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연산의 장편답사기>

문: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으로 된 <<선구자노래>>가 확실히 있었습니까?

답:1962년엔가 어느날 서울방송을 들을라니 귀에 익은 음악이 흘러나오더군요. 1944년 봄에 녕안에서 조두남선생의 신곡작품으로 발표한 그 <<룡정의 노래>>였습니다. 그런데 노래제목이 <<선구자노래>>로 되여있더라구요.

특히 가사에서 보면 류랑민의 서러움이 력력히 보이는 <<눈물 젖은 보따리>>거나 <<흘러온 신세>>같은 구절은 없어지고 그 대신<<활을 쏘던 선구자>>,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로 되였더군요. 원 가사에는 <<선구자>>라는 어구가 전연 없었답니다. <<룡정의 노래>>를 발표한 그 당시 목단강지대는 물론 한국 전체에서도 항일투쟁이 이미 저조기에 들어갔으며 군경들의 경계가 삼엄한 때인데 커다란 녕안극장에서 감히 <<조국을 찾겠노라 말 달리던 선구자>>라고 노래할수 있었겠습니까? 그 시기 서울에서는 일장기를 걸고야 음악회를 했다고 하는데 그처럼 <<선구자>>를 노래했다면 그것은 민족해방 투사가 아니라 우매한 사람일수밖에 없습니다. 연주에 참가한 나 역시 나이가 어리긴 했어도 단군력사를 배웠고 애국가를 부르며 자라났으므로 일본놈이 되기 싫어 종래로 일본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이긴 했어도 그런 담량까지는 갖지 못했었습니다. <<선구자노래>>는 원래의 곡이긴 하지만 <<룡정의 노래>>를 가사로부터 제목에 이르기까지 고친것입니다.

한국의 책을 보면 <<선구자노래>>는 1932년에 창작된것이라고 하는데 그건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당시 룡정에서 불렸다고도 하는데 그때 룡정에서 살았거나 공부를 했던 사람들이 그런 노래를 부른 적이 없었답니다. 그리고 예술가란 자기의 작품을 자랑하기를 좋아한답니다. 조두남선생도 그러한 분이였습니다. 그런데 나하고 2년나마 사귀여왔고 무랍없는 사이였지만 그런 말 한마디 없었다구요. 더구나 1944년 봄에 녕안에서 가진 신작발표공연에서 처음으로 <<룡정의 노래>>를 내놓았던것이랍니다.

문:조두남선생의 다른 애호가 어떤것이 있습니까?

답:그분은 장기를 아주 잘 두었습니다. 신안진에서 그분을 당할 사람이 없었답니다. 한다하는 오장기도 조두남선생한테 졌으니깐요. 선생의 말씀에 따르면 평양에 계실 때 담배돈이 떨어지면 거리에 나가 장기박보풀이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한테 가서 고개를 기웃거리면 벌써 장사군들이 슬그머니 돈을 쥐여주며 자리를 뜨기를 바랐다는겁니다. 평양에서도 그의 장기가 소문이 자자했던가 봅니다.

문:김선생님 외에 조두남선생을 아시는 분이 생존해계십니까?

답:있지요. 조두남선생의 작곡으로 된 <<고향생각>>을 시창한 남수억(南壽億)선생이랍니다. 지금 팔가자에 계십니다.

필자는 1995년 5월 16일 오후 1시 20분에 화룡시 팔가자진 상남촌에 사시는 남수억선생을 찾았다. 남수억선생은 1922년 4월 4일 연길현 팔도향에서 출생하셨다고 한다. 그날 취재석에 동석한 분들로는 남수억선생의 부인 안경숙(安京淑 69세), 박장길(朴長吉 35세 연길시 조선족예술단), 김윤찬(金允燦 47세 한국 서울신문사 사진부 차장) 등이였다. 당시 취재자료를 적으면 아래와 같다.

문:신안진으로 언제 갔습니까?

답:내가 7세 때에 조선 청진으로 이사를 갔다가 1942년 봄에 신안진으로 다시 이사를 갔댔습니다.

문:조두남선생이 신안진으로 언제 왔습니까?

