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조선이주민의 문맹도와 입학률

5. 조선이주민의 문맹도와 입학률

《만주와 조선인》의 저자 이훈구씨가 북만의 201호 조선이주민에 대한 조사를 인용하면 가독(可读)연령의 47%가 읽지 못하고 51%가 쓰지 못한다. 또 학령연령의 어린이 중 23%가 학교에 다니는 상황이여서 대다수 아동은 문맹상태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주조선인의 교육열은 극히 높으나 원래 생활기준이 낮아 제일 말단에서 허덕이다 보니 공부가 불가능했고 또 대다수 농촌은 도시와 떨어진 편벽한 산골에 있고 집단거주마저 형성하지 못하여 교육기구의 설치가 더욱 어려워진 것이다.


6. 일본측의 간섭과 탄압

일본 측이 조선인사립학교에 대한 간섭은 일찍 서전서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앞에서 적은바 있다. 그들은 매수하고 친일학교를 세우고 강박폐교령을 내리거나 학교의 핵심인원을 체포하는 등 수단으로 조선인사립학교의 운영을 저애, 압제하였다. 1909년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에서 《간도사립학교에 관한 내규》를 제정, 공포하였으며 이는 일제가 1908년 조선에서 식민지교육체계를 확립하려는 목적으로 반포한 《사립학교 령》의 복사본에 불과했다. 용정에 영사관이 설치되자 매수와 회유정책을 써가며 21개소의 서당에 매달 13원의 보조금을 내주어 이들 서당으로 하여금 조선총독부의 교과서를 사용케 하며 일본어의 보급과 민족주의적인 교육목적을 중지케 하였다.

이런 수단의 뒤끝에 일제는 탄압정책을 실시하였다. 각지의 조선인사립학교 238개소에 밀정을 파견하였고 많은 학교를 《배일주의》로 간주하고 엄밀히 감시하였다. 간도 3개 현의 40개소 학교가 《배일학교》로 지목 되였는데 연길현의 17개소, 화룡현의 19개소, 왕청현의 4개소가 포함되었다.(《현대사자료》 (27) 강덕상)

1919년 《3.13》반일독립시위가 있었으며 학생이 주력군으로 나타났다. 매수, 회유, 대항책이 실패한 끝에 일제는 최종 무력을 들이댔다. 일제의 탄압은 1920년《경신년대토벌》에서 극치에 달하였다. 《현대사자료》(27)에 따르면 당시 간도 4개현에서 36개소의 조선인사립학교가 불에 탔거나 혹은 파괴되었다. 그중에는 명동, 창동, 정동, 신동, 장동, 길동, 북일 등 학교가 망라되여 있었다.


7. 중국 측의 간섭

조선인사립학교초기 중국 측은 방임하는 태도를 취하였으나 중일 양국이 조선인을 둘러싸고 진행된 외교적교섭과 변화에 따라 조선인교육에 대해 간섭, 제한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조선인에 대한 중국당국의 교육정책은 《반일친중》내지 민족동화 정책이었다. 1915년 《21개 조약》이 체결된 후 이주조선인의 교육을 자국학제 하에 통일시키려는 야심을 실천에 옮기고저 1915년 6월 연길도윤 도빈은 《획일간민교육방법》을 제정하였으며 《조선인사립학교들에서 매주에 중국어로 12시간씩 교수함으로써 동화를 촉진시켜야 한다.》는 등 10여 개의 조항을 포함했다.

조선총독부는 보통학교를 증설하고 교육비를 보조해주는 《보통학교》를 다그쳐 설립했다. 이에 대비해 중국 측은 조선인사립학교를 개편하거나 관립학교를 증설하여 조선인학생을 수용함으로써 일본 측과 맞섰다.

1921년 10월 길림성교육청에서는 조선인교육을 정돈할 계획을 작성하였다. 이 계획에 따르면 간도 4개현에서 학생을 모집하여 중국인자녀와 공학함으로써 동화의 효과를 거두려 했다.

