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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호와 경희는 소림사의 탑림(塔林)으로 올라가는 길가의 벤취우에 앉아있었다. 우연한 만남이였지만 서로의 대화는 필연이였다. 소실산의 우중충한 산등성이 바위우로 달이 떠오르며 오유봉의 하얀 달마석상을 비추었다. 멀리서 바라보이는 달마상이였지만 달빛속에서 유난히 명쾌하게 바라보였다. 몇점의 구름이 하늘에 떠있고 한낮 달고 달았던 대기도 저녁이 깊어감에 따라 서서히 식어가고있었다. 소림사앞 광장에 더위를 피해 나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서성거리고있었고 탑림앞 광장에는 어느 명인의 전용기라고 해서 가져다놓은 낡은 비행기 한대가 외롭게 서있었다.

창호와 경희는 벤취에 앉은채 오랬동안 말이 없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두사람은 꼭 같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있었다. 수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했었고 수없이 많은 탐닉과 격정의 밤을 함께 지낸 그들이였지만 과거시간이라는 베일앞에서 추억을 더듬기는 어딘가 힘든 일이였다.

<<관광을 오신거예요?>>

경희가 물었다.

<<손님땜에. 경희씨도?>>

<<가족관광이죠. 한여름은 더워서.>>

<<가족? 결혼했어요?>>

<<네, 작년에...>>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둘만의 자리를 만든것은 아니였다. 그러나 그들만의 이야기주제로 들어가기에는 누구도 선을 떼려고하지 않았다. 그렇게 멀어진것일가?

창호는 소실산의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떠오르는 달빛속에 잠긴 소실산은 어렴풋한 륜곽만이 안겨올뿐이였다. 창호는 소실산남쪽부분의 따로 빠진 작은 봉우리를 바라보며 그 모양이 코뿔소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소의 뿔처럼 홀로 걸어가라.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었다. 초봄의 우울한 바다가 철썩이던 곳, 그곳에 혼귀석이라는 바위가 있었고, 그 산우에 공산사가 있었다. 우연하게 만났고 헤여지고, 그리고 다시 우연하게 만나고, 이제 다시 헤여져야 하겠지만 기약은 있을것인가? 인연이 다하지 않는다면 다시 만날수 있으리라고 찡관스님이 말했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연도 다하지 않은것인가?

창호는 이 저녁이 길고 길다고 느껴졌다. 이 만남을 위해서 여기 소림사로 온것은 아니였다. 다만 나래라는 녀자가 영화포스터를 우연히 보았고 그 포서터의 인연이 이곳, 소림사로 그들을 몰아왔고 이곳 천년의 고찰에서 그들은 다시 만났다. 그렇다면 이 만남의 인연은 어디서 시작된것일가? 한국에서 나래를 만나지 않았어도, 나래가 중국에 오지 않았어도, 나래가 그 영화포스터를 보지 않았어도 경희와의 만남은 있을수 없는 일이였다. 아니, 경희가 찡관스님이 꾸리는 려관에 묵지 않았더라도 그들은 만남이 없을것이였다. 아니, 소림사의 광장앞에서 창호가 허루이를 만나지 않았어도, 아니, 기어이 사진을 찍겠다고 고집하지 않았더라도 이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을것이였다. 이 우연한 만남을 누가 만들고있었을가? 누가? 나래가? 찡관스님이? 허루이가? 아님 하늘이?... 그럼 하늘은 왜 기어이 이 만남을 만들어주고싶었을것인가?

사랑해! 창호는 경희를 사랑하면서 집사람과의 리혼을 생각했었고 경희가 딸 미화를 데리고 온다면 잘 키워주리라 생각도 했었다. 리혼의 과정까지 세세히 상상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고민과 아픔과 사랑은 지나간 이야기, 그랬었던가 하는 기억조차 희미해가고있었다.

<<결혼했어요?>>

창호는 경희가 결혼했다는 점이 가슴에 싸늘한 흔적이 되여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한번 확인이라도 하듯이 다시 물었다.

<<작년에 했어요. 동해시량식국 국장이예요. 부인은 사별하고... 같이 오신 아가씨는 한국아가씨라 하셨죠?>>

<<예, 한국에서 만났지요. 중국 관광온다고 왔어요.>>

<<애인이세요?>>

창호는 얼굴을 돌렸다. 경희가 창호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고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남자와 녀자이지 않아요. 관광을 함께 다닐수 있고 방을 같이 쓸수 있다면 뭐 그렇게 리해를 할수 있잖아요?>>

역시 경희다운 스타일이였다.

