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현실진단과 미래가치 평가] 곽승지 저

.일제가 항복하고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진 이후에도 한반도와 중국을 나누는 경계는 1909년 일본과 청나라가 체결한 간도협약에 의해 지배되었다. 협약 체결 주체가 없어짐에 따라 실제로는 그 효력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중국이 백두산정계비에 대한 입장차이가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두만강과 압록강을 경계로 하는 선에서 묵시적 타협을 한 채 구체적인 입장을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과 중국 간 국경문제가 구체화되어 효력이 발효된 것은 1964년에 이르러서다. 1962년 10월 12일 북한의 김일성과 중국의 주은래(周恩來) 수상이 평양에서 만나 ‘조중변계조약’을 체결하고 이 조약의 검토과정을 거쳐 1964년 3월 20일 의정서를 교환함으로써 공식 발효된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약이 체결된 사실은 1999년 말에 이르러서야 확인됐다.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 공개되지 않았던 것이다.

총 5조로 되어 있는 이 조약은 백두산과 천지, 압록강, 두만강 그리고 서해 영해의 국경선을 명확히 적고 있다.(연합뉴스, 1999.10.20/ 중앙일보, 2000.10.16) 이 조약에 따르면 백두산 천지의 경계선은 “백두산 위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마루 서남단 위에 있는 2520고지와 2664고지 사이의 안부의 중심을 기점으로, 동북 방향 직선으로 천지를 가로질러 대안의 산마루인 268고지와 2680고지 사이의 안부 중심까지다. 그 서북부는 중국에 속하고 동북부는 조선에 속한다”고 돼 있다.

조중변계조약 체결로, 일본과 청나라가 백두산 동남쪽 약 4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해발 2200m)하고 있는 백두산정계비를 기준으로 하여 영토를 획정함에 따라 백두산일대와 천지가 한반도에서 분리됐었으나, 백두산 천지의 55%는 북한에, 45%는 중국에 속하게 되었다. 천지 수면에 대해서는 서로 공유키로 합의, 천지 안에서는 양측이 모두 자유롭게 항행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이 조약은 또 백두산, 압록강과 두만강 상의 섬 및 사주(모래톱)의 귀속에 대해서도 상세히 적고 있다. 백두산에는 압록강 최상류지역에서부터 천지주변을 거쳐 모두 21개의 국경표지비를 설치해 놓았다. 압록강과 두만강 상의 총 451개 섬과 사주 가운데 북한이 2백64개, 중국이 187개를 소유한다고 적고 있다.

북한과 중국 간에 국경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백두산주변의 국경문제는 정리됐다. 그러나 북한과 중국이 이 조약체결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쳐왔다는 점에서 또 다른 문제의 소지는 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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