1924년부터 중국정부는 만철부속지의 교육권을 회수한다는 이유로 조선인사립학교를 제한, 폐교시켰다. 1924년 6월, 봉천성 정부는 《동변도소속 각 현 조선인학교 폐지조례》를 공포하고 각 지방에 조선인사립학교를 폐쇠시키라고 명령했다. 1925년 말 흥경현의 12개 소 조선인사립학교가 문을 닫았으며 통화, 무순, 안동, 개원 등 현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되었다. 1930년 3월까지 간도에서만 하더라도 16개소의 사립학교가 경영권을 회수당하였다. 이리하여 중국 측 학교에서 취학하는 조선인이 급격히 늘어났다. 1928년 5월 현재(《재만 조선인 사정》) 간도 4성과 장백현을 놓고 볼 때 조선인은 108개소 학교 에서 공부하였는데 조선인교원이 178명 (중국인교원은 66명), 조선인학생은 6808명 (중국인학생은 558명)이었다.


8. 주요한 조선인학교 연혁

용정 동흥(东兴)중학교
조선 천주교교도인 최익용(崔翌龙)이 창설하였다. 그는 일찍 《간도국민회》 사법 부장직을 맡았었다. 1921년 초에 용정에 와서 저명인사 김홍선(일명 김성, 북한 김책의 형님) 등과 손잡고 천도교교회의 후원을 받아 중학교설립의 의연금을 모았다.

1921년 4월 15일, 《천도교종리원》의 명의로 《동흥 소학교》를 창립하고 거기에 중학강습소를 설치하였다. 그해 10월 1일, 동흥 중학교로 승격시키고 원 소학교를 부속소학교로 만들었다. 1923년 9월 29일에 검은 벽돌기와의 새 교사를 일떠세웠다. 설립초기 교장은 최익룡, 교원은 3명이고 학생은 4개 반에 113명이었다.

1922년, 학생들 속에서 《사회과학연구회》, 《학생친목회》 등이 결성되었고 1924 년에 천도교교회로부터 학교운영권을 인계받아 자치권을 행사했다. 1925년에 《독서회》가 조직되고 1930년 10월에는 최호림을 서기로 하는 중공비밀지부가 설립되었다.
1934년 일제는 동흥, 대성 두 중학교를 강박적으로 합병시켜 《민성(民成) 중학교》라고 개칭했다. 후에 두개 학교를 회복시켰지만 1939년 6월 만주교육부의 엄령으로 재차 합병시켰다가 8.15후에는 원 교명을 회복, 1946년 9월 용정의 여러 학교를 합쳐 길림성용정중학교로 되었다.

건교 이래 1938년까지 16회에 걸쳐 546명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용정 대성중학교
대성(大成)중학은 대성유교의 공교회에서 꾸린 것이다. 민족주의자이며 공교회 일원인 강훈(姜勋) 등이 각 지의 기부금으로 용정촌 제4구에 2층 건물을 신축하고 1921년 7월 11일에 학교설립을 선포하였다. 모금활동에서 대성유교의 석화준(石华俊), 청림교의 임창세(任昌世), 지방부호 남군필(南君弼), 지방인사 장지량(张志良)이 크게 이바지 했다.

초기, 강훈이 학교이사회 이사 겸 교주(校主)로 있었고 교원은 5명, 학생은 50명이었다. 1928년에 이르러 학생이 425명에 달하였다. 공맹지도가 학교의 교육취지로 되었으며 교수내용은 《사서오경》,《명심보감》 등을 습득하는 것이다.

1922년, 조기조선공산주의자 이린구(李麟求)와 이주화(李周和)의 지도 밑에 《광명회》라는 맑스주의 연구소조가 조직되었으며 1923년 3월 김사국(金思国)이 소련 연해주로부터 용정에 와 방한민(方汉民)등 인사들과 협력하여 대성중학교의 부설학교로 《동양 학원》을 꾸리였다. 1928년 6월부터는 조선공산당 ML파의 성원인 박윤서(朴允瑞)가 대성중학교에서 《간민교육연구회》를 조직하고 중, 소학교 교원강습소를 꾸렸다. 1930년 10월에는 중공 대성중학교지부가 건립되었다.