답:1942년 가을인가 겨울인가일겁니다. 자그마한 연출대가 신안진에 와서 공연을 했는데 조두남선생이 손풍금을 쳤답니다. 약침쟁이였는데 안원장이 붙들어서 술을 먹이면서 치료했습니다. 그래서 술을 많이 먹었습니다. 권녕일이 주동이 되여 조두남선생이랑 목단강에 가서 민족예술절에 참가했습니다. 나는 1944년 녕안에서 가진 조두남선생의 신작발표회에서 노래 <<고향생각>>을 불렀습니다.

문:조두남선생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답:키가 크고 몸이 후리후리하고 얼굴이 걀죽했습니다. ―나는 팔가자림업국 기본건설과에서 일하다가 1980년에 퇴직했습니다. 윤해영선생은 이름은 들었고 <<룡정의 노래>>를 작사하여 조두남선생이 곡을 붙여서 녕안에서 있은 신작발표공연에서 불렀답니다.

김종화선생과 남수억선생의 회상담을 들어보면 조두남선생은 신안진에서 살았었고 녕안에 살았던 윤해영선생과 래왕하면서 <<룡정의 노래>>, <<목단강의 노래>>, <<산>>, <<흥안령마루에 서운이 핀다>> 등 노래를 창작했다. 그리고 <<선구자노래>>는 <<룡정의 노래>>의 가사를 뜯어고친 재판에 불과하다. 그런데 조두남선생은 왜서 1932년에 윤해영을 만난 뒤로는 다시 상봉하지 못했고 윤해영이 <<선구자노래>>라는 가사를 썼다고 했을가?

김종화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조두남선생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은 조선생이 아니라 다른 제삼자가 조두남선생의 이름을 빌어 력사를 분식한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

물론 이는 김종화선생께서 조두남선생을 존경하는 심정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력사는 력사인것만큼 조두남선생이 글로써 남겼으니 믿지 않을수도 없는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조두남선생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을가?

광복후 랭전으로 말미암아 조선반도가 분단되고 중국과의 래왕도 끊어졌으니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한국 국민한테 해도 윤해영, 김종화 등 동료들이 모를거라는 생각에서 한 말일가?

그리고 <<룡정의 노래>>를 <<선구자노래>>로 뜯어고친것은 조두남선생의 소행일가 아니면 제삼자의 소행일가?

노래의 가사가 후세인에 의하여 임의로 고쳐진다면 그것은 력사의 진실을 뜯어고치는것과 같다. <<동북인민행진곡>>의 제4절 마지막 구절의 <<아세아의 평화를>>하는것이 <<새 동북을 건설하자>>로, <<동북인민자위군 송가>>의 제2절 첫구절 <<빛나는 청천백일 대지에 붉은데>>가 <<빛나는 혁명기발 대지를 휩쓰는데>>로 그리고 제4절 두번째 구절과 세번째 구절 <<장성을 넘고넘어 두만강을 건너서 침략자 내적외구 한칼로 베고>>가 <<장성을 넘어넘어 황하장강 건너서 간악한 내외 원쑤 한칼로 베고>>로 후에 고침으로써 민족색채가 사라지고 완전한 혁명노래로 탈바꿈 한것과 같이 한수의 애수의 노래(<<선구자노래>>)가 비장한 민족의 투사의 노래로 된것이 아닐가?

조두남선생은 1932년 윤해영이라는 사람이 가사를 주고 표연히 사라진후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는데 아마 독립군이였을것이라고 전설적인 이야기를 창작했는데 그것은 무엇때문일가?

광복전 몇해간 윤해영과 래왕하면서 여러수의 노래를 창작했고 아울러 동료들과 함께 윤해영의 집에서 파티까지 가졌으면서도 왜서 윤해영을 독립군 전사로 미화하고 희생되였을것으로 추측을 했을가?

그렇다면 윤해영은 독립군이였던가?