창호는 자조적인 기분이 되여가고있었다. 과거 사랑했던 애인앞에서 다른 애인이 있음을 수긍하기에는 좀은 뻔뻔스러움이 필요했다.

<<그럴수도 있지요. 그렇게 리해를 하려고 노력한다면 그렇게 되는거겠지요.>>

창호는 그때 만남에 리유가 없듯이 헤여짐에도 리유가 없다라고 하던 경희의 말을 생각했다.

<<남자와 녀자가 같이 있는다고 해서 애인이라는 리유는 없는거죠. 남자와 녀자가 같이 산다고 해서 부부라고 해야 한다는 리유가 없듯이말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경희는 한숨을 지으며 창호를 바라보았다.

<<너무 신경쓰지 말아요. 그 아가씨가 창호씨의 애인이든 부인이든 저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 않아요. 다만 두사람 모두에게 행복이 있기를 바랄뿐이예요. 우리야...>>

경희는 우리라고 해놓고는 입을 다물며 입술을 옥물었다. 분명 그들에게는 우리라고 부를만한 과거가 있었고 사랑이라고 부를만한 반짝이는 인생의 순간이 있은것만은 사실이였다. 과거시간속에 묻혀있다해서 그 과거시간에 있었던 격정과 정열이 거짓이였다고 하기에는 아름이 찬 일이였다.

<<우리는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만남이였을 뿐이예요. 다 잊고 살려고했는데...>>

경희의 목소리가 떨리고있었다. 창호는 다시금 혼귀석에 부딪치는 파도의 소리를 들었다. 그날의 아픔이 서서히 돋아나고있었다. 찡관스님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그날의 결과는 어떻게 되였을가? 되돌아오는 길은 얼마나 힘들었던가?

<<아직까지도 저는 리해할수 없어요. 왜 그런 방식으로 헤여지려했고 그렇게 상처를 주면서 떠났는지를 말입니다. 잔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구름이 달을 가리웠다. 멀리 가로등불빛에 비치운 경희의 얼굴이 우울했다. 창호의 마직막 말이 나왔을 때 서리빛이 경희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스쳤다.

<<잔인했다구요?...>>

경희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얼굴이 차게 굳어지고있었다.

<<창호씨도 세속의 남자일뿐이군요. 녀자의 립장에서 생각해보신적 있어요?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요. 녀자는 녀자로서 살아가야하는 리유가 따로 있어요. 잔인했었죠. 잔인하지 않을수 없었죠...>>

창호는 잔인이라는 표현이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혼귀석의 파도를 생각하는 순간, 이보다 더 부드러운 표현을 하기에는 더 합당한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진실이든 과장된것이든 그때 창호는 수백수천번을 죽음을 생각했었다. 허무와 실의와 인생이 주는 모든것에 대한 포기를 생각했었다.

<<저라고 더 특별하라는 법은 없는거지요. 세속에 물젖은 평범한 인간일뿐입니다. 잔인했다는 표현이 과장된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때 저는...>>

창호는 혼귀석의 바다를 떠올리는 순간 목이 메였다. 그 진실이 거짓은 아니였다. 사랑과 죽음과 그리고 순간 순간의 저주도 있었었다. 창호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 순간에 저는 하나의 진실에 자신이 희생으로 되고싶었어요. 적어도 자기의 진실에만은 충실하고싶었다고 할가요? 만일 저 찡관스님과의 해후가 없었다면 오늘 이자리는 없었을지도 모를겁니다. 경희씨, 사랑에는 리유가 없어요. 사랑하고 사랑을 받고, 그러면서 서로가 아프기도 하고, 그것에 만족하고 그것에 혼신을 다하고싶었어요. 그것이 그렇게 값없는것이였어요? 그렇게 쉽사리 던져버릴수 있는것이였습니까?...>>

경희는 창호를 쳐다보고있었다. 눈가에 이슬이 맺히고있었다. 그러나 그 이슬은 방울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동안이 지나 경희는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갈리고있었다.