1939년 6월 15일 대성, 동흥중학교는 두 번째로 합쳐져 용정국민고등학교(농과)로 되었다.
대성중학교는 설립하여 1938년까지 14회에 걸쳐 졸업생 476명을 배출하였다. 중공 북만성위 서기 김책,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1군 1사 참모장 이민환, 요하현 반일회 회장 이일평 등은 대성중학출신이다.


용정 은진중학교
은진(恩真)중학교는 1920년 2월 4일 카나다 장로교 선교사 빠카(조선이름은 박걸)가 용정에다 세운 것이다. 개학할 때 학생은 27명이고 빠카가 제1임 교장으로, 성경서원에서 개학의식을 거행하였다. 수업과목은 자연과학을 위주로 성경, 영어, 중국어 등을 배워주었으며 학제는 5년이었다. 이듬해 여름, 용정의 영국조계지내에 건평 600평방미터의 3층 집을 교사로 지었다.

1923년 3월부터 학제를 4년으로 고치고 그해에 제1회로 6명을 졸업시키였다.

소련 연해주에서 온 학생들의 영향 하에 학교에는 《사회과학연구회》가 조직되었고 1926년에는 허원규, 이영근을 중심으로 조기 조선공산당지부가 건립되었다. 학교와 종교의 탈리 활동을 벌렸으며 1931년 1월에는 조선 광주학생반일투쟁을 성원하는 시위를 벌렸다.

1936년 2월에는 공과학교로 고쳐지고 토목과와 건축과를 설치하였는데 이듬해 12월에는 교육권이 위만주국에 넘어가게 되었다. 광복 후 다른 중학과 합병되여 용정중학교로 되었다.

은진중학교는 창립되여서부터 1946년까지의 26년간에 24회에 걸쳐 졸업생 983명을 배출하였다.


용정 영신학교
1909년 가을, 조선 회령인 윤상철(尹相哲)이 용정 신촌에 《광성서숙》(1910년 10월 7일 설립)을 꾸렸고 1911년 9월 교명을 영신학교라 하였다. 1919년 영신학교에 《기독교 동지 청년회》를 결성하고 《조선독립선언》을 선전하면서 반일독립운동을 성원 하였다. 1921년 5월에 중학교를 증설하였다. 1923년 6월 28일에 4년제 영신여자중학교 개학식을 거행하였다. 1925년 4월 1일 영신중학교와 소학교는 일본인 히다까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학교이름을 《광명중학교》라 개칭했다. 이해 8월부터 조선총독부의 교재를 사용하였다. 1945년 8.15광복이후 영신학교가 회복 되였는데 교장은 최승준이었다.


용정 명신여자중학교
명신(明新)여자중학은 1910년 예수교에서 처음으로 세운 상정(尚贞)여자학교의 토대 우에서 창립된 것이다. 그 후 장로파교회의 선교사 빠카의 부인 레베카 빠카가 1913년 6월 4일에 상정여학교의 규모를 확대한 뒤 학생 158명을 모집하고 교원 12명을 초빙하여 명신여자학교를 꾸렸다.

1920년 6월 영국 선교사 게투루드 챠스(여)가 명신여학교를 중학교로 승격시켰다. 그 후 21년간 명신여자중학교는 21회에 거쳐 졸업생 255명을 육성하였다. 1941년 봄, 광명고등여자학교와 합쳐서 용정여자국민고등학교로 되었다. 8.15광복 후 학교는 다시 회복되여다가 1년 후에 다른 중학교와 함께 길림성립용정학교로 되었다.


훈춘현 북일중학교
훈춘현 대황구 북일(北一)중학교는 이동휘 등 애국지사들이 설립하였다. 1911년, 애국지사 량하구(梁河龟)와 김철수는 의병장 류백초(柳百草)의 협조 밑에 대황구에 동창(东昌)학교를 세웠다. 1917년 1월 이동휘는 량하구 등과 상의하고 북일중학교를 설립하였다. 초기교장은 량하구, 이동녕은 명예교장으로 되었다. 1919년 량하구가 체포된 후 오영선(吴英善, 이동휘의 둘째사위)이 제2대 교장으로 추대되었다.