만일 조두남선생의 회상을 사실이라 믿어서 윤해영선생이 <<선구자노래>>를 1932년에 썼다고 하자. 하지만 이미 알려진 윤해영의 광복전 창작품에서 이른바 <<선구자노래>>를 내놓고 애수에 젖은 동요외에 <<발해고지>>, <<해란강>>, <<사계>>, <<오랑캐고개>>, <<락토만주>> 등은 친일시들이다. 1938년에 창작한 <<오랑캐고개>>에서 시인은 <<오늘은 이 고개에/오색기 나붓기고/폭도군 젊은이들이여/노래소리가 우렁차서/두만강 나루터엔 다리가 걸리고―>>로 일제통치를 구가했고 그후 1943년에는 <<락토만주>>를 창작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색기 너울너울 락토만주 부른다/백만의 척사들이 너도 나도 모였네/우리는 이 나라의 복을 받은 백성들/희망이 넘치누나 넓은 땅에 살으리//송화강 천리 언덕 아지랑이 향화촌/강남의 제비들도 봄을 따라 왔는데/우리는 이 나라의 흙을 맡은 일군들/황무지 언덕우에 힘찬 괭이 두르자//끝없는 지평선에 오곡금파 굽실렁/노래가 들리누나 아리랑도 흥겨워/우리는 이 나라에 터를 닦는 선구자/한천년 세월에 영화만세 빛나리>>

보다싶이 락토만주는 글 전체에서 일본의 괴뢰정부를 찬양하는, 친일의 냄새가 물씬물씬 풍기는 노래이다. 그후 광복이 나자 윤해영은 또 <<동북인민행진곡>>, <<동북인민자위군 송가>> 등을 창작했고 조선에 가서는 <<분여받은 땅>>이라는 노래를 썼다. 그리고 윤해영선생은 학교 교원으로부터 녕안협화회에 몸담고있었던 사람이고 독립군은 아니며 시대적인 핍박과 본인의 세계관의 제약성으로 말미암아 한때 친일사상에 물젖었다가 공산주의를 신앙한, 시대의 조류를 따라 살아온 시인에 불과하다.

당시를 살아온 문인들중에 일제의 강압정치에 억눌려서 민족의 량심을 저버린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조두남선생도 <<징병제만세>> <<황국의 어머니>>라는 노래가 있다. 김종화선생은 1944년 조선 청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남양 골목에 나붙은 무슨 악극단의 포스타를 보았는데 조두남 작곡으로 된 <<간첩은 날뛴다>>라는 소가극 소개를 보고 공연을 관람했는데 내용은 <<간첩>>들이 경찰서를 치는것을 주의하고 미리 막아야 한다는것이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한 간첩이란 반일세력이였으니 <<징병제만세>>와 다를바 없는것이였다.

김종화선생은 말한다.

<<노래는 가사가 위주입니다. 가사의 억양과 뜻을 옳게 반영해야 하는거지요. 윤해영선생이나 조두남선생은 일제시기 대동아공영권을 가사와 노래로써 찬양하기도 한 사람들이긴 하지만 다가 민족의 량심은 가슴에 간직한 분들이라 하겠습니다. 광복후 윤해영선생이 쓴 <동북인민자위군 송가> 등은 그런 마음의 바탕이 없었다면 창작할수 없었을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조두남선생은 자기의 음악풍격에서 민족의 얼을 지켰다고 보아야 할것입니다. >>

그리고 비암산 산정에 몇달간 세워있었던 선구자탑에는 <<선구자노래>>가 1942년에 작곡되였고 룡정일대에서 널리 불리여졌다는 내용의 글이 새겨있었는데 이는 조두남선생의 회상담과도 엄청난 차이가 있고 또한 력사적 증거도 없다. 지금도 광복전 룡정의 학교들에서 공부한 이들이 건재해있는데 당시 류행된 노래라면 세월이 오라서 가사는 기억에 남지 않더라도 곡은 불러넘길수 있을텐데 <<선구자노래>>는 듣지도 못했거니와 불러보지도 못했다고 입을 모으고있다.

<<선구자노래>>는 오늘날 우리 민족 모두가 애창하는 비장한 노래로 되여있다. 이러한 실정에서 그 력사의 진실을 밝히는것은 자못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이 글을 마무리 짓는 이 시각 필자는 밀물처럼 덮쳐오는 실락감에 가슴이 오리오리 찢긴다.