<<저도 알아요. 그 고통이 어떤것인가를 말이예요. 창호씨 혼자만 아팠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요. 사랑에 리유가 없다는 말이 맞는지 몰라요. 창호씨를 사랑하기까지 전 창호씨보다 더 많은 아픔을 감내해야 했을지도 몰라요. 안해가 있는 유부남을 사랑하는 고통을 창호씨는 모를거예요... 전 녀자예요. 창호씨가 저와 결혼할 생각을 하고있다는것을 알았을 때 전 두렵기 시작했어요. 내 행복을 위해 다른 한 녀자를 아프게 한다는것을 전 용납할수 없었어요. 녀자이기때문에, 한 녀자에게 있어서 리혼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 잘알고있어요. 고상해서는 아니예요. 도덕적인 완성을 위해서도 아니였어요. 그랬다면 창호씨를 사랑하지 않았을것이고 그만큼 나가지도 않았을거예요. 나때문에 다른 녀자가 아파할거라는 생각만 해도 전 두려웠어요... 잔인했다고 할수도 있겠죠. 잔인하지 않으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창호씨, 그 잔인함이 저에게도 그만큼한 고통이였다는걸 아셔요? 혼자만이 아팠다고요? 아니요. 사랑은 두사람이 했었고 헤여짐도 두사람이였어요. 왜 자기만 생각해요? 사랑했다면서?...>>

창호는 가슴에서 묵직한 무엇이 숨통을 올리받치는것 같았다. 죽음으로 바꾸리라고, 그리고 언제까지나 보듬어가리라 생각했던 사랑이 헤여짐의 리유는 너무나 간단했다. 유부남이기때문에, 다른 녀자에게 고통을 줄수 없다는 시시껄렁한 리유 하나때문에 사랑이 포기되다니? 사랑의 무게란 원래 이만큼밖에 안되는것이였을가?

창호는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라이터를 켜는 손이 자꾸만 떨렸다. 현실앞에서 사랑은 너무나 창백한 존재였다. 사랑에 빠져있을 때 사랑은 인생의 전부로 느껴졌었다. 그러나 돌아서서 돌이켜볼 때 그 진실의 무게가 너무나 가볍다는것을 발견한 이 순간, 창호는 허무를 느꼈다. 그토록 알고싶었던 헤여짐의 리유가 이처럼 간단한것이라니?...

그러나 경희에 대한 고마움이 솟구쳐올랐다. 사랑했었다. 사랑했기에 헤여지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고 너만큼 아팠다. 그것만으로도 창호는 감동하고있었다.

<<미안해요. 난 경희씨에 대한 고까운 생각만 하고있었어요. 사랑을 하면 눈이 먼다는 말 지금 새삼스러워져요. 오히려 그때 받은 고통의 무게만큼 경희씨에 대한 사랑의 무게라는걸 생각하니 위안이 되여요. 진실했다면 유감은, 그래요. 유감은 없어요... 그리고 경희씨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경희는 조용히 느끼고있었다. 가냘퍼보이는 어깨가 떨고있었다.

<<저도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싶어요. 하루라도 그런 날이 있다면 행복할거라는 생각도 얼마나 했는지 몰라요. 그러나 아이가 딸린 리혼녀가 살아가기에는 사랑으로는 부족해요. 사람은 사랑으로만은 살지 못해요. 구체적인 인생은 구체적인 인생의 모든 리유를 가지고있어요. 사랑보다 살아가는 리유가 더 큰지 몰라요. 그건 피할수도 이길수도 없는것이지 않아요?...>>

창호는 경희의 말뜻을 알아듣고있었다. 구체적인 인생이라. 그속에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스며들어있는것인가!

<<알았어요. 사랑했고, 사랑할수 있었고, 사랑에 아팠다면 전 만족했어요. 그리고 한 사람에게 사랑하는 존재로 남았다면 저 바랄것이 없습니다...>>

창호는 가슴이 서서히 비여가는 느낌이였다. 한숨을 내쉬면 그는 떨고있는 경희의 어깨를 감아안았다. 경희의 몸이 창호에게로 기대여왔다.

<<고마와요. 전 저주받을 인간인지 몰라요...>>

<<그렇지는 않아요. 이건 우리의 숙명입니다. 숙명이구말구요...>>

창호는 감상적이 되여가고있었다. 그러면서 가슴에 묵직하던 덩어리가 서서히 녹아가고있었다. 창호는 경희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러자 경희가 얼굴을 쳐들며 창호의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가져왔다.

경희의 혀가 창호의 입속으로 들어왔다. 그토록 익숙하던 놀림이였다. 그러나 과거 서로가 사랑하면서 탐닉하던 키스의 열정은 없었다. 그들은 이미 과거라는, 재미가 없어진 낡은 책을 한장 한장 번져보고있을 뿐이였다.

창호는 이로써 경희와의 인연은 끝나고있다고 느끼고있었다. 인연이 다하다... 그러나 왜 이 머나먼 타향에서, 이 천년의 사찰앞에서 이 인연은 최후의 막을 내리려고 하는것일가?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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