학제는 일정한 연한이 없이 반년 혹은 1년에 수업을 끝마쳤고 설치한 과목은 조선어문, 조선역사, 조선지리, 중국어, 영어, 로어, 군사, 체육, 수학, 물리, 화학 등 12개였다.

설립초기 학생은 20여 명이였고 인차 40여 명으로 증가되었다. 교육취지는 학생들에게 반일민족주의사상을 주입하고 군사지식을 전수하며 군사훈련을 각별히 중시하여 문화가 있고 군사지식과 전투기능이 있는 반일군사인재를 육성하는 것이다.

1920년 10월, 일제의 《토벌》에 부 교장 김남극 등 3명 교원이 살해되었고 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다.

북일중학교는 200여 명 학생을 졸업시켰다. 그들 대부분은 반일무장투쟁에 참가하였다.


심리평사관연성소(왕청)
서일을 총재로 한 북로군정서와 그들이 꾸린 반일민족독립운동의 무장대오를 양성하는 군사학교이다. 지점은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 잣덕 (현 태평촌)의 북쪽 산기슭이다. 1920년 3월 1일에 개학하였으며 사관생은 주로 대종교교회 산하 청년과 명동중학교(왕청)학생들이었다. 선후로 60여 명을 모집하였다. 북로 군정서 사령관 김좌진이 소장을 겸하고 사령부부관 박녕희(朴宁熙)가 학도단장을 겸했으며 교관은 이장녕, 이범식, 김규식, 김홍국, 최상운 등이었다. 설치한 과목은 군사학, 총검술 등이 있었고 전투훈련을 진행하였다. 교재는 《보병조전》, 《축성교범(筑城教范)》, 《군대 내무서》, 《야외 요교범》 등을 인쇄하여 사용하였다. 1920년 9월 9일 제1회로 289명의 사관생을 졸업시켰다. 사관연성소를 졸업한 사관생들은 청산리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두는데 골간적 역활을 놀았다. 그후 대부대가 밀산 방면으로 이동할 때 함께 전이했다.

서일은 1881년 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김희동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서기학이고 호는 백포(白圃)이다. 소년시절에는 고향에서 서당공부를 했고 유지의숙에 다녔다.
서일은 1902년에 함일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국치전까지 교육계몽사업에 힘쓰다가 1911년에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이주했다. 가솔로는 서일의 부친, 서일, 서일의 모친 채씨, 맏딸, 둘째딸(6), 아들 서윤재(4) 등 여섯이었다. 처음으로 발을 붙인 곳이 왕청현 덕원리였고 서일이 사망 후 젠즈루로 이사했다.

서일은 왕청에 망명하여 청일학교, 명동중학교를 설립하는 등 육영사업에 전념하였다. 한편 대종교를 신봉하여 시교사로서 수년간에 걸쳐 수 만 명의 교우를 얻어 동일도 본사 전리와 총본사 전강을 역임하는 동시에 《오대종지강연》, 《도해》, 《삼문일답》, 《희삼경》등을 저술하여 교리를 전파하는 일면《자유공단》이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고 약 1만 5000명의 단원을 가진 단장으로 선출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또한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들을 규합하여 중광단을 조직하고 본부를 길림성 왕청현에 두었다. 1918년에는 여준, 김좌진 등 38인과 함께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계화(桂和) 등과 함께 동북만주에 산재한 대종교도를 중심으로 정의단을 조직하는 한편 신문을 간행하였다.

1919년 8월에는 김좌진을 맞이하여 정의단을 개편하고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본영을 왕청현 서대파구에 두고 무기를 구입하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를 치르게 되여 일본군 수 백 명을 살상하는 독립군사상 최고 큰 전과를 올렸다.

한편 1920년에는 임시정부 직할의 간북북부 총판부 총판으로 임명되여 활동하였다.

청산리전투 후 독립군 3500여 명 병력이 밀산에 집결되였는데 대한독립군단이 조직되었고 서일은 총재로 추대되었다. 1921년 대한독립군단이 노령 자유시로 이주하고 그는 밀산현 당벽진에 옮겨가서 다시 기회를 기다리며 군무의 여가를 타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1921년 8월 26일 토비의 습격을 받아 젊은 동지들이 다수 희생되자 나라 잃은 슬픔에 겹쳐 8월 27일 아침, 마을 뒤 산에서 자결 순국하였다. 서일의 유해는 독립군두령들과 대종교요인들의 결정에 의해 당벽진에 토장되었다가 1927년 봄에 화장하여 대종교의 본거지였던 화룡현 청파호에 봉장되었다.