한국의 오양호선생이 윤해영의 친일시를 보고 가슴 찢기는 실락감을 가사(<선구자노래>) 자체의 장려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데서 안위를 가지고있지만 연변력사계에서의 이런 물론을 들으신다면 그 아픔이 어떠하실지 궁금하다.

하지만 일송정은 일제의 통치밑에서 나라와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싸워온 애국지사들의 성스로운 형상이였다는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룡정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물론 린근의 조선족들은 모두가 대대손손 일송정을 성스러운 길상물로 귀중히 여겨왔다. 일송정이뿌리 박은 바위벼랑을 기자석(祈子石)으로 삼고 아들 낳기를 기원했고 왕가물이 들면 명암으로 여겨 기우제를 지냈다.

두만강을 건너 오랑캐령을 넘어 룡정을 중심으로 연변 각지로 퍼져서 삶의 터를 닦던 우리 민족은 악마와 같은 치발역복으로 소작인으로 되고 또 마적들의 로략질에 극빈선에서 허덕일 때 일제의 마수가 뻗혀왔다. 청국의 강박적 동화정책, 마적의 행패, 일제의 마수― 이는 우리 민족운명에 들씌워진 3대 재난이였다.

1904년 일로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연변을 발판으로 중국대륙을 강점할 침략야심으로 1906년 11월 18일 조선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朴濟純)을 충동질하여 조선 통감 이등박문한테 <<간도에 간 조선사람들을 보호해달라>>고 청원하는 추태극을 놀았고 그 <<청>>을 <<무겁게>> 받아들인 일제의 파견을 받고 1907년 8월 19일 일본 륙군중좌 사이또 스에지로(齊藤季治郞)는 20여명 호위병과 54명 관리들을 거느리고 룡정에 이르러 <<통감부간도파출소>>를 내오고 23일에는 간판을 내걸었다. 당시 룡정에는 조선족이 96호, 한족이 5호, 총인구는 409명이였다. 2년후인 1909년 7월에는 총인구가 1, 188명으로 격증, 그중 일본인은 군경을 제하고도 273명이나 되였다는 놀라운 통계이다. 1908년 7월 5일 일제는 연길청에서 내린 식량에 대한 국외수출 금지령을 철소하라고 공공연히 위협했고 8월 6일에는 일본 헌병 20명, 보병 5명이 무장을 하고 비법 입경했다. 8월 16일 간도파출소 소장 사이또대좌는 병력을 증가시키며 무기를 수송해왔다. 그리고 10월 21일에는 우적동에서 일본헌병이 중국 순병 서점괴(徐占魁), 오기서(吳基瑞) 등 2명을 살해하고 수많은 수병을 부상시키는 혈안사건을 빚어냈다. 그리고 조선족내의 주구들과 결탁하여 조선족 농촌에서 매호당 호세를 강요하였고 납부하지 않으면 소위 의병으로 체포하였다. 1908년 3월 화룡현 달라자 중국측 도향약(都鄕約) 현덕승(玄德勝)을 체포하여 조선 감옥에 보냈다.

당시 연길 변무방판(延吉邊務幇辦) 오록정(吳祿貞)은 중국의 주권을 무시하는 사이또따위의 침략행위를 견결히 반대했으나 1909년 9월 일제는 온갖 핍박과 기편으로 청정부와 <<간도협약>>이란 불평등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같은해 11월 룡정에 <<일본룡정총령사관>>을 설치하고 스즈게 요다로(鈴木要太郞)가 대리 총령사로 되였다.

일송정에서 룡정시가지를 굽어보면 가장 유표하게 드러나는것은 룡정총령사관 터이다. 2m 높이의 빨간 벽돌토성을 사방 두른 총령사관 자리엔 지금은 중공 룡정시위와 룡정시 정부, 공안국, 시 인민무장부, 방송텔레비죤방송국, 시직속기관 간부기숙사 등이 들어앉았는데 그 부지면적은 42, 944㎡이다. 당시 담장안에 세워진 일제령사관 주체건물과 부속건물의 총 면적은 9, 567, 90㎡이다.

