. 연변의 총 변경길이는 768.5키로미터이다.

연변에는 장백산맥과 노야령산맥이 서남지역에서 동북지역으로 뻗어 있어 광활한 벌판으로 이루어진 길림성의 동부지역이나 요녕성 북부 및 흑룡강성 서부 지역과 달리 해발 500-1000미터의 높고 낮은 산들이 많다. 이 산지에서 나오는 하천은 동북지역 수계의 근원이다. 두 산맥이 만나는 지점에 연길분지가 자리하고 있다. 역내의 주요 하천으로는 두만강과 송화강 무단강 수분강 합이포통하 해란강 등이 있다.

장백산(백두산)을 포함한 울창한 삼림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는 연변은 삼림면적 점유율이 80퍼센트를 넘는다. 이곳에는 국가급 자연보호구 2곳과 성급 자연보호구 6곳, 국가급 삼림공원 5곳, 성급 삼림공원 6곳이 지정되어 있다. 이 지역은 또 1980년에 중국 최초로 유네스코로부터 생태권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장백산은 중국의 10대 명산으로 불리는데 중국정부는 장백산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연변지역의 기후는 기본적으로 대륙성 기후로서 변화가 적다. 연평균기온은 섭씨 2-6도이며 1월 평균기온은 영하 14.1도, 7월 평균기온은 21.6도이다. 연간 강수량은 한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500-700미리미터 정도이다.

. 사회문화적 환경

연변의 공식 명칭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이다. 행정구역상 길림성에 속하며 연길 도문 돈화 화룡 용정 훈춘 등 6개 시와 왕청 안도 등 2개 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면적 4만2천7백 평방키로미터로서 주도는 연길이다.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국이 소수민족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족이 집거하고 있는 이 지역을 특화하기 위해 만든 특별행정조직이다. 1952년 9월 3일 조선족자치구로 설립됐다가 3년 후인 1955년 12월 등급을 낮추어 자치주로 변경됐다. 2007년은 조선족들을 위한 독립행정조직이 설립된 지 55주년이 되는 해이다.

조선족자치구가 설립될 당시 행정구역은 1시5현으로 구성됐었다. 1958년에 돈화가, 1965년에 도문시가 각각 연변조선족자치주에 편입됐다. 그리고 1985년, 1987년, 1993년에 돈화 용정 훈춘 화룡이 각각 현에서 시로 승격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들 현과 시에는 하부 행정조직으로 15개의 향과 51개의 진 등 모두 66개의 향‧진이 있다. 한편 연변조선족자치주와 함께 조선족동포들이 집거하고 있는 자치지역으로는 길림성 장백조선족자치현(1958년 설립)과 30개의 자치향, 28개의 조선족‧만족 연합 자치 향 및 진이 동북3성 지역 내에 산재해 있다.

중국 길림성 정부는 2007년 7월 연길‧용정‧도문 등 3개시를 광역개념의 한개 도시로 통합하는 이른바 연룡도프로젝트를 정식 비준‧공포했다. 중국의 한 인터넷신문은 7월 15일 “김림성 정부는 지난달 30일 ‘연길‧용정‧도문 시 공간발전계획 요강’을 정식 승인하고 이달 13일 대외에 공포했다”고 보도했다. 요강에 따르면 연길‧용정‧도문 등 3개 도시를 반시간권 이내의 단일 도로망으로 연결하는 일체화 개념을 통해 경제, 산업, 무역 자원을 합리적으로 배분하고 기반시설을 공동 건설 또는 이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2005년 말 현재 연변에는 조선족을 포함해 한족 만족 회족 등 24개 민족이 살고 있으며 전체인구는 약 2백17만5천명에 이른다. 이중 조선족은 81만6천명으로 약 37.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한족 59.4퍼센트, 만족 2.6퍼센트, 회족 0.3퍼센트 등이다. 한족이 조선족보다 20퍼센트 이상 많다. 2007년 2월 중국 소수민족 인구통계 자료에 따르면 중국 내 조선족은 192만 597명이다. 소수민족 중 12위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 내 조선족 중 42퍼센트가 연변지역에서 살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인 연길시 인구는 42만9천100명이며 이중 조선족은 전체의 57.7%인 24만7천700명으로 집계됐다. 이 같은 수치는 2007년 3월 16일 연길시 통계국이 발표한 2006년 국민경제 사회발전 및 통계 공보에 의해 밝혀졌다. 한족인구는 17만1천200명으로 전체의 39.8%이다.