서일에게는 둘째사위 최관(둘째딸 서죽청(竹青)의 남편)이 있었다. 그는 대종교 종본사의 주요책임자였다. 서일이 당벽진에 있을 때 권씨 집에 투숙했고 그가 사망 후 독립군두령과 대종교요인들은 그의 유언에 따라 1923년 초 서윤제와 권 씨의 딸의 혼인을 성사시켰다.

1930년, 연변에 5.30폭동, 8.1길돈폭동이 일어났고 10월 왕청에서도 소작료인하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서윤제 부부, 서중청부부도 시위에 참가했었다. 농민운동은 동북군벌의 진압을 받았으며 서일의 부친은 이웃집 노인의 생일 술을 마시다가 군벌과 맞다드러 그들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1942년 《임오교변》이 일어날 때 서윤제와 최관도 체포되었다. 서윤제는 몇 달 후 무죄로 석방되였으나 최관은 7년(8년?)형을 선고 받고 광복을 맞아서야 출옥했다.

1992년, 고 강룡권씨가 답사길에 찾아 뵙였을 때 서일의 손자, 서윤제의 아들인 서경섬(68)씨는 할빈에 거주했고 서일의 외손자, 최관의 아들인 최웅(68)씨는 목단강시민족사무위원회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하고 목단강시에서 살고 있었다.


대황구 3.1학교
일찍 북일중학교를 졸업한 김근은 김성도, 리상준, 유사준, 엄승호, 김경련, 김규봉 등은 1923년 3월 1일에 훈춘 대황구에 3.1학교를 세웠다. 맑스주의를 학습하고 협애한 민족주의를 배격하며 공산주의사상으로 새 세대를 교양하는 것을 교학의 취지로 정하였다.

이 학교에는 중, 소학부를 두었고 북구와 청수동에 분교가 있었다. 소학부의 과목은 조선어, 수학, 역사, 지리, 음악, 체육이고 고등과에서는 물리, 화학, 영어, 일본어를 더 배웠다. 1928년 학생은 100여 명이었다.

3.1학교의 비용은 《학교유지회》라는 학부형조직이 해마다 매호에 25-30원씩 내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1929년 9월 일제의 파괴로 문을 닫았다. 졸업생중 주요한 인물은 동만항일에서 업적을 쌓은 김근, 안길, 김규봉, 김원익 등이다.



신흥무관학교
신민회의 중견들인 이동휘 등이 1911년 4월 유하현 고산자에 《경학사》를 세웠고 그 부속기관인 신흥(新兴)강습소를 대고산에 꾸렸다. 1912년 4월 이회영, 이상룡 등이 통화현 횡도천에 신흥강습소분교를 꾸렸고 1913년에 신흥학교로 개칭하였다. 여준이 교장으로 되었다. 신흥학교는 본과는 4년 학제이고 특과는 6개월 혹은 3개월짜리 속성반 이었다. 1915년에는 《양성중학》으로 개칭했다. 1911-1919년까지 신흥학교의 졸업생은 3500여 명인데 대부분이 항일골간으로 되었다.

1919년 5월 3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하였다. 교장에 이시영, 교성대장에 이청천, 교관에 이범석 등이었다. 본교는 통화현 횡도천에 두고 유하 고산자와 칠도구에 분교를 설치했다. 이때부터 신흥무관학교는 전적으로 군사지식을 전수하는 장소로 되었다. 이청천과 이범석이 군사지식과 손자병법 강의를 맡았으며 실전연습도 책임졌다.

1919년 초부터 1920년 8월까지 신흥무관학교는 100여 명 학원을 양성해냈다. 양림, 김산 등은 신흥무관학교출신이다.