바로 이같이 어마어마 큰 부지가 당시에 소가죽 한장 너비의 땅이였다는 풍설이 있었고 그 풍설의 연장으로 전설이 된 이야기를 박창묵선생은 이렇게 적고있다.


―웃음속에 칼을 품은 일본측대표는 도태부에 들어서자 속으로는 엉큼한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웃음을 섞어가며 례절스럽게 말했다.

<<귀국 정부에서 룡정에 우리 총령사관을 두기로 하지 않았소이까. 령사관원들이 당도하였는데 있을 곳이 없어 걱정이옵니다. >>

<<허허, 나라에서 승낙한 일인데 있을 곳이 없다니 당치도 않은 소리요. 대체 얼마나 큰집을 세우려 하시오?>>

<<우리는 본디 바다 한가운데 사는 소국사람이라 욕심부릴줄 모르웨다. 그저 령사관을 지을 터자리로 소가죽 한장만큼 큰 땅만 떼주면 족하옵니다. >>

― ―

<<허허허― 정말 그래 그것뿐이시오?>>

<<이만한 청도 과분한줄 아옵니다. >>

―그런데 그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놈들이 룡정 수십평의 땅을 점하고 그곳에 보기만 해도 으리으리한 총령사관을 지어놓았다는 소문이 도대인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도대인의 얼굴에 노기가 충천했다. ―룡정에 도착해보니 과연 듣던 소문과 같았다. 수십경되는 땅두리에 높다란 담장이 빙 둘러서고 그속에 보란듯이 총령사관 고층건물이 우뚝 솟아있었다.

―<<이것이 그래 소가죽 한장만한 땅이란말인가? 그대들은 언약도 없고 국제공약도 없단말인가?>>

―<<대인님 우리는 언약대로 소가죽 한장만큼한 땅에 령사관을 지었는데 대인님은 어이하여 그렇게 대노하시나이까?>>

―령사는 하졸들에게 소가죽을 내오라고 소리쳤다. ―헌데 이자들이 가지고 나온 소가죽은 통것이 아니라 실오리처럼 가늘게 오리오리를 낸 소가죽오리였다. ―령사가 오리를 낸 소가죽을 붙여놓으라고 해서―붙여놓으니 틀림없는 큰 소가죽 한장이였다.

―<<보십시오. 틀림없는 소가죽 한장이지요. 우리는 언약대로 했습니다. 저 소가죽 오리를 내여 길길이 늘여놓으면 꼭 우리 령사관의 토성둘레와 같습니다. ―대인님, 소가죽을 통채로 놔두어도 소가죽 한장이옵고 오리를 낸걸 합쳐도 그 소가죽 한장이오니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소가죽 한장이야 한장이지 두장이나 백장은 아니지요. ―>>


간사한 일제의 침략야심을 잘 나타내는 전설이라 하겠다. 일제가 전설에서처럼 소가죽 한장으로 세운 룡정총령사관은 일본외무성의 직접적인 지휘하에 국자가, 두도구, 백초구, 훈춘 등지에 령사분관을 설치하여 길림성의 연길, 화룡, 왕청, 훈춘과 안도 등 5개 현의 1, 269개의 조선인 부락을 관할범위로 확정하였다. 또 령사관에 경찰부를 증설하고 400여명 경찰대를 두었으며 그후 관할구역내에 19개소의 경찰 분주소를 세워 동만조선인에 대한 파쑈적통치를 감행하였으니 소가죽 한장에 앉아 불장난을 시작했던것이다.

나는 일송정 소나무옆에 서서 룡정을 바라보며 <<룡정경치가>>를 읊조렸다. 곡은 어떻게 불리였는지 모르나 그 가사만으로도 나의 작은 가슴은 뜨겁게 불탔다.