연변은 중국 동북지역의 변방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여건이 매우 열악했다. 그러나 최근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교통망이 다양하게 구축되었다. 장춘 길림 도문을 잇는 창투철도가 이 지역을 동서로 가로지르고 있으며 연변에서 화룡과 개산둔으로 지선이 분기한다. 도문에서는 목단강과 함경북도 온성으로 통하는 철도가 연결되고 있다. 도로는 철도를 따라 뻗어 있는데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가 발달하였다. 과거 내륙지역인 연길에서 해외로 나가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중수교 이후 한국기업의 지원으로 연길에 국제공항이 건설됨으로써 지금은 서울과 부산행 항공노선이 개설되어 있다. 국내선으로는 북경과 창춘 심양노선이 있다.

0. 동북아시아역사를 통해 본 연변

. 주변국들의 연변지역에 대한 관심

연변은 냉전체제하에서는 중국 동북지역의 변방에 위치해 주변국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던 그저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보면 연변은 동북아시아에서의 질서 재편시기마다 이 지역이 지니고 있는 지정학적 가치로 인해 주변 국가들의 특별한 관심을 끌어왔다. 이러한 현상은 근현대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연변지역은 19세기 말 이후 주변 국가들 간의 갈등이 충돌하는 각축장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도 청나라의 봉금조치에 따라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지대로 남아있었지만 불과 수십년이 지난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조선과 청나라는 물론 일본과 러시아까지 이 지역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인 관계맺기를 시도함으로써 연변의 고단한 역사가 시작됐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주변 국가들이 연변지역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지난시기 세계정치가 보여준 제국주의적 침략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즉 연변이 지니고 있는 지정학적 가치를 평가하게 되면서 힘 있는 국가들이 이 지역에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앞을 다투어 관계맺기를 시도한 것이다.

근현대사에서 주변 국가들이 연변지역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서세동점의 시대상황 속에서 서양세력이 동양을 압도하기 시작한 1800년대 중반 이후부터이다. 제일 먼저 연변지역에 개입한 나라는 러시아였다. 1860년 베이징조약을 주선한 대가로 중국으로부터 연해주지역을 할양받음으로써 이 지역 일부에 대한 영유권을 획득한 것이다. 부동항을 획득하기 위해 부단히 남진정책을 추진해 온 러시아가 중국이 쇠락해가는 틈을 타 흑룡강 이북 지역에 이어 연해주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차지함으로써 현재의 중국과 러시아간 국경을 설정하게 됐다. 러시아는 이후에도 중국 동북지역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1904-5년 러일전쟁도 이 지역에 대한 러시아와 일본 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한 결과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일본에 패함으로써 연변을 포함한 만주지역은 러시아와 일본이 세력을 양분하는 형태로 변했다. 이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독점적 위상이 약화되고 대신 일본의 영향력이 증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은 청일전쟁에 이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대륙침략을 위해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했는데 이 과정에서 연변지역은 주된 전장이었다.

그리고 일본이 패망한 직후부터 중국에 공산정권이 수립되기 전까지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정부 간 내전에서 연변지역은 다시 성패를 좌우하는 격전지의 하나가 되었다. 그 와중에서 러시아혁명을 통해 새로운 연방국가로 탄생한 소련도 과거 이 지역을 장악하려던 역사를 되새기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다.

주목되는 것은 일본의 항복 직전 대일선전포고를 한 소련이 전후 동북아시아 지역의 질서 재편에 간여하는 가운데 연변지역을 중국에 넘겨주지 않고 북한에 편입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2007년 6월 포스텍 박선영교수는 이같은 내용을 담은 1948년 7월 10일자 중화민국 외교문서 사본과 지도를 발굴․공개했다. ‘소련이 장차 길림성의 연길을 포함해 목단강․목릉 지역을 조선에 편입시키려 한다’는 제목의 보고서는 “소련대표는 장차 이 지구를 북한영토로 획정하려 한다”며 “이 지역은 현재 우리 영토 내에 있으나 북한 정규군이 주둔하고 있는 데다 조선인들이 해당 지역의 지방행정을 주관하고 있어 실제 이 지역이 북한에 합병된 것과 같다”고 적고 있다.