신흥무관학교는 중국조선인이 세운 첫 무관학교이다. 이 학교의 주요인물의 행방을 보면:

이동녕 제1임 교장이였던 그는 1919년 상해임시정부가 설 때 임시의정원원장으로 되었다가 후에 임시정부 국무총리, 국무위원회 주석 등 요직을 맡아보다가 1940년 4월 사천성 기강에서 72세를 일기로 병고했다.

이회영 1919년 이동녕과 함께 상해임시정부를 세웠고 1924년 조선의렬단 참모장으로 있었으며 1932년에 항일의용군을 세우기 위해 상해에서 동북으로 오던 중 대련에서 일본경찰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시영 1919년에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있었고 1945년 8.15광복 후 한국 부대통령으로 지냈다.

이청천 1924년에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으로 있었으며 1940년에 광복군총사령으로 되었다.

이범석 1920년에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으로 되었고 1940년에는 광복군참모장으로 지냈으며 1948년에 한국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으로 지냈다.


유하현 동명학교
1922년 12월 7일 한경희 목사가 유하현 삼원포서문안에 동명학교를 세웠다. 당시 교원은 5명, 학생은 146명이었으며 교장은 한경희였고 교감은 기독교회의 장로 전정모였다. 학교의 운영경비는 초등과에 매달 30전, 고등과에 50전을 내는 외 삼원포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의연금으로 해결되었다. 교재는 정의부 교육부에서 출판했거나 자편한 반일적이고 민족독립사상이 담긴 것을 사용하였다.

1928년에 한경희 목사가 일경에 체포되자 그의 아들 한청옥 씨가 제2대 교장에 추대되었다. 1930년 3월 한청옥 씨는 암살되었고 학교는 9.18사변 후에 문을 닫게 되었다.


화전현 화성의숙
1925년 3월 정의부에서 화전현에 세운 2년제 군사 정치 간부학교이다. 숙장은 최동오이고 총무는 강제하였고 교관은 황포군관학교 출신 이웅이었다. 1926년 12월에 2기생을 졸업시킨 후 자기의 사명을 마치였다.

화성의숙에서 설치한 과목은 삼민주의, 중국혁명사, 조선혁명사, 조선역사, 세계 역사, 세계지리, 세계혁명사 등이다.


통하현 서북하학교
흑룡강성 통하현 청하진 마을사람들이 1928년 김지강(최용건)의 직접 령도 하에 자체로 꾸린 학교이다. 교장은 김지강, 교원은 문창빈, 김명덕(여)이고 초기 학생은 40여 명 이었으며 후에 70여 명으로 증가됐다. 과목은 조선어, 산수, 조선역사, 조선지리, 시사, 체육, 음악 등이었으며 혁명교양을 진행하고 혁명가곡을 배워주었다.

1932년 일제가 통화를 강점하고 토비가 살판치자 백성들이 마을을 떠나면서 폐교되었다.


탕원현 소동모범학교
1928년 최석천(최용건), 채평, 이춘만, 김리만 등이 타원현 오동하서에 세운 학교이다.
초기에 7간 초가를 짓고 교실로 삼았다. 교원은 4명, 학생은 70명이였는데 가르친 과목은 정치, 시사, 국문, 동국역사, 지리, 군사체육, 음악 등이다.

9.18직전 특대홍수로 농민이 이산되자 송동모범학교는 페교되었다. 이 학교는 흑룡강성 반일민족학교들 중에서 명성이 가장 높았다. 이 학교 출신으로는 항일연군 제6군 1사 사장 마덕산(김병호), 정치부주임 서광해(서병인), 탕원현 중심현위서기 배치운 등이 있다.


녕안현 3.1학원
1934년 대종교가 녕안 동경성 발해진에 세웠다. 원장은 대종교 제3세교주인 윤세복이다. 초기 학생은 40여 명, 교원은 윤세복 외 2명, 남녀공학을 실시했다. 과목은 한글, 산수, 역사, 시사, 지리, 생물, 창가, 도화, 체조 등이다. 교원은 봉급을 받지 않았고 학생은 월사금을 바치지 않았다. 1년 후에는 《대종학원(大综学院)》이라 고쳤다. 대종학원은 1936년에 발해진 조선소학교와 합병되여 보통학교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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