압록강 두만강 넘어오니

간도성 룡정이로다


굽이굽이 감도는 해란강변에

층암절벽 기암이요 일송정이라


울뚝불뚝 북망산 공동묘지는

외국사람 모여사는 영국더길세


울울창창 우거진 진학공원은

각색 화초 만발한 호랑세계라


양복 많고 면포 많은 십자거리는

각종 물화 사고 파는 큰 장거릴세


중앙, 해성, 일광, 동아 작은 학교는

학문교육 전수하는 소학교 되고


룡고, 은진, 광명녀고 크나큰 집은

중등인물 키워내는 요람이로다


장하도다 멀리 뵈는 저 대포산은

가작 없는 장한 기세 자랑하고요


북쪽켠에 우뚝 솟은 저 모아산은

주야장철 우리 룡정 굽어보누나


왜놈들이 꾸려놓은 이 령사관은

무고한 우리 인민 탄압하누나


<<룡정경치가>>는 30년대 일본제국주의 만행을 직접 목격한 룡정 녀자고등학교 한 녀학생이 룡정에 대한 향토애와 일제에 대한 증오감을 그대로 시에 담아 부른것이란다. 그때 이 노래는 룡정일대에 널리 불리웠고 그 녀학생은 이 노래를 지은것이 죄가 되여 투옥되였다고 한다.

노래에서 말했듯이 일본총령사관은 일제가 연변을 침략하고 연변 각족 인민의 항일투쟁을 진압하며 연변지구의 경제자원을 수탈하는 대본영이였다. 개척초기 압박과 착취가 없는 좋은 세상에서 대대손손 행복하게 살아가려던 개척민들의 동경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일제는 1930년 5월부터 이듬해 4월사이에 3, 168명을 체포하고 190명 반일투사를 살해했고 1931년 9월 18일부터 1935년 3월 31일까지의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더라도 일제는 항일유격근거지를 678차 토벌하고 유격구의 군대와 백성 4, 520명을 살해하고 316명을 체포했다.

지금 룡정시 길안거리 14―21호를 주소지로 한 간도일본총령사관 건물은 1922년 화재로 주체건물이 훼멸된 후로 1924년―1926년에 재건한것이다. 반지하층을 가진 주체건물은 3층이고 남쪽 정문우로 세운 탑식건물은 5층이다. 철근을 넣고 콩크리트로 때린 바닥, 탄탄한 적색벽돌로 쌓아올린 벽의 겉면에는 미황색 자기벽돌을 붙였다. 지붕은 양철판으로 되여있었다. 소가죽 한장속에 령사관 주체건물외에도 감옥, 식당, 주택을 망라한 부속건물이 20여곳이 널찍널찍하게 들어앉았다. 1937년 12월, 일제는 그해 11월 5일 위만주국과 체결한 <<만주국에서의 치외법권과 남만철도부속지 행정권양도를 철소할데 대한 조약>>에 좇아 간도일본총령사관을 철소하면서 개척의원(開拓醫院)이 차지했고 지금은 룡정시 정부와 당위원회의 각 기관들이 차지하였다.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으며 룡정시 정부에서는 령사관유적지 지하실을 개방하고 <<혁명사적지 전람관>>을 꾸렸다. 지하실은 20여㎡되는 아홉개 칸으로 되였는데 남향쪽의 다섯개 칸에 룡정시 력사를 일목료연하게 바라보는 도편과 실물들을 전시하였다. 지하실은 일제의 고문실이였다. 쇠창살을 친 창문과 출입문, 천정에 박힌대로 녹이 쓸어 가맣게 색이 죽은 쇠갈구리들은 항일투사들을 거꾸로 매달고 고문을 하던것이라고 한다. 1, 2전시관에 전시된 항일유격대 장병들이 사용했던 권총이며 일제의 만행을 고소하는 군도며 작두며 수갑이며는 당시 항일투쟁의 가렬처절했던 나날들을 눈앞에 주마등처럼 재현시킨다.