특히 이 보고서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평양협정’을 언급하며 1948년 2월 소련과 북한 및 중국의 공산세력 간에 체결한 이 협정에 따라 “장차 동북지역 일부를 3개 한인자치구로 획정해 주려한다”며 압록강과 두만강을 따라 안동(현재의 단동) 길림 간도 3개 자치구를 획정한 지도를 제시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소련과 북한 및 중국의 공산세력이 1948년 무렵 연변지역을 한국의 영토 내지 특수관계가 있는 영역으로 인정하는 모종의 협정을 체결한 것이다.(동아일보, 2007.6.27)

. 청의 봉금정책과 봉금지대에 대한 해석

19세기 중반까지 간도지역은 청나라의 봉금정책에 따라 주인이 없는 땅으로 남아있었다.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던 조선 역시 청나라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청나라의 봉금정책에 대체로 순응했다. 그러나 양국정부의 봉금정책에도 불구하고 간도지역에는 조선인들이 진출해 주로 인삼과 사금을 채집하는 한편으로 농사를 지었다. 당시의 농사는 정착단계까지는 가지 않고 봄의 해빙기에 강을 건너 평야를 태우고 파종을 하고, 가을에 수확을 끝내고 돌아오는 이른바 춘경추귀(春耕秋歸)의 화전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1860년대 말 자연재해로 인해 식량난이 심화되면서 두만강과 압록강 가까이에 살던 조선인들이 대거 강을 넘어 봉금지대로 들어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1871년의 흉작 때 간도로 이주한 조선인은 약 1,000호에 이르렀다. 이 무렵 조선의 지방관은 조선의 간도개척을 사실상 묵인함으로써 간도로의 이주는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때를 같이 하여 청나라도 자국민들이 농사지을 땅을 찾아 이 지역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면서 점차 봉금정책은 빛을 발하게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나라조정은 1881년 정식으로 봉금령을 해제한다. 그리고 이 지역의 조선인을 백두산정계비에서 정한 토문강 아래로 쇄환할 것을 요구한다. 청나라의 이러한 요구는 결국 백두산정계비의 적실성과 관련해 청나라와 조선 간에 국경문제를 재론케 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면 여기서 청나라가 봉금령을 통해 압록강과 두만강 상류지역을 봉금지대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자. 청나라가 봉금령을 통해 이 지역을 봉금지대로 설정한 외형적 이유는 이곳이 청나라 건국신화가 깃든 신성한 곳이라는 것이다. 백두산아래 두만강 발원지 인근의 원지(圓池)가 바로 청나라 건국신화가 깃든 곳이다.

대체로 봉금령은 청나라 강희제가 왕으로 등극하기 이전인 1658년경에 내려졌으며 강희제가 왕이 된 후 봉금지대가 확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계기로 봉금지대가 설정됐다는 주장도 있어 봉금령을 발한 시점은 분명치 않다.

계명대의 이성환교수는 청나라가 봉금지대를 설정한 것이 조선을 침략한 직후, 명나라를 공략하기에 앞서 이루어졌다는 시점에 주목한다.(이성환, 2004) 즉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할 때 명나라와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조선이 배후에서 공격하는 위협을 배제하기 위해, 선제공격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그는 봉금지대를 “정치적으로는 양국 간의 직접 충돌을 방지하는 완충지대 또는 비무장 중립지대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봉금지대가 지속된 것과 관련해서는 조선과 청나라가 공히 백두산을 건국의 상징으로 신성시 한데서 그 이유를 찾는다.

따라서 이 지역은 정치‧군사적 측면에서 또는 건국의 상징으로서 두 나라에 의해 오랫동안 소속이 분명치 않은 상태로 방치된 부주지로서 일종의 중립지대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당시에는 아직 국경을 선의 개념이 아니라 지대의 개념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무주지 봉금지대가 국경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음을 지적한다.

이 교수에 따르면 봉금지대는 1881년 봉금령이 해제될 때 까지 2백년 여간 청나라와 조선의 경계를 이루는 비무장 중립지대로 역할했다. 오늘날 휴전선을 두고 남북으로 2km를 비무장지대로 두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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