이 지하고문실에서 피해당한 사람은 루계로 4천여명이라는 통계이다. 연길현 항일유격대 선전위원 김정길(金貞吉 1910―1933년)녀사가 1930년 12월에 체포되여 2년 3개월을 옥고를 겪으면서 한코한코 뜬 뜨개보에는 <<연길현제4감옥에서 김정길이 고통을 깨물고 세계 녀성해방을 고창한다(延吉懸第四鑒獄, 金貞吉呻吟苦痛之結品, 靑女子解放世界的高唱)>>는 27자가 수놓아져있다. 김정길녀사는 1933년 겨울 일본토벌대와의 접전에서 23살 꽃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녀의 뜨개보는 현재 중국혁명박물관에 보존되여있다. 그리고 항일련군 제2군 제6사 재봉대 책임자였던 최희숙(崔姬淑 1909―1941년)은 1941년 2월에 체포되였다. 여기 지하고문실에서 일제는 그녀의 눈알을 도려내고 심장을 뽑아 참혹하게 학살했다. 넷째동생 황경연이 항일에 참가했다는것으로 련루된 맏형 황기섭(黃基燮)은 여기 고문실에서 열손가락을 잃고 그 미열로 1943년에 별세했다.

선렬들의 비장한 최후는 눈물없이는 들을수 없었고 일제와 주구들의 만행은 의분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일송정 정자옆에 떠다옮긴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저 아래 룡정시가지에서 바라보면 일송정은 바위우에 호랑이가 버티고 앉아있는 모습이였다고 한다. 단군조상 때부터 호랑이는 우리 민족의 길상물이였다. 그래서 당시 조선족들은 호랑이(일송정)가 룡정을 굽어보며 일제의 죄상을 지켜보며 천벌을 내릴상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현재의 일본총령사관유적지가 일어선 후로 령사관안에서는 무시무시한 음귀가 떠돌았다는 전설이 있다.

룡정으로 파견되여오는 일제 령사놈은 시름시름 앓게 되였는데 명의를 보이고 좋다는 약은 다 썼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그래서 점쟁이를 불러다가 점을 치기에 이르렀다. 점쟁이는 말했다.

<<이 집을 지을 때에 천분을 어겼거니 어이 천벌을 면하리오. 소가죽 한장을 천오리 만오리 베여서 2, 503㎡의 땅을 강점했으니 그 죄과로다. >>

령사놈은 소, 돼지 잡고 떡을 쳐서 비암산에 올라 빌었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어느날 명풍수를 청해왔다. 풍채가 름름한 풍수는 박달나무 지팽이를 짚고 령사관주위를 돌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은빛수염을 어루 쓸며 한마디 했다.

<<필시 서남에서 살이 뻗혀오고있도다. >>

서남이면 룡정에서 4km 상거에 있는 비암산마루에 호랑이가 당장 덮칠듯 노려보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있고 또 3km 더 나아가 대포산이 대포아구리를 령사관쪽에 겨누고있었다.

령사놈은 관동군을 출동시켰다. 그러나 매번 돌격에 무리로 죽어갔다. 결국 비행기로 폭격을 하고 포를 쏘기도 하여 대포산의 포신을 끊어버렸다. 그런데 일송정을 향해 쏜 포알은 산너머가 아니면 비암산 코숭이에 가서 떨어졌다. 악에 받친 왜놈들은 일송정 줄기에다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후추씨를 밀어넣고는 대못을 박아 흔적을 없앴다. 이리하여 우리 민족이 그토록 숭상하고 찬송하던 일송정은 그때로부터 시들기 시작하다가 1938년에 끝내 말라죽었다고 한다.

항일시기 우리 민족의 투쟁의 정서를 보여주는 전설을 머리속에 펼치며 나는 조기천의 시 <<두만강>>의 한구절을 목청 다해 읊었다.


뼈에이는 얼음장 찬 물결

추격의 총소리 귀뿌리 막 치는데

새벽 비낀 저 언덕 바라고

운명을 물결에 맡기는―

두만강이여, 이것이

그대 그려둔 조선의 지사가 아닌가?


모래우에 뚜렷한 피흘린 발자국

마지막 탄환도 원쑤에게 보내고

죽어서도 죽어서도 놈들 손에 안들려

한많은 이 물결에 몸 던지는―

두만강이여, 이것이

그대 그려둔 조선의 의병이 아닌가?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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